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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란 무엇인가] 종범 스님 천수경이란 어떤 경전인가 『천수경』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경전의 하나로, 절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경전일 뿐 아니라 각종 의식(儀式)에서 빠질 수 없는 경전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외워야 하는 독송집(讀誦集)입니다. 이처럼 『천수경』은 대중화되고 통용화된 경전이지만 그 내용이나 성립 연원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불자들이 늘 독송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은 그것이 종교 의식과 신비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고 일반적인 간경(看經)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천수경』의 원래 명칭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大陀羅尼經)’인데, 여기서 천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을 뜻합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지난 무량겁(無量劫) 전에 천광왕정주여래(天光王精住如來)로부터 받으신 ‘대비신주(大悲神呪)’를 다시 중생을 위하여 세상에 신설하신 것이므로 『천수경』이라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범어 ‘아바로기테스바라(Avalokitesvara)’로서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 번역합니다. 줄여서 ‘관음’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간략히 부르는 약칭입니다. 관세음보살은 32응신(應身) 14무외력(無畏力) 4불사의덕(不思議德)을 갖추어 현세에는 신통력(神通力)과 위신력(威神力)으로 중생들을 자비롭게 보살피십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중생을 인도하는 보살이십니다. 이와 같이 관세음보살께서는 6도(六道: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도, 천도) 중생을 다 구제하시기 위하여 6관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① 성관음(성관음, 정관음, A-rya) ② 천수관음(千手觀音, Sahasrabhuja) ③ 십일면관음(십일면관음, Ekadasamukha) ④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Cinta-manicakra) ⑤ 마두관음(馬頭觀音, Hayagriva) ⑥ 준제관음(准提觀音, Candi) 등으로 출현하고 계십니다. 『천수경』에서는 이 같은 6관음 중에서 천수관음이 중심이 됩니다. 천수천안의 신비한 위신력과 자비력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천수경』의 다라니(陀羅尼)를 외우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봉독되고 있는 『천수경』은 천수다라니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앞과 뒤에 여러 청원문(請願文)과 게송문(偈頌文)이 안배되어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치밀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현행본(現行本) 『천수경』은 언제 편집되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의상 대사 당시 신라에 전래된 천수다라니가 신라시대에 많이 독송되면서 어떠한 의식의 법칙[儀車凡]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나 참고할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지금 확실한 문헌으로는 송(宋)나라의 사명산(四明山) 지례 법사(知禮法師, 960~1028)가 편집한 ‘천수대비심주행법(千手大悲心呪行法)’이 있습니다(『대정신수대장경』 제46책 p 973~978). 이것은 밀교의 의식에 근거한 천수다라니 독송법으로서 비교적 상세하게 짜여졌습니다. 고려에서도 천수다라니의 독송에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무튼 『천수경』의 유통에 있어서 상세한 고찰은 할 수 없으나 현행 독송본 『천수경』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 이상을 소급하지 못하는 근대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수경』 본문 강의 1. 경초의 진언 『천수경』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시작됩니다. 진언은 법어의 다라니(dharani) 또는 만다라(mantra)를 번역한 말입니다. 진언은 주사(呪詞), 주문(呪文)과도 같은 뜻입니다. 이는 호법신의 노래, 부처님의 참다운 말씀, 보살님들의 기원하는 말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구업진언이란 천수다라니를 독송하기 전에 우리의 입을 청결히 해야 하기 때문에 정구업진언을 외우는 것입니다. 이 진언에는 옴(唵, om) 자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옴 자가 있는 예도 있습니다. 진언에서 ‘옴’과 ‘사바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옴은 매우 신성한 뜻을 간직한 음이라 하여, 인도에서는 종교 의식에 꼭 제창하는 음이며, 귀의(歸依), 공양(供養)의 뜻이 있습니다. 사바하(sva-ha)는 ‘원만(圓滿)·성취(成就)’ 등의 뜻입니다. 진언은 옴으로 시작해서 사바하로 끝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것은 ‘비옵나이다. ……들이 속히 성취되기를 비옵나이다. 원만히 성취되기를 비옵나이다’ 하는 격식입니다. 옴 자가 없는 진언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언의 본문에서는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고, 진언의 신비성과 불가사의성을 감안하여 해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천수경』 강의에서도 진언 자체에 대해서는 해설을 피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 진언으로는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입니다. 『천수경』을 봉독하기 전에 온 주위에 있는 신들을 편안히 안심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 진언을 외웁니다. 여기서 신이라는 말은 천신, 지신 등 중생과 동격의 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진언이 끝나면 ‘개경게(開經偈)’가 나옵니다. 이것은 경전을 펴면서 찬탄과 원력(願力)을 일으키는 게송(偈頌)입니다. 게송이란 범어의 가타(Ga-tha-)를 ‘게(偈)’로 음역했으며, 뜻으로는 ‘가요·성가·시구’의 내용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시경(詩經)에 나오는 ‘풍(風)·아(雅)·송(頌)’ 중의 송(頌)을 붙여 게송이라 합니다. 어원을 분석하면 ‘게’는 범어이고 ‘송’은 한문입니다. 이 둘이 합해져서 하나의 시구를 표현하는 말로 ‘게송’이라 합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부처님의 높고 깊은 가르침은 백천만 겁이 지나도록 만나기가 어렵도다. 나는 지금 듣고 보아 받아 간직했으니 여래의 참된 뜻을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리하여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으로 이어집니다. 법장(法藏)은 진리가 소장된 창고란 뜻이며, 경전(經典)을 가리킵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한없는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법장이라 합니다. 이 개법장진언은 경전을 펴면서 발원하는 진언입니다. 2. 계청문(啓請文) 개법장진언에 이어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의 경의 제목이 나오고, 바로 계청문으로 연결됩니다. 일반적인 경의 체제는 경의 제목이 나오면 역자를 소개하고 곧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천수다라니에서는 그렇지 않고 중간에 긴 계청문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수다라니를 읽기 전에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청하는 의식문(儀式文)입니다. 이 계청문의 게송은 『대장경』의 『천수경』에도 수록되었으나, 본래 경의 본문은 아니고 관세음보살을 청하는 문장입니다. 계청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主)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천비장엄보호지(天臂莊嚴普護持) 천안광명변관조(天眼光明遍觀照)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속령만족제희구(速令滿足諸希求) 영사멸제제죄업(永使滅除諸罪業) 천룡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자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경례하옵니다. 원력이 너르고 깊으시며, 상호 거룩하사 천 손으로 중생을 돌보시고 천 눈으로 법계(法界)를 관찰하시나이다. 진실한 말씀으로 비밀어를 선설하시고 평등한 마음으로 자비심을 일으키시옵니다. 저희들이 원하는 일 만족하게 하시고 저희들의 죄업들을 영원히 소멸하게 하소서. 천룡의 호법성중은 자비로 보살피어 우리들의 온갖 불법을 다 이루게 되기를 원합니다. 『천수경』을 외우면 이 몸은 광명의 깃발이고 『천수경』을 외우면 이 마음은 신통의 곳집이옵니다. 번뇌를 씻고 고해를 건너 속히 성불하게 하소서. 저희들은 『천수경』을 독송하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저희들이 원하는 일 다 성취되게 하소서. 이 계청문은 문장이 아름다우며 장엄하고 내용의 폭이 매우 넓습니다.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깊은 찬탄과 발원이며, 자신의 죄업에 대한 깊은 참회의 문장입니다. 이러한 계청문에 이어 다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발원(發願)을 올립니다. 하나하나에 대승불교의 근본 발원(중생교화와 불국토 건설)이 선명합니다. 3. 십원 육향(十願六向)에 대하여 십원 육향 중 먼저 10원문이 나옵니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1)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2)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 (3)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4)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5)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6)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7) 원아속득계족도(願我速得戒足道) (8)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9)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10)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자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南無)하옵니다. 저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중생을 제도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방편을 얻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반야의 배를 타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고해를 뛰어넘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계행의 길을 가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열반에 오르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해탈을 이루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진리와 하나가 되게 하소서. 이상은 10원 6향 중 전반에 해당하는 10대원(十大願)입니다. 대승불교의 광대한 이념을 이 심대원에 유감없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독송할 때는 원마다 ‘나무대비관세음’을 다 봉독하고 이 원문(願文)을 읽습니다. 불교의 본질은 해탈에 있습니다. 해탈을 성취하는 데는 죄악을 소멸해야 성취하는 길과 선업을 이루어서 성취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10원 6향 중에서는 전 10원은 성취법(成就法)을 밝히고, 후 6향은 소멸법(消滅法)을 밝힌 내용입니다. 4. 10대 이명(十大異名)의 관음보살과 본사 아미타불 십원 육향의 발원문이 끝나면 십대 이면의 명호와 본사 아미타불의 명호가 나옵니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南無觀世音菩薩摩訶薩)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南無大勢至菩薩摩訶薩) 나무천수보살마하살(南無千手菩薩摩訶薩) 나무여의륜보살마하살(南無如意輪菩薩摩訶薩) 나무대륜보살마하살(南無大菩輪薩摩訶薩) 나무관자재보살마하살(南無觀自在菩薩摩訶薩) 나무정취보살마하살(南無正趣菩薩摩訶薩) 나무만월보살마하살(南無滿月菩薩摩訶薩) 나무수월보살마하살(南無水月菩薩摩訶薩) 나무군다리보살마하살(南無軍茶利菩薩摩訶薩) 나무십일면보살마하살(南無十日面菩薩摩訶薩) 나무제대보살마하살(南無諸大菩薩摩訶薩) 나무본사아미타불(南無本師阿彌陀佛) 이상의 성호 중에 아미타불을 제외하고는 다 관음보살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중에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은 관음보살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며, 맨 마지막에 나오는 제대보살은 관음보살의 총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보살들을 관음보살의 10대 이명(十大異名)이라 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천수경』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실천 수행인 육행(기도, 발원, 귀의, 송주, 참탄, 참회)과 오문(예경문, 공양문, 참회문, 발원문, 지송문)을 갖추고 있습니다. 5. 신묘장구대다라니 앞에서도 말했듯이 『천수경』에서는 천수다라니가 중심입니다. 이 천수다라니를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라고도 하고 ‘대비주(大悲呪)’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력과 위신력을 다라니에 나타낸 말로써 동일한 의미입니다. 『천수경』의 본래 모습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란 제목에 이어서 바로 천수다라니로 들어가는 체제였습니다. 그 외에 여러 항목이 삽입된 것은 모두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라니에 대해서는 가장 중요시해서 봉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다라니의 발생 동기와 성립 과정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과학적인 안목으로 추구해 볼 수도 있겠으나, 다라니의 참다운 생명은 신비적인 신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신앙적인 태도로 다라니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천수다라니는 과거 부처님이신 ‘천광왕정주여래(天光王靜住如來)’께서 관세음보살을 위하여 설하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 다라니를 듣고 무량수(無量數)의 머리와 무량수의 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자신이 성취한 것과 동일하게 중생도 성취하도록 중생들에게 이 다라니를 선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라니를 나직하게 독송하는 사람은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그리고 다라니에는 낱낱 구절마다 불가사의한 신비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정중한 마음으로 간절히 읽을 때, 업장소멸(業障消滅)과 소원성취(所願成就)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천수다라니에는 현재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대조해 보면 내용에는 조금씩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인도에서부터 여러 형태로 전수된 천수다라니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점입니다. 둘째는 중국에서 인도 음을 중국 한문 음으로 옮길 때 각기 다르게 옮겨진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라니의 길고 짧은 형태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라니는 음성만 다라니이기 때문에 다만 지극한 마음으로 외우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라니는 한 말 속에도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다라니는 늘 신비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다라니 속에 잠재해 있는 신리력은 나타낼 수 없는 일입니다. 다라니는 언어 조직보다도, 음성에 포함된 신비력과 감응력이 생명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독송하는 데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6. 참회게(懺悔偈)와 십악 참회(十惡懺悔) 아석조소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예부터 지은 모든 악업은 다 탐진치 삼독으로 말미암아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지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저는 지금 다 참회합니다. 이 참회게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보현보살께서 자비심으로써 깊은 보살행을 펴시면서 중생의 삼독심을 깊이 참회한 게송입니다. 참회란 말은 범어와 한문이 합성된 말입니다. 참(懺)은 범어 참마(ksamaya)의 줄인 말이며, 이것은 번역하면 회과(悔過), 개회(改悔)로써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범음의 ‘참’과 한문의 ‘회(悔)’를 다 표현하여 참회라 부릅니다. 참회는 종교적 신앙심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마음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됩니다. 자신의 적은 죄과라도 깊이 반성하고 부처님께 용서를 비는 마음이야말로 그대로 불심의 모체가 되는 것입니다. 참회게에 이어 ‘참죄업장십이존불’의 명호가 나옵니다. 보승장불을 비롯하여 제보당마니승광불까지가 바로 12존불입니다. 이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십악 참회를 하기 위해 먼저 증명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12존불을 증명불로 모시기 위하여 정중히 명호를 외우는 것입니다. 12존불에 이어서 십악(十惡) 참회문으로 계속됩니다. 십악은 1) 살생(殺生) 2) 투도(偸盜) 3) 사음(邪淫) 4) 망어(妄語) 5) 기어(綺語, 진실하지 않게 꾸며서 하는 말) 6) 악구(惡口, 욕설) 7) 양설(兩舌, 이간질하는 거짓말) 8) 탐애(貪愛) 9) 진에(瞋쨌) 10) 치암(痴暗)으로써 신구의 삼업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다 참회하는 것이 십악 참회입니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백겁을 살면서도 쌓인 죄업 참회하는 일순간에 다 없어져서 불이 마른 풀을 태우듯 하나도 없게 하소서. 죄는 본질이 없어 마음에서 일어난 것 죄짓는 마음이 없을 때에 죄는 따라서 없어집니다. 죄와 마음이 다 없을 때에 참으로 참회이옵니다. 업장을 소멸하는 데는 참회법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게송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된 어둠이라 하더라도 광명만 비치면 일시에 밝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참회함을 통해서 오랜 업장이 소멸됩니다. 그리고 죄는 근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마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해지면 죄는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리하여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깨끗해져서 본래의 근본 세계로 돌아갈 때에 진정한 참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비로운 참회진언을 외웁니다.
7. 준제게송(准提偈頌)과 준제진언(准提眞言) 준제는 범어 ‘Can.d.i’로서 청정(淸淨)이란 뜻입니다. 『천수경』에서는 준제관음을 말하는 것이며, 준제관음은 6관음 중의 하나이고, 인간 세계와 천상 세계를 제도하는 관음이십니다(天人丈夫觀音). 준제관음은 부처님을 출생시키는 불모(佛母)로 신앙됩니다. 이것이 ‘준제불모’ 신앙입니다. 준제공덕취(准提功德聚)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일체제대난(一切諸大難) 무능침시인(無能侵是人) 천상급인간(天上及人間) 수복여불등(受福如佛等) 우차여의주(遇此如意珠) 정획무등등(定獲無等等) 준제진언의 공덕은 한이 없어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항상 외우면 온갖 환란이 이 사람에게는 침범할 수 없도다. 하늘나라에서나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음이 부처님과 같으리. 이 준제주를 만났으니 반드시 최상의 결과를 성취하리라. 이러한 게송에 이어서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을 호칭한다. 구지는 범어 ‘Kot.i’이며 뜻으로는 숫자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일 구지는 십만, 천만, 만억 등의 많은 수를 구지라 합니다. 준제보살은 칠구지 동안의 불모이기 때문에 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 합이다. 계속하여 정법계진언과 호신진언, 관세음보살의 육자대명왕 진언을 외운 다음 ‘준제진언’에 들어갑니다.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이 바로 준제진언입니다. 이 진언에는 신비력을 찬탄하는 후렴의 게송이 또 나옵니다.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나는 지금 준제주를 외우면서 성불을 향한 광대한 원을 세웁니다. 나는 선정이 원만하고 지혜가 밝아지기를 원합니다. 나는 모든 공덕이 다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는 좋은 복으로 온 누리를 장엄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과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준제관음신앙은 밀교에서 중요시됩니다. 『천수경』에서도 준제진언을 전후하여 다른 진언과 게송을 거듭 첨가한 것은 준제진언에 비중을 크게 둔 것입니다. 『천수경』은 관음신앙을 구체화하기 위한 의식 교전으로 엮어진 것입니다. 이에 준제관음을 나타냄으로써 그 종반부에 당도했음을 보여 줍니다. 『천수경』에 있어서 진언은 준제진언이 마지막입니다. 준제진언을 끝으로 관음신앙의 체계는 더욱 튼튼히 세워졌습니다. 다음 항목은 발원을 통해서 경의 말미를 맞습니다. 8. 십대발원과 사홍서원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嗔癡)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나는 삼악도에서 영원히 떠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삼독심을 속히 끊기를 원합니다. 나는 삼보에 의지해서 정법을 항상 듣기를 원합니다. 나는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기를 원합니다. 나는 항상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나는 보리심에서 퇴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는 결정코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속히 아미타불을 뵙기를 원합니다. 나는 몸을 나누어 온갖 세계에 가득 채우기를 원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십대 발원은 『낙방문류(樂邦文類)』 권2(『대정장』 제47책, p.179중)에 「왕생정토십원문」의 제목으로 수록되었습니다. 다만 내용상으로 볼 때 대승불교의 전체에 해당하는 발원으로 파악됩니다. 삼악도, 탐진치, 불법승, 계정혜 등의 순서에 따른 발원은 통불교적인 발원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정토신앙과 화엄 법화신앙에 의한 발원으로 이해됩니다. 안양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은 정토발원이며, 분신(分身)과 광도중생, 그리고 보리심 등의 발원은 다 화엄, 법화신앙에 의한 발원입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리다. 내 자성의 중생을 다 건지리다. 대승불교는 보리심에 의한 보살도 실천이 그 생명입니다. 이것을 발심수행이라 합니다, 그런데 보살도 실천은 발원에 의하여 전개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대승경전은 모두 발원으로 가득합니다. 『대아미타경』의 48원, 『약사경』의 12원, 『승만경』의 10대 원,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10대 원 등이 그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발원을 모두 종합적으로 집약한 것이 사홍서원(四弘誓願)입니다. 홍원은 총원(總願)이란 말입니다. 대승불교의 총체적인 원이 바로 사홍서원이 됩니다. 철저한 발원으로 인생의 목표를 굳게 세워야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에 그 발원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9. 발원이 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시방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께 예배하옵니다. 나무(南無)는 범어 ‘나마스(Namas)’로 귀의(歸依), 경례(敬禮), 예배(禮拜) 등의 뜻이 있습니다. 나무는 신앙의 기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나무’라는 말이 거듭 봉창됩니다. 대승불교에서의 부처님은 시방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이십니다. 불신의 시방에 충만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계시며(常任) 곳곳에 출현하는 것을 신앙함이 대승불교입니다. 부처님이 항상 계시니까 부처님의 가르침도, 부처님의 제자 분들도 다 시방에 항상 계시는 것으로 신앙합니다. 이것이 ‘나무상주시방불, 법, 승’입니다. 『천수경』에서는 이처럼 발원을 마치고 삼보례로 끝납니다. 그러나 일반 의식의 통례로 보면 조금 어색한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상적인 의례의 경우 삼귀의를 제일 먼저 하고 최후에 사홍서원을 하는 것이 규법인데, 『천수경』에서는 사홍서원을 마치고 삼귀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앉아서 『천수경』을 다 독송하고 일어서서 다시 삼보례를 올리는 경우에 삼보례가 이중으로 되는 셈이죠. 의식 진행상 조금 어색한 면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일용집(日用集)」에서는 준제주 지송에 있어서‘사홍서원’으로 끝나고 ‘나무상주시방불, 법, 승’은 염불 절차 첫 항목에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합당한 것 같습니다. 모든 의식을 시작할 때는 삼귀의로 시작해서 마칠 때는 사홍서원으로 마치는 것이 정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수경』 독송법이 삼보례 독송을 마지막에 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준용하게 됩니다. 의식 진행에 있어서 중복되는 점은 있으나 별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나무상주시방불, 법, 승 다음에 ‘정삼업진언’을 위시해서 정법계진언을 봉독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행에 따라서 얼마든지 가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천수경』으로써는 귀명례삼보로 끝나는 것입니다. 『천수경』은 관음신앙을 천수다라니로 구체화한 경전 『천수경』은 불교의 상용 의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경이며, 한국불교의 신앙체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입니다. 이러한 『천수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은 ‘관음신앙’입니다. 관음신앙을 ‘천수다라니’로 구체화한 경이 『천수경』입니다. 한국에서의 관음신앙과 천수다라니 독송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관음신앙은 자장 법사 이전부터 신봉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수다라니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의상 법사(625~702)의 「백화도량발원문」을 통해서 그때에는 10원 6향문이 있는 『천수경』이 신라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천수다라니가 많이 독송되었음을,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수다라니의 독송예법(作法節次)에 있어서는 참고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송나라 지례 법사가 편집한 『천수대비심주행법』에 의해서 고려에서도 그와 비슷한 형태가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행 독송본 『천수경』의 체제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것은 지금부터 100년이 채 못 되는 최근세의 일입니다. 현행 독송본 『천수경』은 관음신앙과 천수다라니 독송이 시행되어 오면서 여러 가지가 첨가되어 지금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천수경』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도모하자면 한국의 밀교 부분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밀교신앙의 기반 위에서 천수다라니가 독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대중 신앙의 입장에서 『천수경』을 조명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에서의 토속적 불교신앙이 어떤 것이며, 밀교의 의식체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광범위하게 고찰하면 『천수경』에 대한 이해가 비로소 가능하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 한국불교의 전반에 걸쳐서 재조명하는 작업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출처: 불교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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