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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문화기행... 세종대왕자태실
태봉(胎峰)에 얽힌 전설
고려 제25대 충렬왕(1274 - 1308)때 일이다. 성주읍 사골(社洞)마을에서 이장경(李長庚)이라는 어른이 돌아가셨다.
이장경의 장례를 치르는 날, 한 노승이 오더니 산봉우리에 있는 귀신을 쫒는다는 예장나무<또는 녹나무>를 가르키며 "저 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더 없는 길지(吉地)인데"라고 말했다. 그 스님은 이어서 "그러나 묘각은 짓지 말 것이며 만약 묘각을 지으면 길지를 잃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스님이 가고 난 뒤, 문중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예장나무를 도끼로 쳤더니 큰 벌 한 마리가 나와 스님이 간곳으로 날아갔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스님을 찾아가보니 스님은 절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 벌에 쏘여 죽어 있었다. 문중에서는 길지라는 그곳에 묘를 쓰고, 묘각을 짓지 말라는 스님의 경고를 잊고 묘각을 세웠다.
그 후, 선석산(禪石山)에 태를 묻을 자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 아래 봉우리가 첩첩이 맴돌아 태를 감출 명당자리라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서울에서 지관이 내려왔다. 그는 산세를 둘러보고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쉬려고 묘각에 올랐을 때 그는 크게 놀라며 "명당자리가 과연 여기였구나!" 고 소리쳤다. 순간 짙은 안개가 걷히고 산봉우리가 환히 보였다고 한다.
지관이 가고 난 후 왕실의 태를 여기에 묻게 되었고 이장경의 묘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묘를 쓰고 난 뒤 이장경의 아들 5형제는 모두 큰 벼슬을 했고 그 자손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묘를 옮긴 후부터는 문중이 전과 같이 번창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있는 곳, 세종대왕자태실을 찾았다.
태봉 가는 길
성주군 월항면 인촌동의 선석산(742m) 기슭에 선석사라는 절이 있다. 선석사에서 동남쪽으로 200m 거리의 산봉우리에는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다.
성주에서 김천으로 가는 905번 지방도로를 달리다 안내표지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들어가 선석산에서 흘러나오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선석사와 태봉(258m) 이 있다.
태봉에 오르니 사방의 산들이 꽃봉오리처럼 태봉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내가 꽃봉오리 속에 안겨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2대에 걸쳐 왕을 내는 천하의 명당자리라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찾아가 그 자리에 섰을 때도 이렇게 편안하지는 않았다.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때 맞춰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도 태봉을 감싸 안는다.
생명의 근원, 태를 묻다.
인간의 생명은 태(胎)로부터 출발한다. 조상들은 탯줄을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끈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 귀히 다루었다.
태를 가를 때는 가위 같은 쇠붙이를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로 만든 칼을 쓰거나 급하면 이빨로 끊었다. 쇠붙이를 사용하면 태독이 생길 수 있고, 아기가 단명(短命)하거나 불길(不吉)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출산 후에는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태우고 그 재를 강물에 띄어 보내거나 길한 땅에 묻었다. 이렇게 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흙과 물과 불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는 깨끗이 씻은 후, 백자 항아리에 담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했다. 다시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뒤, 더 큰항아리에 담아 길한 방향에 고이 보관했다. 이것을 세태(洗胎)라고 한다.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를 선정하여 땅에 묻는다. 이것은 안태(安胎)라고 한다. 태를 길한 땅에 묻으면 좋은 기를 받을 수 있고,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를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던 곳이다. 특히 임금의 태를 묻은 곳은 태봉(胎封)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이 임시로 설치되어 이 일을 맡았다.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서는 태봉출(胎奉出)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 행렬이 태봉지로 출발했다. 안태 행렬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그 지방의 관리들은 태를 봉안하는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원하였다.
태실을 둘러보며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문종(文宗)을 제외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왕자들과 세손인 단종(端宗)의 태실 19기가 있다. 한 곳에 이렇게 많은 태실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도 여기 밖에 없다.
이 중 5기는 기단석만 남아 있는데, 계유정란에 죽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와 장태비가 세조3년(1457)에 파내어져 태봉 아래로 쓰러뜨려졌기 때문이다. 1975년 지방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어 보수하게 되면서 태봉 아래 넘어져있는 기단석만 찾아 원래 자리에 앉혔다.
태실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맨 아래에 사각형의 기단석을 두고 그 위에 둥글면서 납작한 중동석(中童石)을, 맨 위에는 보주를 가진 개첨석을 올린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은 앙련(仰蓮)을 새기고 개첨석에는 복련(覆蓮)을 조각하였다. 앙련은 우러를 앙(仰)자를 써서 연꽃이 우러러 보고 있는 모양이고 복련은 엎어질 복(覆)자를 써서 연꽃이 엎어져 있는 모양이다.
지하에는 석실을 만들어 태항(胎缸, 태를 담은 항아리)과 태주(胎主)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음각으로 새긴 지석(誌石)을 넣고 위에 평평한 판석형의 개석(蓋石)을 덮었다.
이 밖에도 성주군에는 용암면 대봉동 조실산의 태봉과 가천면 법전동의 법림사 진산에도 왕실의 태를 안치한 흔적이 있다. 조실산 태봉은 태종의 태를 안치하여 조선 태종 때 경산부에서 성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법림사 진산에도 법림사를 헐었다고 하고 산아래 아직도 태석이 굴러 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의 수난사
<풍수학제조 이정영의 고뇌>
조선 세종(1397-1450)때 성주에 왕자의 태실을 두기 위하여 이장경의 무덤을 딴 곳으로 이장해야 한다고 조정에서 결정할 때의 일이다.
당시 이장경의 후손으로 영의정 이직의 손자이며, 한성판윤 이사후의 아들인 이정녕(1411-1455)이 1438년 풍수학제조 성균관직강으로 있었다. 그는 조상의 명당자리를 뺏기지 않으려고 조정의 결정을 무시하였는데, 그 죄로 이듬해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는 숙혜옹주와 결혼하여 성원군에 봉해진 태종의 9번째 사위였다.
<계유 정란과 안평대군>
1452년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였다.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그리고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금성대군이 어린 단종을 보필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과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거사를 시작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좌의정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청을 드릴 것이 있다면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편지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수양의 심복 임어울운이 철퇴를 휘둘렀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김종서가 쓰러지자 아들 김승규가 아버지의 몸을 덮었다. 그러나 다시 심복 양정이 칼을 날렸고 두 사람은 쓰러졌다.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죽은 후에 이를 왕에게 알리고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하여, 입궐하는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鄭苯) 등을 유배시켰다. 이것이 계유정란이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1457년(세조 3년) 안평대군의 태실도 쓰러졌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어린 조카인 단종이 즉위한 후에 수양대군과 함께 단종 앞에 나아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계유정란을 일으켰고, 단종을 독촉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1455년(세조1년), 안평대군에 이어 금성대군마저 죄를 뒤집어 씌워 삭녕으로 유배를 보냈다.
1456년(세조2년)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운동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세조는 상왕인 단종도 복위운동과 관련이 있다하여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1457년 6월에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사육신 유응부가 수양대군의 계유정란 횡포를 탄식하며 지은 시가 있다.
간밤에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닐려 무엇하리오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팔다리 및 머리를 각각 매단 수레[牛車]를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사육신 성삼문의 시도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까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이 때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고, 그는 여기서 본격적인 모의를 시작하였다. 부사 이보흠(李甫欽)을 중심으로 유배지의 군사와 향리를 결집시키고, 경상도의 양반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1457년 9월, 거사가 있기 직전 관노의 고발로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금성대군 등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노산군도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동년 10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성주에 있는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도 쓰러졌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서북쪽으로 200m정도 가면 금성단(錦城壇)이 있다. 금성단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순절한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제단이다. 소수서원 앞 죽계계곡은 당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피로 가득하여 그 피가 10여리까지 흘렀다고 한다. 그곳에 피끝마을이 있다. 죽계계곡 큰 바위에는 원혼들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공경할 경(敬)를 새겼다.
<세조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
세조가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이 세조의 태를 이곳에 묻었다는 글을 지어 세조의 태비 앞에 세웠다. 그러나 세조가 무도하게 조카의 왕위를 뺏은 것을 미워한 백성들은 그 비에 오물을 퍼붓기도 하고, 비문을 돌로 갈기도 하였다. 그렇게 훼손된 비는 지금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권력투쟁에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태봉은 조상의 명당을 지키려는 이정영의 사연, 수양대군의 권력투쟁,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그리고 단종의 억울함, 백성들의 염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역사는 그 많은 아픔을 간직한 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성주이씨 문중사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제56대 경순왕(敬順王)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이었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이름까지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지금의 성주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여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었고, 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제23대 고종(高宗) 때 그의 어머니가 꿈에 북두칠성의 여섯째 별인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낳았는데, 이장경은 장성함에 따라 덕량과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에 정통하여 존경하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다섯 아들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크게 명성을 떨쳤으므로 나라에서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추봉하였으며, 그의 손자 이승경(李承慶: 이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며 공적을 세워 황제가 특별히 농서군공으로 봉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장경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처음에 농서 이씨로 칭관(稱貫)하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성주(星州)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출처] 성주문화기행(2) 세종대왕자태실|작성자 적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