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방에서 생긴 일/ 최명란
평창동 산꼭대기 오뚝 앉은 승방에서 한참을 놀다가
우리는 돌아오고 늦게 찾아온 그 여인은 승방에 남았더라
어쩌면 좋아요! 저 뽀얀 가슴살을 가지고 스님 혼자 있는 승방에 남았어요
스님이고 보살인데 어떨까 아니야 내가 알기론 앙증맞은 그 여인의 품에 스님은 몇 번이나 드나들지 몰라
아니 스님이 집적이면 여인은 귀찮아할까 멀쩡한 사지로?
시간이 더 늦어지면 돌아오기란 더 만만치 않을 텐데
집에서는 어떤 핑계로 나왔을까
여기서 밤을 지내기까지의 변명을 채워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늘여놓았을까
내가 마음속으로 물었을 뿐인데 여인은 용케도 들었다는 듯
낮에 들꽃축제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머리칼이 숭숭하고 화장도 반쯤 지워진 까닭을 설명하듯 말하더라
아니, 남편이 있는 여인일까 아닐까? 남편이 죽었을까 아닐까? 이혼했을까 아닐까?
여인은 토끼띠라 했는데 그렇다면 사십 초반의 나이
스님은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라니까 부녀관계 나이쯤은 좋게 될지 몰라
법당 일이며 설거지며 조금도 서투름 없이 척척 해내는데
나는 속으로 아하! 아마도 몇 번은 이곳을 드나든 솜씨다 싶어
그럴 때마다 스님과? 아이쿠 스님의 저 큰 머리를 어쩌나
나는 그만 자꾸 웃음이 쿡쿡 나서 애써 우스개로 시간을 모면했더라
밖에는 뜻 모를 바람이 울고 바야흐로 절 받으랴 고기 먹으랴 야단법석의 스님
승방에 오소소 앉아 있는 여인의 목덜미 위에 군림하며 천하를 호령할 듯한 스님
두 배나 되는 덩치로 여인을 버둥고 저 스님 어쩔까 싶어
명실상부 어떤 전투를 벌일 것인가 여인은 흐뭇해 고개를 끄덕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럼 여인의 귓불에 무당벌레처럼 딱 붙어있는 저 귀고리는 어찌할까
존엄한 혼인서약헌장은 어찌할까
그런 다툼에도 시비가 있을까 없을까
자리는 지옥에 깔까 천당에 깔까
법당에 계시는 키 작은 아미타불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못 본 척하시므로
허허만년 음양이 있어온 이래 암수 서로 엉기고 풀리고 죽어갔더라
스님의 바랑 속에 든 법이며 물이며 범패며 취기며 연(緣)이며 눈물이며 모두 고무줄에 재워서라도 한번 버팅겨 보시라
하룻밤 인간기생충이 되어 서로의 살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가 보세나
그럴 때 글쎄 등줄기에서 무수한 강물이 쫙쫙 흘러내리더라만, 웃을 일만은 아니라보네 마는
창자 속을 훑고 지나가는듯한 골목을 한참 지나 이른 평창동 산꼭대기
바늘 끝 같은 바람이 웬 창자벽에 그렇게 우수수 와 꽂히는지
산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야경
하늘만 아니라 발 아래도 저렇게 무진한 지상의 은하가 있고나
그렇다면 여인의 저 얼크러진 머리칼 한 올 한 올에도 내일 아침 동이 틀 것인가 말 것인가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램덤하우스
시가 감동이거나 깨달음이 있어도 시를 읽는 맛이 나지만 재미있는 시도 이렇게 눈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평창동 산꼭대기 승방이면 산은 북한산(삼각산)이고 절도 유추가 가능한데 여기서 어느 산 어느 절이 중요한 게 아니죠. 무언가에 들킬새라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가만가만 훔쳐보는데 햐! 관찰력과 상상력도 이쯤이면 가히 글 속에 홀딱 빠질 만 하지 않습니까. 어조 또한 자부자분하여 글을보고있는 사람을 글 속으로 막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승방에 밤 늦게까지 남아있는 사십 초반의 보살을 보면서 뻗어나가는 상상력이 절이 있는 삼각산 주능선의 줄기보다 길고 재미있습니다.
보살과 스님이라... 아니 어쩌면 남과 여가 한방에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생각만 해도 땀이 송골송골 날것 같은데 시 속에 나오는 보살은 화자의 상상력처럼 수많은 거짓말을 할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사연도 있어 보입니다. 아니면 우바이님께서 불심에 안기어 하룻밤 편하게 쉬어 가고 싶은 것을 속인이 피안의 눈으로 고정된 관념으로 온갖 편견의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이 시는 시집이 나오기 전에 인터넷(시평 여름)에 올라온 것을 먼저 보았는데 시집에서보니 "스님은 실눈을 뜨고 운판을 치며 발 아래 서울을 깨울 것인가 말 것인가" 마지막 행을 삭제하고 수록을 하였더군요. 작가가 시집을 엮으면서 없는 것이 낫다고 해서 뺀 것 같은데 때론 시를 보면서 없으므로 해서 시가 여운도 남고 한결 나아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임은 내게 황금으로 장식한 작은 상자와
상아로 만든 열쇠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그의 얼굴이 그리웁거든
가장 갑갑할 때에 열어 보라 말씀하시이다.
날마다 날마다 나는 임이 그리울 때마다
황금상(箱)을 가슴에 안고 그 위에 입맞추었
으나,
보다 갑갑할 때가 후일에 있을까 하여
마침내 열어 보지 않았노라.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 먼 먼 후일에
내가 참으로 황금상을 열고 싶었을 때엔,
아아 ! 그 때엔 이미 상아의 열쇠를 잃었을 것
을.
(황금상 -- 그는 우리 임께서 날 버리고 가실 때
최후에 주신 영원의 영원의 비밀이러라.)
양주동 「영원한 비밀」 전문
상징적 수법으로 쓰여진 이 시는 1920년대에 쓰여진 시입니다. 당시의 문학작품들을 보면 계몽적인 글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광수의 소설 '흙'이나 심훈의 '상록수' 같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글들이 많았는데 지금 보면은 낡은 숫법 같지만 당시에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적 여건으로 본다면 새로운 감각으로 쓰여져서 참신하다는 느낌이 드는 시입니다 그런데 3연은 설명적이어서 군더더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낫다는 느낌입니다.
아래의 공광규의 '얼굴 반찬'이라는 시는 아무리 영양가가 많고 맛있고 좋은 음식이 풍성한 식탁이라도 사람만한 음식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기 반찬에 혼자서 먹는 진수 성찬보다 찬밥에 물말아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먹더라도 다정한 이들과의 식사가 소화도 잘되고 영양도 풍부하겠지요.
이웃과 친척을 "간식, 외식"으로 표현한 시어도 시와 잘 비벼져 이 시를 더 욱 맛깔스럽게 하고 있는데 요즘 현대인의 식탁풍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아 아주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 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얼굴 반찬」 전문
그런데 이 시를 시하늘에 올렸더니 어느 분이 댓글에다가 '참 좋지만 마지막 연이 아쉽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어딘가 미진하여 마무리를 해 놓은 것 같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을까요. 완벽하다는 것도 찾아보면 결점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어떤 시인은 자기 시를 죽을 때까지 수정을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아직 합평이라는 것을 어울려서 해본 적이 없지만 합평으로 해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렇게 다듬어진 시를 가지고 등단한 시인들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때론 이렇게 합평을 해서 달라진 시가 그 시인의 것인가 하는 작은 논란도 있습니다만 신경림의 '목계장터' 가 여러사람의 조언 속에 좋은 시로 탄생을 한 것처럼 그렇게 해서 한결 깔끔한 시로 다듬어진다면 문제가 되기보다는 좋은 시 한 편을 독자들에게 내 놓는 것이 되겠지요.
첫댓글 참 재미있는 글이네요. 시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모호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엉뚱하고 불경스러운 생각을 따라가 보는 재미가 있는 글입니다.^^ㅋㅋ 상상하는 것이야 뭐 죄가 되겠습니까? ㅎㅎ
맛있게 먹고 갑니다. 스님이나 목사나 신부나 모두 인간 아닌가. 이련선하에 우루빈나 처녀의 우유죽을 얻어 자신 부처님도 사람이었다네. 그걸 보고 부처님을 따르던 도반들도 모두 실망하여 떠났다는데. 빛과 그림자를 구분함은 어리석은 일이지..ㅎ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그야말로 전설입니다. 스님께서 아주 큰 보시를 하셨는데 발가락만 닮은 것을 가지고 우길 수도 없고 전설이니 증명할 길이 있어야지요......최명란 시인의 '묵비' 라는 재미난 시가 있는데 나중에 한 번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