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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문창수역, 정경사, 1999
서문
본서는 주일 오전예배에서 계속해서 전한 60편의 설교를 모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책으로 출판하라는 압력을 받아 출판하였다. 저는 오늘의 교회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강해설교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깊이 느끼고 있다. 설교는 수필이 아니며 출판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설교는 청중에게 들려져서 즉각 충격을 주는 데 있다. 여기의 설교는 거의 수정을 가하지 않은 당초의 설교 그대로이다.
저의 최대의 바람과 소원은 이 설교들이 강해설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자극할 수 있었으면 한다. 설교자들은 주일 오전 예배에 40여분 행해지는 이 같은 강해설교가 오늘에도 도심지교회에서도 행하여질 수 있음을 알고 격려를 받을 것이다.
나의 최선의 비평자요 가장 가혹한 비평자는 나의 아내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1959년 3월 런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
1 장 총 서론
무릇 어떤 교훈을 검토할 적에는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책이라 하겠다. 이것이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방법은 산상설교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유명한 산상설교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설문과 함께 기독교인의 생활, 사상, 견해에서 차지하는 이 설교의 위치에 관하여 알아보아야 하겠다.
- 어떤 이유로 해서 산상설교를 검토해야만 하는가?
산상보훈에 관하여 설교하게 된 이유는 성령의 타이르심과 강요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지하였음을 근본적으로 전제한다. 만약 저 자신의 선택에 맡겨졌다면, 산상보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특별한 이유는 오늘날 교회 생활의 특수 상황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그것의 피상성이다. 현대의 복음전도 활동을 과거의 교회들이 실현했던 위대한 복음전도 노력과 비교 대조하여 볼 때, 오늘날의 교회는 요란스러움과 우리의 선조들을 두렵게하고 충격을 주었을 끔찍스러운 수단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피상성은 교회 성결 개념과 성화론에 대한 교회의 접근방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원인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신중히 여기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이 우리에게 스스로 말씀하시도록 놓아두지를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교범이요, 유일한 자료요, 유일한 권위이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참된 의미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체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선한 영도 있지만 악한 영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짜 체험도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 올바라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을 읽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읽음으로써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계획에 의해 그 날의 분량을 읽은 다음 생각도 묵상도 하지 않고 그저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우리는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 그리고 읽는 모든 것은 그 이론의 조정을 받는다. 이단자는 결코 부정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이론을 발전시켜 그것에 만족을 느끼고, 이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임하게 되었으며,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그 이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주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측면만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낱 도덕률의 집합쯤으로 변형시키고 만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희생하고 은혜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약성경의 복음이라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은혜를 강조한 것 때문에 자주 오해를 받았다.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율법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대로 살게 되어 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고, 온전케 하러 오셨다. 이 점을 망각하기 때문에 율법과 은혜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제 나는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집중하는 최선의 방법은 산상설교를 대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상설교는 우리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우리의 사고와 관점에서 그것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또한 산상설교는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산상설교의 목적은 사실상 무엇이겠는가? 서로 상반된 견해가 많이 있다.
① 사회복음적 견해 –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본 설교뿐이며, 이 속에 사회복음의 기초가 있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원칙이 그 속에 깔려 있으며 우리가 행해야 할 바 모든 것은 산상설교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문제도 끝이 난다. 사회복음주의의 잘못은 산상설교의 처음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항상 무시해 왔다는 것이다. 이들 말씀이야말로 사람은 그 누구도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스스로 산상보훈대로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② 모세 율법의 해석(정교화) - 주님은 율법을 잘못 풀이하고 있음을 아시고 산상설교에서 모세의 율법을 정교화하고 해석하심으로써 율법에 보다 높은 영적 내용을 더하셨다는 것이다. 산상설교가 어떤 점들에서는 율법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이나, 팔복은 율법의 범위를 완전히 초월하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③ 세대주의 견해 – 산상설교가 현대 기독교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은 우리 주님은 천국에 대해 설교했으나 유대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 산상설교는 천국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을 세울 수 없었으므로 때늦은 방편으로써 십자가 위의 죽음이 오고, 교회와 교회 세대가 오게 된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 주님이 천국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 다시 산상설교가 소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천년왕국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본 설교는 첫 제자와 그 이후에 항상 이것을 실천하도록 작정된 사람에게 설교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상설교에 있는 교훈이 하나도 빠짐없이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나 있다는 점은 중요한 사실이다. 산상설교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바 ‘새 계명’,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이 명령을 장중하게 정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법을 보게 된다.
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땅 위에 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천국은 동시에 이미 땅 위에 임한 나라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오늘 모든 참된 기독교인 속에서 다스리고 있다. 산상설교는 천국생활의 완전한 표현이다. 마태는 천국을 끝까지 강조하려 했다. 산상설교가 마태복음 첫 머리에 놓인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물질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본 설교의 목적은 천국을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산상설교에는 ‘이렇게 살아라, 그래야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란 말씀이 없고 ‘너희가 기독교인이니까 이렇게 살아라’ 이다.
-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연구하고 본 설교대로 살려고 해야 하는가?
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산상설교를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다.(딛2:14)
② 산상설교만큼 중생과 성령과 그의 내적 사역의 절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팔복의 말씀은 나를 바닥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산상설교처럼 복음과 복음의 은혜로 이끌어 주는 것은 없다.
③ 산상설교를 듣고 실천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 많은 축복을 체험한다. 만일 여러분이 생활의 능력을 얻으며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산상설교로 곧장 가서 산상설교를 살며 실천하며 몸을 내어 맡기라. 만일 여러분이 배부르기를(채워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신비한 축복(체험)을 찾지 말라. 이 축복을 얻으려고 여러 집회로 달려가지 말라. 그 대신 산상설교와 그 의미와 요구를 정면으로 대하라. 그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축복의 지름길이다.
오늘의 세계는 참된 기독교인들을 찾고 있고,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외부사람들을 끌어 드리기 위해 전도단을 조직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기독교인의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해야 할 것이며 교회가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건물 속으로 밀려 들 것이다. 공산주의에서 기독교로 돌아선 사람의 말은 유식한 설교나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기독교인에게서 자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심을 본 결과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산상설교를 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기독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임을 알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그것이 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항상 산상설교를 신중히 여기고 본 설교에 자기들을 대면케 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 설교를 세심히 연구해 보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연구해 보자. 산상설교는 요구사항만 말씀하고 있지 않고 힘의 공급원을 보여주고 있다.
2 장 개관 및 분석
본 설교의 자세한 내용과 진술에 앞서 그것을 전체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유는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이 변함없는 위험 때문이다. 비유컨대 산상설교는 하나의 웅장한 음악과 같다. 만일 본 설교를 전체로써 이해하고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속의 어느 특정 명령의 어느 하나도 적절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위 ‘현대적 요구에 부응한 산상설교의 사회적 적용’이 그토록 완전한 허위가 되고 이단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본 설교의 순서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본 설교에는 일종의 논리적 연결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영적인 순서와 연결이 있다. 주님의 이 말씀들은 어떤 기초 원칙이 설정되고 그것을 기초로 다른 원리들이 뒤를 잇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산상설교를 살며 실천하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서 기독교인의 행위를 기대하는 것은 이단이다. 신약성경의 어느 서신이나 먼저 교리요, 그 다음에는 교리로부터 추론이 항상 이어져 ‘그러므로’ 그들은 어떠 어떠한 일들을 하라고 권면을 받는다. 신약의 모든 서신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진 것이요, 비그리스도인에게 쓰여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모든 서신의 윤리면에서의 호소는 항상 신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사람들에게만 말씀되어진 것이다.
- 본 설교의 분류
일반적인 것) 5:3-16:
3-10,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성격
1-12, 그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 의해 증명된 기독교인의 성격(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
13-16, 세상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특수적인 것) 5:17-48: 그리스도인의 의에 대한 대략적 서술. 여기에 내포된 원칙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조문보다 영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과오는 그들의 기계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6: -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에게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생활하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항상 하나님 존전에 있음을 앎으로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비추어 생각한다.
07: - 하나님의 판단에 비추어 항상 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자로서의 기독교인.
- 그리스도인 특유의 자질,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법과 관련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며 그 법을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항상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니다.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관점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의식주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며, 이런 것들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의 수도원제도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설교는 우리의 태도가 비그리스도인의 태도와는 전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 환경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된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기 때문에 비겁한 두려움 때문에서가 아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은 양의 내부를 살피신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항상 이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을 고발할 최후의 죄는 얄팍함과 입담의 죄가 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은 이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육신과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며 행해야 한다. 이것이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 본 설교의 해석을 지배하는 원칙
중요한 원칙은 산상설교는 어떤 윤리나 도덕적인 규범이 아니라 어떤 성격의 서술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게 되어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 되어야 한다. 주님은 여기서 “너희가 이런 사람이니 너희는 율법을 이렇게 대해야 하며 율법에 따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람들은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명령을 예로 들며, 이대로 하면 옷장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 설교가 거듭 우리에게 일러 주는 교훈은 우리가 어떤 주어진 환경과 조건 안에 있으므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심령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규범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뜻이요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렇게 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나의 모든 소유는 주의 것이니 이제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본 설교의 전반원칙과 자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어떤 구체적인 것에 대한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말로 나타내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정확히 연주하는 것이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라해도 규칙이나 규례를 무시할 이유는 없다. 그를 위대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그의 표현이요, 영이요, 생명이다. 기독교인은 영을 강조하고 있을 때에도 동시에 문자에도 관심을 가진다.
요약하면 이 설교에 의문이 들어 다투려 하게 될 때는, 심령 상태가 잘못되어 있거나 잘못 해석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산상설교는 매우 두려운 교훈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말씀대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합시다” 만일 본 설교의 어느 명령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해석과 이해가 잘못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주님과 제자들도 산상설교대로 살았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생활화해야 할 교훈이다. 이 교훈들과 다투는 심령이 되지 말라. 여기에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이 있다. 만일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산상설교대로 산다면 세상은 쇼크를 받을 것이며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 원컨대 우리들이 본 설교의 심판 아래 있게 하옵시며 이 세상에서 세우고 있는 집이 주의 마지막 테스트와 어린 양의 엄위하신 눈 앞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3 장 팔복 서론
팔복에는 기독교인의 기본 면모와 특징이 내포되어 있다. 본 설교의 복이 몇 개인가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의 교훈이 무엇인가 이다. 산상설교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성격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사람뿐이다 이러한 사람이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행위를 고찰하기에 앞서 기독교인의 근본 성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팔복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원칙)은
첫째로, 기독교인은 ‘모두’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을 두 집단으로 즉 성직자와 평신도, 기독교인의 생활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과 세속 일에 종사하는 사람과의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철저하고 완전하게도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참된 경건을 파괴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직책에 구별은 있으나 팔복은 직책을 서술하고 있지 않는다. 팔복은 인물(성격)에 대한 서술이다.
둘째로, 모든 기독교인은 이런 ‘모든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야 하게’ 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애통해야 하게’ 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화평케 해야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가당찮은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이 모든 특징을 동시에 나타내게 되어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성격이 이러하니 우리가 팔복을 하나씩 분석해 보는 순간 각 축복은 또 다른 축복들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애통함’이 없이는 ‘심령의 가난’이 있을 수 없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없이는 애통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온유’하고 ’화평한‘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는 온유와 화평을 행할 수 없다. 팔복은 하나의 완전한 전체이므로 이것을 분리시킬 수 없다. 팔복의 비율의 변화는 있어도 모두 나타나 있는 것이며, 이 팔복은 모두 동시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로, 각 특징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은혜로 산출될 수 있는 하나의 기질인 것이다. 팔복에 서술된 영적 자질과 그것을 비슷하게 닮은 생태적 자질과 명확히 구별하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날 때부터 훌륭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예로 들면 그들의 상태는 영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도 상관이 없다. 여기 여러 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생태적 성격의 서술이 아니라 은혜로 산출된 성격이다. 복음은 천성적으로 가장 교만한 사람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은혜의 결과이며 성령의 산물이므로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특성과 기질이 된다. 우리는 이 같은 차이를 영적으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해서 구별해야 한다.
넷째로, 이 서술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인과의 사이에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현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본질적인 차이에 대한 이해이다.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 교회는 세속화 되었다. 한계가 분명치 않아졌다. 이 차이가 매우 분명했던 때, 그때는 언제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교회를 외부 사람들에게 매력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만 있으면 외부 사람들과 비슷해지라는 소리이다. 복음의 영광스러움이 교회가 세상과 절대 다를 때에만 외부사람들을 끌어 들이게 되어 있다. 세상이 처음에는 미워해도 교회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이럴 때 뿐이다. 이렇게 해서 부흥은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다르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대상이 다르다. - 세상은 자기신념, 자기표현과 삶의 지배를 신앙하고,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하게 됨을 신앙한다. 자연인은 자랑거리를 좋아하나 팔복에서는 이것이 정죄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구하는 것에서도 달라야 한다. 부귀와 돈, 지위, 명성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다. 다음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논리 의식에 대한 호소이다.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난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1-12)
② 본질적인 차이는 그들이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들의 신념이다. -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으나 그리스도인은 자기 한계를 사실대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게 되어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게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과 완전히 대조됨으로써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할 것을 산상설교 이상으로 권고하는 것은 다시 없다. 그러므로 우리 중 그 누가 지금까지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되려고 애쓴 사실 때문에 가책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부터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첫째 복과 마지막 복이 ‘천국‘으로 약속되어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전혀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가 본질에서만 아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너희가 세상에 있기는 하나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천국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나라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영역을 의미한다.
① 주님은 땅 위에 계실 때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그가 나타나셔서 권세를 행사하는 곳은 천국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 하였느니라”(마12:28)
② 천국은 동시에 모든 참 신자들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하며 지금의 삶에서 그의 통치와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는 하늘나라에 있으며 천국은 우리 속에 있다.
③ 천국은 앞으로 임할 것이다. 천국은 임했다. 천국은 임하고 있다. 천국은 임하려고 하고 있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계 위에 물리적이며 물질적인 의미에서까지 확립될 때에 임할 것이다. 그 때는 천국이 완전한 형태로 온전히 임할 것이다.
- 팔복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본질상 얼마나 다른가! 그러므로 우리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에 소속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복된 자인가? 참으로 복되며, 행복한 사람은 주께서 복되다고 하신 사람들뿐이다. 팔복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인 반응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정확히 판별될 것이다. 각자 자신을 살펴보자!
4 장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처음에 오는 이 말씀은 뒤에 오는 모든 복의 열쇠가 된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그리스도인과 천국시민의 기본 특징이다.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은 속을 비우는 것을 의미하며 나머지 복을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채우기 전에 먼저 비워야 한다. 복음에는 항상 이 두 가지 면이 있다. 세워지기 전에 먼저 넘어짐이, 개심에 앞서 뉘우침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해방하기에 앞서 정죄를 선언한다.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만의) 것임이요”보다 더 완전한 믿음에 의한 칭의론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주 대할 때 뿐만 아니라, 특히 산상설교의 전 메시지를 대할 때 우리에게 엄중하고 철저한 테스트가 된다. 즉 산상설교를 우리 힘으로 행할 수 있다는 생각들을 즉각 정죄한다.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가늠해야 할 산이 있다. 너희는 그 산을 올라가야 한다. 너희가 이 산을 바라볼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너희가 혼자 힘으로는 이 산을 오를 수 없으며, 너희 자신의 힘으로 올라가 보려는 모든 시도는 너희가 아직 그 높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본문을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복이 있다’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이 영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주님은 ‘가난’이란 말씀을 세속 정신에 지배를 받지 말라, 부귀에 의존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정죄를 받은 정신이다. 주님께서는 ‘영의 가난’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것은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은 자연인과 그리스도인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가리킨다. 이 구절 이상으로 세속정신과 견해에 더 큰 반제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은 자기 신념과 자기 의지와 자신과 자기표현을 얼마나 크게 강조하는가? ‘세일즈맨쉽’의 본질은 자신감과 확신이라고 말한다. 고객에게 감명을 주고 싶으면 여러분도 이 방법을 따라야 하며, 이런 관념은 어느 영역에서나 통용되고 있다. 여러분이 직업에 성공을 원하면 여러분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비극적 자신감의 표현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마주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얼굴을 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철저한 가난한 영 이외의 다른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축복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인기가 없다. 오늘의 교회와 과거시대, 특히 청교도시대와의 대조는 너무나 크고 놀랍고 유감스럽다. 오늘의 교회에 ‘개성’ 운운하는 말들처럼 어리석고 비기독교적인 것이 없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육적인 것이며, 일종의 외모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위험한 것은 이런 태도는 대체로 참된 개성과 자신감, 자존심, 자기표현을 혼동하는데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큰 덕목인 겸손이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은 끔찍하게도 ‘개성을 인정받으려’ 애를 쓴다. 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함이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여 두려워 떨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가 보잘 것 없고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귀감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아! 교회가 세상과 세상의 방법으로 그 전망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끔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리스인들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 심리에 홀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속하는 어느 것과도 전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자.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소심하거나 자신이 없어야 한다거나 용기가 부족하다거나 교제를 싫어하며 수줍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팔복에 나타나 있는 자질 중 생래적 자질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개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거짓되게 십자가에 못 박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겸손한 것으로 가장한 것이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큰 희생을 하는 사람이라거나 중들처럼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하기 위해 삶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어떤 것인가?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하게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이것이 겸손의 특성이다.
그것은 모세의 정신과 같다. 그는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음을 깊이 느끼고 자신의 부족과 부적격을 의식했다. 다윗은 “주여 내가 뉘기에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라고 말했다. 환상을 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자신을 믿는 현대의 전형적인 세속인이었다. 그가 주님을 볼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담대했고 개성은 변함없었지만 동시에 그는 심령이 가난했다. 바울은 큰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의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서신을 읽으면서 그의 생애 끝까지 그가 싸워야 했던 싸움은 자만에 대항하는 싸움이었다. ‘자랑’이란 말을 계속 사용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뵙고 난 후 그는 모든 것을 ‘손실’로 여겼다. 그는 심령이 가난했으므로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것을 우리 주님의 생애에서 보게 된다. 그는 사람이 되셨고,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다. 그는 신성의 대권을 쥐지 않으셨고 사람처럼 사시기로 결정하셨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다.(요14:10)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만심이 온전히 없음, 자신과 자기 의존의 완전한 없음을 의미한다. 가난 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에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이 엄청난 인식이다. ‘심령의 가난’은 우리가 철저히 복종한 상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철저하게 의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밧모섬의 사도 요한처럼 필연코 ‘죽은 자처럼’ 느끼게 된다.
- 나는 심령이 가난한가? 나는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는가? 결국 사람은 어떻게 해서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일까? 그 대답은 여러분이 자신을 바라보거나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에 있지 않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이다. 주를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들 스스로는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를 바라보라. 그러면 자신을 위하여 할 일이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십자가를 붙들 뿐입니다” 속이 비고 무력하고 벌거벗은 죄인이지만 주님은 항상 충족시켜 주신다.
5 장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두 번째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복도 그리스도인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되게 한다. 세상이 적어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애통이다. 할 수 있는 대로 행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세상이다.
하지만 복음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6:25의 병행어구를 보면 주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화를 선언함으로써 이 세상의 웃음과 유쾌함과 행복을 정죄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애통인 것으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자연적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교회 자체는 모두 옳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모두가 바깥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뿐이라는 생각보다 더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은 없다.
모든 부흥운동은, 교회 자체가 기독교회로써 그리고 여기 팔복에 서술된 내용에 근사한 개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에 교회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끌려 들어온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불행히도 오늘의 교회가 과거에서처럼 이 점이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가짜 청교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거짓된 청교도주의는 지난 세기말과 금세기 초에 가장된 경건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신앙생활은 거의 비참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그리스인은 매력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 한 가지 원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끌어 들이려면 일부러 밝고 명랑한 모양을 가장해야겠다는 생각이 유포되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부에서 생긴 기쁨과 행복을 가지려 애쓰지 않고 겉치레를 도모했다. 이러한 피상성과 가장된 쾌활이 오늘의 교회생활에서 애통의 특징이 사라진 이유인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은 잘못된 죄의식과 잘못된 죄론 때문이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죄에 대한 참되고 깊은 확신이 없으며 피상적인 기쁨과 행복만이 있다.
이처럼 잘못된 죄론과 피상적인 기쁨과 행복관이 복합 작용하여 필연적으로 피상적인 유의 인간과 매우 부적당한 유의 기독교 생활을 낳고 있는 것이다. 죄와 기쁨에 대한 교회의 이중개념이 이처럼 잘못되어 있고 부당한 것이라면 교회가 전도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 산상설교는 부정적인 면부터 시작한다. 죄의식은 필연적으로 개심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참 기쁨이 있기 전에 죄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정죄의식을 떠나서 기쁨을 원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심하여 참으로 행복하고 복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애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많은 형제 가운데 첫째 아들’이시다. 이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주님에 대한 이사야 예언을 보면, 주는 ‘슬픔이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그의 용모는 너무 상하여 아무도 그를 바라지 않을 정도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8:57에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 주님이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웃음의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다.
바울은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외친다. 이 구절은 애통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기독교인은 자기에 대하여 철저한 절망감을 가지고 바울처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의 법과의 사이에 비참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면 이 사도 바울과 기타 사도들과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닮아야 한다.
-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그의 성결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응시해 볼 때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본다. 참으로 자기와 대면하고 자기 삶을 검토하는 사람이면 자기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해 할 것이다. 내 속에 나를 이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 속의 무엇일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이 그의 지체들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그것을 미워하며 그것 때문에 애통해 한다.
애통은 불가피한 것이며, 실제 체험이며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시금석이다. 만일 이와 같은 유의 가르침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곧 내가 주의 백성이 아니며 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애통한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이다.
참된 기독교인은 여기에 머물러 서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한다. 기독교인은 사회 상태와 세계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도덕적 혼란과 인류의 고통을 보면서 애통해 한다. 이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며 이 때문에 애통한다.
우리 주님이 ‘슬픔을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이셨던 까닭도 이와 같다. 주님은 죄라고 하는 무섭고 더러운 것을 보며,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해 하신 것이다. 그의 성품을 받은 사람도 그래서 애통해 한다.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것 때문에 애통해야 한다. 죄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찢으려는 이 무서운 실재를 알며 사람들의 반역과 오만과 사탄에게 귀를 기울인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애통한다. 신약성경에서 이 영적 의미의 애통이 곧 그것이다.
- 세상의 표어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이다. 우리 주님은 팔복에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죄의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며, 자기의 철저한 죄성과 절망을 보고 구주를 찾는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를 발견한다.
애통의 의미를 먼저 알기 전에 주를 그의 구주로, 구속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참으로 애통한다면 그리스도가 나의 죄로 인하여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존전에서 나의 변호인으로 서 계심을 본다.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준비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슬픔은 기쁨으로 변한다. 이것은 개심에 있어서 그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계속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제공되는 또 다른 위로, ‘복된 소망’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날이 동터 올 것을 안다. 그러면 땅 위에서 죄는 물러갈 것이며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이 임할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영원한 소망이 있다. 저 영원한 상태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용서받은 죄로 인한 기쁨, 화해의 기쁨, 하나님에게서 이탈해 나갔을 때 우리를 도로 찾으신 것을 아는 기쁨, 앞에 있는 영광의 기쁨, 영원한 상태를 기대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아는 것이다.
- 애통하는 사람은 슬픈 사람이지만, 병적이거나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신중하고 위엄 있는 사람이지만 결코 냉정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다. 위엄 속에는 따스함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는 삶을 심각하게, 삶을 영적으로 응시하며, 삶 속에서 죄와 결과를 본다. 그는 속으로 신음한 바울과 같지만 그리스도를 체험함과 장차 올 영광 때문에 행복하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신중한 행복이다.
우리 주를 닮아서 신음하고 울지만, 앞에 있는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와 수치를 참는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심오한 죄론과 차원 높은 기쁨의 교리, 이 둘이 합하여 애통하며 동시에 위로를 받는,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6 장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 이 진술은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큰 쇼크로 임했을 것이 틀림없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있어 메시야는 그들을 전쟁의 승리로 이끌어 줄 분을 의미했다. 주님은 즉각 그들의 이 같은 생각을 물리치셨다.
더 나아가 이 복은 비참하게도 오늘의 교회의 사고방식과 매우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으니 우리는 모두 연합해야 한다. 우리는 저 원수와 대결하기 위해 단 하나 거대한 조직(기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이다. 자신의 조직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과 제도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수를 늘이시지 않고 계속 줄이셨다. 이것이 영적 방법이다.
- 팔복의 각 복은 다음의 복을 암시하며 다음의 복으로 연결된다. 먼저 ‘심령의 가난’에 대한 선결 조건이 나온다. 그 조건이란 우리가 죄를 알게 될 때 차례로 애통의 상태로 인도되는 근본적인 영을 말한다. 이 영은 차례로 온유한 영으로 인도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각 복 사이에 이런 논리적인 관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팔복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더 난해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 겸손하게 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한다.
첫째 복은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 인식을 요구한다.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 되기 시작도 못했다. 이 복은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한다. 우리의 사람됨이 무엇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인식할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복은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성품을 알게 되고,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심한 무력함을 알게 된다. 최선의 행동과 생각과 의욕에도 죄가 있음을 보게 되며 우리도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는가? 라고 부르짖게 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셋째,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자신의 철저한 하찮음과 무능, 내 속에서 나를 이끄는 죄악, 이 두 가지를 모두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같은 것들을 말하게 허용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나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 자신이 그것을 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서취라이트’를 비추게끔 허락하는 일이다.
-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브라함은 한마디 불평도 불만도 없이 어린 롯으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대로 먼저 선택하도록 한다. 놀라운 온유이다. 모세는 땅 위의 모든 사람보다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를 비천하게 생각하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온유를 본다. 모세는 애굽 궁정과 바로의 딸의 아들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참되게 평가했으며,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낮추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어떻게 계속 전했는가를 보라. 스데반과 바울의 온유를 보라.
놀라운 온유의 최고의 실례인 주를 바라보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다. 그의 전 생애에서 박해와 경멸과 야유와 조롱을 참으신 것을 보라. 그의 원수들에 대한 태도, 더욱이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그의 온유를 보여준다.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기록한 주의 모습을 보라. 그는 스스로 겸손하여 종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온유이다. 이것이 참된 겸손이다. 이것이 주께서 여기서 가르치시는 자질이다.
-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는 생래적 기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기질과 심리야 어떻든 모두 누구나 이 같이 되도록 작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거의 끓는 가마솥과 같다고 했지만 온유했다. 막강한 지도자요, 비상한 인격자요, 강인한 인물인 사도 바울의 철저한 겸손과 온유를 생각해 보라.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만드신 것이다.
온유는 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유는 무기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이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온유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온유가 아니고 무기력이다. 온유는 싹싹하다거나 사귀기 쉬운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온유는 연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구나 타협이나, ‘견해 차일랑은 덮어버리고 행복합시다’하는 평화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온유는 위대한 능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굳게 믿는 까닭에 필요하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들이다. 순교자들은 온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단코 약하지는 않았다. 이 고상한 자질을 동물적, 육체적, 생래적인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온유란 외적 태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내적 정신의 문제이다. 참 온유는 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참는다거나 견딘다는 느낌도 갖지 않는 상태이다. 입을 통제해야 하며,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소명을 받았고, 이런 사람이 되기로 작정함을 받았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결국 온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표현되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견해이다. 그러므로 온유는 두 가지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세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나의 태도의 표현이다. 사람의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다. 자기가 악한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다. 나의 죄성 때문에 가난한 심령과 애통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될 때에만 교만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에게는 자랑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온유가 ‘자기를 표현하라’ ‘자기를 주장하라’라고 말하는 오늘의 인기 심리학을 부정하는 말이다. 온유한 사람은 또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의 지위나 특권이나 소유물이나 신분을 요구하지 않는다. ‘곧 예수의 마음이다’
더 나아가 온유한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면서 삶을 거의 소비하고 있다. 자신을 더 이상 방어하지 않는 것은 방어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자기 연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으로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온유한 사람은 이것을 모두 끝장낸 사람이다. 여러분은 그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음을 알게 됨을 의미한다.
“이미 넘어져 있는 사람은 넘어질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요한 번연)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온유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나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배후가 있고 그분이 그것을 갚아 줄 것을 알기 때문에 보복의 영을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인내하고 오래 참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그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6-21)
동시에 온유는 우리가 귀를 기울여 배울 자세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온유는 항상 배우려는 영을 의미한다. 배우고 귀를 기우릴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끝으로 온유는 모든 것, 우리 자신, 권리, 대의, 우리 앞날, 모두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특히 그래야 한다. 우리가 갚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만 하면 된다. 주께서 원수를 갚으실 것이다.
- 온유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게 되는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얻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이생에서 땅을 얻는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을 얻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골드스미스-작가, 목사)
바울은 이것을 더 훌륭히 표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요하게 살 줄도 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여러분이 온유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은 여러분의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땅을 얻은 것이다.
동시에 이 말씀은 미래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 곧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7) 우리는 그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다.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눅14:11) 이것이 온유이다.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것도 우리를 겸손하게 할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우리의 죄성 때문에 우리를 애통하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이미 성령을 받았음을 반드시 주장해야 한다.
-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주장이라면 온유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핑계할 수 없다. 온유는 성령이 직접 만드신 열매이다. 온유는 우리에게 제공된 것이며, 우리들 모두에게 가능하다.
우리가 할 일은 온유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겸손해져서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철저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든 문제의 원인인 자아와 절교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희생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주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소유하실 수 있다.
7 장 의와 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배부를 것임이요” 참된 평화의 길은 오직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살피는 대신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며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 복 역시 앞의 복들을 논리적으로 뒤따르고 있다. 이 복은 다른 복들의 논리적 결론이며 우리 모두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다른 복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살피고 검토하게 하지만, 여기서는 그 해결책을 찾기 시작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무서운 자아의 문제, 즉 자기관심, 자기이익, 우리를 비참한 데로 인도하는 자기의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은 자아에 의지하여 자아를 신격화시키며 궁극적으로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실재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방향전환을 하여 해결책, 곧, 자아로부터 구원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불행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질서와 삶의 원칙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는 복음의 뚜렷한 선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우리는 복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과 복만을 욕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항상 놓쳐 버리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행복은 직접 구해야 할 것은 못된다. 행복이란 항상 다른 것을 구하는데서 결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를 구하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하다. 행복을 의 대신 취할 때는 행복은 얻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치료법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지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과 복을 찾으면서 한평생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참으로 행복하고 복되려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신다.
-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막연하게 존경할만한 태도라든가 보편적인 도덕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의는 칭의 일뿐 아니라 성화도 포함한다. 궁극적으로 온갖 형태의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자 하는 욕구요, 죄를 제거하려는 욕구이다. 심령의 가난이 무엇이며 내부의 죄로 인한 애통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하는 단계로 나간다. 지금까지 이 복들의 관점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인은 그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이 죄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음을 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의는 그 이상이다. 의는 죄를 지으려하는 욕망에서 해방되려는 갈망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성품의 본질을 오염시킨 실재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은 자아와 온갖 형태의 자아의 무서운 표현에서 해방되고자 갈망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적극적으로 성결해지기를 소원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매일의 생활에서 팔복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의는 인생의 최고 욕망이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빛 가운데서 동행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최고의 갈망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 견해는 바울이 ‘분토’로 여긴 것이다.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는 모든 형태의 자기 신뢰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절실한 궁핍의식을 의미하며 고통스러울 정도의 심각한 궁핍의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나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주림은 그것이 만족하기까지 계속되는 깊고 심오한 것이다. 영적 주림과 목마름은 실제의 육체적 주림과 목마름과 같다. 그것은 고통과 고뇌를 일으키고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어떤 상태를 소원하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쉼이 없고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그는 꾸준히 애를 쓰며 그것에 대해 꿈을 꾸게 되며 그의 꿈은 삶을 지배하는 정열로 화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 이것이다. 탕자가 주려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원하는 상태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절망상태가 되며, 주려 죽으며,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며, 궁극적인 도움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은 행복하고도 행복하며, 복이 있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이 흘러 들어오는 지점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의로 채워지지 못할 것이며 복을 찾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는 데 있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내가 버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 약속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사모한다면 여러분은 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 일은 즉각 일어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와 죄책의 장벽은 제거된다. 기독교인은 항상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서 죄의 세력과 죄의 오염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세력과 오염에서 구원 받기 위해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것을 얻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염을 제거하는 작업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내주하시는 성령과 함께 동행하심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내내 계속될 것이다.
마침내 이 약속은 영원 세계에서 완전히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 존전에 허물없이, 티 없이, 점과 주름 없이 서게 될 날이 오고 있다. 그때에는 완전한 몸으로 된 새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몸과 혼과 영이 절대 온전하여 온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게 될 완벽한 의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을 안다. 하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되어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요 또 이미 온전해졌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뿐이다”(빌3:12)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계속 주리고 목마르고 있음을 안다. 채워지고 그리고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욱 주리고 목마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복이다. 우리는 다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 우리 최고의 갈망은 여전히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이다’이다.
여러분은 채워졌는가?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다. 은혜롭고 영광스런 약속이다.
8 장 영적 의욕(desire)의 시금석
앞장에서는 6절을 대략적인 의미로 다루었으나 좀 더 실제적인 방법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 복이 팔복의 열쇠 중의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복의 하나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이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기독교의 구원의 본질이 제시되어 있고, 본문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가르치는 구원론의 완벽한 진술이다.
- 이 복이 특이한 가치를 가지는 까닭은, 이것은 교리를 시험하는 시금석인 동시에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시험하는 실제적인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① 교리의 시금석으로 구원론에 대한 두 개의 가장 흔한 반대론으로 첫째,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반대하여 말하기를 “하지만 이 말은 구원을 너무 쉽게 얻는 것이 되게 한다”라고 말한다. 둘째, 그들에게 본문의 의의 성격을 말하면 그들은 반대하기를 구원을 너무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반대론이 같은 사람들 속에서 발견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 의는 어느 정도의 예절 바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는 궁극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표준이다. 절대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의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 순간, 이 의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며, 이것을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아야 할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해 주며 구원을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그들은 의로운 것이다.
② 실제생활의 시금석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계시해 주는 진술들의 하나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배부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채움을 받은 사실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채움 받기를 소망하고 있다. 우리는 채움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채움을 누리고 있다.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문제도 역시 해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그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어 주셨음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고 역사하셔서 그리스도를 점점 닮게 하시는 강한 능력을 안다. 그러므로 점이나 주름이나 허물 같은 것이 없는 저 궁극적인 완성의 최종상태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채움의 의미이다.
우리는 채워졌는가? 그리스도인의 삶과 체험을 즐기고 있는가? 주 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시금석들이다. 우리가 참으로 이런 것들을 즐기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실의 단 한 가지 원인은 우리가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채워질 것이다.
-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그 해답을 찾는 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채워진 위대하고 영광스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라.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를 장식해온 위대한 성도들의 전기를 읽어라. 그들은 이 충만함을 누린 사람들이며 그들의 거룩한 생애는 이 채워짐을 보여주는 삶이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는가를 아는 시금석
첫째, 자기 의는 아무것도 아니며 누더기이다. 바울은 이것들을 모두 ‘똥’으로 썩고 있는 쓰레기로 여겼 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또는 우리가 지금까지 행한 어떤 것으로 만족감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을 변호하기 일쑤라면 이것은 여전히 자신의 의에 매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리고 목마르는 것은 죤 다아비의 표현대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굶어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것임을 안다. 이것이 첫 단계이다.
둘째, 동시에 우리 자신의 구원의 필요와 구주가 필요함을 깊이 인식함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성도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의욕을 우리들 속에 가져야 하겠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들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는가? 경고하건데 우리는 그들과 같이 되려는 의욕은 없이 그들이 누린 축복만을 즐기려 할지 모른다. 발람처럼 의인처럼 죽고 싶으나 의인과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인처럼 죽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의인처럼 살고 싶어해야 한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그것이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이다.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의와 반대되는 모든 일을 피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수는 없으나 시궁창 같은 삶을 중단할 수는 있다. 이것은 주리고 목마르는 것의 일부가 된다.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나쁘고 해로운 것들을 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의욕을 마비시키거나 무디게 하는 것들을 피할 것이다. 이 의욕의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간식을 먹으면 식욕을 무디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 자체만으로는 정죄할 수 없는 것들로 너무 시간을 많이 보낸다면 영적인 일들을 점점 적게 원하게 된다.
셋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우리가 이 의를 열심히 상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생각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들 앞에 있도록 우리의 생활을 훈련하며 이 의를 날마다 바라볼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시간을 내게 될 것이며, 이 의를 바라보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소경 바디메오는 자기 스스로 고칠 수 없었지만 그는 가서 시력을 얻을 기회를 가졌다. 성경을 연구하고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내라. 성경 말씀을 깨달으려고 애쓰라.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으라. 그런 다음 이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께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는다면 그들은 그날의 가장 좋은 시간을 4-5시간을 하나님께 바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어디서나 의만을 찾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사람은 거의 미친 사람같이 된다. 그들은 바디메오나 귀찮게 조르는 과부와 같다. 그들은 주의 사자와 씨름을 한 야곱과 같다. 여러분이 이 의를 참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혼신의 힘으로 이 의를 찾을 때뿐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 이것이 생애 최대의 의욕이 되고 있는가? 가장 큰 소원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를 못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절망과 참화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있다. 우리를 하늘에 가서 그와 함께 그의 거룩한 존전에서 영원을 보내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의뿐이다. 이 의는 이생과 내생에서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삶은 얼마나 고귀한 삶이며, 훌륭한 성품인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9 장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기질은 앞에서 살펴 본 모든 것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이 복은 바로 앞서 나온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와 매우 선명하고 잘 정의된 논리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얼마나 탐사성 있는 진술인가? 여기서 우리 각자의 위치와 신앙고백에 대하여 놀라운 시금석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팔복을 전체로서 취급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일반적인 시금석이 됨을 인식해야 한다.
먼저,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한 원초적이며 중심되는 진리들을 상기시켜 준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보다 우리의 자세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복음의 중요한 강조점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가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무언가를 행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존재(being)는 행위(doing)보다 중요하며 자세가 행위보다 더 의의가 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려 애쓰도록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성품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의 행동은 그 결과가 된다.
나의 기독교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내가 진리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은 내가 내 속의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지배하시는 것이지 내가 주님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영이 나의 삶의 중심에서 나를 통제하고 있으며 나의 존재의 근원에서 나의 모든 활동의 원천에서 나를 조종한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삶의 표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일종의 도금이나 합판 장식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인격 바로 중심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그의 모든 생각과 모든 전망과 모든 상상을 통제하며 그 결과로써 그의 모든 행동까지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은 이 새로운 창조의 결과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새 성품의 결과이다. 우리 생활 전체는 실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표현이며 선언이다.
- 우리는 긍휼히 여기고 있는가?
주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살펴본 그런 인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이것은 ‘안이하고 적당주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을 지배하는 관념은 절대 자유사상을 가져야 하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범죄와 법률 위반에 대하여 미소짓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인은 말하기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안이하고 맥없는 사람이요, 적당히 사귀기 쉬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생래적 기질이 아니다. 생래적 기질은 팔복의 어느 하나를 해석하는 데도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안이하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더 큰 이유는 특별히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형용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긍휼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시며 긍휼하시다. 긍휼과 진리는 서로 조화된다. 만일 진리와 율법을 희생시켜야만 긍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니며 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 긍휼은 무엇인가?
긍휼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은혜가 죄를 전체로서(총괄적으로) 내려다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긍휼은 측은감과 행동이 합쳐진 것이다. 긍휼의 영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에게 죄지은 사람을 여러분의 권세하에 두고 있는 위치에 있음을 발견할 때에 나타나는 그러한 영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긍휼한가를 아는 길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에 희생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그 사람에게 양식과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긍휼이다. 측은감만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사태를 제거하려는 하나의 노력을 의미한다.
완벽하고 으뜸가는 긍휼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일이며, 아들의 오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련한 상태를 보셨고 고통을 보셨으며, 그래서 우리 상태를 해결하신 것이다. 공의와 긍휼 사이, 긍휼과 진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둘은 서로 조화된다. 일반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를 내려다보시게 되면 일반적인 것에서 떠나 특별한 긍휼이 된다.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이 본문처럼 자주 오해를 받아온 팔복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해야만 하나님도 내게 긍휼이 될 것이다. 내가 용서해야만 나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내가 용서 받는 조건은 내가 용서하는 데 달려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주기도문)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들은 이 비유들을 들어 말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구를 모순되게 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어구가 이처럼 법적으로 엄격히 풀이된다면 누구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고 아무도 천국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용서는 불가능 하게 된다. 둘째, 그러면 우리는 신약성경으로부터 은혜론을 전부 말소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다음 원칙을 본문에 적용하면, 본문의 해석은 단순해진다. 주님은 내가 참으로 회개할 때에 한해서 참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나는 처벌 이외에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내가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을 전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돌려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내 위치를 인식하고 내가 이런 식으로만 용서를 받게 됨을 알게 되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반드시 용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심령이 가난하다. 내게 의가 없음을 안다. 나는 철저하게 무능함을 안다. 그뿐만 아니다. 나는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한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이 외침이 무엇인지를 알며, 내 속에 있는 이 타락성을 제거하고자 의욕한다. 내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이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았다. 나는 채움을 받았다. 나는 이 의를 모두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때는 나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에 대하여 긍휼할 수 있고 또 긍휼해야 한다”
죄를 결코 지으신 일이 없고,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시고, 오셔서 진리를 설교했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하려 오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보며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아니라 사탄이었고, 그들은 사탄의 희생물이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순교자 스데반을 바라보라.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긍휼히 여겼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
죄의 노예된 무능한 모든 사람에 대하여 비애를 느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악용하고 헐뜯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 대하여 큰 비애감을 느껴야 한다. 그들은 무슨 일로 그렇게 성내는가를 보라. 그들은 영이 온통 잘못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이 여기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여러분이 긍휼하다면 이렇게 긍휼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미 긍휼을 갖고 있더라도 죄를 다시 지을 때마다 다시 긍휼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도에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이 복이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
용서의 한 가지 조건은 회개이다. 회개는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께 조금도 권리를 주장할 것이 없으며,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반드시 긍휼해야 한다는 귀결이 오는 것이다. 여러분 속에 용서의 영이 없다면 여러분은 용서를 받았을 리가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엄숙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함과 함께 마음속에 임할 때 우리는 긍휼하게 된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를 할 것이다. 이미 긍휼을 얻었기 때문에 긍휼하다.
또한 우리는 최후의 날에 긍휼이 필요할 것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직고할 때 이 긍휼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속에 있다면, 우리가 긍휼하다면, 그 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긍휼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거나, 그리스도 밖에 있어 아직 죄 속에 있거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긍휼한가? 죄인들이 여러분에게 죄를 지어도 그 모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가? 여러분은 세상과 혈육과 마귀의 희생물이요 속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가? 이것이 시금석이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이 말씀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경외감과 자신의 부적격함을 가져야만 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다. 팔복에는 일정한 사상의 연결이 있으므로 여러분은 본문이 맨 처음에 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사람의 온갖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목적이 되어왔다.
어째서 이 본문이 여기에 오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6절이 설명을 제공한다. 6절은 가운데 있어 처음 세 복은 6절에 인도하고 나머지 복들은 6절을 분수선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처음 세 복은 우리의 깊은 필요 의식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필요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목마르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가 배부르게 채워질 것이라는 놀라운 대답을 가지고 오신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만족의 결과 채워진 결과, 곧 가득 채워진 결과를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 그 후에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된다.
이 보다 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6절의 중심이 되어 뒤에 오는 세 복은 처음 세 복과 부합한다. 긍휼한 사람은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긍휼하게 되는 데 가장 중한 필수 단계가 된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과도 부합이 된다. 그들은 그들의 심령 상태에 대하여 애통하며, 그들의 죄성 때문에 애통한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은 그들의 불결한 마음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며, 그것이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되는 단 한 가지 방법이다. 이와 같이 화평케 하는 사람은 곧 온유한 사람들임을 발견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두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 이것을 강조하신 까닭은 틀림없이 바리새인들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주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교리의 이해와 지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임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동시에 교리가 절대 중요하며 지적 이해가 절대 중요하며 이해가 사활로 중요하다는 점을 즉시 덧붙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하여 동의에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이 단순히 지적 관심만을 가지게 되었을 때 교회가 저주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님은 본질적으로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신다. 머리의 문제이지만 머리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주께서 외형과 행위보다 마음을 더 강조하신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기독교는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 ‘마음’이란 무슨 뜻인가? 마음은 단순히 감동과 감정의 자리만은 아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이며, 다른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샘이다. 마음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한다. 마음은 전인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표면 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도, 마음의 온갖 활동의 근원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마음은 이처럼 깊고, 가장 중요하다. 복음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본문은 마음이 항상 모든 문제거리의 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지난 수백년간의 비극적인 오류는 사람의 모든 문제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환경만 변화시키면 된다고 한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인류가 타락한 것이 낙원에서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인간이 맨 처음 잘못된 것도 완전한 환경 속에서였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다. 사람의 문제거리는 사람의 인격 중심에 있다. 교육만으로 선한 사람을 만들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마음에 있다. 마음은 절망할 정도로 악하고 부패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할 때에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사람됨은 이것과 완전히 정반대이다. 복음이 제의하는 것은 우리를 이 무서운 함정에서 하늘나라로 들어 올리려는 것이다. 복음의 제의는 초자연적이다. ‘마음이 깨끗함’은 ‘위선이 없다’는 뜻이고 ‘선한 것’이란 뜻이다. 이 말은 구김살이 없다, 아무것도 숨겨진 것이 없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신실이란 말로 서술할 수 있다. 이것은 일편단심, 전심이란 뜻이다. 순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는 시편의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게 하소서”이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분할된 마음이다. ‘깨끗함’의 의미는 이것뿐이 아니다. 이 용어는 동시에 ‘정화된’, ’흠이 없는‘이란 뜻도 있다.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4-15). 부정하거나 불결하거나 더러운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것의 완전한 표현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으신 완전하고 흠 없고 순결하고 온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깨끗한 것은 가장 크고 으뜸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 삶의 최고 갈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알고자 열망하며 그를 사랑하고 섬기고자 소원하는 것이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를 뵙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의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끔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결, 깨끗한 마음, 혼합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빛과 어두움은 혼합될 수 없으며, 검은 것과 흰 것은 혼합될 수 없다.
- 하나님을 본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이며 가시적인가? 아니면 순전히 영적인 것인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이 영광스런 약속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복에서와 같이 이 약속도 땅위에서 지금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떤 의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일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본다. 그의 가까우심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그의 임재를 누린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불완전해도 지금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고 있다.
그 분을 볼 수 있는 또 한 방법은 우리의 체험, 곧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로운 교제 관계에서이다. 우리는 지금은 거울 속의 영상같이 희미하게 본다.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삶을 혁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만왕의 왕의 존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의 영광스럽고 영원한 임재 가운데서 영원히 거하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 복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을 묵상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여러분의 최대 관심사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데에 있을 것이다.
- 마음은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인가?
수 세기를 통하여 주목을 끌어온 견해가 있다. 첫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승려나 수도원제도 같은 견해로 이 세상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비성경적이다. 성경의 방법은 우리의 타고난 마음이 검다는 것을 알고 다윗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할 것이다. 정결한 마음을 가지는 오직 한 길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깨끗케 하시는 일이다. 이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흠 없이 점과 주름 없이, 오점 하나 없이 될 날이 오고 있음을 안다.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하여 수동적인 태도로 가만히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야고보가 말한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오 그리하면 그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실 것’을 믿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 분이 이 일을 최종적으로 하셔야 함을 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영으로 육체적인 행위를 죽이면 살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여러분의 최고의 목표요, 갈망이요, 소망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리고 복음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이런 희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시간은 짧다. 우리가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는 왕의 알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때에 여러분에게 아무 가치도 없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게 될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이 순간 부끄럽지 않는가? 시간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뵈려고 하며, 그의 영원한 영광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누리려고 한다. 우리의 한 가지 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며 이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깨끗케 하자.
11 장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이렇게 한 단계 더 나아가 고찰할 때 성경 전체에서 팔복만큼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우리의 교만을 꺾는 말씀은 없다 하겠다.
이 진술에서 하나님께 채움(배부름)을 받은 결과와 그 작용을 본다. 이 복이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씀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심령과 긍휼이 여기는 것, 애통하는 것과 마음이 청결한 것이 서로 관계가 있고 온유와 화평케 하는 것에도 서로 일치점이 있다. 이것들 사이에 연결점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충족을 하나님께 바라며 기다린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모든 점에서 전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주님은 전혀 새롭고 다른 나라를 세우고 계셨다. 자연인이 팔복을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태롭고 치명적인 것은 없다. 새 사람만이 이런 새 삶을 살 수 있다. 이 진술이 유대인들에게 매우 큰 쇼크로 임하였으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오고 있는 메시야의 나라가 국가주의적, 물질주의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례 요한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요한마저도 이런 생각에 집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너희 견해는 전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이 복을 제시하시면서 이 원칙을 한 번 더 강조하셨다.
이 말씀보다 오늘 이 세대에 더 적절한 말씀은 없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이 세상과 이 세상 삶에 대한 말씀 중 본문보다 더 분명한 선언의 말씀은 없다. 이것은 고도의 신학적 진술이다. 어떤 사람들이 습관처럼 자기는 신학에 조금도 흥미가 없으며 사도 바울을 철저히 싫어하며 신약의 서신들에는 관심이 없지만 산상설교에는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산상설교의 아름다운 윤리적 교훈, 신기한 도덕의 개선책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성경에서 산상설교를 좋아한 까닭은 산상설교가 비신학적이며, 교리나 기타 쓸데없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복되는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절대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복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신학과 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상에는 어째서 전쟁이 있는가?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의 정욕과 탐욕과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이다. 신약 성경의 인론과 죄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현대 세계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 유엔은 어째서 실패하는 것 같은가? 그것은 정치적인 것도 경제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아니다. 그 대답은 본질적으로,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이요, 교리적인 것이다. 20세기의 비극적인 어리석음은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데 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발견되는 과오다.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문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며, 새 마음, 새 사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바깥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이 산상설교처럼 인도주의와 이상주의를 철저하게 정죄하는 것이 성경에도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인도주의자들은 산상설교를 이해하지 못하고 산상설교에서 교리를 빼 버림으로써 산상설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켰다. 산상설교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이러한 신약성경의 올바른 관점에서 현대 세계를 바라볼 때뿐이다. 여러분은 전쟁과 전쟁의 소문 때문에 놀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놀라서는 안 된다. 유화책으로 전쟁을 지연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전쟁의 회피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 화평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먼저 수동적 의미에서 그가 평화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능동적 의미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평화를 능동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잠자는 개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평화를 소원하며 평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 그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한다는 사실에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본질적으로 화평케 하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능동적으로, 부정적으로 긍정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두통거리를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새 성품, 새 마음, 깨끗한 마음을 의미한다. 논리적 순서로 화평케 하는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뿐이다. 화평케 할 수 있기에 앞서 마음이 청결해져야 한다.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앞서 자아와 자기 이익과 자기 관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자아를 전적으로 잊어 버려야 한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 중립이 되어야 하며, 이렇게 되어야 쌍방을 화합 시킬 수 있다. 즉 화평케 하는 자는 반드시 자기에게 가져오는 결과에 비추어 만사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만사를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본다. 항상 싸움과 오해와 분쟁으로 유도하는 것은 바로 이 정신이며 이것은 화평자의 자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첫째, 그가 자아에 대해 전혀 새 견해를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자신의 심령의 가난함을 보았고, 자신의 검은 마음 때문에 애통하였고, 자신을 보고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면 여러분의 권리나 특권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참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 하나는 바로 ‘나는 나의 생래적 자아를 미워하는가’라는 것이다.
자신의 심령이 가난함을 보았고, 자신의 검은 마음 때문에 애통하였고, 자신을 보고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면 권리나 특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 하나는 바로 ‘나는 나의 생래적 자아를 미워하는가?’ 라는 것이다.
둘째, 새 생활관을 가진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새 견해를 가짐을 의미한다. 그들을 보며 저 가련한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희생물이며 지옥을 향하고 있다. 그들을 이렇게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셋째, 새 세계관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자기를 낮출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고난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첫째,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혀와 입술을 억제해야 한다. 화평자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래적인 성품에 따라 말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국제 사회에는 너무 토론이 많이 계속되고 있다. 평화를 이루는 첫걸음 하나는 말하지 말아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 데 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약1:19)
둘째, 어떤 상황에든지 그것을 항상 복음에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분쟁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직면할 때에는 말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그 상황을 받아들여 복음의 문맥에 비추어 ‘이것에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하고 물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화평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면 그에게 먹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그를 불쌍히 여겨 기도해야 한다.
셋째, 그를 구해 줄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되어 자신을 낮추고, 사과하고, 친절하려 애쓰고,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선수를 써야 한다.
넷째, 어디에 있든 그곳에서 화평을 보급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심 없이,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권위를 세우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소유된다’는 뜻으로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소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로 소유하시려 한다. 이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이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히 13:20).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가장 영광스런 정의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젊잔만을 빼시지 않으시고, 오셔서 화평을 이루셨다.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권리와 체면을 세우셨다면 온 인류는 지옥과 절대 파멸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가 오신 것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 그가 어떻게 화평을 이루셨는가?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써 평화를 이루셨다”고 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며, 우리 마음속에 평안을 누리며, 서로 화평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는 둘을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기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4-15)
주님은 신성과 영원성의 특권을 주장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모양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자기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위하여 그분이 여러분을 위하여 죽으신 것을 여러분은 안다.
‘여러분은 이 마음을 품으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각각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남의 일도 돌보아 주시오’ 이것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이 복되고 영광스런 진리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를 평화의 왕을 닮은 자와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드신다.
12 장 기독교인과 박해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10절로서 그리스도인의 특징 묘사는 대체로 끝낸 것이다. 이 복은 제자들에게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복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적극적인 성격 묘사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다른 복에 비해 간접적이지만, 주님은 ‘이것이 너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복이 화평케 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에 뒤이어 나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과 특징에 대하여 얼마나 큰 이해와 통찰을 주는 것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이 화평케 하는 자라면 박해는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 이 복에 대한 약속이 첫째 복에서 하신 약속과 같다. 주님께서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내신 까닭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천명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받고 있고 충만히 받게 될 이 모든 복들보다 더 큰 복은 천국 시민이 되며 영의 나라에 소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복도 그리스도인의 특징의 하나임을 상기하자. 팔복은 모두 탐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어느 복보다 탐사성이 큰 면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이 복보다 더 조심해야 할 진술은 없으며, 이 복처럼 잘못 해석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 없다. 본문은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매우 중요하며 본질적인 것이며 불가결한 부분이다.
- “의를 위하여”
본문은 단순히 ‘박해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첫째, 본문은 반대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때문에,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그 무엇으로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조건은 ‘의를 위하여’이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고 잘못된 관념이나 자기 의로 고난을 자초할 수 있고 전혀 불필요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편견과 원칙의 차이를 올바로 분별하는 일에 더디며, 어떤 특별한 성격과 기질 때문에 불괘감을 주는 것과 의롭기 때문에 불괘감을 주는 것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둘째, 본문은 ‘광신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는다. 지나친 열심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4:15)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를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와 같은 범주 속에 취급한 것을 주목하라.
셋째, 본문이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란 뜻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과 어떤 대의명분을 위하여 핍박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이 종교적이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그런 박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와 정치를 혼합한다면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놀라선 안 된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가장 큰 위험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예리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들은 결국 정치관과 여러 가지 견해를 견지하고 있지만 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 복과 약속은 의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만을 말씀하고 있다. 원컨대 하나님께서 정치적 편견과 영적 원칙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와 지혜와 이해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또 한 가지 큰 위험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순수 기독교 신앙을 어떤 정치적이며 사회적 견해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절대 별개의 것으로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예를 들면 기독교 신앙은 반공산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혼과 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가 반공산주의라는 인상을 주게 되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는 셈이다.
넷째, 본문은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 희생적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선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하고 고상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이것 역시 의심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칭찬하고 찬양하는 법이다. 의인들만이 박해를 당한다. 그것들이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실천했는가, 아니면 그것이 기독교와 다른 어떤 것인가, 즉 하나의 일반적인 고상성뿐이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
- 그러면 이 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롭다거나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를 닮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뜻이다. 그 분을 닮은 사람들은 박해를 항상 받는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18-2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이것은 절대적인 진술이다. 이 복이 팔복 중에서도 가장 탐사성이 큰 복이다.
여러분은 박해를 받고 있는가? 이것은 성경에 일관되어 있다. 아벨, 모세, 다윗, 선지자들, 사도들, 그들이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단순히 의로웠다는 이유 때문이다. 최고의 모범은 물론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실만 했다. 누구도 그처럼 부드럽고 친절한 분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보라. 그리고 교회사의 긴 역사를 읽어보라. 순교자의 생애, 곧 존 후스나 언약교파 사람들이나 청교도들에 대한 기록을 보라. 18세기 부흥기간의 지도자들, 20세기 허드슨 테일러, 그들처럼 박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의인이 누구의 박해를 받는가?
세상에서만이 아니다. 가장 격심한 박해의 일부는 교회 자체와 종교인들에 의해 의인들에게 가해졌다. 주님을 박해한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었는가?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에게 잔인하게 박해를 받았다. 청교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사를 읽어보라. 신약성경과는 거리가 먼 기독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진실하고 참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좁은 길을 걸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박해하였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일이 많았으며,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형식적인 기독교는 순수 신앙의 가장 큰 원수일 때가 많다.
의인은 어째서 이렇게 박해를 받는가? 의인이나 고상인들보다 박해를 받는가?
의인들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주님이 박해받은 것은 그가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무언가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고,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 버리게 한다. 그들은 자기네 의가 매우 값싸고 야하게 보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이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사람됨 때문에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을 바리새인과 기타 사람들이 미워한 까닭은 그 분의 철저하고 절대적인 성결과 의와 진리 때문이다.
결론)
첫째, 본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이 불신자들에게 찬양과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 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 분을 미워했고, 그 분 대신 살인자를 선택하고 그를 죽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세상에 준 결과가 이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세속인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 분을 보았더라면, 그분의 동시대인들처럼 그 분을 미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그리스도관이 자연인이 쉽게 찬양하거나 갈채할 수 없는 올바른 그리스도관인가 검토해 봐야 한다.
둘째, 이 복은 우리의 기독관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멋지고 인기 있고 아무 사람도 성나게 하지 않고 따라서 지내기가 매우 쉬운 그런 그리스도인을 항상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지만, 주를 닮은 사람은 결코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중생이 절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전적으로 변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처럼 될 수 없다. 우리는 옛 성품을 제거해야 하며 의를 사랑하고 주를 사랑할 새 성품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려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칭찬할 것이요, 그리스도를 닮으려 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혐오할 것이다.
-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빛은 항상 어두움을 노출시킨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항상 빛을 혐오한다. 우리는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해서 박해를 자초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그대로 닮음으로써 핍박은 불가피하게 온다. 이것은 영광스런 일이다. 우리 주님은 ‘너희가 이와 같으면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며,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최종적 증거를 얻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특권도 받았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큰 지혜와 분별력을 주셔서 이것을 터득할 수 있는 지식과 이해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고난 받아야 할 때 그 고난이 의를 위한 것이며, 이 영광스러운 복의 위로와 위안을 충만히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13 장 환란 중에 기뻐하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 11절과 12절은 10절의 진술의 확대 부분이다. 주님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는 세 가지 원칙이 나타나 있다.
첫째 원칙은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성격은 우리 주의 성격을 닮는 것이기에 항상 박해를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들은 이것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 원칙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위해 하려는 관심의 통제와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전 목적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빚지고 있음을 알고 ‘몸과 혼과 영’,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고자 소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제하는 동기가 된다. 이것은 우리를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하고 기독교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셋째, 원칙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앞으로 임할 하늘나라에 대한 생각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의 기초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의 하나이다.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믿음의 영웅들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그 비결은 ‘우리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장차 올 도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데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지으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성을 찾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비그리스도인은 죽음이나 영원에 대해서처럼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들을 매우 많이 생각하고 유의하며, 이것은 그의 삶과 전망에 있어 큰 통제원칙과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과의 명백한 차이점이다.
- 첫 번째 질문, 이 세 가지 원칙이 그리스도인이 박해에 직면할 때 어떻게 예증되는가? 박해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오는 축복은 그의 조건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약속되었으며 모든 약속에는 항상 조건이 붙어 있다. 고난을 당하는 방법은 끝없이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데 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보복해서는 안 된다.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 본래 자연인은 자기 보존 본능과 보복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성격상 다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은 보복해서도 안 되지만 분개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 이렇게 되기는 매우 힘든다. 먼저 할 일은 행동에 의한 대꾸를 억제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억압 상태에서 사는 삶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 정도를 넘어서 박해를 원망하지 않는 상태에까지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으로 상처를 입고, 분개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것을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매우 신경이 예민한 사람임을 그의 서신이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실로 이런 일들로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 도달했다. 모든 비판을 하나님께 일임한 것을 빌립보서 1장을 통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박해로 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 일 때문에 낙심하고 불행감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여러분의 영혼이 억압감이나 압박감에 덮일지 모른다. 자신에 대하여 ‘어째서 나는 이래야 하는가?’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위치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자연인에게는 이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 주님은 이런 일들에서 우리가 주님을 닮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 두 번째 질문, 그리스도인은 어째서 이렇게 즐거워야 하며 이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한다. 그리스도인이 단순히 박해를 직면했다는 이유만으로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 자체는 항상 슬퍼해 마지않을 일이다. 박해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것이 즐겁고 기쁘다는 바리새인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박해하는 사람들의 죄의 결과를 보고 가슴 아파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박해에 직면할 때 박해 자체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첫 번째 원인은, 그리스도인이 주를 위해 받고 있는 박해는 그가 누구이며 어떤 신분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이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영광 중에 기뻐하는 선지자들과 같음을 안다. 기뻐할 것은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만사를 승리로 변화시키는 한 방법이다. 마귀는 주님의 중개작용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며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을 올바로 본다면 여러분은 즐거워해야 할 원인을 발견할 것이며 사탄을 향하여 “고맙다. 너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서신에서 이것이 여러분의 부르심과 자녀됨의 증거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실히 알게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면 우리 삶이 주의 삶 같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이 받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당한 특권도 받았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런 박해를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의 두 번째 증거가 된다. 그는 이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두 번째 원인은, 박해가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처소가 어딘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성경에서 일괄되어 흐르고 있는 위대한 원칙중 하나는 우리의 최종적 결말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너희가 천국에 가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의 각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붙은 천국행 꼬리표요, 여러분의 궁극적 결말이 결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앙고백에 대한 또 하나의 큰 시금석이 된다.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야 할 원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보상 때문임을 믿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나의 전망은 이 세 가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즉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로 갈 것이며, 내가 거기에 이를 때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고후4:17-18) 그리스도인은 항상 이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보상 개념이 그리스도인이 누릴 올바른 보상관인가? 라고 묻는다. 그들은 천국이나 지옥에는 관심이 없으며 기독교의 이 놀라운 삶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보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우리가 육신으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그대로 보응을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후5:10-11) 또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으며 은혜로 구원받는데 어째서 보상을 말하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보상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며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다. 보상을 공로로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상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보상에는 차이가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매를 많이 맞을 종들과 덜 맞을 종들의 기록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 그리스도인은 항상 종말을 생각해야 할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것들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본다. 모세는 어째서 바로의 딸의 아들로 머무르지 않았는가? 그는 일시적인 죄의 향락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으며, 죽음과 영원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며 사라져 없어질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 저편의 일들은 얼마나 적게 바라보고 있는가?
성경은 보상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놀라웁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로 그 영광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천국을 오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분을 그 모습 그대로 볼 것이며, 그의 영광스런 존전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도 변화되고 영화되어 아픔이나 질병이 없어질 것이다. 슬픔이나 탄식이 없을 것이며,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이다. 만물이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 순수한 기쁨, 영광, 순결, 경이! 이런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는 얼마나 이 불행하고 비참한 세계에 집착하여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며 묵상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저 놀라운 영광과 순결과 행복과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이 모든 박해는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박해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은 천국을 얼마나 자주 생각하며, 천국을 생각하며 얼마나 기뻐하는가? 만약 두려움으로 천국을 피하려 한다면 우리는 너무 낮은 차원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 생각으로 기뻐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울과 같이 “내게 있어서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것을 더 소망해야 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4 장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 산상설교의 새로운 대목으로 3-12절까지에서 그리스도인이 성격을 묘사하고, 13절에서는 그 적용이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리스도인이 그 사람됨을 어떻게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고립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나 세상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하며, 긍휼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에 따라 이 세상에서 기능과 목적을 생각하는 것으로 옮겨간다. 우리는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는 세상을 한 마디로 암시하는 말씀이다. 나는 성경의 진리를 이 시대처럼 증명해 보인 시대가 과거에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는 매우 비극적인 시대가 되었다. 19세기 말엽의 시대의 사상가들의 사상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에서도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 중심되는 관념은 인류의 삶이 진화하여 발전하며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20세기는 놀라운 한 세기가 될 것이었다. 대중은 교육을 통하여 음주와 음란과 갖은 악을 중단할 것이며, 대다수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실히 믿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이런 관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주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은 세상의 부패성을 암시함이 분명하다. 세상은 타락하고 사악하고 부정하다. 세상은 썩고 오염되기 쉬운 고기와 같다. 성경의 견해만이 인간성을 참되고 올바르게 해석하는 견해이다. 세상은 방부제나 예방제에 의해서만 건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이 건전하다고 하는 말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므로 이 악하고 오염적인 요소는 즉시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창세기 6장을 보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란 말씀을 보게 된다. 불결과 오염이 너무 심하여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셔야 했다. 하지만 이 악한 원칙은 여전히 그 정체를 나타내었으며, 거의 상상하기 힘든 죄악으로 더럽혀진 소돔, 고모라에 이르게 된다. 성경이 변함없이 보여 주는 것이 이와 같다. 이렇게 끈덕진 부패 성향은 언제나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세상은 부정하고 사악하고 악랄하다. 세상에 대한 어떤 낙관론도 철저하게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의해서도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상과 그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소금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너희가’ ‘너희, 너희만이 소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이것은 절대 분명하다. 소금은 접하고 있는 매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 매체와 다름으로써 소금의 모든 자질이 발휘하게 된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아무데도 쓸데없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달라야할 뿐 아니라 이렇게 다른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과 명백히 다르셨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분리되고 특이하고 눈에 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속에는 다른 사람과 구분하여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 소금의 기능은 무엇인가?
소금의 기능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다.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금의 주요 기능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기능일 뿐 아니라, 먼저 이 기능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방부제 역할을 기본 전제로 소금의 이차적인 기능은 맛을 내는 것이다. 음식이 맛없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 진술에 따르면 기독교 없이는 삶이 무미건조하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지겨워 여러 가지 쾌락을 향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삶의 맛, 곧 신앙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쾌락과 재미가 필요 없다. 우리 생활에서 기독교를 떼어버려 보라. 우리 삶이 얼마나 무미해지겠는가? 특히 늙거나 임종 시에 더욱 그러하다.
- 그렇다면 먼저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소금으로 작용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를 구별해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반적인 상황(정치적, 경제적, 기타 유사한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선언을 수단으로 해서 소금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탄핵하고 전쟁과 국제 정세와 기타 문제들을 논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형편에 이와 같은 논평을 가함으로써 일반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소금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성경을 심각하게 오해한 견해이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에서도 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구약시대 교회는 곧 이스라엘 국가였고 교회와 국가 사이에 구별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국가 전체와 국가 전체의 생활을 말해야 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어느 국가나 민족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 결과 사도들은 로마제국 정부를 비평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의미에서 소금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접촉하는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이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양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견해 역시 오류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하는 일과는 매우 다른 일이다. 교회의 기본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는 일이다. 만일 교회가 사회의 어떤 특정 부면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교회는 그 부면에 대해서 전도의 문을 닫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 공산주의자들도 복음화하는 것이 복음 전도자로서 할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순간 교회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전도의 임무를 방해하고 해치는 것이 된다. 개개인은 한 시민으로서 자기의 역할을 원하는 대로 해야 하며 이것은 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 할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이 구원의 메시지를 만인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교회는 죄와 그 죄의 정체가 드러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원칙이 교회에서 큰 각성과 개혁이 있을 때마다 전체 사회가 그 결과를 거두었다. 위대한 모든 부흥운동의 기록을 보면, 교인들이 부흥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하여 교회로 들어 왔다. 그 지역의 사람들의 전체가 영향을 받아 죄와 악과 비행이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이 일은 질타하는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스도인의 개개인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거의 자동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나 청교도 개혁을 보라. 전체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청교들이 통과시킨 법률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그들의 일반적인 양태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직접 참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개인들이 전보다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정세가 영향을 받았고, 19세기에 통과된 큰 법률들은 많은 개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 현재의 사회상과 세계상은 이 원칙에 대한 완전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지난 50여년 동안 교회가 그 이전 수백년 전부를 합친 것보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문제에 대하여 더 직접 주의를 기울였다. 교회 총회와 각 교파 총회가 정부에 보낸 선언문과 결의안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 결과는 50여년 전보다 훨씬 더 음란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악과 불법과 무법이 판을 치고 있다. 문제는 참 그리스도인이 너무 적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충분히 소금 역할을 못한다는 데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그 영향력을 발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었고,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는 ‘성도’가 되지 못함으로 우리의 동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세포 침투의 원칙이다. 소금의 본질 때문에 소금은 모든 것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이것은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의 큰 소명이 된다. 법률을 통과시킴으로써 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부패와 악취와 비열을 통제할 개개 그리스도인들이 증가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있는 곳에서 이 부패과정을 통제해야 한다. 그래야 온 덩어리 전체가 보존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가 이 단순한 명제에 비추어 자신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은혜를 내리시옵소서. 하나님의 교회가 이 일에 몰두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문제에 낭비하지 않게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들 속에 은사를 불일 듯 일으키시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처럼 함께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15 장 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14절 본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에 관한 가장 놀랍고 비상한 진술의 하나이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전혀 하찮은 이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다. 이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범하고 영광스런 일인가를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하는 진술이다. 우리의 위치와 행동에 대한 매우 철저한 시금석됨은 물론이다. ‘너희는’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을 의미한다.
- ‘너희는’ 부정적인 의미로 “너희는 그리고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세상은 암흑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상은 세상의 계몽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을 한다. 계몽이란 말은 세상이 애용하는 어구의 하나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지식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던 15, 16세기의 르네상스 이후 그러하였다. 모든 사상가들은 이것을 역사상 하나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현대문명이 이 때에 시작되었다고 간주한다. 그때 지식과 학문의 부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헬라의 고전들이 재발견되었고, 과학적인 의미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의 전망과 생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부흥은 가히 ‘계몽’이란 말을 들을만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공격의 시작이었다. 권위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의 선언의 자리를 철학과 인간의 사상으로 대신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이 운동이 빛이란 말로 표현되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계몽’으로 말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지식은 빛을 가져온다고 했다. 새 지식은 온 우주의 작용에 대하여 큰 광명을 던져왔으며 삶의 여러 국면에 전보다 큰 이해를 준 것이 사실이다. 지식과 문화의 결과로 사람들이 흔히 ‘계몽’ 운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괄목할 만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술은 여전히 ‘너희 너희만이 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여전히 이 세상은 큰 암흑 상태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20세기 우리의 지식은 순전히 생물학적이며 기계적 의미의 지식이었다. 우리의 삶을 삶다웁게 만들어 주는 삶의 참된 요인에 대한 지식은 조금도 증가하지 않았다. 오늘의 세계가 이와 같은 곤경에 처해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위대한 새 지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발견하는 일에는 실패하였다.
이것을 개인의 삶과 행동과 품행의 영역에서 생각해 보라. 큰 지식을 소유하고는 있으나 개인의 삶에서는 비극적인 실패자들이 많다. 대인관계에는 비극적인 와해와 붕괴가 있고,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큰 산업경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칠흑처럼 어두운 상태에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 이외에 아무도 도움이 되는 충고나 지식이나 교훈을 줄 수 없다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자랑스런 주장이요 긍지가 되고 있다. 현대 세계 최대의 사상가와 철학자들 마저도 20세기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 원인은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더 많은 지식이라는 그들의 이론 때문이다.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적용하지를 않는다. 그들은 사람의 진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문제거리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신앙이 제공하는 빛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는 빛이 전혀 없다. 우리 주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은 그 당대에 대한 단순하고 놀라운 진리였을 뿐 아니라 그 이후 모든 시대에도 적중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주님은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한 무리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놀랍고 감동적인 진술이다.
- ‘너희는’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 철학은 모르더라도 그리스도인 아닌 위인이나 전문가보다 삶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세상이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1:21) 하나님의 지혜는 매우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능과 관련해서 주께서 첫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둘째 “너희는 그리고 너희만이 세상에 빛이다”였다. 이 말씀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진술임을 항상 기억하자. 본문은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정당하게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우리에 대해 사실이 되는가? 이것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도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인 까닭은 ‘세상의 빛’이신 그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약속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에 행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주시고 동시에 우리도 빛으로 만드신다. 우리는 빛의 전달자가 되었다. 즉 우리는 복음을 받는 사람들로서 빛과 지식과 교훈을 받았다. 빛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빛의 반사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빛은 그리스도이신 빛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신 빛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길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에서 말씀하신 성령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파악하는 길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령이 오시면 이런 결과가 될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함께 너희 속에 거처를 정하겠다. 우리는 너희 속에 있겠고 너희는 우리 속에 있겠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에 대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됨을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의 두 번째 결과이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말씀을 소금에 대한 말씀 직후에 하셨다. 이 진술의 순서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최초로 끼치는 영향은 일반적이고 다소 소극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서의 기능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만 소유하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말하기 앞서 먼저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항상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하는 경향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복음을 말로는 전파하되 그들의 삶과 행동으로 이 복음을 부정하는 것은 비극이다. ‘세상의 소금’은 ‘세상의 빛’ 앞에 온다. 우리는 그 무언가를 행하기에 앞서 그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그가 ‘세상의 빛’이 된 것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가?
빛이 하는 일은 어두움과 어두움에 속한 것들을 노출시키는 일이다. 빛이 비취면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난다. 온 세상은 ‘빛의 자녀들’과 ‘어두움의 자녀들’로 구분되어 있다. 최악의 일들은 항상 어두움의 장막 속에서 일어난다. 자연인마저도 눈부신 빛 속에서는 그런 일들을 부끄러워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다른 삶의 유형을 보여주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표준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사고와 방식의 오류와 과오를 드러낸다. 참된 부흥은 어느 사회, 어느 지역에서나 그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경향이 있다.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길이 결국에는 옳다는 것과 다른 길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세상은 정직이 최선의 수단임을 발견했다. 이것이야 말로 위선이 진리에 바치는 일종의 공물이라 하겠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빛으로 가지는 영향력은 다른 것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밖은 것은 그분은 절대 순결하고 거룩했고, 그분이 ‘세상의 빛’이었기 때문이다. 이 빛은 그들 속에 숨어 있던 어두움을 계시하고 드러내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이런 영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빛은 어두움의 숨은 일들을 드러낼 뿐 아니라 어두움의 원인도 설명한다. 현대의 세계 문제의 단 하나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그 해답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빛이요, 그리스도인만이 이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만드신 것이므로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한, 참되게 살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본성과 존재 속에 일정한 규칙을 집어 넣으셨다. 사람은 이 규칙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잘못 되게끔 되어 있다. 오늘의 세계의 어려움의 원인을 분석해보면 결론적으로 죄와 이기주의와 자아중심으로 낙착된다.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다. 18세기 중엽에 계몽이 시작된 후 200년간 쌓인 온갖 지식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여전히 본성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다.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도 악을 일삼는다. 그것은 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머리에 있지 않고 그의 본성에 있다. 사람을 교육하고 통솔하려고 애써도 사람의 본성이 악하고 타락해 있고 정욕의 노예인 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복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직면하게 하므로 사람을 화나게 한다. 복음은 하늘의 빛으로 서 있다. 빛은 어두움에서 헤어나는 오직 하나뿐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제공한다.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미워하는 본성이 필요하다. 거듭남에 소망이 있다. 붙잡힐 필요가 있고, 하나님께 돌아갈 필요가 있다. 매우 단순한 이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 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한분 인격을 아는 일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새 삶과 새 성품을 주신다. 그 분은 우리를 새 의욕과 새 포부와 새 전망과 방향설정을 새로이 하는 새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분은 우리를 새 생명, 곧 어두움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는 대신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미워하는 새 생명을 주신다.
- 우리는 큰 암흑상태의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을 떠나서는 그들은 이 세상 어디서든 빛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들에게 무언의 꾸지람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삶이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는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만큼의 삶이 되고 있는가? 그들에게 우리는 이 신기하고 놀라운 뉴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다. 사람에게 새 성품과 새 생명을 주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의 빛이다. 빛의 자녀로서 살며 빛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16 장 이같이 너희 빛을 비추어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
-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언가가 될 수 있도록 그분이 만드신 바 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볼 수 있기를 열망하셨다. 이 점이 성경을 일관해서 흐르는 큰 요지가 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빛들’로 서술하며, 이런 까닭에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붙들라고)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인 까닭에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빛과 어두움의 대조법을 늘 쓰고 있다. 사도의 서신들은 이 문제를 푸는 많은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비중이 큰 일이 되어야 한다.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째서 소금과 빛처럼 되어야 하는가? -
첫째, 우리가 그렇게 되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금의 특성은 짠 것이고, 빛의 기능과 목적은 빛을 주는 일이다. 우리는 소금과 빛의 이 본질적인 기능들을 얼마나 잘 잊고 있는가? 등불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기 위해 켜진다. 불을 붙이는 목적은 그 빛이 그 지역 안에 퍼지고 발산되기 위해서 이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본질적인 것, 곧 ‘소금’과 ‘빛’인 것이다.
둘째, 이와 같이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위치가 모순될 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숨겨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는 대신 말 밑에 넣는 일을 상상해 보라. 등에 불을 켜는 목적은 빛을 비추기 위함인데 빛을 덮을 것으로 덮어서 가린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주님은 ‘나는 너희를 빛과 같은 것으로 숨겨질 수 없는, 산 위에 서 있는 동네처럼 만들었다. 너희는 이것을 일부러 숨기려 하느냐? 이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셋째, 이것은 우리 자신을 철저히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소금은 이차적인 용도를 찾아낼 수도 없다. 소금은 소금기를 잃는 순간 아주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퇴비 무더기에 던질 수도 없다.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처리 방법은 제거하는 방법 뿐이다. “후에는 아무 밖에 쓸데없어 다만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빛의 특성은 그것이 빛이라는 것과 빛을 준다는 점이다. 이외에 다른 기능은 없다. 빛은 빛으로 행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 가치를 잃는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보다 철저하게 무용지물인 것은 하나님의 우주 속에 또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같으나 실제는 아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 잃은 빛, 말 아래 숨겨진 빛이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세상을 못되게 만들만큼은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 어떤 적극적인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일들을 두려워할 정도로 세상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세상과 함께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참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생명의 풍요를 얻을 만큼 기독교를 소유하고 있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속물의 기능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능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던져버림을 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인 삶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들은 결국 소외된 인간들이다. 그들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비극적인 인간들이다. 이 경고는 마 25장의 비유들에 강조되어 있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맛을 잃어버렸거나 참 빛을 주지 못하므로 문자 그대로 발에 밟히운 교회들이 있다. 명목상의 신앙고백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숨겨질 수 없으며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소금과 같고, 산 위에 선 동네와 같고, 등경 위의 등불과 같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빛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참으로 알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고 계속한다면 결국 내어 던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내 속에 그리스도인인 사실을 덮어버리려는 경향을 발견하게 되면 자신을 검토하여 그것이 사실 ‘빛’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나는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덮어 버리려는 사람이 아닌지 물어야 한다.
- 우리는 어떻게 소금과 빛의 기능을 확실히 할 수 있는가? -
등잔에 필요한 것은 기름과 심지이다. 이 두 가지는 절대 필요하며 항상 함께 붙어 다닌다.
첫 번째, 기름(열 처녀 비유)은 절대 중요하다. 팔복의 요점은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기름 없이는 빛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의 빛인 것은 세상의 빛이신 이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거하심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방언이나 사람들이 그처럼 흥분하는 기타 특정 은사들을 주시는 데 있지 않다. 성령의 목적은 생명과 성령의 은사들을 주시는 것인데, 이것이 ‘더 귀중한 은혜의 선물’(고전12:31)인 것이다. 기름 곧 생명, 하나님의 성령께서만 내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가? 확실한가? 우리는 이것을 늘 변함없이 구해야 하고 공급 받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늘 접촉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변함없이 늘 받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임없는 기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채워지지만 항상 더 원한다. 우리는 결코 정지해 있지 않고 주리고 목마르는 일을 계속한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연구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름 공급 받는 일을 중단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심지이다. 등불을 밝게 유지하려면 심지를 손질해야 한다. 심지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 심지는 불빛을 내지 않는다. 심지를 손질하는 과정은 예민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팔복을 상기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되게 되었는가를 상기하는 일보다 심지를 더 잘 손질하는 방법이 없다. 하루 일을 시작하기 앞서 아침마다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과 말하는 모든 것에서 나는 팔복에서 보는 사람을 닮아야 한다.
또한 팔복을 상기해야 할 뿐 아니라 팔복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는 팔복의 성격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세상과는 전혀 다르게 되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빛과 어두움의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이것이든가 저것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다른 점을 보여줘야 함을 의미하며, 최소한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으므로 사회의 풍조도 점점 거칠고 조잡해지고 있다. 개개 그리스도인이 지난 세기들 보다 오늘에 더 큰 기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반응해야 한다.
-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올바른 방법으로 행해져야 한다.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이같이’는 위대한 말씀이다. 여기에 겉치레는 전혀 없다. 소금과 빛의 기능과 겉치레가 없는 것과의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은 실제로 어렵다. 그리스도인의 기능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삶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어떤 쇼맨쉽을 가져서는 안 된다.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자아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비워지고 산산히 부셔져야 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마음에 큰 슬픔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로 유도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하나님을 더욱 더 닮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고, 큰 슬픔을 느끼셨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행동을 결정한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항상 해야 한다. 모든 것의 기초를 그들을 위한 사랑에,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그들을 연민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와 반대되는 자들을 비웃으신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그들이 주를 볼 때에 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가 그들에게 의문을 일으킬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람들은 어째서 매사에 이처럼 다른가?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라고 물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해석을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반사체요,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자들이 되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신 것같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17 장 그리스도와 구약성경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성격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상기하게 되었고, 우리의 삶으로 이 본질적인 성격을 나타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나라 시민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시민의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일이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한마디로 의를 살아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산상설교의 나머지 주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의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실례이다. 7장 14절까지 이 주제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개 된다.
- 우리가 나타내야 할 이 의와 의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
17-20절은 이 주제에 대한 서론으로서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특색이 되어야 할 의의 문제와 의로운 삶을 도입하고 있다. 주님은 주제를 설명하고 해석하기 전에 도입부분을 제시한다. 일반적인 원칙이다. 실제에서 잘못되는 사람들은 언제나 원칙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우리는 전문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전문가는 세부사항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원칙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삶의 장애와 와해는 대부분 어떤 기본원칙들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모든 사람이 경건한 생활을 한다면 회담이라든지 다양한 기관들이 만들어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주님께서는 이 의의 문제를 다뤄나가심에 절대적인 명제 둘을 설정하시면서 진행하신다.
첫째로 17-18절, 주님이 가르치는 것은 구약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절대 일치하는 것이다.
둘째로 19-20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철저하게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 두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면 4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기록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는 주님이 감내해야했던 모든 괴로움과 주님이 늘 받으신 오해에 대한 해석이 있다.
우리 주님은 긍정적인 진술들만으로는 만족하시지 못하시고 부정적 진술도 하셨다. 주님께서는 교리를 진술하는 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다른 교리들을 비판하시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에는 부정적인 가르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긍정적인 가르침을 가지자’고 말하며 ‘여러분은 여러분과 다른 견해를 비판하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명백히 비판했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은 교회연합 문제를 논하며 지금은 교리상의 문제점들을 논할 때가 아니요, 모두 함께 뭉쳐야 한다는 논리가 대두되었다. 카톨릭과 희랍정교회가 기독교인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들의 부패성과 오류를 들추어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안 되는 것이다.
- 주님은 어째서 이렇게 하셨는가? 주님은 어째서 이 도입부분을 산상설교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적용하시는가?
주님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문제거리가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분은 통상적인 경로를 따라 선생의 지위에 오르시지 않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일부러 비판했다. 그들은 지도자요 종교 문제의 교사들로 인정받던 그 나라의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모든 시간을 율법을 해석하는 일에 쓰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교리를 설교했는데 탕자와 같은 비유들을 소개하였다. 더 고약한 것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우러져 함께 앉아 먹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규칙과 규약을 준수하는 것 같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들을 일부러 깨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그들의 공인된 교훈을 비판했으며 실제행동에서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 나사렛 예수는 성경을 믿지 않는가? 그는 성경을 없애려 왔는가? 그의 가르침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탄핵하는가?’ 이 질문은 그가 가르친 교훈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던 질문들로서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백성들의 비평으로 당황하지 않도록 이 두 기본 명제를 설정하여 전체 배경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그들의 마음과 전망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주셨다.
이 질문은 시대에 뒤진 케케묵은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문제가 되고 있다. 율법에 대한 주님의 관계 때문에 구원의 길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사활을 거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 난제가 제기 된다.
첫 번째로 주님이 하신 모든 것은 율법의 교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고 믿는 학파로, 4복음서와 신약의 서신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복음서들은 고대 율법에 대한 해석 이외 아무것도 아니며, 나사렛 예수는 율법 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기독교의 진짜 창시자는 사도 바울이다. 칭의론이나 성화론과 같은 교리들은 바울의 신학과 함께 사도 바울의 작품이다. 예수의 단순한 복음이 이 사람에 의해 변화된 것인데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정 반대로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히 폐하셨으며 그 대신 은혜를 도입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을 입 밖에 내어도 안 된다고 말한다.
- 우리 주님은 17-18절의 진술에서 이 두 난제를 동시에 대답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구약전체이다.
‘율법’이란 도덕법, 민법, 의식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덕법은 10계명과 기타 중요한 도덕 원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재판법도 있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에 주신 법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법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동을 규제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성전과 기타 장소에서 예배와 번제물과 모든 의식에 관한 의식법이 있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율법이란 말씀이 이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 율법은 직접 삶과 행위와 품행에 대하여 교훈하는 모든 것을 가리켜 언급하신 것이다. 동시에 율법은 구약에서 여러 가지 모형과 제물 기타 세밀한 모든 것으로 가르치신 것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단번에 온전히 성취하신 것의 모형이요, 예언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 전체로 취급되어야 한다.
‘선지자’ 구약성경의 선지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지자들도 율법을 가르쳤으며 율법을 적용하고 해석했다. 그들은 백성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들은 주로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로 이끌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하였다. 그들은 숨은 것을 드러내어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예언자들이었다.
‘완전케’ ‘완전케한다’나 ‘종결시킨다’는 뜻이 아니며, 이미 시작된 것에 무언가를 추가시킴을 의미하지 않는다. ‘완전케한다‘는 말의 참 뜻은 그것을 ’완전히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문자 그대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하고 진술한 모든 것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 우리 주님이 실제로 가르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법은 절대적이며 완전무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며 영원하다. 하나님의 법의 요구는 영원하며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폐기되거나 감소될 수 없다.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일획은 히브리어에서 가장 작은 글자이며 일점은 히브리어 글자에서 가장 작은 점이다. 세미한 항목이 완전무결하게 전부 성취되기까지 천지는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은 선언이요, 이미 선언된 것 중 가장 중대하고 중요한 선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지속되며 효력을 발생할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왜냐하면‘이란 말로 강조하시고 이 중요성에 더하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부언하셨다. 주께서 소유하고 계신 모든 권위로 이 진술에 인을 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율법, 곧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 완전무결한 성취가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율법은 지속되며 효력을 발생할 것이다.
둘째,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을 파괴하거나 미세한 정도나마 수정하러 오시지 않았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주를 가리키며 가장 작은 항목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이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절에서 구약성경 전체를 확인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권위의 도장을, 이를테면 재가를 구약성경 전체에 찍으셨다. 주님은 구약성경의 모든 부분을 인용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것은 성경이었다.
사람들은 초대 교회가 어째서 구약성경을 신약성경과 결합시키기로 결정했는가를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복음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나 구약성경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초대 교회는 이 책은 저 책에 빛을 던지어 해명한다고 보았으며, 각 책은 다른 책의 빛에 비추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두 성경은 항상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잠재해 있고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성 어거스틴)
무엇보다도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선언이 있다. 우리가 주를 참으로 따르며 주를 믿는다면 우리도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고의 권위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매우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10:35)
구약성경은 천지가 존속하는 한 미세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성취되고 존속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18 장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 주께서 구약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실현하셨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살며 박해를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쓰고 있다. 주님의 변화산상의 변화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한 바 영광의 음성을 들은 일들을 말한다. 하지만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 구약 선지서로 돌아가 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것들이 입증된 것을 보라 그러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믿음의 보루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포괄적인 진술을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 놀라운 인물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예언의 성취야말로 가장 놀랍고 주목할 만한 사실의 하나이다. 이것이 모두 정확히 성취되었다. 유대인들이 어째서 그분이 걸림이 되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이다. 그들은 선지자의 글을 읽긴 했으나 편견 때문에 눈이 멀어 말씀을 보는 대신 그 말씀 위의 그들 나름의 첨가된 사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선지서에서 가장 세밀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예언을 본다. 그의 인물됨과 삶을, 행하시려한 일과 그 속에 내포된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구약성경으로부터 복음을 설교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복음으로 가득차 있다.
예언은 선지서에서 뿐만 아니라 시편에서도 발견된다. 시편22편을 읽어 보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문자 그대로 정밀하게 서술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주께서 세우려하신 나라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과 함께 부활마저도 예언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방인들이 들어옴에 관한 예언과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의 명백한 기록도 발견된다.
우리 주님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만 따로 인쇄해서 내어놓는 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 둘은 불가분리적으로 한데 뭉쳐있다.
-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 -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다”(갈4:4) 우리의 유한한 마음이 이 말씀의 참 뜻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주님은 율법 위에 무한히 높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 아래 있게 되셨고 율법을 실현하셔야 했던 분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보다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불가침성과 절대성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신 때는 없다. 우리 주께서는 율법을 얼마나 세밀히 지키셔야 했는지 보라. 주는 율법을 세밀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사랑하게 하셨고 변함없이 율법을 확립하셨으며 율법의 절대 순종의 필요를 주장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서는 물론 그의 생애에서 그가 율법에 종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교리를 선언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십자가에 대하서 감상적인 태도로 말하거나, 십자가를 일종의 도덕적 감화를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속에 연민의 정을 일으키기 위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을 그저 일반적으로 시위하려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결국 율법의 관점에서만 최종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범하고 그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은 죄의 형벌을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 형벌은 죽음이다. 그가 죽음으로 율법은 성취되어야 했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처럼 형벌이 죽음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처벌하심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다.
주님은 가장 이상하고 놀라웁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죄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지심으로써 구약성경의 모든 모형을 성취하신 것이다.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에 관한 기록들, 장막과 성전의 의식과 제단과 정결을 위한 놋대야에 관한 기록들을 읽어 보라.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진설병과 제사장과 각종 그릇들과 기타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 궁극적으로 행해져야 했던 것의 그림자, 모형, 예언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하늘에 자기를 바치심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들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서도 율법을 성취하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4) 우리 주님이 이 지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는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 그는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속에 이것을 성취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할 마음과 이 사랑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굴복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며 이렇게 될 능력을 받았다. 즉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새 언약 아래서는 율법이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
아직 성취되어야 할 율법이 남아 있다. 의식법은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서 의식법은 전부 성취되었다. 성전의 휘장은 이미 그가 죽으실 때 둘로 찢어졌고 성전과 그 성전에 속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단이시요, 희생물이시요, 정결을 위한 놋대야요, 향이시요, 기타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아직 레위기의 율법의식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가 나의 번제물이시요, 나의 희생제물이시요,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나에게 적용되는 셈이며, 내가 이것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내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민법은 하나님의 신정국으로써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신정국이 아니다. 베드로는 벧전2:9-10절에서 새 나라는 곧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민법 역시 성취된 것이다.
도덕법의 위치는 다르다. 도덕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항상 있어야 할 관계를 세우시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우리 주님께서 첫째가는 큰 계명이라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두 계명은 옛 의식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도덕법은 예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대로 오늘에도 유효하며 세상 끝까지 우리가 완성될 때까지 유효할 것이다. 이 과정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죄는 여전히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의 위치이다.
미래는 이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의 일점일획도 이와 같이 완전히 수행될 것이다. 율법을 깨뜨리는 자는 마침내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 예수 안에서 제공된 것을 수행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를 달게 받을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행위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 받았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써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이 의의 규범으로써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율법을 은혜와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율법은 한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만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은혜 아래 있다. 율법은 결코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할 수 없도록 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율법은 은혜가 가득하여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거짓된 율법관과 거짓된 은혜관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은혜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의로왔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사)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이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키기를 열망하게 된다.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성결은 하나의 체험이 아니다. 율법을 사랑하며 이 율법을 지키도록 의욕하게 하는 새 마음과 성향을 가져야 하며, 주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하나님의 뜻은 십계명과 도덕법이다. 이 법은 폐하지 않았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 대속적 속죄론은 그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자기 몸을 율법에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굴복시키셨다. 모든 예표는 그분 안에 성취되었다. 나머지 예언도 확실히 수행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구속사역의 결과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즉 율법을 즐거워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성결을 열망하며,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와 같이 살기로 열망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19 장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9-20)
그분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사회에 속하지도 않았고 공인된 율법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인받은 가르침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공인된 교사들을 서슴치 않고 비판하셨다.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알려져 있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은혜론을 강조한 요소도 있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이때까지 들어온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메시지의 의미와 관련하여 중요한 오해에 빠지기가 쉬웠다.
주님의 가르침의 두 가지의 원칙을 정의하면, 첫째, 결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 그의 오신 목적은 율법을 페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기서 율법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할 것을 강조하신다. 율법에는 두 가지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 둘째 부분은 우리의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이다. 중요성에 있어 우열에 차이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사람에 대한 관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분명하다.
은혜의 전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의를 성취하고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면 우리는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성결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결과 성화를 체험으로 받을 수는 없다. 성결은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성결은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 세상에 계실 때 율법을 지키신 바와 같이 율법을 높이고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결은 주를 닮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결은 율법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으며, 항상 율법을 지키는 관점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세력을 잡은 것은 그들이 가장 성결한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의와 성결이 부족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자들이었다. 바리새(분리주의자)인들은 소위 그들의 거룩함 때문에 눈에 띄는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켰으며 구약성경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엄격한 삶과 행동의 규칙 및 규례를 만들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다고 말했지만 구약성경은 일년에 단 한번만 금식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윤리와 행동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법전을 만들었으며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덕행의 모범으로 생각하였다. 평민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선하게 사는 것이 종교적, 도덕적, 영적 의미에서 그들의 전 목적이요 대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주님은 오셔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우리의 성결관과 성화관은 어떠한가?
주님은 항상 그들에 관해 언급하셨으며 그들을 다루고 계셨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주님이 하셔야 했던 한 가지는 그들의 가르침이 공허한 것을 보여주고 백성들에게 참된 가르침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바리새인의 종교를 보면, 그들은 자기는 착취자가 아니며, 부정한 자가 아니며, 간음자가 아니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리새인은 외적 의를 갖고 있었다. 일 주에 두 번 금식을 하였고 소유했던 모든 것, 식용식물인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서 바쳤다. 여기에 추가해서 그들은 극히 신앙적이었고 예배와 종교의식 준수에 매우 정확하고 엄격했다. 그들은 말로 했을 뿐만 아니라 행하였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선언된 무서운 화가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 23장을 읽어보라. 우리가 착각하고 스스로 속을 가능성이 무섭도록 실재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우리 주님에게 위선자로 탄핵을 받았다. 그들은 위선을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적 위선자들이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의지할 가능성이, 참된 예배의 자리에 서기보다 참된 예배에 관계되는 것들에 의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 우리 주님이 그들을 비판하신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
첫째, 그들의 종교는 마음의 종교가 아니라 전적으로 외적이요, 형식적인 것이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이 진술은 사법적 정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셨으므로 자기에게 행하여졌던 거기에 불평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 신앙을 구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법적으로 탄핵하셨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다. 외부는 그럴듯하나 속을 보라!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을 탄핵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의가 만일 이 외식 종교의 요구를 능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외적 행동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다. 신앙의 최선의 정의는 “신앙은 사람이 자기 혼자 있을 때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끄러워 외부세계에서 숨기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들, 이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를 최종적으로 선언해 주고 있다.
둘째, 그들이 도덕보다 의식에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손씻는 일과 율법의 의식적 면에는 아주 꼼꼼했지만 율법의 도덕적 면에는 조심스럽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무서운 위험이 되고 있다 여러분은 주일 오전 예배 후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그들은 예배에 다녀왔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주의 날은 가능한 한 하나님께 많이 바쳐야 할 날이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그들은 전통을 세공화 하였고, 이 전통의 대부분은 사실 율법의 요구를 피하기 위한 교활한 계교 이외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는 주께 일정 몫의 돈을 바쳤으니 부모를 돌보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 해드리기가 힘들다’라고 한다. 그들은 율법을 특이한 방법으로 이행했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율법의 요구를 피한 것이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그 죄를 변명하며 빠져나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에 대하여 구실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전형이었다.
넷째, 그들은 근본 그들 자신과 그들의 의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기만족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바리새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보다도 항상 그들 자신의 업적에 만족했고 주의를 집중했다. 우리도 때로는 이와 같은 짓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특히 저 현대주의자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 합니다”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의 성격과 존재와 성품을 상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종교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결정한 일들의 일정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을 행하면 그것으로 만사는 잘 되었다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혼자 잘난 체, 점잖은 체, 자기만족, 입담은 우리들 사이에서 크게 눈에 띄고 있다.
다섯째, 바리새인들이 궁극적으로 정죄를 받은 까닭은 팔복에 묘사된 영이 그들의 삶에서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가엽고 비극적이다. 이것이 그들과 그리스도인들과의 차이점이다. 그리스도인은 팔복을 예시하는 사람이다.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받쳤으나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보다 중요한 문제를 잊고 무시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마음 자세를 말하며,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 문제는 그들이 원칙보다 행동에, 사람됨(being)보다 행동(doing)에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산상설교의 나머지 부분은 바로 이것의 해석이다. 어떤 일들은 삼가고 어떤 일들은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그의 최고의 갈 망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일은 시간제 작업이 아닌,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주의를 요구한다.
-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가? 주님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고 계시는가? 주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바리새인들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 증거는 우리가 의로움을 살고 있는데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리스도인의 표식은 행위로써 나타내 보이는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만일 나의 삶이 의로운 삶이 아니라면 회심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새 생명과 새 성품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한 사람, 그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며 그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한다. 그는 이제 자기 업적이나 성공을 위해 살지 않으며, 자기 만족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는 심령이 가난해졌고, 온유하며, 긍휼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그는 화평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열망하는 것이다. 그는 십계명을 지키고자 한다. 그는 지금 매일의 삶에서 이 율법대로 살며 그에게 이 율법을 예증하는 일처럼 호소력 있고 마음에 드는 일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훨씬 능가하는 의이다.
우리에게 사활로 중요한 질문들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크고 첫째가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것을 너무 소원하므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게 하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심히 죄를 지었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을 존귀케 하며 영화롭게 하며 사랑할 수 있는가? 그분이 여러분을 자기의 위치에까지 회복시킬 수 있음을 믿는가? 각자 자신을 검토해보자.
20 장 율법 조문과 영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1-22)
- 우리 주님은 그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 시민들을 서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성품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능과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 문제에 손대고 계심을 본다. 그 이유는 주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받은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은 새 가르침을 율법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했기 때문이다.
21절부터 7장까지 우리가 하늘나라 시민이 되어야 한다면,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17-20절 말씀의 확대인 것이다.
*5장의 나머지 부분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거짓된 해석과 대조해서 율법의 참된 해석을 보여줌.
*6장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치고 실천한 것과 대조하여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관계를 보여줌.
*7장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치고 실천한 것과 대조하여 참된 의를 보여줌.
- 5장의 나머지 부분(21-48절)에서 주님은 일련의 여섯 개 진술 “옛 사람들에게 말한 바---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는 형식으로 율법의 참된 해석을 보여준다.(21, 27, 31, 33, 38, 43절) 이 여섯 개 진술에 어떤 공통된 원칙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는 세목들보다 공동원칙들에 더 관심을 갖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어떤 원칙을 설정하신 다음 이곳에서 그 원칙들의 실례를 들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 먼저 볼 것은 사용하신 형식이다.
“옛 사람들에게 말한 바---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옛 사람들에게 말한 바’는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고 있는가? 여기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만든 율법에 대한 거짓된 주장과 대조해서 율법의 참 교훈을 보여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교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조상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통이 되었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상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전의 이 나라 백성들의 상태와 흡사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백성들은 라틴어를 알 수 없어 사제들에게 그들의 성경지식을 전적으로 의존했다. 종교개혁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을 백성들에게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백성들 스스로 성경을 읽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에 대한 거짓된 가르침을 볼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입장이 흡사 이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들은 히브리어를 알 수 없게 되었으며,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다. 그 결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그들의 모든 율법지식을 의존하게 되었다. “그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백성들이 율법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실 율법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시한 율법의 한 표현이었던 셈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그들 나름의 해석을 추가하여 어느 것이 율법이고 어느 것이 해석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님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해주는데 관심을 가지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자신을 권위자로 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만일 ‘옛 사람에 의하여’란 말이 모세의 율법을 의미한다는 견해를 취하면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정정하고 계심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나는 모세의 율법에 책임을 지는 바로 그이며, 그러므로 율법을 참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그는 하나님으로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시며,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본 산상설교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의 권위를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그의 속죄를 믿지 아니하며, 그를 영광의 주님으로 경배하지 아니하고, 단순히 산상설교에서 세상을 위한 윤리의 법전을 발견하기 때문에 산상설교를 신봉한다고 말하는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 산상설교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산상설교의 진정한 목적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어떤 상세한 법전(도덕법)이 아니다. 주님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새 나라를 세우러 왔다. 나는 새 백성 중 최초의 백성이요, 많은 형제 중 맏아들이다. 나를 머리로 하는 백성은 일정 유형, 일정 성품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정한 형태로 처신하게 될 것이다. 자, 나는 그들(백성)이 어떻게 처신하게 될 것인지 너희에게 그 실례를 보여주고 싶다”
- 주님이 상세한 실례보다 원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 이다. 만일 우리가 실례를 받아들여 이것을 율법으로 변화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주께서 나타내려 하신 바로 그 일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여러 가지를 그 원칙의 형태로 가지기 보다는 그것들을 깎아서 축소시키기를 더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자연인은 어떤 일정한 목록을 가지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자연인은 그 목록에 기록된 여러 가지에 일치하는 한 만사가 모두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입장이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지나치게 행해졌다. 우리는 매일 매일 원칙을 가지고 살기보다는, 일년 중 어떤 주간을 사순절로 준수한다는 관점에서 성결을 생각하기가 쉽다. 우리는 항상 한 세트의 틀에 박힌 규칙이나 규약을 좋아한다. 여러분이 산상설교를 ‘내가 간음을 범하지 않는 한 나는 모두 옳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주의 말씀하시는 요점을 전혀 놓쳐버린 것이 된다. 산상설교는 윤리 법전이 아니다. 주님은 어떤 상태와 자질을 묘사하시려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특정 실례를 율법으로 만들지 않고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여러분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 즉각 여러분의 권위자에게로 향하여 적절한 대답을 찾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또 하나의 율법이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복음은 어떤 원칙들을 설정한 후에 우리에게 그것들을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복음의 본질이 되는 가르침은 우리가 상세한 모든 것과 관련해서 적용해야 할 새로운 전망과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칼 날 위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하여 이 중심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인 것이다.
주님은 한 진술에서는 성도덕을, 다음 진술에서는 살인을, 그리고 다음 진술에서는 이혼문제를 취급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 원칙은 매번 같다. 여기서 진리 하나에 대하여 여섯 가지 실례를 주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중요한 의도는 율법의 참 뜻을 보여주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든 거짓 관념을 바로 잡아주려는 것이었다.
- 그 원칙은
첫째 원칙, 원래 중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중요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정신은 제쳐놓고 문자에만 관심을 가졌다. 정신은 항상 그 형식에서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사람은 내용보다도 항상 형식에, 정신보다는 문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영이지 문자가 아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는 한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생각했다. 율법의 정신은 문자 그대로 살인을 범하지 않을뿐더러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가 올바르고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것에 있다.
둘째 원칙, 율법에 일치하는 것을 행동의 관점에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각과 동기와 의욕이 모두 꼭 같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법은 행동으로 이끄는 그 동기를 행동만큼 중요하게 관심을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적 상태와 태도를 보신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셋째 원칙, 율법은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도 생각해야 한다. 율법의 궁극적 목적은 잘못된 것들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적극적으로 하며, 옳은 것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 유대인의 율법관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간음을 범해서는 안 되고, 살인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의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내내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악한 것을 피해야 할 뿐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넷째 원칙,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압제적인 규칙에 얽매여 복종상태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영적 성품을 자유롭게 계발하고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활로 중요한 점이다. 성결 곧 성화의 길은 우리로 하여금 굴종상태에 밀어 넣는 가혹하고 쓰라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영광스러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분량의 경지에까지 자라가는 것에 있다. ‘그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요한은 그의 제일 서신에서 말씀하고 있다.
복음의 전체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특정 명령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 경지에 도달하여 그것을 누릴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는 특정 실례들에 지나지 않는다.
다섯째 원칙, 하나님의 법과 이 모든 윤리적인 교훈들은 그것들 자체에 목적이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것에 일치하고 부합되려고 애를 써야 할 무엇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가르침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율법 자체로만 보고 법전화 시켰으며 이 법전을 지키는 한 만사는 다 잘되어 간다고 말했다. 우리 주님에 의하면 이것은 철저한 허위의 율법관이다. 우리에게 항상 적용할 시금석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나는 하나님을 아는가?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율법을 율법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산상설교 그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참되고 생명 있는 관계, 살아 있는 관계로 이끌어 주기 위한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이지 의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요, 목적이요, 목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피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과 직접적이며 살아있는 참된 관계를 떠나서 살려는 우리 속의 치명적인 경향이다.
여섯째 원칙,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훈련은 유익하고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만일 여러분의 주요 목적과 의도가 여러분이 설정한 훈련과 부합되게 하는 것에 있다면 이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가장 큰 위험이 될지 모른다. 금식과 기도는 유익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하나도 의미가 없는 것이며, 사순절에 하는 금식과 회개도 의미가 없다. 어느 기간 동안 담배와 술 ,노름의 중단이, 하나님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증가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이것을 하지 않았던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만일 공중 예배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된다면, 강단에서의 나의 유일한 목적은 한편의 설교를 하는 것이 되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사랑할 수 있기 위해 복음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설교는 헛된 것이며 나의 영혼을 저주하고 파멸시키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들을 종교로 변화시키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기록된 율법은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21 장 살인하지 말지니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21-26절에서 주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해석과 대조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해석으로 주신 여섯 가지 실례 중 첫 번째 실례이다. 이것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대조가 아니요, 모세 율법에 대한 거짓된 해석과 주님께서 주신 참된 율법과의 대조이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항상 율법의 의미와 요구마저도 감손시킨 죄책이 있다. -
첫째로 잘못된 점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뜻을 감소시켜 실제 살인을 범하는 문제로 격하시켰다. 둘째로 한 일은 이 명령에 붙어 있는 재가를 치안판사의 손에 벌하는 것으로 격하시키고 제한해 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명을 순전히 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므로 하나의 법조문에 지나지 않게 하였다. 그 결과 살인죄를 범하지 않는 한 만사는 잘 되어가고 있고, ‘살인 하지 말라’는 계명을 태연하게 대면하여 ‘나는 율법을 지키고 성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아니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 감손시키고 제한했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속 편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율법을 제한 시켰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동시에 우리들도 여전히 이것을 범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려 한다. 사도 바울은 그가 회심하기 전에는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생각했다. 부자 청년 역시 이런 식으로 배웠고 거짓 해석을 믿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율법조문을 받아들이면서도 영과 그 내용과 의미를 온통 잊어버리고 있는 한,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의롭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할 가능성이 있다.
- 주님은 이 허위를 어떻게 노출시키시며 보여 주시는가를 살펴보면, 주님은 세 가지 표제 아래 그의 견해와 해석을 하셨다 -
첫째, 원칙은, ‘중요한 것은 율법조문 뿐 아니라 영이다’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실제 살인을 포함할 뿐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 마음속에 까닭없는 분노감을 품는 것도 포함한다. 즉 ‘누구든지 형제에게 까닭없는 성을 내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 우리가 율법의 참된 영적 내용을 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옛 율법에는 이 영적 내용이 모두 있었다. 그들이 이 점을 놓친 것은 이스라엘의 비극이 되었다.
옛 법은 마음 속에 형제에 대하여 까닭없는 분노감을 품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속에 적대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살인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을 까닭없이 미워하고 몰인정한 분개감을 느끼는 것은 살인이다. 특히 믿음의 형제에게 성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살인에 해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할 죄가 된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는 멸시적인 표현을 범해서도 안 된다. “누구든지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라가’는 ‘쓸모없는 놈’이란 뜻이다. 주께서 말씀하신 죄의 목록을 주목해 본 일이 있는가? 주님은 악한 생각을 항상 살인과 함께 포함시키셨으며, 또 다툼과 원한과 속임과 기타 우리가 무섭고 더러운 죄로 여기지 않는 많은 것들을 포함시키셨다. 멸시, 경멸, 조롱은 궁극적으로는 살인으로 유도되는 바로 그 영(정신)인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살인만큼 무섭고 더러운 생각들을 품는다. 살인까지는 안가더라도 사람들이 파멸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비판의 말이나 허물들을 찾아내어 사람들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살인은 육체적인 것 이상으로 사람의 영과 혼을 파괴하며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을 파괴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산상수훈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거나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과오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산상수훈은 우리의 존재 깊은 밑바닥까지 파헤치고 있다. 살인은 온통 마음과 감정과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 속에 있음을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살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성내는 것은 항상 나쁘고 모든 성냄은 금지되고 있는가? 주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강한 표현을 사용하신 실례가 있지 않는가? 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주께서 이 화를 선언하셨을 때 주님은 재판장의 신분으로 선언하신 것이며, 주님은 메시야로서 그렇게 하실 권세를 받으신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기 의를 고발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의 말씀은 재판적인 의미의 선언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와 같은 표현을 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 특정 죄책을 면제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죄에 대해서만 나타내져야 한다. 죄인에게 분노감을 느껴서는 아니 되며, 그에게 슬픔과 동정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다. 죄와 위선과 불의와 기타 악한 모든 것을 볼 때에는 분노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이것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하신 바울의 명령을 성취하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는 조금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주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였으며,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사람과 그 의를 행하는 바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들을 구별하는 선을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그 무언가를 행했을 때 여러분은 맹렬한 노염 속으로 빠져드는가? 여러분에게 사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분노감을 느끼는가?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을 이미 지켰다고 혹은 범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일종의 자기 의를 만들어 내지 않기를 바란다. 각자 자기를 검토해 보자.
둘째 원칙, 우리의 태도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3-24)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우리가 살인과 악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형제와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하여 적극적 단계를 취해야 함을 의미한다. 문제거리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실제로 조처를 취해야 한다. 형제와 우리들 사이에 영에 있어서 마져도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단계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23-24절에서 영적생활에서 매우 미묘한 위험 곧 악을 선으로 상쇄함으로써 도덕상의 과실을 보상하려고 애쓰는 무서운 위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점을 강력히 주장하신다. 위험은 도덕상의 과실을 덮어버리기 위해 어떤 의식의 희생을 고안해내는데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 일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사소한 일들의 문제에는 항상 꼼꼼했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멸시하여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심의 통증을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있다’는 것으로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일으키시는 가책에 직접 직면하지 않고 자신에 대하여 ‘지금 나는 이러 저러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큰 희생을 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 사역을 위하여 여러 일에 바쁘게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이 한 가지 선행이 저 한 가지 악행을 메꾸어줄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주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눅16:15)
우리는 형제와 바르게 된 이후에 돌아와서 예물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어떤 알려져 있는 죄를 품고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예배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실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형제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알고 있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헛되며 효과가 없다. 하나님은 죄를 보실 수 없을 만큼 순결하시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하므로 여러분은 기도를 중단해야 하며, 말하자면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해야 한다고 하신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올바로 되기까지는 여러분은 하나님과 올바로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사울은 아말렉을 모두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사울은 스스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선지자 사무엘이 와서 중대하고 무서운 말을 발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을 행하지 않는 일이 많다. 그러면서도 예배행위를 베푸는 것으로 명령을 보상될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 여러분의 제물을 놓아두고 가서 여러분의 형제와 일을 바로 잡고 난 후에 예배를 드리라.
셋째 원칙,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의 나를 생각해야 한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5-26) 이 문제는 이처럼 긴박하고 절박한 문제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입장이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요, 그의 법은 절대적인 법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급히 사화해야 한다. “길에 있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말하기를 “너와 네 형제와의 관계는 어떠하냐? 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은 어떠하냐? 너는 이것들을 수행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주님은 즉시 해결하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내일 아침에는 여기에 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분은 영원을 향하여 가고 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여러분은 이 거룩한 율법에 대한 주의 해석을 살펴 본 그대로 율법의 요구를 느끼고 있는가? 정죄감을 느끼고 있는가? 그의 율법을 통하여 요구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길에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한 속히 행동하라고 말씀하시는 명령을 주신데 대해서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의 조건은 매우 쉽다. 즉, 나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철저히 고백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들볶는다 해도 여하한 자기 방어나 자기 의를 중단한다. 그리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처가 있다면 그것을 즉각 취해야 한다. 나는 겸손하여 바보가 되어야 한다. 파산한 더러운 죄인에게 철저한 고백과 회개를 조건으로 제시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가 이것으로 모든 것을 상환할 수 있다는 것이며, 십자가 위의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과 자기희생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만 용서받음을 인정하면 된다는 조건이다.
급히 사화하자. 지체하지 말자.
22 장 죄의 사악성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28)
- 율법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의 두 번째 실례가 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진짜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십계명을 올바로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의 전체 목적은 죄의 사악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론을 싫어하여 기질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을 심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견해가 이런 것이라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구약에서도 그렇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죄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죄론에 관해 분명히 알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구원의 길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의 죽으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십자가 위의 죽음은 죄의 문제가 설명해 준다. 죄의 문제는 이처럼 깊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이 일을 하셨지만 아무도 율법을 지킨 사람이 없다. 헬라철학의 지식과 견문과 기타 이런 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죄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구원론을 이해하는 오직 한 길은 죄론에서 출발하는 길인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써만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의 중생론도 마찬가지이다. 죄론을 깨닫지 못하면 중생은 의미가 없다. 만일 여러분이 죄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 교리는 바른 전도개념을 결정하는 데 절대 중요하다. 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곳에 참된 의미의 전도는 없다. 복음의 본질은 율법을 설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고 결단을 내리라고 강요하시기는커녕 사람들에게 큰 장애물을 놓으셨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율법을 설교한다는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거룩과 죄의 결과에 직면하고 있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옥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죄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죄의 참 성격을 말씀하실 때였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람의 죄의 사악성, 율법의 요구와 율법이 말하는 벌과 악과 악행의 영원한 결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도피하는 사람만이 자기 죄책을 보게 된다. 참된 전도는 애초부터 회개의 요청인 것이다.
죄론은 참된 성결개념과도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가 해온 전도는 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결개념 역시 피상적인 것인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검토해 본 일이 없다. 우리는 마음의 문제로써의 성결을 보게 되며 행위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탐하지도 말아야 한다. 여러분의 마음을 들어다 보고 악이 있는가 찾아보라. 이것이 신약성경의 성결이다.
죄론은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큰 힘이 절대 필요함을 보여준다. 죄론은 그리스도에게 달려가 그를 의지하게 하며 그 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한다. 신약성경의 성결제시 방법은 죄론을 설교하며 그의 사람됨을 그에게 제시해 줌으로써 그가 자기를 보고 자기를 미워하며, 심령이 가난해지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그리스도에게 도피하며, 그 안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성결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체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요, 따라야 할 그리스도인 것이다.
신약성경의 죄론을 파악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방법뿐이다. 하나님에 관한 것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고백의 궁극적인 시금석이 된다. 여러분은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함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어째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원인은 우리가 죄의 성격과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 죄론을 파악하라. 죄론의 의미가 그 분에게 어떤 것이며, 그가 그것에 대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깨달을 때 여러분은 그의 사랑이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신성함을 보게 될 것이다.
죄론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한다면 복음의 이해도, 참된 전도의 이해도, 참된 성결의 이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죄란 무엇인가?
주님은 첫째, 죄의 깊이 또는 죄의 세력을 강조해 말씀하셨다. 죄는 행동으로 이끄는 마음 속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증상이 아니라 질병인 것이다. 죄와 타락의 결과로써 인간성 속에 있는 이 무섭고 더러운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그 결과 사람은 욕망하고 탐하는 것이다. 주님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이 마음 속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로 하여금 그것을 하도록 충동질 하는 것에 있다. 우리들 속에 있는 죄를 직면해야 한다. 죄의 깊이와 세력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죄의 교활성으로, 죄는 우리가 그 죄의 행위를 범하지 않는 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우리를 현혹하는 무서운 실재이다. 죄가 우리 마음에 쓰는 교활한 방법은 마음으로, 상상 속에서 죄를 즐기게 한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신문의 이혼란을 그처럼 세밀하게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법적인 관심이나 사회적인 관심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오직 한 가지 대답은 여러분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간음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들이 소설이나 기사들을 읽으면서 순전히 관심 때문에 읽는 척 가장하지만 사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 속의 죄, 생각 속의 죄인 것이다.
셋째, 죄의 사곡성과 그 결과로 죄는 참화를 가져온다. 주님은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본능들은 죄 때문에 우리의 원수가 되었다. 죄는 거룩하고 바르고 선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율법이 나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나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게 한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끗하지 않다면 선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해가 될 수 있다. 율법은 옳고 선하고 순결하다. 문제는 우리들 속에 우리의 사곡한 성품 속에 있는 것이다.
넷째, 죄는 파괴적인 실재이다. 죄는 사람과 세상 속에 사망을 가져왔다. 죄는 항상 사망으로 인도하며 궁극적으로는 지옥으로 고통과 형벌로 인도한다. 하나님과 죄는 절대 양립될 수 없다. 죄는 하나님께 절대 가증한 것이다.
- “간음하지 말라” 간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가? 간음이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가? 그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보고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가 간음죄나 기타 이와 비슷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해서 삶에 만족감을 느낀다면, 우리는 자신을 아직 모르고 있으며 우리 마음의 검은 것과 더러움을 모르고 있는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자신을 살피되 생각과 욕망과 상상까지도 살펴야 한다.
우리가 악하고 더러우며 씻음 받아 깨끗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가난한 심령으로 철저한 무능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도록 기도한다. 나에게 복음을, 나에게 새 마음, 나에게 그분의 성품을 주시러 그분이 오셨고 또 주신 것에 감사한다.
은혜로우신 주여 당신의 성품을 주옵소서.
위로부터 속히 오셔서 당신의 새 이름을
내 마음 위에 쓰옵소서.
당신의 새롭고 가장 좋은 사랑의 이름을 쓰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기도한다.
** 22장-30장까 용량초과로 올릴 수 없으니 첨부된 파일을 다운 받아 계속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한 학기 동안 요약 강의 해주신 김영희 교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