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엽 총장 이야기
이 땅의 아들과 딸에게
내가 대학에 막 들어갔을 무렵 대학가는 안팎으로 시끄러웠어. 정권에 맞서는 학생운동도 활발했지만 ‘학민싸움’ 즉 학교 당국에 반대하는 학내(學內) 민주화 투쟁도 그에 못지않았지. 그래서 각 학교의 총장실은 무시로 학생들에게 점령당하기 일쑤였단다. 그런데 고려대학교는 조금 달랐어. 학생운동 활발하기로는 어느 학교에 뒤지지 않았던 고려대학교였지만 1989년 이전까지는 총장실 점거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데에는 고려대학교 제 9대 김준엽 총장이라는 큰 이름이 버티고 계시지.
이분은 일제 말엽 학병에 끌려갔다가 탈출, 광복군의 일원이 된 독립운동가이셨고, 중국사에 정통한 역사학자이시며 동시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파도 속에 뛰어든 제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진정한 교육자셨어. 이분의 일생을 설명하기엔 이 지면이 너무나 짧으니 1980년대 고려대 총장으로서의 그분의 모습을 잠깐 얘기해 주려고 해.
1980년대 초반의 대학은 너희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어. 각종 정보기관 기관원들이 아예 학교에 출근해서 상주했고 경찰 병력도 대학 안에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어. 서너 명이 모여서 얘기라도 할라치면 “어이 어이 해산들 하지?”하면서 건들거리는 ‘요원’이 있었고 시위라도 할라치면 “학우여!”를 외치기도 전에 “학!”에서 입이 막혀 끌려간다고 해서 “학시위”라는 말이 씁쓸하게 유행했지. 김준엽 총장이 취임한 즈음의 대학가는 어두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단다.
김준엽 총장에 따르면 총장 비서실장 사무실 소파에는 무려 10여 명이 넘는 ‘기관원’들이 드글거리면서 비서실장으로부터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보고받고 있었다고 해. 김준엽 총장이 가장 먼저 총장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낸 일은 이들을 내보낸 것이었지. 하루는 비서실장이 쭈뼛거리며 오더래.
“기관원들 밥이나 술도 좀 사시고 그러셔야 학교에게도 총장님에게도 좋습니다.” 그 직후 비서실장의 머리에는 제우스의 벼락보다 무서운 김준엽표 벼락이 떨어지고 만다. "이 돈은 가난한 학생들이 낸 등록금이요. 부모님들이 옳게 식사도 못하면서 자식들 장래를 위해 보낸 소중한 돈이란 말이오.” 밥과 술을 잃은 기관원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는 총장에 대한 험담을 있는 대로 담아 보고서를 올렸다고 해. 이미 김준엽 총장은 정부의 눈의 가시로 돋기 시작했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학생회관을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어. 당연히 경찰은 학생회관에 들어가서 시위 학생들을 밟아버릴 태세를 갖췄지. 그때 김준엽 총장이 핸드 마이크를 들고 나타나신다. “다친 학생들이 있으면 내보내라. 앰뷸런스가 대기 중이다. 즉시 병원으로 데려갈 것이다. 학생 여러분. 몸을 다치지 마라.” 이제나 저제나 경찰이 들어오면 죽도록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총장님의 방송이 어떻게 들렸을지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되리라 봐.
총장은 밤새 학교에 머물며 경찰 당국을 설득했고 결국 농성 학생 전원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단다. 저 서슬 푸른 빛나리 대통령 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해피 엔딩은 현미경으로 들여 봐도 찾기 어려워. 하지만 정권측에서 봐서는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었지.
1984년 11월 당시 대학생들이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당사를 기습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어. 여당의 본부가 학생들에 의해 일순 장악된 셈이니 정권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다 못해 곰보로 만들고도 남았지. 당시 권익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의 말은 이랬다.
“폭도들과 대화는 무슨 대화야! 전기 끊고 물 끊어!”
글쎄 누가 폭도였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겠지만, 아무튼 학생들은 경찰들 손에 질질 끌려나와 곤죽이 되도록 맞고 감옥에 갇혔어. 정부는 그에 그치지 않고 각 학교에 “관련학생 전원” 제적을 요구한다. 여기에 분연히 맞선 게 김준엽 총장이셨어. 몇일 몇시까지 제적을 강행하라는 문교부 (그때는 이렇게 불렀어)의 요구에 김준엽 총장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고려대 학칙에는 총장에게 그런(자신의 뜻대로 학생들을 제적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학칙에 따른 소정의 절차를 따를 겁니다. 제적이든 퇴학이든 검찰조사가 끝나고 정식으로 재판을 받은 후에 그 판결을 토대로 할 겁니다. 법적으로 일하겠다는 것이 반정부라면, 우리 정부는 무슨 정부란 말이오?”
전두환 정권은 이런 꼬장꼬장한 선비를 고려대학교 총장 자리에 앉혀 둘 인내심을 포기하지. 문교부는 거의 모든 학교에서 관행처럼 돼 있던 교직원 자녀 특례 입학 사례를 핑계 삼아 총장에게 책임을 물었고, 1985년 2월 고려대 9대 총장 김준엽은 문제의 학생들을 보호하는 조건으로 스스로 퇴진하게 돼. 이에 학교 안에서는 불길 같은 총장 퇴진 반대 시위가 일어난다. 그때껏 시위대가 소수로서 경찰에게 쫓겨 다녔다면 경찰이 무서워서 도망다닐 만큼 그 기세가 뜨거웠다고 하네.
1985년 2월 25일 총장으로서의 마지막 졸업식 날이 왔어. 총장 퇴진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열린 졸업식. 졸업생 답사를 맡은 여자 졸업생이 으레 이어지는 공식적인 문장을 읽어 내리다가 갑자기 단호한 어투로 바꾼다.
“고대 사학 80년 전통에 있어서 외부 당국의 압력에 의해 행해지는 굴욕적인 사퇴 처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진정한 학원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해 이번 일이 철회될 때까지 매진할 것입니다. 총장님, 힘을 내십시오!”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지. 총장 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학생들 일부도 엉엉 목놓아 울었고 말이야. ·
김준엽 총장님은 이런 표현을 즐겨 하셨어. “나는 역사의 신을 믿는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내 멋대로 해석하자면 현실이란 결국 기나긴 역사의 일부이며 눈앞의 세상에 묻혀 살기보다는 우리 행동이 역사에 어떻게 기억되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질지를 고민하라는 말씀으로 들려. 그런데 작년에 김정배 신임 국사편찬위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많이 황망해졌다. (이분 역시 고려대 총장을 지내신 분으로서 김준엽 총장의 제자이시기도 해.)
“국가 지도자의 경우 어느 하나의 과오를 내새워 독재자나 악인으로 폄하하는 것은 역사학이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다,,,,,, 인물 특히 지도자 품평에 공7, 과3의 상식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과연 김정배 위원장님은 김준엽 총장을 끌어내린 전두환에 대해서도 이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실 수 있을까? 국가의 지도자였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는? 여기에 대해 당시 김정배 국사편찬위 위원장님은 이런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시네.
“불필요한 정쟁을 피하기 위해 역사는 현재의 시간과 다소 거리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불필요한 정쟁을 피하기 위해 전임 김정배 국사편찬위 위원장님은 혹시 자신의 스승인 김준엽 총장님이 용감하게 독재에 맞섰던 역사까지도 혹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국사’를 '편찬‘한다는 곳의 수장의 말을 들으며 ’역사의 신(神)‘은 어떻게 생각하시며 하늘에 계신 김준엽 총장님은 무슨 표정을 지으셨을까. 계절하늘 공활한데 다시금 그 푸른 천정에 굵고 뿌연 의문부호가 새겨지는 요즘이구나.
(펌)
첫댓글 김준엽은...장준하하고는 또 다른 의미에서...역사를 감당할만한 위인이다
그런데...대한제국말기에도 이런 위인이 한 사람있었다.
성균관대학 창립자 심산 김창숙...온갖 정상모리배들만 가득찬 이 나라에도 가끔씩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될만한
인격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아주 절망적인 나라는 아니고 그 씨종자만은 절멸시킬 백성은 아닌것 같다^ ^*
학계도 그렇고 다른 분야도 그렇고 어느 나라나 1% 미만의 순수는 있는데
그리고 결국 그 1% 미만이 그 사회를 지탱하는 바탕이 되는데
그런 사람들의 기상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는가에 따라...
조선시대에도 세파를 거슬러 목숨을 내놓고 상소를 올리는 외로운 선비들이 있었는데
비록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고 귀양을 가고 멸문지화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로 인해 나머지 절대다수의 양심을 일깨우면서 사회적 마지노선을 지키는 역할을 한 것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