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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2007
한 세기 반 동안이나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는 청교도적 신앙과 생활의 명확하고 설득력있는 표현으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 홀랜드 그리고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의 방식을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본서를 탐독했다. 또 그들의 열망이 어떠하든지 임마누엘 대학, 라이든 대학, 하버드 대학, 예일 대학 학부생들은 신학개론의 일환으로 라틴어본 「신학의 정수」를 읽어야 했다.
하트포드의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1586?-1647)는 매우 열정적으로 동료 목회자들에게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와 또 다른 저서를 추천하면서 “다른 저서들을 전혀 소장하지 못하고 본서들만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본서들은 능히 그를 훌륭한 목사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1717년 매더(Cotton Mather)는 임직식 설교에서 목사들의 필독서로 오직 「신학의 정수」만을 추천했다. 현존하는 영역본은 아마도 19세기에 인쇄된 역본일 것이다· 본서가 17세기 초엽에 저술된 라틴어 저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로써 본서가 매우 광범위하게 출판된 저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를 학문적인 논문이 아니라 평신도와 학생들을 위한 유용한 개론서로 저술했다. 본문은 두 권으로 구분되며 각 장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초신자도 특정한 사항에 대해 에임스의 답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하지만 본서는 신학적인 점검을 위한 목록 이상의 저서이다. 「신학의 정수」에 의하면 신학은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적인 삶으로 응답하도록 해야 하며 인간들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딛2:12)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따라서 본서는 근본적으로는 청교도적 형태의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교본이다.
윌리엄 에임스는 1576년 서포크에 있는 입스위치에서 탄생하였다. 이곳은 동 앵글리아에서 청교도주의가 뿌리를 내린 지역이며 왕권과 주교의 종교적 박해가 가장 비효과적이었던 지역이다. 그의 부친은 청교도 정신에 공감한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의 모친은 신세계에 플리머드 정착촌을 건설하도록 조역했던 가문들과 관련된다.
어린 시절 양친의 사망으로 에임스는 비극을 일찍부터 경험하였다. 삼촌이 윌리엄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 그의 생계와 교육을 책임졌다. 에임스는 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 자연적으로 옥스퍼드 대학 대신 당시 청교도 학문의 중심지였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선택하였다. 이 대학은 토머스 카트라이트, 윌리엄 퍼킨스, 존 프레스톤과 같은 대가들이 설교와 가르침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에임스는 “땅에서 유리하거나” 구금되려는 상황에서 영국을 떠나 홀랜드로 망명하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610년에 홀랜드에 도착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명성과 갈등, 첫 번째 부인의 사망, 재정적인 불안정, 영국 당국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방해를 겪었으며 마침내 1633년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에임스는 1622년 프라네커에서 신학부 교수로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계획대로 미국으로 이주했었다면 아마 하버드 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의 최초의 장서는 에임스의 저서들이었다. 코튼 매더는 그를 “심오하고 고귀하고 섬세하고 반박할 수 없는 영국 박사”라고 명명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종종 에임스의 사상에서 출발했다. 초기 미국의 신학과 지성사에 있어서 윌리엄 에임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제 1 권
1 신학의 정의 혹은 본질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다. 요6:68,영생의 말씀, 행5:20,이 생명의 말씀, 롬6:11,너희도 너희 자신을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신학을 교리라고 지칭한 것은 이를 다른 분야와 같이 자연과 인간의 탐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지시로부터 유래된 분야라는 것을 명기하기 위함이다. 사51:4,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마21:25,하늘로서냐.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요9:29,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갈1:11-12,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요6:45.
다른 학문의 원리들은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내재한 것이므로 감각적 지각, 관찰, 경험, 귀납법을 통해 발전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하지만 신학의 기본 원리들은 연구와 근면에 의해 발전될지라도 본래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마16:17,이를 내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종류의 삶은 살아계시며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삶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일치되어 살아갈 때 하나님에 대해 살아가게 된다. 갈2:19-20,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라 ---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행복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이러한 삶의 범위 내에 포함되지만 올바르게 사는 것(유조니아)이 행복하게 사는 것(유우다이모니아)보다 중요하다. 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만족과 관련된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선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신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사는 행복한 삶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사는 선한 삶으로 정의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삶은 인간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행하게 되는 전인적인 영적인 활동이며, 분명히 인간의 의지와 관련되기 때문에 신학의 고유하며 최초의 주제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잠4:23,생명의 근원이 이(마음)에서 남이니라. 이렇게 의지된 삶에서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신학이 사변적 분야가 아니라 실천적 분야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신학은 이를 특별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수행한다.
신학은 이러한 최종 목적 혹은 그 목적에 연관된 수단들과 관련되지 않은 어떠한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의 모든 내용은 실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러한 삶의 실천이 신학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고찰되므로, 경제, 도덕, 정치 생활, 법 제정에 있어서 올바르게 사는 것과 관련된 보편적 진리에 대한 교훈들 중에 신학과 정당하게 관련되지 않은 교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학은 모든 학문 중 궁극적이며 가장 고귀한 학문이다.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파송되어 신적인 일들을 다루고 하나님을 지향하며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함으로써, 우리의 최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지침이며 총괄적인 계획이다. 따라서 이를 신학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테오조니아), 하나님을 향해 사역하는 것(테우르기아)라고 지칭하는 것도 부정확한 것은 아니다.
2 신학의 구분 혹은 부분들
신학의 두 부분은 신앙과 순종이다. 딤후1:13,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지키고. 딤전1: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시37:3,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동일한 부분들이 아브라함의 신학을 구성한다. 창15:6, 17:1,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리스도는 신앙을 넘어서서 그들이 그가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명령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셨다. 바울은 명백히 신학의 정수를 지니고 있는 로마서에서 동일한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구분은 대상의 본성에서 연원한다는 점에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학의 고유한 관심인 영적인 삶의 시작 혹은 최초의 행위가 신앙이요, 두 번째 행위 혹은 신앙의 원리의 작용이 순종이므로, 양자가 신학의 진정한 부분들이며 다른 것들이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도출된다.
율법적이며 노예적인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구약성경에서는 신학이 때때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율법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전12: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신앙과 순종은 활용되고 행사될 때에는 항상 함께 결합된다. 하지만 이들은 본성상, 그리고 이들을 규제하는 규범에 있어서는 서로 구분된다. 본성의 질서에 있어서도 구분된다. 신앙이 첫 번째 위치를 점하고, 영적 순종은 두 번째 위치를 점한다. 왜냐하면 새 생명의 원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생동적인 행위들이나 삶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신앙
신앙은 심령을 생명과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악에서 구원받고 모든 선을 따르게 된다. 사10:20,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시37:5,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렘17:7,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믿는다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증거를 승인하는 지성의 행위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지가 감화되며, 의지를 통해 이와 같이 증명된 선을 받아들이게 되므로, 신앙은 의지의 행위로 정당하게 지칭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신앙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요1:12,영접하는 자 --- 곧 믿는 자들에게는.
신앙은 선택행위이며 전인적인 행동이다. 이는 결코 지성만의 행위가 될 수 없다. 요6:35,내게 오는 자는 --- 나를 믿는 자는. 신앙이 항상 복음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지의 행동이 수반된다. 지성과 관련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항상 신적 증언에 의존한다. 하지만 신적 증언은 하나님에 대한 의지의 진정한 전환 없이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요3:33,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롬4:20,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앙은 증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신앙은 그 본성상 어떤 인간적 지식보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신앙은 무오류성이라는 형식적 기초로 그 대상에 인도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다. 딤전4:10,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니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 아니라 매개적 대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롬6:11,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고후3: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벧전1:21,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신앙의 진정한 대상은 우리가 선을 추구할 때 우리가 의뢰해야 할 하나님이다. 고전2:2,예수 그리스도 --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의 구원에 주목하는 신적 신앙을 가지려면,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해야 한다. 고전2: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는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되어야 할 모든 진리에 대한 직접적이고 고유한 근거가 된다. 신앙은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위 즉 신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벧후1;20-21,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로되. 또 신앙이 신앙하는 행위를 지시할 때 신앙의 최종적인 근거는 성령의 작용과 내적 감화에 두어져야 한다. 고전12;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대해서 믿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게 하는 이러한 신앙은 진정하고 본래적인 신뢰이다. 이는 확신과 기대를 위한 선하고 충족한 수단의 선택과 획득을 지칭한다. 이는 신앙의 진정한 본질이 제시되는 모든 성경 구절에서 언명되고 있다.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앙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신앙함으로써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충족한 삶과 구원으로서 하나님에게 안식하는 것이다. 신30:20,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신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게 하는 최초의 행위이므로, 신앙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대한 승인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더욱이 자신의 비참함과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서는 구원의 수단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신앙을 수용하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충족하고 신실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한다. 지성의 승인을 통해서는 이렇게 복종할 수 없다. 이는 오직 의지의 동의로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장차 오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확고한 희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신앙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바란다는 점에서 신앙 자체이다. 어떤 자들은 신앙을 부분적으로는 지성 안에 있고 부분적으로는 의지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타당하지 않다. 신앙은 단일한 덕목이요 항상 단일한 성질로 구성된 행위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고전 13장.
4 하나님과 그의 본체
하나님 자신은 자신을 제외하곤 어떤 다른 존재에게도 이해될 수 없다. 딤전6:16,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하나님은 정면으로부터가 아니라 배면(背面)에서 인지된다.
출33:23,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신인동형동성론’적 서술들이 자주 사용되었다. 또 이들은 인간의 이해를 인간의 방식으로 설명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본성보다는 인간 자신의 개념에 따라 언명되었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 뿐 다른 방식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계시된 것은 우리가 올바르게 살기 위해 충분하다. 신29:29,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충족성(sufficientia)과 사역적 권능(efficientia)이다.
롬4: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노니. 충족성과 권능은 신앙의 기둥이요, 위로의 근거요, 경건의 동기요, 참 종교의 진정한 표지이다. 하나님의 충족성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 안에서 충족한 하나님의 성질이다. 따라서 그는 지극히 충족하신 하나님이라 불린다. 창17:1.
하나님의 충족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된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롬4:20. 하나님의 충족성은 그의 본체(essentia)와 그의 실재(subsistentia)에 있다. 하나님의 본체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제 1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사44:6,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계1;8,21:6,22:13,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나님의 본체는 신명(神名) 여호와 즉 주님에 의해 지칭된다. 다음과 같은 진술이 도출된다. 첫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자존하신다. 즉 하나님은 타자로부터 혹은 타자에 의해 혹은 타자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수동적이라고 불리는 성질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불변이시다. 시102:26,27,주는 영존하시겠고 — 주는 여상하시고, 롬1: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 약1:17,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의 본체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본체가 마치 다양한 속성으로 구성된 것처럼 설명할 수 있다. 속성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기보다는 속성(attributes)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대로 하나님에게 귀속되는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단일하며 가장 순수하고 가장 단순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신적 속성들은 서로에 대해 모순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일치한다. 모든 신적 속성들은 신적 완전성이다. 신적 속성들은 하나님 안에 일종의 이차적인 본질로 존재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그가 존재한다고 사유한다.
신적 본체에 속하는 것을 지칭하는 속성 이를테면 전능, 광대함, 영원성과 같은 속성들은 완전히 비공유적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는 하나이시며 무한하시다. 하나님이 본체의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가해하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계신다. 하나님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기능들은 예지와 의지이다. 신앙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며 이를 공급하시기를 원하시는 자를 의뢰한다. 하나님의 예지는 혼합, 논증 혹은 분류도 없이 단순하다. 하나님의 예지는 불변적이며 무한하다. 하나님의 의지의 본성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의지는 단일하며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불변적이며 영원하시며 무한하다. 성경에서 사랑, 미움 등과 같이 하나님에게 귀속된 감정들은 의지의 행위를 지칭하거나 단지 비유적으로만 하나님에게 적용된다.
덕은 예지와 의지의 완전이다. 지혜, 거룩함 등은 하나님 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덕들이다. 하나님이 복되다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완전성은 이러한 모든 속성들로부터 연원한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모든 완전성과 복, 영광의 소유자이며 창시자인 하나님의 의뢰한다는 점에서 확고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5 하나님의 실체(실재)
하나님의 실체(실재,subsistentia), 곧 존재 양태는 위격적 특성들을 가지는 하나님의 본체이다.
동일한 본체가 세 실체에 공통적이다. 따라서 본질에 관련되는 한, 단일한 실체들이 자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실체들은 본체와 구분된다. 실체들은 본질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본체 그 자체와는 구분되기 때문이다. 실체들은 마치 상대적 특성들에 의해 연관된 사물들처럼 서로 구분된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본체이지만 한 실체가 다른 실체가 될 수는 없다. 기원의 순서 및 실존의 방식을 제외하곤 선후 관계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상대적 특성들은 한 본체 안에서의 고유한 능력들로, 영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살아있다. 따라서 실체들은 위격들이라고 지칭된다.
성부의 상대적 특성은 능동적 발생이다. 시2:7,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요3:16,독생자, 히1:6,맏아들, 순서에 있어서 첫 번째이다.
성자의 상대적 속성은 발생되는 것(to beget), 즉 성부로부터 나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의 참여자가 되어 성부의 본성을 완전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성자는 순서에 있어서 두 번째이다. 히1:3,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성령의 속성은 내쉬어지는 것이요 파송되는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는 것이다.
요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롬8:9,그리스도의 영, 갈4:6,아들의 영.
성자에게 적용된 나심(발생,being begotten)과 성령에게 적용된 발출(proceeding)의 차이는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며(proceed)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것 이외에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성경에서는 칭호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자체도 성부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도 부여된다.
렘23:6,여호와 우리의 의, 요1:1,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롬9:5,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딤전3:16,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시고, 계17:14,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이는 성령에게도 주어진다. 행5:3,4,네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다, 행28:25 및 사6:9,여호와께서 이르시대, 성령이 -- 말씀하신 것, 고후6:16,하나님의 성전, 성령의 전.
신적 속성들은 성부에게 인정될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 인정된다. 사9:6,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요2:25,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3:13,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8:58,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도 유사하다. 시139:7,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고전2:10,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히9:14,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의 행동들이 성부에게 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에게도 귀속된다. 선택은 성자에게 귀속된다. 마24:31,그 택하신 자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성령에게 귀속된다. 사40:13,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창조는 성자에게 귀속된다. 요1: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창조는 또한 성령에게 귀속된다. 시33:6,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피조물의 보존과 통치는 성자에게 귀속된다. 히1:3,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그리고 이는 성령에게도 귀속된다. 창1:2,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슥4:6,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신적인 영예와 예배가 성부 뿐만 아니라 성자에게도 귀속된다. 히1:6,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신적인 영예와 예배는 성령에게도 귀속된다. 이는 마치 세례받는 자에게 성령의 이름이 성부와 성자와 함께 호명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28:19,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이 인사의 형태로 호명된다. 고후13:14,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성부 하나님의 성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명명된다는 사실에서 예배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나 성령과 같이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계21:22,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고전3: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6:19, 너희 몸은 —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에게 고유한 권위와 위엄이 성자와 성령에게 귀속된다. 고전2:8,영광의 주, 벧전4:14,영광의 영---. 모든 거룩한 예언이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귀속된다. 벧전3: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벧후1:21,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 말한 것임이니라, 행28:25,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것.
성령이 실존하는 위격으로서 이 모든 방식으로 우리에게 설명되기 때문에, 성경 모든 곳에서는 한 위격에 고유한 모든 행동들과 함께 생명, 예지, 의와 권능이 성령에게 귀속되고 있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의 구분이 되는 차이는 “또 다른 보혜사를 — 보내사—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보내실”(요14장)이란 말씀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모든 방식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시여하기에 충분하시다. 사랑, 은혜, 올바르게 사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온다. 고후13:14.
6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은 만물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 엡1:11,모든 일을 — 역사하시는 자, 롬11:36,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라. 만물의 작용은 그들의 존재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인 모든 환경의 문제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인(動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체와 하나님의 실체의 의미는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은 명백히 하나님의 충족성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능력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본성의 일부로 간주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과 의지에 선행한다. 롬11:23.
신적 전능에 있어서는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절대적 능력과 질서적 능력으로 구분된다. 절대적 능력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3:9,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26: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하나님의 질서적 능력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을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한 것을 실제로 행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시115:3,135:6,엡3:11.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에서 현현되는 하나님의 실체의 의미는 첫째, 신적 위격들이 협동적 사역에서 인지되며, 둘째, 신적 위격들이 활동하는 개별적 방식에서 인지된다. 전자는 신적 위격들이 동일한 일을 불가분리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요5:17,19,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행하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시느니라, 16:13,14,그(성령)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협동적 사역에는 특출한 위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동일한 한 원인으로 더욱 큰 일치와 동일성만 존재한다. 따라 우리는 모든 신적 위격들에게 동등하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역 방식의 차이는 각 위격이 자신의 특정한 실존 양식에 따라 사역한다는 것이 기인한다. 상이한 실존의 양식은 부분적으로는 사역의 질서에서, 부분적으로는 행동의 경계에서 인지된다.
질서에 대해서는 성부의 사역방식은 자신으로부터 성자와 성령을 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시초 즉 창조는 기원의 질서에 있어서 첫 번째 위격인 성부에게 귀속된다. 성자의 사역방식은 성자로부터 성령을 통해서이다. 특히 구속과 모든 교회의 직분의 구성은 성자에게 귀속된다. 엡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 주셨으니.
성령의 사역방식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자신을 통해서이다. 사물의 완성 즉 중생, 딛3:5, 모든 영적 은사의 수여, 고전12:4, 자연물의 완성, 창1:2은 성령에게 귀속된다.
행동의 경계에 있어서는 한 위격의 사역이나 사역방식이 가장 명백히 현현되는 측면은 주로 그 위격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통상적인 구분에 있어서, 창조는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귀속된다.
7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의 실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작정이 선행된다. 이러한 사역방식은 모든 것 중 가장 완전하며 현저하게 신적 본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이 자신의 전능한 능력을 통해 그의 경륜(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시겠다는 확고한 결정이다. 엡1:11,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하나님의 작정에는 하나님의 불변성, 진리, 신실성이 나타난다.
불변성은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토록 변역되지 않는다는 점에 나타난다. 민23:19,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잠19:21,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진리는 하나님은 자신이 작정한 것만을 언명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렘10:10,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롬3:4,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다르게 언명될지라도, 그 의미는 항상 하나님의 작정과 일치한다. 신실함은 그분이 자신이 작정한 모든 것을 작정한 대로 이루신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사46:10,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영원하다. 고전2:7,행15:8. 하나님의 작정은 경륜을 포함한다. 엡1:11,행4:28.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이 예지와 의지에 의해 이미 승인된 것을 성취하시는 최선의 방식에 대해 심사숙고하신다는 것이다. 경륜은 완전한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귀속된다. 모든 일을 사려깊게, 즉 의도적이며 계획적으로 행하신다. 경륜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 즉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에서 현현되고 하나님의 사역들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 혹은 완전성이다.
하나님은 기원에 의해(by genesis) 인식하시며 인간들처럼 분석을 통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전에 먼저 신적 정신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결정하시는 신적 의지의 행위이다. 성경에서 선한 뜻이란 통상적으로 하나님 스스로 구원적 선을 원하고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지칭한다. 이 의지는 지극히 자유롭다. 즉,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롭다. 인간과 천사들에게도 의지의 자유는 공유되지만 이는 하나님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보다 덜 자유롭다.
하나님의 의지는 사물들의 제 1원인이다.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지는 가장 큰 것이나 가장 작은 것, 우연한 것, 필연적인 것, 자유로운 것 등 예외없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사물에 관련하여 이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아야 하며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2,110:4,40:7,8,9;히7:16,21;엡5:25;딤후1:9,
바로에 대해서는 출13장, 하나님이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정복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일을 주관한다. 즉,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게 했지만 여전히 바로와 이스라엘은 자유롭게 활동했다. 마찬가지로 요셉을 팔아버릴 때에는 모든 일이 우연적이며 자유롭게 발생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이를 결정했다.
이는 인간 심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33:14,15, 삼상10:9,26, 잠21:1. 우연히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출21:13; 제비를 뽑는 것에 대해서도, 참새가 땅에 떨어지고 인간의 머리털 하나에 대해서도 마10:29,30; 백합화들, 꽃들, 들풀에 대해서도, 마6:28,30;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욥38장, 시104편, 사45:7, 렘14:22, 마찬가지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의지는 단순하고 또한 보편적으로 제 1원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의지에서의 사역의 방식은 신적 지식과 능력에서와 다르다. 왜냐하면 지식은 인식될 모든 것을 인식하고 능력은 모든 가능한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적 지식과 능력은 실제로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며 장차 존재할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지에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하지 않고 그가 원해져야 한다고 판단한 모든 것 혹은 실제로 일어난 모든 것을 원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지하고 전능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무엇이나 의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원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효과적이다. 하나님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 방해받거나 좌절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고 성취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지복하거나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미래의 모든 일에서의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확실성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뼈가 꺾이우지 않아야 한다는 사건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정들, 그들의 창, 그리고 그때 현존했던 부차적인 원인들에 있어서는 필연성이 부과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들에 있어서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가장 이성에 따라 사역하므로, 목적을 목적에 대한 수단 이전에 두도록 원하신다. 하나님은 수단 중에서도 목적에 가장 가까운 수단을 먼저 원하신다. 최초로 실행되는 것은 의도의 질서에 있어서는 마지막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부분적으로는 감추어져 있고 부분적으로는 계시된다. 신29:29.
8 창조
창조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을 만드시고 전적으로 좋다고 하신 하나님의 사역적 권능이다. 창조는 전 세계 즉 하나님 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련된다. 형상 뿐 아니라 질료에 있어서도 완전히 창조된 것이다. 창조는 존재를 존재로서만 생성시키지 않고 절대적으로 모든 요소를 생성시킨다는 점에서 전무후무하다.
창조는 무로부터 이루어졌다. 즉 창조는 선재(先在) 없이 피조물과 함께 존재한 질료로부터 이루어졌다. 하나님 이외는 어떤 것도 영원 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창조자일 뿐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던 태초란 무의 존속의 종결이요, 세계의 존속의 발단이었다. 세계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물들의 현존하는 섭리와 질서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존재할 수도 없었다.
창조된 것은 매우 선하다. 창조자가 염두에 두었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딤전4:4,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이 선하매. 피조물의 선이란 그 사물이 지닌 용도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들의 선으로 인해 본성적으로 그들이 연유한 하나님을 지향한다. 왜냐하면 제 2의 존재는 제 1의 존재로부터 나오고 제 1의 존재를 위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피조물과 공존한다. 이는 ‘태초에’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장소 즉 피조물의 연장이 규정되는 공간도 역시 사물과 공존한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엄격히 말하자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창조되거나 혹은 연관된다. 시간과 공간은 오직 상대적인 지위만 지닐 뿐 절대적인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소망에서 소망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처럼 기대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창조의 부분들이란 지고의 하늘과 그곳에 거하는 천사들이다. 지고의 하늘이란 하나님의 거룩함의 거주지로 영원한 복락에 속하는 모든 것들로 충만하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다. 이는 3층천, 최고의 하늘, 하늘들의 하늘, 낙원이라고 명명된다. 왕상8:27,마8:11,막12:25,고후12:2,3. 이는 창1:1과 히11:10,16에서의 하늘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도록 창조된 최초의 완전한 영들이다. 천사들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골1:16, 시148:5에서 나타난다. 천사들이 지고의 하늘과 함께 첫 번째 날에 창조되었다는 것은, 첫째, 천사들의 본성이 지고의 하늘의 본성과 유사하며, 둘째, 천사들은 다른 사물들의 창조 시에 하나님을 기쁘게 찬송하였다는 점, 욥38:7에서 나타난다. 천사들은 영들, 히1:14, 눅24:39,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며, 히1:7,14, 기도의 완전성과 불멸의 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눅20:36.
천사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특별히 영생의 상속자를 위해서 사역한다. 히1:14,시91:11,34:7. 천사들은 거룩함과 의에 있어서 순전하게 창조되었다. 천사들은 만만에 이를만큼 다수이다. 임무와 관심 대상에 따라 구분된다. 천사들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에만 복종한다.
사물들의 온전한 실존의 창조에 있어서는 두 가지 문제, 즉 방식과 순서가 고려되어야 한다.
창조 방식은 다음 네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첫째는 모든 것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있으라, 이것 혹은 저것이 있으라.’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생성된 모든 것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승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셋째는 하나님이 모든 것에 용도를 부과하는 질서적 능력이다. ‘그것이 이러저러한 목적대로 되라.’ 넷째는 질서적 능력이 적용되는 사물에 있어서 영원히 준수되어야 할 법과 질서의 확립이다.
창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지고의 하늘들, 천사들, 비형상적 덩어리가 만들어진 이후 첫째 날에는 그 덩어리의 가장 미세한 부분은 위로 부르심을 받고 빛, 즉 빛나는 불이 되었다. 둘째 날에는 공기가 그 매우 미세한 요소로부터 빛에 가장 가깝게 만들어졌다. 셋째 날에는 덩어리의 보다 두꺼운 부분이 나뉘어져서 물들의 대부분이 우묵한 곳에 모임으로써 바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육지가 풀과 나무로 장식되어 출현한다. 넷째 날에는 하늘의 발광체들이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섯째 날에는 물과 공중에 사는 물고기들과 새들이 생성되었다. 여섯째 날에는 모든 짐승들이 생성되었는데 처음에는 비이성적 동물이 그 다음에는 인간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하늘과 땅 및 모든 피조물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순서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선이 풍부하게 현현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이 풀과 채소와 나무를 통상적으로는 이들의 생장에 원인이 되는 태양과 별들보다 먼저 창조했다는 점에서 현현된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이 서식지를 서식동물보다 먼저 창조하고, 음식을 피조물보다 먼저 창조하고, 인간에게 유용한 것들을 인간보다 먼저 창조했다는 점에서 현현된다. 피조물들의 마지막인 인간은 모든 것들의 총화요, 절대적으로도 일시적으로도 완전하다. 절대적인 완전은 그의 영혼에서 발견되며 일시적인 완전은 그의 몸에서 발견된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피조물들은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등 오직 말씀으로만 지어졌는데 인간은 보다 위대한 계획과 심사숙고로써 지어졌다. 몸이 먼저 예비되고 후에 영혼이 불어넣어졌다. 몸은 원소적 질료로 만들어졌지만 영혼은 선행적으로 존재하는 질료가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에 의해 만들어졌다.
몸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되는 아름다움과 유용성의 구현에서 나타난다, 창2:25,롬6:13. 영혼의 완전성은 그 불멸의 본성에 있다. 자신의 행동들에서의- 지성과 의지에서의- 자유를 구가하게 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이에 부합되게 하는 은사들 즉 지혜, 거룩, 의의 수여에서도 현현된다, 엡4:24,골3:10.
인간의 외적 완전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피조물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 구성된다, 창1:26,2:19,20. 인간은 땅을 경작하고 땅의 식물들로부터 음식을 구하도록 위임받았다, 창2:15. 여기서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주인인 인간에게 다가오게 되었고 이름들이 부여되었다, 창2:15. 이러한 일들이 결합되어 인간의 완전성은 완성되었다. 그 완전성으로부터 일정한 하나님의 형상 혹은 신적 완전성이 연원되었다.
인간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졌고, 양자는 영혼이 관련되는 한 무로부터 지어졌다. 남자의 몸은 다른 원소들과 함께 흙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여자의 몸은 남자로부터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남자의 안녕을 위해서 어떤 것도 누락되지 않게 되었다, 고전11:8,9. 이렇게 창조를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은 자연의 질서를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한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4:6.
9 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의 경륜에 일치하도록 현존하는 피조물들을 만물 안에서 보존하시는 사역이다. 섭리는 여하한 원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원인들을 결정하고 따라서 만물의 보편적이며 개별적인 원인이다.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일을 직접적으로 성취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곳에 현존하시며 직접적으로, 내적으로 만물 가운데서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성으로 인해 제 2의 원인들이 통용되는 사물들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사역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매개적인 주체들과 제 2원인들의 힘을 통해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넘치는 선에 의해 수단들을 활용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일정한 사역의 위엄을 전달하며 피조물들 안에서 자신의 사역이 인지될 수 있도록 하신다. 삼상14:6,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따라서 하나님은 종종 가장 가치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볼품없는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고전1:27,28,암9:5,대하24:24. 그리고 종종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방법도 무력화시킨다, 시33:16,127:1,2,호4:10.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들에 주목하거나 수단들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선한 뜻대로 수단들을 통해 혹은 수단들 없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단3: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이고 통상적이든지, 특별하고 비상하다.
일반적인 섭리는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된 사물들의 질서, 즉 어떤 것들이 먼저 오고 어떤 결과들이 뒤따를 것을 요구하는 질서를 준수하신다는 것이다. 호2:21,22,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자연물에 있어서의 질서는 만물에 공통된 자연법 혹은 사물들의 본성 자체이다. 이는 태초에 주어진 결코 반복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힘-그것이 지어져라, 그것이 있으라, 그렇게 되었다-으로부터 연유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래의 형태의 윤곽을 설정하여, 영속성과 불변성을 지칭한다. 렘31:35,36,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33:20,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
특별한 섭리는 하나님께서 통상적이고 제정된 질서를 초월하여 사물을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기적이라 불린다. 기적은 제정된 질서를 초월하는 사역이다. 행위자의 전능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기적들의 창시자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승인을 얻어 기적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보존적이든지 통치적이다.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모든 만물들을 능력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본질이나 실존에 있어서 계속 유지되고 보존되도록 사역하시는 것이다.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 "하나님이 손으로 붙드심"이라고 명명되었다. 만물을 마치 손으로 붙드시는 것처럼 유지하신다.
보존은 피조물이 모든 면에 있어서, 즉 창조뿐만 아니라 존재, 실존, 보존, 작용에 있어서도 창조주에 의존하므로 피조물에게는 필수적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이를 지탱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유래한 무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보존은 말하자면 계속적 창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는 창조와 결합되어 있다. 느9:6,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니.
통치는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고유한 목적으로 지도하고 인도하는 능력이다. 시29:10,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통치는 본질적으로 그 목적을 위한 적절한 수단 뿐만 아니라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따라서 통치의 본질은 확실하고 부동적이며 파기될 수 없다.
통치는 모든 사물들의 작용에서 현현된다. 첫째, 모든 사물들은 본래적으로 목적을 지향한다. 따라서 사물들은 모든 곳에 편재하며 전능하신 지성에 의해, 즉 하나님 자신에 의해 주관되고 통치되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욥38:26,27,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사55:10,비와 눈이 —파종하는 것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둘째, 자연의 작용은 너무도 정확하고 이성적이어서 이들은 최고의 이성으로부터 연유하지 않을 수 없다. 잠30:25-28. 셋째,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완전성을 추구케 하는 질서적 능력 외에도, 만물은 공동사회를 계발하고 자신들보다는 전체를 보존하기를 열망한다(진공을 채우기 위해 무거운 것들이 위로 이송되는데서 나타나듯).
모든 제 2의 원인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능력에 의해 일정 정도 미리 결정된다. 첫째, 이들은 영향력 혹은 이전의 운동에 의해 움직이도록 자극받는다. 일부 그러한 과정은 이전에는 오직 잠재적으로 피조물 안에 존재했던 것을 운동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다. 둘째, 제 2원인들은 이들이 작용하도록 지향된 대상에 적용된다. 겔21:21,삼하16:10. 셋째, 동일한 통치의 능력으로 제 2원인들은 질서를 부여받는다. 즉 제 2원인들의 작용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와 경계가 설정된다. 욥1:12,2:6,38:10. 일정한 선이 제 2원인들의 작용으로부터 도출된다.
피조물 안에서의 힘의 작용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들을 매개하는 피조물들을 의뢰해서는 안 된다.
10 지성적 피조물에 대한 특별한 통치
특별한 통치는 하나님이 이성적 피조물을 도덕적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피조물들의 고유한 특성이 통치방식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성적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불멸하며, 자신의 지혜에 일치되도록 행동들을 결단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지혜와 자유에 일치되어 행복과 불행의 영원한 상태를 지향하도록 명령되었다.
도덕적 통치는 가르침과 이미 전에 가르친 것의 실행에 달려있다. 미6:8,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신30:15,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는 도덕적 삶을 위한 규범으로서 이성적 피조물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는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를 확증함에 있어서 가르침에 의해 통치하신다.
법은 명령하고 금지함으로써 제정된다. 법은 약속하고 위협을 줌으로써 확증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가르쳤던 것을 수행할 때, 이를 성취함으로써 통치하신다. 렘32:19,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그 길과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 이성적 피조물에 대한 특별한 통치방식으로부터 하나님과 피조물간의 언약이 발생한다. 언약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일종의 협약으로 여기서 하나님은 명령하고 약속하고 위협하시며 성취하시고 피조물은 그렇게 요구하는 하나님에게 순종한다. 신26:16-19,오늘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시나니— 네가 오늘날— 그 소리를 들으리라 확언하였고 여호와께서도 —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였은즉— 여호와께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을 맺는 방식은 법 앞에서 평등한 자들 간의 언약이 아니라 주인과 종 사이의 언약이다. 따라서 통치와 관련된다. 이는 인간의 언약이 아니라 창시자요 주요한 행위자이신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 본 언약에서는 지성적인 피조물의 도덕적 행위들은 보답으로써 행복 혹은 형벌로써 불행으로 인도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판단에 복속하는 지성적 피조물의 자기 판단이다.
이성적 피조물들에 대한 특별한 통치는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적용된다. 천사들에 대한 특별한 통치는 특별한 금지명령이든지 추후의 사건의 제정이다. 본질적으로는 이는 십계명의 도덕법과 동일한 법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의 본성이나 유한한 인생의 상황과 관련된 명령들은 예외이다.
많은 천사들이 자유를 남용하여 배교했다. 이들은 그때부터 악에 완고해졌고 최대의 불행을 선고받았다. 유6,벧후2:4, 따라서 악한 천사들은 더러운 영들이요 어둠의 영들이다. 눅8:2,9:42. 천사들의 타락의 시기에 대해서는 오직 아담의 타락 이전에 발생했다고만 말할 수 있다. 지은 죄의 종류에 대해서는, 이들의 최초의 동기가 교만이었다고 매우 개연적으로 말할 수 있다.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에게 최종적인 형태의 형벌이 부과되지 않았으며 이들에 대한 최후의 형벌은 세계 종말시에 주어질 것이라고 언명한다. 마25:41,고전6:3.
인간의 통치에 있어서도 천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것- 법의 규정과 추후의 사건의 결정-이 준수되어야 했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동일한 도덕적 본질이 있다. 인간은 천사들보다 불완전하고 보다 많은 교육과 실천이 필요하므로 적극적인 어떤 것이 자연법에 추가되었다.
아담이 첫 번째이고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연원하기 때문에 법은 천사들에서와 같이 개인으로서의 아담에게 주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공인으로서 혹은 인류가족의 수장으로서 아담에게 주어졌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든 선과 악을 아담으로부터 획득해야 했다. 행17:26, 롬5:18,19, 고전15:21,22.
하나님의 법 혹은 창조시 인간과의 언약은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라. 만약 이를 행하지 아니하면, 죽을 것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들에서 최초에는 명령이 있고 그리고 약속-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과 마지막으로 위협-이를 행하지 아니하면 죽으리라-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언약에서는 두 가지 상징과 성례가 있었다. 순종에 대한 보답은 생명나무로 표시되었고 불순종에 대한 형벌은 선악과의 나무로 표시되었다. 전자는 생명의 성례이며 후자는 사망의 성례이다.
11 인간의 배교 혹은 타락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특별한 통치의 첫 번째 부분인 법을 규정한 것에 대해 다루었다. 다른 부분은 추후 사건들의 제정이다. 인간에게는 사건들을 제정할 때 두 가지 것이 고려되었다. 아포스타시스와 아나스타시스, 즉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회복이다. 롬5:19,고전15:21.
천사들에 있어서는 일부는 보존되고 일부는 타락했지만, 배교한 천사들의 아나스타시스, 즉 회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이 태초에 한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보존과 배교가 함께 병존할 수는 없었다. 즉 인간들 일부가 타락으로부터 보존될 수 없었고 다른 인간들도 동일한 한 아담 안에서 타락한다. 최초의 인간의 죄에 있어서는 모든 인류의 본성이 소멸했다. 인간의 배교는 하나님에게 돌려야 할 순종으로부터의 타락 혹은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법에 대한 위반이다.
타락은 범죄함과 죄의 전파가 고려되어야 한다. 범죄함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명명된 나무로부터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데서 발생했다. 불순종의 첫 번째 운동 혹은 단계는 필연적으로 따먹는 행위보다 선행되었고 인간은 금지된 열매를 따먹기 이전에 이미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와의 금지된 열매에게 접근하려는 욕망이 죄의 한 단계를 나타낸다. 창3:6,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이 불순종의 첫 번째 운동과 단계는 마음의 교만으로 인한 일종의 우월감에 대한 전도(顚倒)된 욕망이었다. 하와는 이러한 우월감을 획득하기 위해- 하나님의 금령은 하와의 불충성 안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그러한 우월감을 부여해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금지된 열매를 시험해보려고 했다. 따라서 교만, 배은망덕, 불충성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한 맹세의 위반을 포함한 하와의 죄의 심각성은 불순종에 대한 일반적 선언 및 언약 전체에 대한 경멸을 보여준다. 이는 죄인의 상황이 완전성에 가까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보다 흉악한 것이다.
범죄함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주요한 원인은 하나이며 다른 이차적인 원인들이 존재한다. 주요한 원인은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의 남용에 있다. 그는 자신이 순종하기를 선택한다면 계속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의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에게 주어진 의와 은혜는 아담의 범죄 전에는 아담으로부터 박탈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확실하고 지혜롭고 공의로운 경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다. 또 하나님은 범죄할 필연성을 부과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했다.
부수적인 원인들은 사탄과 여자였다. 사탄의 첫 번째 죄는 교만이다. 사탄은 전도(顚倒)된 우월감을 취함으로써 정해진 우월감을 상실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의 우월감은 사탄을 괴롭게 했고 사탄은 이를 대적하는 데 전념했다. 하지만 사탄은 강제적인 원인은 아니며 그러한 죄를 야기시키는 충족하고 직접적, 필연적이고 확고한 힘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사탄은 유혹을 통해 의논하고 설득하는 원인일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탄은 유혹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4:3. 사탄의 유혹은 허위적 혹은 왜곡된 논증이며 이로써 사탄은 진리이며 선한 것을 가장하여 허위로 미혹시키고 악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유혹에서 사탄이 언명하고 약속하던 선은 마치 최대의 선인 것처럼 제시되었다. 그것을 성취하는 방식은 단순하고 용이한 듯 가장되었다. 인간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최대의 악이 인간에게는 숨겨져 있었다.
사탄은 인류를 미혹시키는 모든 유혹에 있어서 동일한 일을 행한다. 본 유혹에서는 매우 교활하고 간악한 특별한 궤계가 발견된다. 첫째, 사탄은 뱀을 활용했다. 뱀의 본래적인 성향을 악용했다. 둘째, 사탄은 여자에게 접근했다, 딤전2:14. 남편의 부재 여부는 성경에 언급이 없다. 셋째, 사탄은 첫 번째 대화에서는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가 그 문제에 대해 무지한 것처럼 여자에게 질문만 던졌을 뿐이다. '하나님이 참으로--(말씀)하시더냐?'
넷째, 사탄의 질문은 모호했다. 다섯째, 사탄의 질문에 의해 하나님을 의심하게 했을 때, 사탄은 동요하는 여자의 심중에 너무나도 간교하게 이에 대한 제재 혹은 위협을 제거시켜서, 하와는 진리 자체 혹은 최소한 진리의 필요성을 부인할 수 있었다. 여섯째,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과 제재를 약화시킨 후에 정반대의 예언을 한다. 일곱째, 사탄은 자신의 예언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 그 나무에게 주신 이름을 도용하였다. 창3: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따라서 사탄은 뱀, 거짓말장이, 유혹자, 살인자라고 불리어진다, 계12;9,요8:44,계20:10.
사탄의 유혹에는 하나님의 시험도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로써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을 보여주도록 그 사건을 정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한 시험은 악도 아니요 악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세 번째 시험 즉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수반되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시험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줄런지(비록 그가 하나님을 붙들지 않았으면서도), 그리고 그가 실제로 위협한 대로 행하실 것인지를 보려고 했다.
네 번째 시험은 이와 연관해서 하와 안에 일어났다. 하와는 사탄의 유혹 혹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를 자신에게 적용시켜 파멸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다섯 번째 시험이 발생했다. 즉, 여자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남자를 시험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여섯 번째 시험이 일어나는데, 아담이 여자와 사탄에게 의도적으로 동의하여 시험에 빠지게 된다.
모든 혹은 대부분의 시험은 개개인의 죄들로부터 발견된다. 그리고 인류의 타락을 야기시킨 죄는 아담에게서 완성되었다.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 인류의 시조이다. 성경에서 두 번째 아담에 대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두 번째 하와에 대한 구절들은 발견할 수 없다.
12 죄의 결과들
죄의 결과는 첫째 죄책과 부패, 둘째 형벌이다. 죄책이란 자신의 죄에 대해 정당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의 의무이다. 레5:2-5,(그에게) 허물이 있다; 롬3:9,19,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정죄)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5:17,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죄책은 죄의 형태가 아니라 상태 혹은 결과요, 부분적으로는 분리가 가능하며 부분적으로는 분리할 수 없다. 죄책은 죄를 따른다. 죄책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법 때문이며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이다. 그럼에도 죄책은 죄로부터 유래하며 형벌은 정당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죄책은 죄의 본성에 참여하며 악한 것이다. 죄책은 죄와 분리될 수 없다. 죄책의 이러한 이중적 측면은 롬1:32에서 예시된다.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죄책 다음에는 고소하고 정죄하는 양심의 고통이 뒤따른다. 그 후에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하나님의 현존에서 도피하게 된다. 창3:8,히2:15,롬8:15.
부패란 죄인이 모든 위엄과 영예를 상실하고 악하게 되는 영적 오염이다. 마15:11,계22:11.
부패는 범죄 이후 즉시 수반되었으며, 죄의 행동이 지나가버린 이후에도 죄인 안에 남는다. 이는 죄의 오점, 후패함, 더럽혀짐, 비천, 부정직, 벌거벗음, 불결, 흠, 때로는 죄과라 불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유래한다. 첫째,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사1:15-이는 더 큰 죄악들과 관련해서 패역, 가증한 것이라고도 불린다. 둘째, 인간이 당황할 정도로 수치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수치감은 부패에 대한 인식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이다.
형벌은 죄에 대해 죄인에게 가해진 악이다. 형벌은 선의 결여라는 의미에서 악이라고 불린다.
형벌은 형벌받는 죄인 안에서 행복이라는 선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형벌은 단순히 계약된 악이 아니라 부과된 악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형벌은 보상적이며 보복적 정의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형벌은 범죄를 뒤따른다. 이는 범죄가 금지 되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형벌은 죄책에 따른다.
이는 형벌의 위협이 그러한 내용이었다는 데 기인한다. 형벌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 특히 거룩함, 의, 긍휼이 현현된다. 형벌에 있어서는 특별히 죄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일점의 죄도 없이 순결한 하나님의 거룩함이 현현된다. 시5: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합1:13,주께서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형벌에서 특별히 현현되는 하나님의 보복적 공의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악을 부과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살후1:6,7,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죄에 대해서만 불타오르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는 진노라고 불린다, 롬1:18,엡5:6. 진노가 보다 강해지면 분노라고 불린다,신29;20. 이는 죄인에 대해 내려지는 선고를 의미할 때는 판단이라고 불린다,롬2;5, 그리고 내려진 선고를 집행할 때는 원수갚는 것이라고 불린다,히10:30.
죄에 대해 인간에게 부과된 형벌은 죽음이다, 창2:17,롬5:12. 죽음은 생명의 비참한 박탈이다.
인간은 생명에 의해 영혼과 몸의 결합과 그 상태에서의 인간에게 속한 모든 종류의 완전성이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자연에 대해 제정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죄에 대한 응징으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따라서 죽음은 죄로부터 유래한다. 죄는 죽음을 삯으로 받고 죽음을 획득한다. 하지만 죽음은 단순한 생명의 박탈만이 아니다. 이는 비참함으로의 예속과 연관된다. 이는 죄인을 제거하는 것 이상이다. 왜냐하면 비참의 주체 이외에도 비참 자체도 수행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상징을 보유한 낙원에서의 축출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유비요 진술로 볼 수 있다,창3:22-24.
죽음-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에는 두 단계, 즉 발단과 완성이 있다. 또 죽음에는 두 가지 부분, 즉 상실의 형벌, 즉 박탈의 부분과 양심의 형벌 즉 적극적 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죽음, 즉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이 있다.
상실의 형태에서의 영적인 죽음의 발단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멸 즉 은혜와 원의(原義)의 상실이다. 롬3:23,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엡4:18,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은혜의 상실로 인해 인간은 모든 구원적 은사들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그의 본성은 약화되었고 전도되었으며 손상되었다.
영적인 죽음의 발단은 영적인 예속이다. 영적인 예속은 어둠의 권세 혹은 영적으로 사망한 적대자들에게 예속되는 것이다. 골1: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벧후2:19,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이는 사탄과 사탄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예속이다. 사탄에의 예속은 사탄이 인간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사탄의 권세로의 예속이다. 사탄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사탄의 종들에 대한 예속은 세상과 죄로의 예속이다. 세상으로의 예속이란 세상에서 발견되는 사악한 동기들로의 예속이다. 죄로의 예속은 인간이 죄에 사로잡혀 여기서 탈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3 원죄
최초의 타락에 수반되는 죄는 원죄든지 자범죄이다. 원죄는 인간의 전체 본성의 성벽적인 일탈, 혹은 하나님의 법의 거역이다. 원죄는 전인적인 부패이기 때문에 성경은 옛 사람,롬6:6,엡4:22,골3:9; 죄의 몸,롬6:6,7:24;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롬7:23; 지체,골3:5; 육,요3:6롬7:5,18,25에 대해 언급한다.
성경에서는 동일한 부패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인에게 귀속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각 부분에게도 적용된다. 이는 지성에 적용되며 창6:5,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심을 보시고; 롬8:5-7,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딛1:15에서는 양심에 적용된다.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자니라’. 창8:21에서는 의지에 적용된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롬8:24에서는 모든 종류의 감정에 적용된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롬6:19에서는 몸과 그 지체들에게 적용된다.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원죄는 인간 안에서의 일탈 혹은 거역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원죄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도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부과된 법에 대한 순종이 항상 결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래의 부패는 성경에 특별한 의미에서의 죄, 그 죄, 롬6:12,7:17,7:8,20; 죄의 법, 롬7:23;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 속에 있으며— 함께 있고— 얽매이기 쉬운 죄,롬7:17,20,21,히12:1라고 불리어진다.
인간 안에서의 이러한 전도(顚倒)는 두 가지 부분, 즉 형상적인 부분과 질료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렘2: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자범죄는 마치 어머니와 딸의 관계처럼 원죄를 반영한다. 형상적 부분이란 선을 대한 혐오이다. 롬3:12,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질료적 부분이란 악을 지향하고 악에로의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롬7:23,죄의 법.
원래의 부패로 인해 죄의 상태에서의 인간의 의지는 의지가 수행하는 행동들에 있어서는 자유롭지만, 행동들을 수행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사로잡혀 예속되어 있다. 의지는 올바르게 의도하는 능력을 박탈당했으며 의지의 목적이 선한 경우에도 결국 잘못 의도하는 형태를 취한다. 롬3:12,7:14,고후3:5,요8:34.
14 자범죄
자범죄는 인간 행위의 일탈 혹은 하나님의 법의 거역을 말한다,요일3:4. 자범죄는 마치 행위가 성벽에서 발원하고 개인의 잘못된 행위가 그 본성의 부패에서 발원하듯이 원죄로부터 발원한다.
자범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도에 있어서는 어떤 죄가 다른 죄보다 크고 작다고 말할 수 있다. 겔5:6,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여; 8:15,너는 이보다 더 가증한 일을 보리라. 요19:11,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형벌도 크거나 적을 수 있다. 눅12:47,48,주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마11:22,24.
자범죄는 태만(ommission)의 죄와 범과(commission)의 죄로 구분된다. 이들은 원죄의 두 부분들이다. 원죄는 선으로부터의 일탈과 악의 지향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원죄로부터 유래한 자범죄도 이러한 이중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 선으로부터의 일탈이 지배적일 때 그 죄는 태만의 죄라고 볼 수 있고 악으로의 지향이 지배적이면 범과의 죄라고 볼 수 있다. 태만의 죄는 행해야 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약4:17,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범과의 죄는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이다.
죄들은 범과이든, 태만이든 이들이 매일매일 증가되어 상습적이며 오래될 때에는 악한 습관이 형성된다. 동시에 죄들은 단단한 피부로 의지와 마음을 감싸게 된다. 렘13:23,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행을 할 수 있으리라. 엡4:19,저희가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의식적 실현의 형태에서는 절망과 함께 심각한 양심의 공포가 존재한다. 히10:26,27; 창4:13.
이러한 공포는 죄책과 임박한 형벌의 불가피성을 보다 깊이, 점증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기인한다.
15 육체적 죽음
상실의 의미에서 육체적 죽음의 발단은 내적이거나 외적이다. 내적인 죽음은 육체 중 내적인 선한 것들, 즉 건강과 생기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신28:21,22,27,35; 고전11:30; 마9:2.
치사상태란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요, 가능성이다.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유대를 해체시키거나 느슨하게 하는 것이다. 상실의 의미에서 죽음의 외적인 발단은 생명이 증진되고 유지되게 하는 외적인 선한 것들이 스러지는 것이다.
의식적 실현 형태로서의 육체적 죽음의 시초는 내적이든지 외적이다. 내적인 것들로는 피로, 고통과 질병이 있다. 외적인 것들로는 인간의 외적 삶이 예속되는 모든 재앙들이 있다. 이러한 육체적 형벌에서의 완화책은 내적이며 외적이다. 내적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함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삶의 기회와 합당한 수명을 가진다는 것에서 나타난다,창6:3. 외적으로는 이전의 피조물에 대한 지배의 흔적들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신적 허가와 용서에 의해 피조물들을 활용할 수 있다. 생명이 인간에게 부여되고 연장되었으며, 인간은 생명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16 죽음의 완성
죽음의 완성은 최고의 형벌이다. 이는 영원히 지속적이며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상실과 박탈이라는 관점에서 무한하다. 형벌에서는 죄의 등급과 상응하는 등급이 존재한다. 눅12:47,주인의 뜻을 알고도 —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형벌은 영원히 지속되고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 막9:44,46,48,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죄과의 영원성과 상황의 불가변성에 기인하여 이로부터의 복귀의 길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형벌은 영원하다.
상실의 관점에서 영적인 죽음의 완성은 인간의 하나님 존전, 현존, 호의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유기를 의미한다. 마7:23,내게서 떠나가라 25:41,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살후1:9,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영적인 죽음의 완성은 완전한 의미로 사탄의 능력에 예속되어 전적으로 사탄에게 넘겨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25:41. 여기에 완전한 의미의 양심과 죄에 대한 공포가 엄습한다. 이들은 혹독한 형벌에 의해 야기되는 증오, 시기, 모욕, 혹은 이와 유사한 감정들로 계속해서 범죄한다. 따라서 버려진 자의 죄들은 산 자의 죄들보다 더욱 심한 형벌을 받게 된다. 양심의 공포는 영원히 괴롭히는 벌레라고 말할 수 있다, 막9:44,사66:24.
영적인 죽음과 더불어 육체적 죽음의 완성은 첫째,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를 통해 일어난다. 둘째, 영혼과 신체가 지옥 즉 하나님이 죄에 대한 극도의 고통을 위해 예비해놓은 장소로 던져지는 것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영혼과 육체의 극도의 고통이 일어난다, 눅16:23. 회한과 울부짖음과 이를 가는 것과 이와 유사한 극도의 고통의 표현들이 나타난다, 눅13:28. 하지만 지옥의 위치와 고통의 방식, 부수적인 상황들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에서 명확하게 언명되지 않는다.
17 죄의 전파
죄의 전파란 자연적인 방식으로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아담의 상황에 참여하는 것이다. 욥14:5,시51:7, 롬5:14, 엡2:3. 이는 하나님의 정당한 제정에 의해 일어났다. 죄의 전파는 두 가지 부분, 즉 전가(imputation)와 실제적인 전달로 구성된다. 전가는 아담의 개인적 불순종 행위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실제적인 전달은 아담의 개인적인 죄가 비록 우리의 죄는 아닐지라도 의미와 본성에 있어서 우리의 것과 유사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원의의 결핍이요 형벌로서 최초의 범죄 이후에 일어나는 원죄는 형벌의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의 의에 의해 원의가 거절된다는 점에서 원죄는 형벌이다. 우리 안에 존재해야 하지만 인간의 죄과로 인해 그렇지 못한다는 점에서 원죄는 죄다. 따라서 원의의 박탈은 아담으로부터 합당한 형벌의 형태로 전해진다. 원의의 박탈과 함께 모든 육체적 능력의 부조화와 왜곡이 전달되며, 이는 하나님에 의해 인가된 것을 수행하는 정당한 방식과 갈등을 야기시킨다.
모든 능력들을 통제하는 의의 박탈과 함께 이런 기능들에 있어서도 결함이 생겨 여하한 도덕적 상황에서도 본 기능들의 성향은 도덕적으로 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실제의 죄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빛을 박탈에 의해 어두워진 마음이 오류들을 용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죄의 전파로부터 죽음의 발단과 완성, 상실의 형태뿐만 아니라 의식적 실현의 형태, 영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 죽음 등 모든 종류의 죽음이 아담의 후손에게 전파된다.
18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
인간의 회복이란 인간이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은혜와 생명의 상태로 고양되는 것이다. 회복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목적이었다. 엡1:9,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이러한 회복을 야기시킬 만한 어떠한 능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은 정반대의 일을 많이 행한다. 죄가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롬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회복에는 두 가지 부분, 즉 구속과 그 적용이 있다. 전자는 우리 구원의 충족성이며 후자는 이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분들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구속의 목적은 그 적용에 있으며 적용의 최초의 이유, 규범, 범위는 구속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 자체이다. 엡1:9,10,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한 것이니 —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구속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획득된 각자와 모두에게 적용된다. 요6:37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다.
구속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인간을 죄와 사단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벧전1:18,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요—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 고전6: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러한 해방은 권능이나 기도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며-하지만 이들은 이를 완성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정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행해진다.
인간에 의해서 지불될 수 없는 대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여 이들을 완전히 화해시킬 중보자의 사역을 요구했다. 딤전2:5,행20:28,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딤전2:5,6,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그러한 중보자는 한 시대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영원히 주어진다. 히13:8,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계13: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때가 찼을 때에야 현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당하다. 중보는 모든 시대에 동등하게 필요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작정과 약속, 승인으로 인해 태초부터 충족적이며 효과적이었다.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행4:12,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가지, 즉 그가 구속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적합성 및 구속 자체의 부분들이 고찰되어야 한다. 적합성은 그리스도의 위격으로 이루어졌고, 또한 그리스도의 위격에 부가된 직분이다.
그리스도의 위격에서는 두 본성 간의 구분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의 결합 등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란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 2위격이라는 점에서 신성을 지니고, 우리와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죄와 실존양식을 제외하고는)에서 인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마1:23,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요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두 본성 간의 구분은 지속된다. 이는 두 본성이 본질과 본질적 특성에 있어서 이들이 결합되기 전과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잔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과 결코 변화되거나 혼합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혼동되지 아니하며 인성도 신성과 변화, 혼합, 혼동되지 아니한다.
인격적 결합이란 신성의 제 2위격이 인성을 취해 동일한 인격 안에 불가분리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요1:14. 신성의 제 2위격은 비록 하나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만 이중적 실존양식을 가진다. 하나는 영원 전부터의 신적 본성에 있는 실존양식이요, 또 하나는 성육신 이후 인성 안에 있는 실존양식이다. 롬9:5,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 두 번째 실존양식은 인성과 결합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에 속한다.
인성에 있어서 본 결합은 인성이 최고의 완전성으로 고양되도록 변화를 일으킨다. 인성은 말하자면 이를 위한 신적 위격의 특성이 된다. 인성은 신성이 또 한 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신인의 지체이다. 실존양식의 영역에서는 인성은 신성이 특별히 거주하는 주체일 뿐만 아니라 신성에 의해 특별히 유지되는 외양이 된다, 골2:9. 본 결합은 신비적이요 은밀하고 따라서 인간의 단어와 개념으로는 명확히 표현될 수 없고 다만 어렴풋하게만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와 고통들은 비록 기원과 형태에 따라 일부는 한 본성에 관련되고 일부는 다른 본성에 관련되지만, 하나의 책임적인 그분의 전 인격에 관련된다. 각 본성의 속성들은 전 인격에 부여되는데 이로써 그리스도가 죽었다거나(이는 오직 인성에만 관련된다) 태초부터 계셨다(이는 신성에만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하나의 인격으로 인해 각 본성의 속성들이 또 다른 본성에 귀속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올리셨으며’(딤전3:16), ‘십자가에 달리셨다’(고전2:8)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신성에는 속하지 않고 오직 인성에만 속한다. 그리고 전 인격에 고유한 것들도 각 본성에 귀속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라고 할 수 있다. 딤전2:5, 이는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종류의 지성이 있다. 하나는 신적 지성으로 이로써 그리스도는 만물을 아신다, 요21;17. 하나는 인간적인 지성으로 이로써 그리스도는 어떤 것은 알지 못하셨다, 막13:2. 또한 두 의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신적 의지다, 눅5:13. 다른 하나는 자연적 열망을 지닌 인간적 의지이다, 마26:39. 따라서 그리스도는 이중적 현존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적 현존은 모든 곳 혹은 많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혹은 신인이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시키므로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한다.
19 그리스도의 직분
그리스도의 직분이란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행하신 것이다. 딤전1: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두 가지가 고찰되어야 한다. 직분으로의 부르심과 그 직분 자체이다. 부르심은 성자에게 특별한 언약을 통해 이러한 직분에 위임하는 하나님의 행동, 특히 성부의 행위이다. 사53:10에 표현되어 있다.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할 것이라.’ 부르심은 선택하고 미리 정하고 파송하는 것을 포함한다.
선택하시는 것은 목적과 관련된다. 미리 정하는 것은 수단과 관련된다. 파송은 행동과 관련된다. 이는 인간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예견된 어떤 조건도 없이 오직 은혜만으로 수행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고난받은 모든 일, 심지어 모든 상황도 미리 결정되었다. 눅22;22,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거거니와; 행4: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일상적인 방식으로는 성취되지 않았다. 이는 비범한 특질과 그 영원성을 인치는 장엄한 맹세와 함께 확증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심을 받은 직분 자체는 삼중적이다. 즉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이다.
직분의 수효와 순서는 첫째, a무지 b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c하나님께로의 복귀 불능 상태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들의 필요성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 순서대로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에 의해 해결된다. 둘째 수효는 구원이 야기되는 순서로 입증된다. 우선 설교되어야 하고 다음에는 획득되어야 하고 후에는 적용되어야 한다. 순서대로 직분과 관련된다. 셋째 순서는 본 직분을 수행하는 정해진 방식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했다. 그리고 자신을 드리셨다. 후에 자신의 왕국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은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의지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선지자,신18:15, 행3:22; 랍비,마23:7;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히3:1; 언약의 사자,말3:1라고 불린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지혜,고전1:24,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2:3라고 불린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예언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천사든지 인간이든지 다른 자들 안에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활용된다. 그리스도는 그가 원할 때에 하나님의 모든 비밀들을 계시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선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도 필연적이다.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인격으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희생으로 인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호의를 획득한 것을 말한다. 골1:20,22, 고후5:15, 롬5:10. 이 제사장직은 율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다.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요(히7:17), 확고하고 더 좋은 소망의 질서로 이루어진 것이다(히7:18-19) 영원히 지속된다(히7:24), 이는 후계자나 대리자가 전무하며 영구적이며, 오직 영원하신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속한다,히7:24-25.
제사장직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제사장, 제물, 제단이 되신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양 본성에 있어서 제사장이었다, 히5:6. 그분은 인성 안에서 제물이었고 따라서 성경은 제물을 그리스도의 위격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관련시킨다. 이는 또한 그의 피, 골1:20; 그의 영혼, 사53:12,마20:28에 관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물이 효과적이 되는 주된 이유는 신성, 즉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드리셨다는 데에 있다, 행20;28, 롬8:3.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 제단이었다, 히9:14,13:10,12,15. 왜냐하면 제물로 드려진 것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제단의 기능이요 따라서 이는 제물보다는 더 큰 위엄을 지녀야 한다, 마23:17. 하지만 그리스도는 신성에 의해 안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요17:19.
이로써 우리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필연적인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적절한 제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제물은 충족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인간의 구원에 속한 모든 것을 능력과 권위로써 시여하고 집행하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미한다, 시2:6, 단2:44, 눅4:36. 그리스도의 왕직의 속성으로는 첫째, 보편성을 들 수 있다. 이는 모든 시대를 포괄한다, 마22:43-45. 이는 모든 종류의 인간과 관련된다, 단7:14, 계17:14. 그리고 이는 인간의 구원을 개선시키고 증진시키는 것과 관련되는 한, 모든 피조물에게도 적용된다, 엡1:21,22. 둘째, 이는 인간의 영혼과 양심 안에서 지배력을 행사한다, 롬14:17. 셋째, 이는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시여한다, 계1:18. 넷째, 이는 영원하다, 단2:44,7:14. 다섯째, 이는 그 상속자들에게 최대의 평화와 가장 완전한 기쁨을 제공한다, 사9:6, 엡2:16, 히7:2. 따라서 본 왕직은 성경 전역에서 ‘하나님의 나라, 평화의 영광의 나라’라고 명명된다. 이는 또한 ‘빛과 영광의 나라, 하늘나라, 장차 오는 세상’이라고 명명된다, 히2:5.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의 영적인 왕이 될 수 없으며 영원한 생명과 죽음도 시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몸과 동일한 본성으로 머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전형(典刑)들이다.
선지자직에서 그리스도는 소위 선지자들을 복종시켰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왕직은 그러한 복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구도 직무상 영적인 제사장 혹은 왕이 될 수 없다. 제사장의 직무인 하나님 존전에서 제물에 의한 죄의 대속과 왕의 역할인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통치는 단순한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민족들의 왕들은 그 권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에게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복속된다.
20 만족(속죄만족)
구속에는 두 가지 부분이 존재한다. 우리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비하요, 그리스도의 승귀이다. 그리스도의 비하란 인간의 구속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빌2: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러한 비하는 신성 그 자체에는 속하지 않고 신인에 속한다.
인성을 취한 것은 이러한 비하의 일부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성을 입으신 것에 수반된 종의 상태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비하의 최초의 기초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원하는 관계로 인해 신적 인격은 비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빌2:7. 왜냐하면 일시적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든 영광과 신적 위엄을 포기한 한 형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비하의 기간 동안 신적 위엄은 억압되었고, 감취어졌음, 후에 그리스도의 승귀에서 나타나듯 지속적으로 그 위엄이 발현되지는 않았다.
비하의 목적은 만족과 공로의 성취에 있다. 비하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 가해진 불법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기 때문에 만족이라고 불린다, 롬3:25,그의 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만족은 정죄를 제거하고, 롬8:34, 최종적으로는 이와 함께 구원으로의 화해를 가져온다, 롬5:10.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다'(고후5:2)라는 구절에서도 동일한 것이 제시된다. 그리스도는 전혀 부패가 없으신 분이다. 죄는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죄로 인한 형벌을 감수하셨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에게 전가될 수 없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사53:4)는 말씀도 동일하다. 동일한 능력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는 말씀에서도 발견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을 대속물로 삼으셨기 때문에 중보자이다, 딤전2:5,6.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드리고, 갈2:20,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요1:12,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벧전1:21; 이러한 구속의 참예자가 되었다, 갈2:20. 동일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한 제물과 희생이라고 일컬어진다, 엡5:2,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전체적인 신비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우리의 보증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다, 히7:22. 그리스도는 아담이 창조되고 버려진 자들의 최초의 인간이 되었듯이 구속될 모든 자들의 공통된 시조이다, 롬5:16-18, 고전15:22.
그리스도의 비하에는 공로의 성취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비하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보답의 형태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순종으로 의를 획득했다고 말하는 모든 성경 구절들에서 나타난다. 롬5:19,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롬5:10,우리가 --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영생을 얻었다); 롬5:2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
그리스도에 의한 공로와 만족의 성취는 상이한 행등들로 구분될 정도로 본질적으로는 상이하지 않다. 이들은 동일한 순종의 두 단계이다. 본질에 있어서 만족은 모든 수준의 공의에 있어서 완전하다. 만족은 보상적 언약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은혜를 전제한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롬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 5;15,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따라서 최대의 공의와 최대의 은혜가 인간의 구속에서 함께 발현되고 함께 역사한다, 롬5:17,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이러한 만족의 결실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실이요 결과라고 명명하는 것은 타당하다. 이러한 만족은 충족하고, 어떤 의미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는 첫째, 이를 제공하는 하나님이신 인격에 기인하고; 둘째, 제공되는 것의 가치와 탁월성에 기인하며; 셋째, 인격적 결합에 있는 신적 완전성에 있는 제공의 방식에 기인한다.
만족에 있어서는 행위 혹은 고난뿐만 아니라 행위하고 고난받는 인격 자체가 영광을 받는 자의 의지와 일치한다. 사역은 항상 사역자에 의존한다.
21 그리스도의 비하의 생애
그리스도의 비하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이요, 탄생 이후의 기간이다. 잉태시에는 수동적 원리와 능동적 원리가 작용하였다. 수동적 원리란 마리아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몸이 형성되는 물질을 제공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수동적 원리라 불린다. 수동적 원리는 초자연적인 예비와 성화에 의해 적합하게 되었다, 눅1:35,나실 바 거룩한 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태초에 약속된 여인의 씨였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마리아와 실제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아들됨은 그리스도의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격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위격, 그리고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인성 간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진정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잉태의 능동적 원리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다. 하지만 성령의 아들로는 불리지 않는다. 잉태의 첫 순간부터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에 있어서 최초의 행동과 관련해서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요1:14,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눅2:40,아이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그리스도는 자신의 잉태 순간부터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순례자들이 그러하듯, 그리스도는 최고로 승귀될 때까지는 계속 진보했다.
그리스도의 탄생 시에는 최대의 가난이라는 비하와 함께 최대의 영광에 대한 증거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지상적인 부수물들은 가장 비천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천사와 별들이 영광을 선포했고 이에 의해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헤롯과 제사장, 모든 백성들이 동요되었다. 그리스도는 특히 모든 민족에 축복을 전해 줄 아브라함의 씨이며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다른 나라를 가지고 계신 다윗의 아들이었다. 요18:36,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눅1:33,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탄생 이후 그리스도의 생애는 사적이며 공적이었다. 그리스도는 공생애 이전에 사적인 생애를 사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신을 복속시킨 인간적 조건이 이를 요청하고, 하나님의 법이 이를 결정했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의의 태양이 점차적으로 나타나야 했으며, 인간들은 모든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으로 인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적 생애는 유아기와 부모에게 순종하는 시기였다. 유아기에서는 그의 할례와 성전에서의 봉헌, 애굽으로의 탈출과 복귀가 발생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인(印)이다. 봉헌은 장자를 하나님에게 보이고 헌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인한 구원의 언약을 확증하려고 했다. 모든 장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거룩하였다. 다른 모든 것은 모형일 뿐이다. 부모들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도덕법 전체에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자신을 메시야로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공생애에서는 발단, 과정과 종결이 있다. 세례와 유혹은 공생애 발단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직분의 공적인 수행의 전주곡이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세례 안에서 인정되고 확증되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고, 하늘로부터의 소리로써 성부의 증언이 주어진 표징들을 통해서 확증되었다. 마3:17,17: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요 설교자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의 세례로 인해 우리 자신의 세례가 확증되고 거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첫 번째 아담보다 더욱 강하시며 유혹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를 공감으로 돕기 위해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과정은 가난과 수고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수고는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시고 근신하며 선을 행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신 것으로 구성된다. 그리스도의 공생애 과정은 설교와 기적행사에 두어졌다. 은혜와 권위가 그리스도의 설교에 항상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다른 자들의 심령을 개방시키거나 더욱 강퍅하게 했다. 그리스도의 설교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복음 혹은 하늘 나라였다. 기적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위격을 증명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며 영적인 선교를 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종결은 죽음 자체를 예비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르침과 위로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변모에서 성취되었다. 눅9:31,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특별한 방식으로 대망하는 표지들, 즉 유월절과 성찬에 의해 선포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범에 의해 주어졌다. 요13: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부분적으로 이는 마지막 설교시, 요14:15,16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기도에서 주어졌다, 요17장.
22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비하의 마지막 행위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에 있어서 인간들의 죄로 인해 두렵고 매우 모질고 극도의 고통을 겪었다. 그리스도는 의도적으로 대면했고 인내했다. 요10: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동일한 이유로 죽음은 자원적이며 강요된 것이 아니었다. 본 행위는 강함에서 연원하는 것이지 연약함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그리스도 자신의 죄책이나 당위적인 의무감의 발로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순종과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로로 이루어졌다. 본 행위는 승리를 통한 만족을 의도했으며 굴종을 통한 파멸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본 행위는 인간들의 죄들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비참과 동등해야 했기 때문에 최대의 형벌을 포함했다.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잘려나가는 것이요, 버려지는 것이요, 발아래 밟히는 것이요, 저주요, 슬픔을 쌓아놓는 것 등등으로 불린다. 사53장, 시22편. 본 죽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비하의 완성이다. 본 죽음은 그리스도의 비하의 최대의 부분이다.
상실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발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충만한 은혜가 가져올 기쁨과 환희가 스러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영적인 기쁨을 원리적으로만 상실한 것이 아니라 행위와 인식에 있어서 상실했다. 의식적 실현의 관점에서 영적인 죽음의 발단은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고 어둠의 권세에 어느 정도 복속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마실 잔에서 극명하게 표현된다. 마26:39,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진노의 대상은 그리스도 자신은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증으로서 겪었던 형벌에게만 연관된다. 어둠의 권세에 대한 복속은 굴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마음에 느꼈던 고뇌들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혼은 번민하여 슬픔, 비탄, 두려움, 공포에 잠겨있었다, 마26:39,요12:27,히5:7,눅22:44. 그리스도의 영혼은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고통을 받았으며, 우리의 이름으로 진정한 고난을 겪어야 했고, 육체적 죽음의 공포로부터가 아니라, 영적이고 초자연적 죽음의 의미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번민(아고니아)의 두 가지 결과가 있었다. 첫째, 강력한 기도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놀란 마음과 죽음의 쓰라린 고통으로부터 피하고자 하는 본성이 나타나지만, 이는 항상 성부의 의지에 의해 제약되고 이에 복속된다. 막14:35,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요12:27,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두 번째, 여기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눅22:44,예수께서 더욱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리스도의 영적인 죽음의 발단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 행해져야 할 의무들 즉, 기도, 담화, 경고, 반응들을 위한 시간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완화책이 존재했다. 완화책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다. 내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혼에서 느꼈던 중압감과 고통이 순간적으로 감소되는 데서 발생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수행했던 직분의 의미, 성부와 자신에게 일어날 영광,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의 구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의식적으로 죽음의 모든 비참함에 직면하기를 결정했다. 죽음에서의 외부적인 완화책이란 그리스도에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견고하게 했던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다. 눅22:43,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외적인 죽음의 발단은 상실과 의식적 실현의 단계에서 나타난다. 상실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백성에게 거부당했고 살인자보다 더 흉악한 자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는 가장 친밀했던 제자들에게도 버림을 받았고, 거절당했으며, 배반당했다. 모든 종류의 인간에 의해, 특히 지도자들과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의해 그리스도는 미친 사람, 기만자,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 귀신들린 자, 마술가, 또 다른 왕국의 찬탈자라고 불렸다. 그리스도는 벌거벗겨졌고 필요한 음식마저도 거절되었다.
의식적인 실현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수치스런 체포, 강제 연행, 종교적, 시민적 정의의 부정, 조롱, 채찍질, 모든 종류의 능욕과 모욕을 받았으며 십자가형을 받으실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완화시키는 요소도 존재했다. 첫째,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자 병정들이 땅에 엎드려지고, 말고의 귀를 치유하신 일 등 몇가지 기적들을 통해 신적 위엄이 현현되었으며, 둘째,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는 정죄받기 전에 무죄하다는 선언을 받았다. 마27:24,이(옳은)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완성은 최고의 형벌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죽음 자체와 이의 지속이 고찰되어야 한다. 상실로서 영적인 형벌의 완성은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은 것이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위로를 박탈당했다. 마27:46,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의식적 실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완성은 저주였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충만히 의식하였다.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이 이러한 저주의 원인과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이에 대한 표징이요, 상징일 뿐이다.
신체적인 죽음의 완성은 신체의 고통과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숨을 거둔 것이었다. 여기서는 영혼과 몸이 분리되었지만 이들과 신성과의 결합은 계속 유지되어 인격의 해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지 가장된 것이 아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작용하는 원인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내적인 원리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생명과 힘을 지속시켰으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이를 내버리셨기 때문이다. 요10:18.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가장 낮은 데까지 비하가 계속되었다는 것이지, 고통의 형벌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후자, 즉 고통의 형벌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 아래 3일 간 있었다는 것이다. 행2:24,이는 통상적으로 지옥에 계셨던 상태로 서술된다. 그리스도가 3일 동안 장사되었다는 것은 이 상태를 증거하고 보여준다.
23 그리스도의 승귀
그리스도의 승귀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승리를 말한다. 눅24: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엡4:8,그가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골2: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인내함으로, 죄를 대속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사탄의 손에서 먹이를 박탈하고 탈취함으로써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이러한 승리의 절정과 현현이 그리스도의 승귀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진정한 승리가 있었으며, 그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장소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의미와 공적에 있어서도 승귀되고 칭송받으셨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는 야전에서 승리하셨고, 승귀에서는 왕의 보좌 혹은 개선 마차 위에서 승리하셨다. 이러한 승리의 영광은 종과 같은 비천한 형상과 부수적, 저열한 상황으로부터 전적으로 천상적인 지고의 복락상태로 옮겨지셨다는 것이다. 빌2:9,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신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승귀는 단지 이것이 적극적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성에 대해서는 이는 이에 수반되는 상응한 행동을 부여받았다. 인성은 피조된 본성에서 가능한 모든 완전성을 부여받았다. 영혼에 있어서는 원리적으로 기질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행위와 표현에 있어서도 지혜와 은혜가 충만하여졌다. 그리스도의 몸은 순결하고 기민하고 빼어나고 활력이 넘쳤다. 히12:2,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빌3:21,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리스도의 승귀된 영혼은 영혼이 본성을 갖고 있듯이, 영광의 몸도 몸의 본질과 본질적 속성을 상실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광의 몸이라 할지라도, 편재하거나, 동시에 많은 장소에 현존하거나 또 다른 몸과 삼투적으로 동일한 장소에 존재할 수는 없다. 눅24:51,축복하실 때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마28: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의 비하와 상응하여 승귀에도 세 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조된다. 승천은 무덤과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과 대조된다.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심은 무덤에 남아있고 죽음 혹은 지옥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과 대조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에 의해 삼켜진 모든 인성과 관련된다. 영혼에 있어서는 이는 지옥 혹은 지금까지 영혼이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복속해야 했던 죽음의 상태와 권세로부터의 부활을 의미한다. 몸에 있어서는 이는 죽은 자로부터,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을 의미한다.
영혼은 다시 부활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몸과 인간 본성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몸과 인간은 실제적으로 그들의 완전성을 회복했지만, 영혼은 몸 안에서 행동하고 완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했다고 볼 수 있다. 부활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내적인 부분으로 이는 영혼과 몸이 결합됨으로써 재생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외적인 부분으로 무덤에서 나와 자신을 회복된 생명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부활의 사역이 성부 하나님에게 귀속된다 할지라도, 또 다른 자의 권능과 허락에 의해 일어나지 않고, 스스로 부활하셨다. 요2:19,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이를 일으키리라. 10:18,나는(목숨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부활의 시기는 죽음과 장사 지낸 지 3일만이다. 마28:1,눅24:7,행10:40,고전15:4.
부활의 목적은 첫째,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주기 위함이요, 롬1:4,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니; 둘째,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인치기 위함이요, 고전15: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셋째, 그리스도의 죽임 이후에 수행할 그의 직분 중 일부를 성취하기 위함이요, 롬4:25,예수는---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넷째, 그리스도가 자신을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들도 의롭다 하기 위함이요, 고전15: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다섯째,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적이며 육체적인 부활의 본질과 모범과 시초가 되기 위함이다. 고전15:20,21,23,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원리적으로 우리의 부활의 원인이시기 때문이다. 비하와 죽음에 의해 대속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공로적 원인이 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범적 원인과 우리를 위한 증거와 시초가 된다.
승천은 승귀의 과정 중 중간단계로서 여기서 그리스도는 지상을 떠나 영광의 보좌인 지고의 하늘로 올라가신다. 이는 전 인격의 승천이지만, 비유적으로는 신성에만 속한다. 신성은 이제 인성과 지고로 결합되며 승천의 원인으로 기능하고 성육신에서 인성을 입으실 때 비우셨던 영광을 발현한다. 승천은 인성에도 적용되는데 여기서 인성은 저등한 지위에서 고등한 지위로 변화된다.
승천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영화된 인성을 영광의 처소에 두기 위함이요; 둘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오하고 천상적인 경륜에 참여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요3:13,내가—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셋째, 그가 성부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요,요14:3; 넷째, 그리스도가 자신의 이름으로 천상의 왕국을 소유하기 위함이요, 엡2: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다섯째,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와 권능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행해져야 하는 모든 일을 주관하기 위함이요, 요16:7,(내가) 가면 내가 그(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섯째,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승천을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요, 고전15:20,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일곱째, 우리가 생각이나 태도나 말에 있어서 천상적인 것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골3:1,빌3:20,너희가—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리노니.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은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최대의 영광을 향유하는 승귀의 최고 단계다. 부활과 승천은 본 상태에 이르기 위한 운동들이다. 부활과 승천은 또한 어떤 면에서는 우리와 공통적인 것이지만 성부 우편에 좌정하심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부여받은 최고의 영광은 왕적인 영광이다. 행2: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러한 왕적 영광은 자신을 위해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능과 위엄의 충만이다. 시110;1,고전15:25,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이러한 왕적 위엄에는 그리스도가 인간과 천사들의 심판자가 되시는 권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왕적 영광은 다른 직분에까지 흘러 넘쳐서, 그는 왕적 제사장과 왕적 선지자직을 행사하신다. 왕적 제사장직은 우리를 위해 탄원하는 것인데, 이는 수난을 당하고 무릎을 꿇고 겸손히 간구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가 행하고 수난받은 것을 영광스럽게 상기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 히9:24,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그리스도는 모든 육체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고 자신의 사절들을 파송하고 그들과 함께 사역하고 그들의 사역에 뒤따르는 표징들에 의해 그들의 말을 확증하고, 세상 중에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고 이들을 보호하시고 세우시며 보존하심으로 왕적 선지자직을 수행하신다.
24 그리스도의 적용
적용이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행했고 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일정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적용은 특별히 성령에게 귀속된다. 고전12:13,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하지만 첫째, 이는 일정한 사람들이 구속되고 구원되도록 그리스도를 시여한 성부의 작정과 선사에 근거한다. 요6: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이는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만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데 기인한다,요6:37. 둘째, 이는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정해진 자들을 위해 대속하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의도에 근거한다. 요17:9,11,12,19,내가 저희를 위해 비옵나니---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 것이로소이다.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적용시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협약 아래 이루어졌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결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전달, 수여되었다. 롬5:10,11,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성부와 성자는 이러한 적용을 수행하기 위해 성령을 파송했다고 언명된다. 요14:16,16:7,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내가 그를 보내리니.
따라서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은 위로부터 성부에게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다,약1:17. 모든 구원에 관련된 일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전달된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해, 즉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이들은 효과적으로 적용된다,엡1:3,5,11.
따라서 적용은 획득하는 것의 마지막 결과이다. 목적이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 의도되기 때문에 그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 이를 획득하는 것은 목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적용은 구속 자체와 동일한 범위를 가지고 있다. 즉 구속은 그리스도와 성부의 의도에 의해 구속이 획득된 자에게만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일시적 유익들은 다른 자들에게도 넘친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맺어지고 파기된 언약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을 가장 확고하게 성취하는 이러한 적용을 성경에서는 새 언약,히8:8,10; 생명과 구원과 은혜의 언약,롬4:16, 갈3:18,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의미에서 이는 또한 복음,롬1:16; 하나님의 선한 말씀,히6:5;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딤전1:15; 선한 교훈,딤전4:6; 생명의 말씀,빌2:16; 화목하게 하는 말씀,고후5:19; 평안의 복음,엡2:17과 6:15; 구원의 복음, 진리의 말씀,엡1:13; 여호와의 팔,사53:1;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2:16,로 불려진다. 이는 확고한 약속을 의미하므로 언약이라고 불린다. 이는 값없는 선물이며 선사자의 죽음으로 인해 확증되기 때문에 이를 언약 대신 유언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히9:16.
신약은 구약과 여러 가지 면에서 상이하다. 첫째, 종류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은 창조자와 피조물들 간의 유대의 언약이지만 신약은 적들 간의 화해의 언약이다. 둘째, 행위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에서는 두 당사자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합의가 존재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언약하신다. 인간의 죄로 인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인 언약을 맺을 수 없다. 셋째, 대상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지만 신약은 특별한 방식으로 제한된 자들에게만 속한다. 그 본성상 그리고 정당하게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한 자들 즉 약속과 구원의 아들들이요 상속자들이라고 명명된 자들에게 속하며 이들을 지향하고 있다. 창15; 행2:39,3:25; 롬4:16,13; 9:7,8; 갈3:21,29.
넷째, 이들은 원리적으로 혹은 동적 원인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주권의 형태로 자신의 지혜롭고 정당한 경륜을 표현한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자비만 존재한다. 구약에서도 순종에 대한 보답을 정함으로써 일종의 은혜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는 진정으로 은혜에 의해 지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약은 완전하다. 즉 이는 실제적으로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한다. 다섯째, 이들은 그 기초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은 인간 자신의 능력에 근거하지만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에 근거한다.
여섯째, 이들은 약속된 것들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생명만을 약속했지만 신약에서 하나님은 의와 모든 생명의 수단을 약속하셨다. 인간은 죽었기 때문에 생명의 지속 혹은 완성이 아니라 (생명으로의) 회복이 필요했다. 일곱째, 이들은 조건들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은 약속을 시행하기 전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수행할 일들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요구했다. 따라서 약속은 보답의 형태로 주어진다. 하지만 신약은 선행 조건들을 요구하지도 않고 추후 혹은 매개적 조건만을 요구하는데(이는 은혜의 수단으로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여덟째, 이들은 결과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은 의로운 것을 가르치고 보여주지만 신약은 그 자체 안에 의를 수여한다. 구약에서는 죄인에게는 죽음이 되었던 죽은 문자가 존재했지만 신약에는 살리는 영이 있다. 이를 받는 모든 자에게 확고한 구원을 야기시킨다. 아홉째, 이들은 존속 기간에 있어서 상이하다. 구약은 신약의 참예자들에게는 낡은 것이다. 현존하는 언약은 존속기간에 있어서도 영원하며- 왜냐하면 새 언약은 본질에 있어서는 끝도 변화도 없기 때문이요- 그 적용에 있어서도 영원하다. 왜냐하면 본 언약의 은혜는 한번 진정으로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25 예정
구속이 일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고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은혜의 사역에서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서 야기되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예정을 알려준다. 예정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딤후1:9,영원한 때 전부터—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는 하나님의 사역의 초기에서 역사했지만 실제적인 적용 이전까지는 예정된 자 안에 내적인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엡2:3,우리도—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고전6: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은혜의 적용 이전에는 예정은 예정된 자 안에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으며 오직 예정하는 자 안에만 감추어져 있다.
예정이란 인간들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 롬9:22,23,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셨을지라도. 목적을 위한 수단의 질서가 확고하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는 결정이라고 불린다. 하나님께서 사물들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기 전에 이러한 질서를 홀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결정이 아닌 예정이라고 불린다.
이는 확고한 뜻에 의해 실행되어질 명백한 선언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작정이라고 불린다. 동일한 의미에서 이는 목적과 뜻이라고 불린다. 예정은 최대의 지혜, 자유, 확고함, 불변성을 수반한다. 예정의 기초는 불변이며 해체될 수 없다. 딤후2:19,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이러한 기초에서 예정된 자의 수는 하나님의 예비의 확실성뿐만 아니라 그가 정한 수단들의 확실성에 의해서도 확고부동하다. 눅10:20,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예정은 어떠한 원인, 이유, 혹은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정하는 자의 의지로부터 유래한다. 마11: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롬9:16,18,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궁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러한 작정이 하나님의 심중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는 의지의 행위를 전제하며 예지라고 명명된다. 따라서 예지란 때때로 예정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덜 정확한 표현이다. 롬11:2,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하나님 안에서는 오직 단일한 의지 행동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는 동시적이며 선후 관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적과 수단에 대한 오직 한 번의 작정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는 의도에 관한 한 하나님이 수단 이전에 목적을 의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롬8:30,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먼저 수단을 의도하시고 그후 본 수단들을 목적으로 인도한다. 살후2:13,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심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두 종류의 예정 즉 선택과 거부 혹은 유기가 존재한다.
선택은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가 그들 안에서 나타나도록 예정하는 것이다. 엡1:4-6,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선택이란 하나님 안의 단 한 번의 단순한 의지행위이다. 신적 심중에 있는 의지의 행위들에는 하나님이 가장 확실히 영생의 상속자들을 아신다는 의미에서 확고한 지식이 수반된다.
따라서 선택 자체는 지식 혹은 예지라고 명명된다,롬9:11. 이러한 하나님의 지식은 구원받을 자의 이름과 이들을 정한 선한 것들이 마치 책 안에 기록된 것처럼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책이라고 불린다. 시69:28, 계3:5,13:8.
유기란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안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예정하는 것이다, 롬9:22,멸하기고 준비된 진노의 그릇, 살후2:12,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 유4,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 유기는 첫 행위는 공의를 나타내기를 의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피조물의 파괴가 아니라 합당한 파멸 안에서 현현하는 신적 공의이다. 선택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은혜가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구원 자체가 목적이다. 반면 유기에서는 저주 자체가 목적이지만 선과는 관련이 없다.
다음에 유기는 이러한 공의가 현현되는 자들을 지명한다. 선택된 자들이 사랑에 의해 구원으로 정해졌다면 유기는 대상자들을 그 사랑으로부터 거부하고 제외시킨다는 점에서 유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별로 하나님은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택을 부정했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며 박탈적이다. 유기는 정의가 유기된 자 안에서 나타나도록 수단을 사용한다. 이러한 수단은 죄로의 허용이며 방임이다,롬9:18,살후2:11,12. 죄로의 허용은 형벌의 원인이 아니다. 이들의 원인은 죄 자체이다.
26 부르심
적용의 부분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연합에서 유래하는 유익들에의 참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로 이로써 인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모든 축복들에 대한 권리를 획득한다. 요일5: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3:24,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부르심이란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모여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벧전2:4,예수에게 나아와; 엡4:12,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하나님과의 연합이 따른다. 살전1:2,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게.
부르심은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부르심은 인간이 실제로 선택되는 첫 번째의 행위, 즉 선택이 인간에서 나타나고 시행되는 첫 번째 행위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성경에서는 종종 부르심과 선택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전1:26-28,형제들아 너희 부르심을 보라---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을 택하사— 약한 것을 택하사.
부르심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위엄, 정직, 근면 혹은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근거한다. 행2:47,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13:48,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롬8:30,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약1:18,그가---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제시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제시란 그리스도를 구원의 충족하고 필수적인 수단으로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외적 제시는 복음, 즉 그리스도의 약속들을 제안 혹은 설교하는 것이다. 내적 제시는 약속들이 내적인 말씀에 의해 인간의 심령에 전해지는 일종의 영적인 감화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제시된 그리스도가 인간과 연합하고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일어난다. 요6:56,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우리는 연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후5:17;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갈3:27;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신다,엡3:17; 그리스도의 집,히3:6; 그리스도의 성전,고후6:16; 그리스도와 결혼한다,엡5:23; 그리스도의 가지들,요15:5; 그리스도의 지체들,고전12:12;
이러한 영접으로 인해 부르심은 회심이라고 불린다,행26:20.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든 자들은 완전히 죄에서 은혜로 전환하고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따르게 된다. 이는 또한 중생 혹은 새 생명의 시작, 새 창조,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린다.
인간에 있어서 영접은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다. 빌3:12,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의 수동적 영접이란 은혜의 영적인 원소가 인간의 의지 안에서 생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엡2:5,(하나님이) 우리를 --- 살리셨고. 이러한 은혜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근거가 된다. 요3: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의지의 회심이 전인의 회심에 있어서 효력적인 원리이다. 빌2:13,너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의지는 자유로운 행위자의 역할이 아니라 오직 순종하는 주체의 역할만 수행한다. 고후4:6,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능동적 영접이란 부르심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서 전폭적으로 의뢰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의뢰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이러한 신앙의 행위는 참으로 나타나게 되며 인간에 의해 자유롭고 그리고 확고하게 불변적으로 실행된다. 요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러한 신앙에서는 의지가 진정한 선을 소유하도록 전환되기 때문에 반드시 회개가 결합되게 된다. 회개에 있어서는 동일한 의지가 진정한 선을 행하도록 전환되며 죄 혹은 악으로부터 돌이켜 죄악을 증오하게 된다. 행19:4, 막1:15,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는 신앙과 동일한 원인과 원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엡2:8,이것이(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딤후2:25,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회개가 인간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해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을 의미할 때, 이는 신앙 이후에 오며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신앙에 의존하며 신앙을 가진 자에게 속한다. 이러한 회개가 항상 과거와 현재의 죄에 대한 회한을 수반하지만, 회개는 회한보다는 죄로부터 돌이키고 죄를 미워하며 선을 따르겠다는 확고한 의도로 구성된다.
27 칭의
칭의란 하나님이 신앙에서 포착된 그리스도로 인해 신자를 죄와 사망을 면하게 하고 그를 의롭고 생명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간주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단이다. 롬3:22,24,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칭의란 판단(판결)을 선언하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물리적인 실제적인 변화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판단을 선언하고 간주하는 데서 형성되는 법적, 도덕적 변화가 존재한다. 잠17:15,악인을 의롭다 하며;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판단은 첫째, 칭의를 작정하신 하나님의 심중에 있었다. 갈3: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미리 알고; 둘째, 칭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에서 일어났을 때 그리스도에게 선언되었다. 고후5: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셋째, 칭의는 신앙이 생성되었을 때 맺어진 첫 번째 관계에 실제적으로 선언되었다. 롬8: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넷째,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음을 우리의 영에게 증거하는 성령에 의해 외적으로 표현되었다. 롬5:5,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칭의가 은혜로운 판단인 것은 칭의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롬3:24,은혜로 값없이.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부르시고 선택된 자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부르시는 동일한 은혜로 하나님은 부르심을 받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칭의는 그리스도 때문에 일어난다. 고후5:21,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담의 불순종이 크리마(범죄,롬5:16)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정죄한 것과 마찬가지로(롬5:18), 그리스도의 순종은 디카이오마(의,롬5:16)가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를 칭의하신다. 따라서 칭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된다. 빌3: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칭의는 직접적으로 죄의 고소, 오점 혹은 모든 결과들을 제거함으로써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칭의는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하는 죄책의 의무를 제거한다. 롬8:1,33,34,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칭의는 형벌 받아야 한다는 당위를 죄에서 제거할 만큼 죄책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는 죄가 남아있는 한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칭의는 죄책의 지속과 치명적인 효과들을 소멸시킬 정도로 죄책을 제거한다.
죄로부터의 용서는 성경에서 사죄, 구속, 화목 등 다양한 용어로 불려진다,엡1:6,7.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죄가 죄책으로 인한 일종의 구속 혹은 영적인 포로로 이해될 때, 칭의는 구속으로 불린다.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할 때, 이는 사죄를 의미한다. 죄는 넘기시고, 도말하고, 면제하고, 치워버리고, 던져버리고, 제거하고, 등 뒤로 던져버린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죄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해될 때, 칭의는 화해라고 불린다,롬5:10. 때때로 사죄는 일종의 죄를 눈감아주고(민23:25), 죄를 덮어주는 것으로(시32:1,2) 간주된다.
칭의된 자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도 사해진다. 칭의는 정죄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칭의는 영생을 확고하게 즉시 선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된 자는 매일 사죄를 필요로 한다. 이는 은혜의 지속이 칭의된 자들에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용서에 대한 인식과 표현은 개별적 죄들이 이를 필요로 하는 한 점점 더 증대된다. 그리고 칭의에서 선포된 판결의 선고는 이로써 수행되고 완성된다.
죄의 용서 이외에도 의의 전가가 필요하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에게서 원의를 박탈하고 정죄 아래 복속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의의 전가는 사죄와 함께 그리스도의 전적인 순종에서 일어난다.
28 양자 됨
양자 됨이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로 인해 아들 됨의 영예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단이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러한 판단은 칭의와 동일한 단계로 진행한다. 양자 됨은 먼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다. 엡1:5,우리를 예정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후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4:4,5,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느니라. 둘째, 양자됨은 신자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갈4: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부르심과 칭의는 양자 됨의 근거가 된다. 양자 됨의 권리는 신앙과 신앙의 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요1:12. 양자 됨은 신앙으로부터 유래하고 칭의는 신앙과 양자 됨 사이에 온다. 양자 됨은 본성상 칭의 안에서 발견되는 화해를 필요로 하며 이를 전제한다. 신자들은 이중적 권한, 즉 칭의를 통한 구속의 권한과 양자 됨을 통한 아들의 권한으로 인해 천국을 소망할 수 있다. 하지만 구속의 권한이란 이러한 권리의 기초이며 양자 됨은 여기에 탁월성과 지위를 추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양자와 신적인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인간의 양자는 입양 외에는 상속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타인과 다름없다. 하지만 신자들은 중생, 신앙 그리고 칭의로 인해 이러한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인간의 양자는 외적인 것들에 대한 외적인 지칭이요 선사이다. 하지만 신적인 양자는 실제적인 관계로 내적인 행동과 생명의 전달에 기초한다. 이러한 양자 됨은 그리스도로 인해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구속자로 이를 행하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에 의해 적용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이 연합의 끈이다.
그리스도가 칭의에 있어서 우리의 죄들을 덮으시는 옷으로 적용되듯이 양자 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형제요, 주라고 적용된다. 이러한 적용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케 해주며 따라서 모든 신자들은 양자 됨의 은혜와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인해 하나님의 장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원래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아들이요 하나님의 장자다. 히12:23,너희의 이른 곳은 ---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인간의 양자는 본래적인 아들이 전무하거나 거의 없을 때 도입된다. 하지만 신적 양자는 결핍이 아니라 풍부한 선에서 유래하며 본래적인 아들과의 신비적인 연합이 양자들에게 주어진다. 신적 양자의 지위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라는 일반적인 관계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타락 이전의 관계도 초월한다. 타락 이전의 관계는 매우 미약했다. 하지만 우리의 양자 됨은 유대(결속)의 형태로 영원히 지속된다. 요8:35,종은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가문에 속하게 된다,갈6:10. 따라서 그들은 항상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고 그의 양육과 영원한 보호를 받게 된다. 아들의 지위와 함께 상속자의 신분도 주어진다. 롬8:17,자녀이면 또한 후사. 이러한 상속은 영원한 복락이며, 따라서 성경에서 양자 됨은 때때로 신자들을 위해 예비되고 신자들이 소망하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의미하기도 한다. 롬8:23,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영원한 복락은 그들이 공로에 의한 의로써가 아니라 아들로 인정되는 은혜로서 신자들에게 속하고 신자들에게 주어진다. 갈3:29,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신적 양자는 승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여된 상속에 참여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성부와 그의 독생자는 영원히 살 것이요 이는 어떠한 승계도 허용치 않는다.
양자 됨의 진정한 부분은 성령의 증거가 신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양자 됨의 지위가 소망된 상속과 함께 인쳐진다. 따라서 성령은 양자의 영이라고 불린다,롬8:15-16,갈4:5-7.
양자 됨의 최초의 열매는 모든 신자들이 율법과 죄, 세상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기독교적 자유이다. 요8:32,36,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롬6:22,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갈4: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히2: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두 번째 열매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고유한 방식으로 선지자, 제사장, 왕들이 되는 것이다,계1:6. 세 번째 열매는 모든 피조물들과 피조물이 행하는 것들이 신자의 통제와 용도 아래 두어지든지,딛1:15, 고전3:21,22; 피조물들이 신자들을 섬기거나,히1:14; 최소한 신자들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롬8:28.
29 성화
칭의가 발현되고 칭의의 결과들이 야기되는 실제적인 변화에 대해 고찰한다. 인간 자신의 성질들이 변환되는 것이다. 고후5:17,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러한 변화는 관계 혹은 근거에 있어서가 아니라 발단, 전개, 완성의 단계에서 인식되는 진정한 결과들에 있어서 일어난다. 고후4:16,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러한 성질들의 변화는 성화라는 정당하고 영예로운 선이든지 영화라는 완전하고 승귀된 선과 연관된다. 롬6:22,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성화는 인간 안의 죄의 부정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의 성결로 이행하는 실제적인 변화이다. 엡4:22-24,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에서 신자가 죄책으로부터 해방되고 생명이 그에게 주어지듯(그 지위는 양자 됨에서 확정된다), 성화에서는 동일한 신자가 죄의 부정과 오염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형상의 성결이 그에게서 회복된다. 성화는 신자가 의와 내재적인 거룩함을 선사받는 신자 안에서의 변화를 지칭한다. 살후2:13,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거룩함이 내재적 은혜의 선물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렘31: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겔36:26,27,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성화는 신앙과 회개와 관련되는 인간 안에서의 변화와는 구분된다. 신앙은 성질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의미하고, 회개는 기질(성벽)의 변화가 아니라(만약 그렇다면 성화와 동일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목적과 의도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반면 성화는 성질과 기질(성벽)의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성화는 전인과 관련되며 어느 한 부분과 관련되지 않는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지만 인간 전체 혹은 인격 전체는 즉시 변화되지는 않는다. 전인이 성화의 은혜에 참여하지만, 성화는 먼저 영혼에서 발생하고 후에 몸으로 진전하여 인간의 몸이 영혼과 같이 하나님의 의지에 동일하게 순종하게 된다. 신30: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롬2:29,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성화의 출발점은 죄의 부정, 부패, 오염이다. 고후7:1,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사. 성화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지식, 의와 거룩함, 엡4:24에서 다시 한번 생성되고 창조되었다고 말하는)의 성결 혹은 율법에의 일치,약1:25; 새 생명,롬6:4; 새로운 피조물,고후5:17,갈6:15; 신의 성품,벧후1:4이다. 성화의 목적이 신적인 새 피조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첫째, 성화는 우리 안에 본성에 의해 주어진 원소들에 의해 야기되지 않기 때문이요(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부르심에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새 생명의 원소로부터 유래한다), 둘째, 우리의 자연적 기질이 이전의 기질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로 구성되기 때문이요, 셋째, 성화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지고의 완전성을 전형(典刑)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화에는 두 단계가 있다. 유아기(어린 아이)라고 불리는 현생에서 일어난다. 둘째 단계는 성년기(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라고 명명된다. 장차 올 세상에서는 성화의 운동과 진보는 종결된다. 오직 안식과 완전만이 발견된다. 따라서 현생에서는 성성(聖性)보다는 성화만을 향유할 수 있고, 장차 올 세상에서는 성화 대신 성성만을 향유할 수 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죽음을 서술하는 용어에서 인식되는 것으로 이는 성화의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목적을 서술하는 것으로 소생 혹은 부활이다, 롬8:5,6. 죽음은 성화의 첫째 부분이다. 이는 죄를 버리는 것이다. 골3:3,5,너희가 죽었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죽음의 공로적, 모범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로6:56,만일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모든 성화되는 자 안에서는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자신과 세상의 부정이 뒤따른다.,눅9:23,갈6:14. 신자들 안에 남아있는 죄와 다른 자들 안에 남아있는 죄 사이에는 내적인 차이점이 있다. 다른 자들에게는 죄가 다스리고 성행하며 지배한다. 신자들에게는 죄가 분쇄되고 정복되고 죽게 된다.
소생은 성화의 두 번째 부분으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혹은 생명의 회복이다. 골3:10,엡4:24,롬12:2,새 사람을 입으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소생의 모범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골3:1,2,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주요한 동인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킨 성령이시다. 소생으로부터 성화된 자들 사이의 강한 유대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일어난다. 고후8:5,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현생에 사는 동안에는 성화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말하자면 죄의 형상과 은혜의 형상의 이중적 형상을 지니고 있다. 완전한 성화는 현생에서는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화된 자 안에 남아 있는 죄나 부패된 부분들은 성경에서는 옛사람, 겉 사람, 지체들, 죄의 몸이라고 불린다. 은혜 혹은 새로워진 부분은 새사람, 영, 마음 등등으로 불린다.
두 가지가 주목되어야 한다. 첫째, 이들간의 영적인 전쟁은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는 것이다.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중생한 자 안에 남아있는 육은 자극적이고 관능적인 취향에서 뿐만 아니라 의지와 이성 자체에도 존재한다,살전5:23. 육 혹은 정욕은 중생한 자들 안에서의 죄에 대한 진정한 원인이다,롬7장. 칭의로 인해 선행에서의 더럽혀진 요소들은 하나님에게 열납되고 보상받는다. 악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양심과 의지 사이의 갈등은 육에 대한 영의 투쟁이 아니라 정욕하는 육에 대한 두려워하는 육의 투쟁이다.
30 영화
영화는 인간 안에서의 비참함 혹은 죄의 형벌로부터 영원한 행복으로의 진정한 변화이다. 롬8:30,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의 발단은 죄의 비참함 혹은 형벌이기 때문에 이는 구속이라고 불린다. 영화의 목적은 강복, 축복, 영생, 영화,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고 불멸의 상속이라고 불린다. 엡1:3,요3:36,6:47,벧후1:3,11,벧전1:4,5;10.
영화의 발단의 최초의 단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교제안에서 현현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파악하고 인지하는 것이다. 롬5:5,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됨이니.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비해두신 모든 좋은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소망과 기대를 가지는 것이다. 롬5:2,우리가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보존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온다,롬8:38. 이러한 확신은 신자들에게는 말, 인침, 맹세, 하나님 자신의 보증에 의해 확립되고 확증된다. 히6: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 두 가지 사실을 인하여 —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14,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이 정당하게 이해되는 신앙과 회개를 인지할 때 일어난다,고후13:5. 만약 이들 중 하나라도 결핍되어 있다면 확신은 사라지게 되며, 언약의 약속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자는 자신 안에서 진정한 신앙과 회개를 인지하기 전에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앙과 선한 양심은 이러한 확신이 강화되거나 감소되는 만큼 인간 안에서 흥하거나 쇠한다. 확신으로부터 위로, 평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일어난다. 이들은 영화의 첫 번째 열매들이다,롬8:23.
세 번째 단계는 넘칠 정도로 부요하게 영적인 은혜의 선물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골2:2,7,10,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믿음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따라서 부요한 은혜란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주시는 것이다,벧후1:8,11.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자비 혹은 선한 의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시31:19,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 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65:4,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느니라.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한다,느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8:28. 이 모든 것은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엡3:17.
완전한 영화는 영혼과 몸에서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제거하고 전적인 완전성을 선사하는데 있다. 이는 몸과 분리된 후 영혼에게 즉시 수여된다,고후5:2,빌1:23,히12:23. 이는 통상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일순간에 하나님 안에서 완전케 되는 종말의 날 이전에는 영혼과 몸 모두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엡4:13,빌3:20,21.
31 신비적인 교회
구속이 적용되는 주체는 교회다. 엡5:25-27,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선택, 구속, 부르심, 칭의, 양자 됨, 성화, 영화는 동일한 주체 즉 교회를 구성하는 개인들과 관련된다.
요17:9-19,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롬8:29,30,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셨다.
교회는 주체이며 구속의 결과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선택된 자는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기 전에는 그들 자체로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정통주의자들이 교회를 선택된 자들의 무리라고 정의할 때, 이는 선택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혹은 현재 존재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앞으로 존재할 교회를 지칭힌다. 교회는 그 명칭과 정의에서 나타나듯 우선 부르심에 의해 구성된다. 참으로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무리이다. 고전1:24,10:32,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부르심의 목적이 신앙이요 신앙의 사역이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이는 것이며 이러한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동반하므로, 교회는 신자들의 무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무리,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무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의해 존재하는 교회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본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골1:24; 하나님의 교회,고전10:32; 그리스도의 나라,골1:13; 하나님의 나라,롬14:17로 불린다. 교회가 무리라고 불리는 것은 교회가 친교로 결합된 다수 혹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엡4:16에서는 교회는 서로 결합되고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된 몸으로 불린다. 또 성경에서 교회가 종종 집, 가정, 도시, 나라, 무리로 불린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너무도 밀접하여 그리스도가 교회의 것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것일 뿐만 아니라,아2:16,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요15:4,요일3:24. 따라서 교회는 신비적으로 그리스도,고후12:12, 그리스도의 충만,엡1:23이라고 불린다. 비유적으로 교회는 신부요 그리스도는 신랑이라고 불린다. 교회는 도시요 그리스도는 왕이며; 교회는 집이요, 그리스도는 주인이며; 교회는 가지들이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마지막으로 교회는 몸이요, 그리스도는 머리라고 불린다.
교회는 모든 민족, 장소, 시간의 신자들을 포괄하기 때문에 보편적이라고 불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정도에 따라 구분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든지 승리의 교회로 불린다. 전투하는 교회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시작되었다는 것만 인지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전장에서 적들과 교전하고 있는 교회이다. 승리의 교회는 이미 완성된 교회이다. 엡4:13,우리가 ---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고전15:46,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교회는 결코 그 모임으로 인해 완전히 좌절하지 않았으며 세상 끝날까지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가 그의 적들을 발등상 아래 둘 때까지 그의 적들 한 복판에서 자신의 나라를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결코 유형적이 되는 것을 결코 완전히 중지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모든 점에서 순수한 예배를 드리기에 충분할 만큼 순수한 교회가 적다 할지라도, 교회는 순수하지 못한 예배와 고백의 한복판에서도 어떤 식으로든지 여전히 유형적이다.
32 제도로서의 교회
지상에서 살아가는 교회는 개인적으로는 그 구성원들 안에서 그리고 집합적으로는 그 집단 혹은 회중에 있어서 유형적이다. 또한 외적인 형상이 관련되는 한, 회중들이 존재하는 수만큼의 유형 교회가 존재하게 한다. 그러한 회중 혹은 개 교회는 상호 성도의 교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특별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진정한 신앙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효과적이 되도록 교회에 거룩성이 결합되게 하고, 진정한 신앙에 대한 고백은 거룩함에 대한 고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서로 구분되긴 하지만 동일한 의미로써 신자들의 몽미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불린다. 엡1:1,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따라서 유형적인 개 교회들은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으로 인해 성부 하나님 안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살전1:1,살후1:1. 진정한 고백이 행해지는 이러한 종류의 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 교회 안에서는 소수의 진정한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신앙고백과 순종에의 약속 이외에는 교회에 입교할 수 없다. 이러한 언약에 의한 결합은 성도의 교제를 지향할 때에만 교회를 건설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다. 교회는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를 제정하거나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설립된다. 인간의 최고의 영예란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이 되는 것이다,히3:5.
그리스도는 교회가 항상 머리인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설립했다. 머리가 없다면 교회는 완전한 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새로운 것들을 제정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지를 명백히 발견하고 성실하고, 질서있고, 최대의 교훈을 산출하도록 그리스도의 율례들을 준수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율례들은 항상 하나님의 축복들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다양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교회에게 주어진다,마18:20,고전5:4. 따라서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살아있고 활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계2:1,사31:9. 또 성령의 현존에 대한 약속들도 주어진다,사59:21. 따라서 하나님의 부요하고 확고한 축복은 고독한 생활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설립된 교회에서 기대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 참여할 수 있지만 이를 소홀히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관련되어서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요, 이와 연관된 축복과 관련되어서는 자신의 영혼들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들이 무엇이라고 공언하든, 자신의 부주의를 완고하게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진정으로 추구하는 신자들이라고 볼 수 없다. 진정한 고백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33 교회의 비상 직원들
구속의 적용의 방식은 성령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모든 그의 유익들을 수여하는 방편들로 구성된다. 성령은 우리에게 내적으로, 가장 친밀하게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모든 구원적인 것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외적인 방편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외적인 방편이 본래적으로 함께 동반되며 작용하지만 그 자체로는 은혜를 수여할 수 없다. 성령이 외적 방편과 함께 일하신다. 고전3:7,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두 가지 주요한 방편은 교회의 직분과 거룩한 표징들(혹은 상징들)이며 여기에는 교회의 권징도 첨가되어야 한다. 교회의 직분은 구별된 자로 하여금 특별한 권한에 의해 거룩한 일들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교회의 한 기능이다. 고후4:1,우리가 이 직분을 맡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고전4: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것이 직분이라 불리는 것은 교회의 사람들에게 위임된 권세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에서만 행사되는 권세이기 때문이다,고전4:1,2.
영적이며 법적인 자율의 권능, 즉 자유롭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사역하는 권세란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 교회의 직원은 자기 대신 다른 사람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지 못한 자로서 자신의 직분을 행사해야 한다. 대리자들이 섬겨야 하는 많은 교회들의 항존직원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야망과 오만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역적 권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행할 수 없었던 것을 적법하게 수행하는 합당한 권세를 가지게 하는 권리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는 정당한 권세라 불린다.
사역의 권한은 소명에 의존한다. 히5:4,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소명은 어떤 사람에게 사역하는 권위와 함께 어떤 직분을 위임하는 행위이다. 소명의 필수적인 요소는 직분에 적합하냐는 것이다. 부적합한 자들은 그들이 인간들에 의해 소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직원이지 하나님의 직원은 아니다. 호4:6,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적합성은 은사들의 적합한 분량과 직분을 수행하고 행사하겠다는 자원적 의지로부터 유래한다. 교회의 직분에 의해 교회의 세 번째 지위를 가진다. 교회가 신앙에 의해 본질적인 지위를 가지고, 집회에 의해 통합적 지위를 가진다면, 사역에 의해서는 일정한 유기적 지위를 가진다. 이로써 교회는 전체의 선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수행하기에 적합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들의 과정과 방향은 교회정치이다.
교회정치의 형태는 왕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단일군주제적이다. 하지만 가시적 체계와 관련해서는 이는 혼합적 성격 즉, 부분적으로는 귀족적이며 부분적으로는 민주적이다. 따라서 교회의 적법한 사역에 있어서는 위계질서나 신성한 지배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종의 서열 혹은 신성한 봉사만 존재한다. 교회의 직원은 자신의 책임에 있어서 다른 직원의 권세에 종속되지 않고 각자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 이러한 직분은 비상직과 통상직분으로 구분된다.
비상직은 일반적인 수단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보다 고도의 혹은 보다 완전한 지도를 받는 직분이다. 비상 직원들은 항상 특별한 은사들과 보조를 받아 오류없이 사역할 수 있다. 비상 직원의 권위는 실제로는 인간에 의해 주어지거나 인간을 통해 주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갈1:1. 따라서 비상직으로의 소명은 직접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소명은 엘리사나 맛디아의 소명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적인 사역을 배제할 정도로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비상직이 교회를 위해 필수적이다. 하나님에 의해 고무되고 파송받고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를 현현시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자들을 필요로 한다. 출4:15,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이러한 비상직은 교회를 처음으로 설립하기 위해서 혹은 교회를 특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혹은 붕괴된 교회를 특별하게 회복시키기 위해 행사된다. 교회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사역은 비록 특별하고 통상적으로 기적들에 의해 확증되지만, 항상 혹은 필연적으로 기적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많은 구절들과 세례 요한에게서 나타난다.
선지자들, 사도들, 전도자들은 비상 직원들이다. 위클리프,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복음의 첫 번째 회복자였던 다른 자들은 엄격히 말해, 비상 직원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비상 직원이라고 불려도 부당한 것은 아니다. 이는 첫째, 이들이 이전의 비상 직원들이 수행했던 것과 유사한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요, 둘째, 시대가 요구하듯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많은 은사들을 받았기 때문이요-이는 보다 유명한 다수의 순교자들에게서도 확인된다- 셋째, 당시 질서가 모두 손상되고 부패해 있었으므로 그들의 평범한 과정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필연적으로 시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제시한 교리들을 확증하기 위해 기적들을 요구한다는 것은 조소거리이다. 비상 직원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증거는 필요치 않다.
34 성경
비상 직원은 구두로 뿐만 아니라 신적 문서들에 의해 교회들을 가르치도록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 이로써 비상 직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들의 사역은 교회에서 항구적으로 사용되고 결실될 수 있게 되었다. 비상 직원들만이 신앙의 규범을 제정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접적으로 무오류적 지시에 의해 문서를 기록하는 것에 관한 한 무오류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신31:19,계1:19,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네 본 것---을 기록하라. 이는 부분적으로는 성령의 내적 감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벧후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딤후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들은 또한 성령의 영감과 인도에 의해 기록했으며 이 점에서 그들은 성령의 도구들이었다. 하지만 신적 영감은 본 저자들 사이에 상이한 방식으로 현존했다. 어떤 것들은 자연적 지식에 의해, 어떤 것들은 초자연적 지식에 의해 알려졌다. 감추어지고 인식되지 못한 것에 있어서도 신적 영감이 그 자체로 작용하고 있었다.
초자연적 영감에 의해 인식된 모든 것들에 있어서는, 공정성의 문제 있어서든, 사실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든, 하나님께서 기록될 주제들에 대해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제들이 표현되어야 할 단어들도 구술하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각 저자가 자신의 인격과 상황에 가장 부합되는 기술방식을 활용하도록 섬세하게 조정된 가운데 이루어졌다. 따라서 성경은 저자들에 대한 언급없이 종종 성령을 저자로 지칭한다. 히10:15,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하나님의 특별한 종에 의해서 그리고 성령의 지시 아래 기록된 책이라 할지라도 신적 권위에 의해 교회에게 공개적으로 주어져서 정경 혹은 규범으로서 구별된 것이 아니라면, 성경의 일부는 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삶의 교리로서 언급된 모든 것들은 교회 이전에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성경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관련된 한 문서로서의 성경은 고대교회 이후에 존재했다.
이는 거룩한 책(Holy Scripture)으로 불리고 때로는 무엇보다도 그 책(the Scripture)이라고 불린다.
성경의 다양한 부분들이 특별한 경우에 기록되었고 특정인들이나 모임을 대상으로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도에 있어서는 이들은 모두 동등하게 모든 시대의 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의 교육과 건덕을 위한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딤후3:15-17,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성경은 부분적이라기보다는 완전한 신앙과 도덕의 규범이다.
성경은 특히 필수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조명을 통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스스로 빛을 발하며 따라서 인간들이 근면히 연구하여 해명할 수 있고, 자신들의 소명에 따라서는 다른 자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내의 모든 부분에는 오직 하나의 의미만 존재한다. 한 가지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는 신학이 논쟁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왕 혹은 행정관들이 설립한 가시적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탐구의 의무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진리를 공적으로 사적으로 분별하는 은사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리고 소명에 따라 이미 인식한 지식과 실천을 증진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지시와 축복이 결합된다.
성경이 교회의 사용과 건덕을 위해 주어졌으므로, 성경은 그 문서들이 기록될 당시 교회에서 가장 일반적이며 널리 유포된 언어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기록된 모든 책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후에 기록된 책들은 헬라어가 교회가 최초로 발전했던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언어였으므로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어떠한 역본들도 절대적으로 진정성이 있다고 판명할 수 있는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들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주목할 만하고 영화롭다. 왜냐하면 비록 고대 역본들 중 어떤 것도 완벽하게 보존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책이 유실되어 완전히 소멸되거나 훼손되고 심각한 결손에 의해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역본들이 원본과 본질적인 면에서 일치하는 한, 이들로부터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이 인식될 수 있다. 교회에 의해 수납된 모든 역본들은 비록 몇 가지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다르고 결손되었다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일치한다.
우리는 수납된 어떠한 역본에도 영원히 의존해서는 안 되며, 순수하고 무오한 해석이 교회에 주어질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 교회의 보고에서 신적으로 전달되고 소장된 모든 책들 중에서 신앙과 도덕의 완전한 규준(cannon)이 구성되는데 이는 정경이라고 불린다.
35 통상 직원들과 설교직
통상직이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지속적인 교육을 위해 지정한 수단으로부터 모든 지시를 받는 직분이다. 본 직분으로의 소명이 하나님에 의해 확립된 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통상직이라고 불린다. 봉사에 있어서 통상 직원들은 비상 직원들에 의해 이전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를 고정된 규범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에서 성경에서 그들에게 규정되지 않은 어떤 것도 제안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
통상 직원들은 비상 직원들에 의존하며, 말하자면 이들의 후계자들이다. 비상 직원들이 한 때에 수행했던 동일한 직분을 교회에 대하여 수행한다. 통상직에 대한 권한은 일반적으로 인간에 의해 주어지며 그러한 이유로 인해 통상 직원의 소명은 간접적이다. 하지만 이는 신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권한은, 비록 그 권한을 받는 자들의 임명은 교회에 의해 행해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모든 적법한 교회의 직원들에게 전달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직분에 필요한 은사를 수여할 수 없다.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선택만 할 수 있다. 따라서 적법한 심사가 소명 자체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딤전3: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통상직의 목적은 정규적 수단을 통해 교회를 보존하고 전파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통상직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에 대해 행할 일을 행해야 하는 부분과, 백성의 이름으로 하나님에 대해 행할 일들을 행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말씀 설교는 극도로 중요하며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일반적인 설교자의 의무는 청중들의 건덕을 위해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의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딤전1:5,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우선 교회의 건덕을 위한 열정적인 열심이 요구되므로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스7:10) 자가 아니라면 적합한 설교자가 될 수 없다. 다른 자들을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기 전에 그리고 가르치는 동안 자신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롬2:21. 그렇지 않다면 그는 교회의 건덕에 예비되지 못한 자다.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의지가 말씀에서 제시되어야 하므로 일반적인 신자의 수준을 넘어서서 성경에 지대한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떠한 자도 설교직에 적합하지 못하다. 그는 아볼로와 같이 성경에 능한 자가 되어야 한다(행18:24). 그는 관주나 주석을 의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지가 건덕을 위해 효과적으로 제시되기 위해서는 첫째, 본문에 있는 것들이 언명되어야 한다. 둘째, 이들은 청중의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청중의 양심에 적용되어야 한다. 딤전6:17,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설교자들은 자신의 청중을 위압하거나, 설교의 출발점으로 어떤 본문을 주석할 때 자신을 망각하여 본문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설교하거나, 단지 단순히 본문을 설정했을 뿐 대부분은 본문 자체와는 전혀 무관한 것들을 설교한다. 본문에 있는 진리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설교자는 먼저 본문에 있는 진리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선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자는 교리들과 증명들과 관련된다. 후자는 적용 혹은 교리들로부터의 유익의 도출과 관련된다. 딤후3:16,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러한 요소들을 전도시키거나 혼동하는 자들은 청중들이 설교를 기억하기 어렵게 하고 자신들의 건덕에 집중하기 어렵게 한다. 그들의 청중들은 설교의 대지들을 기억할 수 없고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이를 반복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행해지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교회에 많은 열매들이 맺혀지지만, 이것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 열매의 대부분이 상실될 것이다.
교리는 성경의 명시적 단어들로 표현되거나 혹은 직접적인 결과로 이들로부터 도출된 신학적 원리이다. 교리는 먼저 발견되고 그후 논의되어야 한다. 발견은 논리적인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며 수사학과 문법이 활용된다. 각 교리가 충분히 설명되었다면 즉시 그 효용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진리를 적나라하게 발견하고 설명하는데 집착하여, 종교와 축복이 근거한 적용과 실천을 소홀히 하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를 과시하거나 육적인 감정들이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성경의 증거로서 나타나야 한다. 고전1:17,2:1,4,13,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말의 지혜와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기 위해서 설교되는 것은 성령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풀이나 짚처럼 무용하다, 고전3:12.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과 혼합되어 말할 때,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과 완전성, 위엄은 손상된다. 그리고 동시에 청중에게도 피해를 주어 청중들은 인간적인 화려한 말에 심취되어 귀가 가려워져서 복음의 단순성을 혐오하고 건전한 가르침을 인내하지 못하게 된다, 딤후4:3. 웅변가들의 불필요하고 견강부회식의 서두와 감언이설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언어와 행동은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완전히 영적이어야 한다. 이는 성경과 경건한 실천에 능한 자, 자신이 먼저 감화되어 완전히 자신의 양심으로 다른 자들을 감화시킬 것들을 결정한 자, 그리고 장중한 권위와 함께 열성, 자비, 온유, 자유, 겸손을 지닌 자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은 세련되고 번지르한 말들보다는 아주 단순한 말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36 성례들
하나님의 언약을 인치는 표징은 성례라고 불린다, 롬4:11. 이는 기념하고, 현시하고, 고지하고, 알려주고, 상기시키고, 인치는 표징이다. 따라서 새 언약의 성례는 감각으로 지각될 수 있는 표징들을 통해 새 언약의 축복들이 대표되고 현존되며 적용되는 신적 제도이다. 그러한 성례는 이차적인 신적 증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일차적인 증거인 언약 자체가 우리를 위해 특별히 확증된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으로부터 일어나는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의 특별한 적용은 성례들에 의해 확증되고 증진된다.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그러한 성례를 제정할 수 없다. 어떤 피조물도 신앙과 확신을 확증할 수 있도록 표징들에 힘을 부여한다거나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은혜를 고취시킬 수 없다. 이러한 거룩한 용도를 위해 구별되고 구분되는 사물 자체는 대표적 표징이라고 불리며 이는 성찬의 떡과 즙에서 예시된다.
성물들은 자신의 용도와 구분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이들은 사용 이전 혹은 이후에는 성물로 존중되지 않는다.
새 언약의 성례가 의미하는 영적인 사물이란 새 언약 자체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위해 예비된 모든 축복이다. 이들은 은혜 언약 전체를 신자들에게 인친다. 그리고 본 성례들은 이들이 시행될 때뿐만 아니라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러한 효용을 가지고 있다.
성례의 본질은 표징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 간의 성례적 연합이다. 성례적 연합이란 표징이 의미하는 것이 그 표징들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자들에게 실제로 전달되는 영적인 관계이다. 성례적 연합으로부터 진술들의 전달이 도출된다. 첫째, 심령의 성화가 할례라고 불리는 것처럼 표징은 표징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진술된다. 둘째, 할례가 언약이라고 불리고 떡이 몸이라고 불리듯, 표징이 의미하는 것이 표징이라고 진술된다. 셋째, 세례가 중생하는 것이라고 말하듯이,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효과가 표징이라고 진술된다. 넷째, 떡에게 적용될 수 있는 ‘떼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귀속되듯이 표징의 속성이 표징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진술된다. 다섯째, 성례적 먹고 마시는 것이 영적이라고 불리듯이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속성이 표징에 귀속된다.
표징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과의 관계의 기초는 명령과 약속으로 구성된 제정의 말씀에 존재한다. 명령은 우리에게 떡과 즙이라는 피조물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의무를 부과한다. 적절한 기도와 병행된 이러한 제정의 말씀은 봉헌, 축복, 성화, 구별의 말씀이라고 불린다.
성례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언약을 인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 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 우리에게 인쳐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도 인쳐진다. 따라서 거룩한 것들에 대한 신비한 표징들은 성례에 대한 편견 혹은 이를 손상시키지 않고서는 인간에 의해 제정될 수 없다. 성례는 단지 인간의 의무만을 제시한다.
성례의 이차적 목적은 신앙과 사랑의 고백이다. 성례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맺은 연합과 동일한 연합에 참여한 모든 자들과 가지는 교제, 특히 동일한 교회의 지체들과의 교제를 상징한다.
37 권징
거룩한 권징은 범죄들에 대해 경계하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범죄들을 제거하기 위해 견책을 통해 개인들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적용시키는 것이다. 말씀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가 제시되며 신앙과 순종을 생성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실제적으로 적용된다. 성례의 시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는 신앙과 순종을 확증하는 인침을 통해 개인들에게 적용된다. 권징의 시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지는 진정한 신앙과 순종에 반대되는 악들을 제거하기 위해 견책을 통해 개인들에게 적용된다.
따라서 권징은 통상적으로 훌륭한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와 연관된다. 권징은 교회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있어서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권징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되고 규정되었다, 마16:19, 18:15-17. 따라서 이는 명백히 신적 권리를 지니며 인간이 원하는 대로 제거되거나 약화되거나 변용될 수 없다. 권징을 교회에서 확립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는 권징의 창시자요 제정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범죄하는 것이다.
권징은 가시적이고 조직체로서 교회의 구성원에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성례에 참여한 권리를 지닌 모든 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이다. 권징은 하나님의 의지 즉 그리스도만이 교회들에게 부여한 영적인 개혁의 수단들을 적용한다, 고후10:4. 따라서 신체적이고 금전적인 형벌이나 고통은 교회 권징에서는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권징은 사람들 안의 죄와 허물들에 관련된다. 권징은 그리스도의 양들이 입은 상처와 질병에 대한 건전한 치료제이다, 고전5:5.
권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효력적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왕권의 대부분이 할애 된다.
권징이 그리스도의 왕직의 일부이듯이 복음의 일부이다. 귄징은 복음을 증진시키는 거룩한 방식이요, 복음 자체에 의해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징을 거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왕직도 온전한 복음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권징을 결여한 교회에 대해 만족해서는 안 된다.
권징에는 형제적 교정과 출교가 있다. 권징은 주로 출교와 저주의 위협으로 구성되지만 우선적으로는 기독교적 교정으로 구성된다. 견책의 고유한 목적은 출교가 아니라 죄인이 적시에 회개하여 교회에 남을 수 있도록 이를 예방하는 것이다. 감추어진 죄들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순차적으로 규정한 세 단계가 지켜질 수 있다, 마18:15-17. 하지만 공적인 죄에 있어서는 그러한 단계들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딤전5:20.
경고들은 항상 인간의 견해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에 도달할 수 없다. 완전한 출교는 범죄에 완고성이 추가되기 전에는 시행되어서는 안 된다, 마18:17. 정당하게 경고받은 자들은 참회하거나 더욱 완고해질 것이다. 참회한 자는 출교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완고한 자만 출교해야 한다. 하지만 극악한 범죄들에게 있어서는 인내 혹은 유예가 필요하지 않다. 유예가 허용될 때에는 성경과 이성을 통해 먼저 출교가 수찬정지 및 다른 교회적 특권들의 금지로 시작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통상적으로 소출교라고 불린다. 회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마침내 완전히 신자의 공동체에서 단절시켜야 하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대출교라고 불린다. 이들과의 대화, 기도, 인사, 초대, 식탁의 교제 등등은 부인된다.
회개는 교회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진지한 회개의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 성행하고 교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조롱을 받는다. 권징은 교회의 동의하에 수행되어야 하며 교회의 허용뿐만 아니라 교회의 승인과 결정 하에 수행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권징의 행사와 시행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교황들, 추기경들, 그들의 직원들의 관례적인 견책들은 그 자체가 견책을 받아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부당한 정부를 지지하고, 다른 사람들의 돈을 갈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책들은 죄에 대한 영적인 교정책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권징의 대상으로 명령한 일들에 있어서 면죄들, 형벌의 감형, 인간적 거래 등은 음녀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38 그리스도 강림 이전 은혜 언약의 시행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언약이 처음부터 동일한 하나의 언약이지만, 그리스도의 적용 방식 혹은 새 언약의 시행방식은 교회가 회집하는 구체적인 시대에 따라 다양했다. 이러한 다양성 안에 항상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으로의 진보가 있어왔다. 처음에는 복음의 신비가 일반적이며 모호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후에는 보다 특정하게, 보다 명확하게 나타난다.
언약의 시행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오실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오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은 이러한 일차적인 주제로 환원될 수 있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약속하고 신약은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가 강림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보다 외적이고 육적이었지만 그가 오신 후에는 보다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 되었다. 요1: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니라.
교회도 이중적인 국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상속자로서 둘째는 어린아이로서이다. 갈4:1,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없어서. 상속자로서 교회는 자유롭다. 어린아이로서 교회는 육적이며 지상적이다, 히9:10,롬9;7. 상속자로서 교회는 양자 됨의 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린 아이로서 교회는 두려움과 종의 영을 가지고 있다, 롬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된 언약의 시행 방식은 모세 이전과 모세로부터 그리스도까지로 구분된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첫째,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그리스도의 적용이 일반적으로 약속되었다. 이는 사단 혹은 죄와 죽음의 일을 분쇄하게 위해 여자의 씨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창3:15,롬16:20,요일3:8,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둘째, 부르심의 차이는 여자의 씨와 사단의 씨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아들들 사이(창6:2)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셋째, 칭의의 방식은 죄에 대해 드려지고 열납되는 대속제물에 의해 제시되었다, 엡5: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넷째, 양자 됨은 그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이었던 아들이라는 칭호와 에녹의 승천에 의해 제시되었다, 창5:24,히11:5.
다섯째, 성화는 선지자에 의해 명시적으로 가르쳐졌고 전형적인 제사 예식과 제물들에 의해 암시되었다, 유14,롬12:1. 여섯째, 영화는 에녹의 사례와 노아와 그의 가족이 홍수로부터 구원된 사례에 의해 공적으로 인증되었다, 벧전3:20,21. 이 시기에는 홍수시 방주의 건조와 구원이 특별한 성례였다, 히11:7,벧전3:20,21.
아브라함의 시대부터는 교회는 주로 아브라함의 가정과 그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다. 새 언약의 유익들이 이전보다 보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증거되었다. 첫째, 선택은 이스라엘과, 에서 이전에 사랑받은 아들이었던 이삭과 야곱이란 인물에게서 제시되었다, 롬9:11-13. 둘째, 구속 및 그 적용은 멜기세덱이란 인물과 그의 축복에서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미칠 축복의 약속과 언약에서 장엄하게 보여졌다. 셋째, 부르심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로부터 새롭고 천상적인 나라로 인도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히11:8-10. 넷째, 칭의는 신앙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요 원형인 아브라함에게 의로 간주되는 하나님의 명시적 증언에 의해 예시된다. 그 의를 인치는 할례의 성례도 주어졌다.
다섯째, 양자 됨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모든 약속의 아들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은혜를 통해 자유한 여자의 가문인 약속의 아들들에게 상속이 이루어짐으로써 선포되었다, 갈4:26,28,31. 여섯째, 성화는 할례에 의해 예시되었는데 할례는 죄의 부패와 옛 사람을 제거하고 일소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골2:11,신30:6. 일곱째, 영화는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 땅에 약속된 축복에서 제시되었다.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시기는 이와 동일한 것들이 특별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예시되었다. 구속과 적용은 특별했다. 구속과 그 적용은 첫째, 그리스도의 모형인 모세의 사역을 통한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의 의해, 마2:15, 그리고 또 다른 그리스도의 모형인 여호수아의 사역을 통한 가나안 땅으로의 정착에 의해 지칭되었다. 둘째, 이들은 죽어가는 자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던 구리뱀에서 예시되었고, 요3:14,12:32,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들과 하늘로부터 입는 피해로부터 보호해준 구름에서 예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으로 빛이 있었고 그들의 힘은 소생되었다, 고전10:2,사4:4-5. 넷째, 이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예비하면서도 적들을 삼켜버렸던 홍해 바다를 지나가는 사건에서, 고전10:2, 다섯째, 하늘로부터의 만나와 바위로부터의 물 즉 그들이 하나님의 손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사건에서 예시된다, 고전10:3,4,요6:32,33.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구속은 대제사장, 제단들, 제사들을 통해 예시되었다. 칭의는 많은 제사들과 정결예식 그리고 유월절의 성례에서 제시되었다. 양자 됨은 장자를 하나님에게 봉헌하는 것에서 제시되었다. 성화는 모든 제물들과 예물들 및 정결과 관련된 규례들에서 제시되었다. 영화는 약속의 땅의 기업과 그들이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것에서 예시되었다.
모세에 의해 외적으로 함께 회집함으로 창시된 유대인들의 교회는 오직 하나였다. 하나의 성전에 근거한 것이고 공적인 고백과 예식들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회당들은 완전한 의미의 교회들은 아니다. 예배와 친교는 회당에서는 시행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교회는 민족 교회였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교회는 하늘 아래 모든 민족의 이방인 개종자들이 하나였던 본 교회에 결합할 수 있는 한 보편적인 교회였다. 행2:5,6,8-11,8:27.
이 시기에 일차적인 직원들은 지속적으로 승계된 아론의 가문의 제사장들이었고 여기에 레위인들이 결합되었다, 민3:6-10. 이 시기의 교회적 권징은 대부분 제의적이었지만 이는 모든 종류의 거룩한 것들을 정결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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