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보니 물이 꽉찬 저수지 뚝방이 생각난다. 담긴 것은 무척 많은데 무엇부터 글로 풀어내야 하나 하는 부담이 생기는 탓이다. 물론 주제의 방대함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지식이 꽉찼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과 부담은 기꺼이 담당해야 할 우리의 몫이다. 우리 시대 교회는 이러한 부담을 진지하게 부담하지 않는 것 같다. 진리를 위해 깊은 고민을 하고 진지하게 묵상을 해야 한다면 기꺼이 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편하며 적당한 것만 모색하는 것은 우리시대 교회의 질병 중 하나다.
1. 예배의 정의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 편의 반응이다. 주지하듯, 하나님의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사실 일반계시란 것도 특별계시의 조명과 인도가 없다면, 부패한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성품), 창조와 구속사역, 섭리와 은혜, 심판과 권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예배와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깨닫게 된다. 즉 계시된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피조물로서, 또 구속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은혜받은 자로서 감사와 영광을 그분께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설교(하나님 말씀의 선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계시하신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당연히 예배로 나아갈 수도 없는 까닭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것은 우리 시대 참된 예배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개혁자들은 이런 행위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규정한 바 있다. 말씀의 기준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잘못이고 죄로 성경은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즉 예배란 우리 편의 행위적 열심이나, 엄숙한 분위기도 나의 종교적 감흥도 아니며 따라서 내가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2. 예배의 요소
전술한 바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인간의 반응을 예배의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설교(말씀선포)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의 반응은 기도(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는 기도에 찬양을 포함하고 있다)와 헌상(헌신, 헌물)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지 않은 모든 기도나 헌상이 예배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가르침이다. 성령과 말씀, 그리스도를 통해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모든 예배행위 즉, 형식이나 구성요소, 의미 등은 늘 말씀과 성령의 조명아래 이뤄져야 한다. 말씀의 조명없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타락한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일 수 밖에 없음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외와 공로를 성령의 역사로 덧입게된 인간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전제된다.
하지만 우리시대 교회에는 이러한 말씀과 성령의 인도와 무관한 '인간의 종교적 열정'으로 충만하다. 예배를 뜨겁게 드려야 한다는 전제에서 열심과 열정을 강조한다. 하지만 말씀의 인도와 지시 없는 그 어떠한 행위도 죄악이며, 우상숭배에 다름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열심이나 간절함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기서 예배의 핵심요소라 전술한 '말씀 선포'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충실히 선포하고 드러내는 일에 설교자들은 얼마나 충실하게 참여하고 있는가. 오히려 자신의 욕심과 판단에 따라 적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 복지정책, 교육철학, 윤리기준 등등...
하지만 말씀선포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말씀만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전체성경(tota scriptura)'의 개념이 적용된다. 즉 '오직 말씀'을 통해 설교의 범주가 말씀 안에 제한된다는 의미가 드러나고, '전체 성경'의 의미에서 화자(speaker)로서의 하나님의 진의와 본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누구나 성경을 말하지만(심지어 교회의 대적자나 이단들도) 전체적인 맥락과 배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흔히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이해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시대에 전체 성경으로의 정신은 매우 강조되어야 할 항목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시대 교회들에는 이런 정신과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자로 세워진 목사들도 문제지만, 그것을 감독할 당회나 교회의 무지와 게으름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악순환의 고리가 되어 교회를 더욱 약화시키고 타락시키는 요인이 된다.
교회에 선포되는 말씀이 이러하니 거기에 따른 기도와 헌상이 바를 수 없다. 오늘날 기도는 마치 하나님을 내 욕심을 성취시켜 주는 존재로 만들고, 나아가 기복주의와 세속주의로 뒤섞어 버렸다. 기도는 말씀의 기준을 따라 내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드려져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고 어긋난 나의 뜻과 갈망은 하나님의 뜻앞에서 복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는 말씀의 기준 앞에서 너무나 변질되어 버렸다.
헌상은 어떠한가. 내가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돈이 부족한 것도, 일할 일군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는 하나님 자신의 열심으로 드러나지고 선포된다. 아니,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당신의 영광이 제대로 드러나고 선포된다.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참여는 그 영광을 오히려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존재와 사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오직 그분의 자비의 은혜요 십자가 신비의 결과일 따름이다.
3. 회복되어야 할 예배
늘상 여기까지 오면 할 말이 막힌다. 우리시대 교회들이 회복된 예배를 볼 수 있을까. 그런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 참 예배는 참 부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그분에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부흥....하지만 어찌하면 그리될 수 있을까. 막막하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어게인 1907'을 외친다. 그때의 부흥이 우리 시대에 재현될 것이라 믿고 그렇게 기도하고 외치며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상당수 교단과 단체, 기구가 참여하고 점점 분위기를 띄워가고 있다. 이른바 평양대부흥의 평가도 엇갈리고 있는 것이 아실이지만, 긍정적으로만 생각한다 해도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안타깝지만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시기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도에 달린 것을 우리 인간에게 맞춰달라고 간구하는 일은 과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심이란 용어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프로그램과 캠페인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가능한 일이며 인간의 열정이나 갈망과 관계없다. 단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일이 인간에게 열망과 열정을 부으시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다른 문제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열정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예배의 회복이 전제되지 않은 가운데 이런 열심과 정열은 참된 부흥으로 이어질 수 없다. 일말의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바른 계시가 참 예배와 부흥의 전제란 점은 분명하다.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우리에게 바른 설교가 회복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며 복음 가운데로 나아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감격하여 기쁨과 희락이 넘침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창조사역과 구속사역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가운데 예배 중에 충만하게 선포되고 드러나지게 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참된 예배의 회복의 전제이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참된 설교가 사라지고 바른 성경의 사역자가 희귀한 것은 우리 시대에 참 예배의 회복도 참 부흥도 요원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나님의 교회는 다수가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수의 남은 자들에 의해 계승되어지는 것이 성경의 증거다. 우리는 참 예배를 통해 이 땅에 소망없음을 인식하고 천국을 대망하는 자리로 나가야 한다. 우리시대 참된 예배와 부흥을 열망하지만 그 일이 이뤄질 가능성이 없음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한 현실 앞에 그리스도의 위로와 공로를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과 사람의 열심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 요소가 되겠습니다. 예배와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와는 어떤 차이가 있겠지만 예수님께 옥합을 깨트려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죄많은 여인의 행위는 자신의 열심일까요? 하나님의 요청일까요? 예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는데..... 역시 개취급받은 가나안 여인의 강청하는 기도도 사람의 열심일까요 하나님의 요청일까요?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하나요? 개혁을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좀 눌리는 기분입니다. / 위의 예배에 대한 최채호님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면 기도원에서 뜨겁게 부르짖는 기도나 열정적인 찬양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시편에 박수치며 찬양할찌어다,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춤추어 찬양할찌어다.... 하는 말씀들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에 속한다고 봅니다만.... 구약성경에 다윗은 에봇을 입고 춤을추면서 기쁨의 찬양을 한 일을 기록하고 있고, 이를 비방한 아내 미갈이 다윗의 저주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삼하6:21~23
우리가 누구의 행위를 두고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자기평가이지요. 주께서는 그런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이니까요. 양반다리 개고 앉았다고 그는 자세부터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과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하는 문제부터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남의 행위를 일일히 자신의 잣대로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의와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 해서도 안되겠지요..
침묵님,어진내인님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낱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표현의 뜻은 윗글에서 최재호님이 설명하듯이'성령과 진리로' 라는 뜻으로서, 구약시대의 열등한 그림자적 예배의 시대와 비교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는 신약시대 예배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비교해서 참(실재)으로 드리는 예배,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열정,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를 인간의 정성,열심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본질이 왜곡된 열정은 우상숭배라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의 문제적 성격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한번만 천천히 읽어봐도 알 수 있을 텐데요. 칼빈의 글이라고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공식적으로 칼빈의 가르침을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칼빈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현대교회의 예배의성격을 어떻게 평가 할지....
음~ . 요한계시록에 천상의 찬양모습이 나오는데,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찬송하는데.... 예고편이라 열등한 모습일까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호수님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열정, 열심, 정성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앞에 인간의 종교적이라고 붙어있지만.... 누가 열정으로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그것은 신령과 진정이 아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다. 종교적 열심을 무엇으로 판단하시는지요. 또 성령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성령을 매우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때로는 조용하게 오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으로 열정을 가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죠? 내가 아는 성령으로만 말하면 성령님이 노하십니다. 모든 것은 무엇으로 판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 열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대해 아주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때,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을 생각한다면 과연 몇교회가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예배중에 선포되는 말씀이 잘 못 선포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자들은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것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특히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은 ......
제 생각에 침묵님과 어진내인님의 관점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살피고 그로 말미암는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신학의 근원적인 작업으로부터의 출발이 안되니, 가지의 흔들림만 보고 진리를 해석 하려고 하니 끊임없이 우왕 좌왕 하는 것 입니다. 광주행님이나 최재호님의 주장은 그 근원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어찌 그걸 볼 줄 아는 눈이 없는지요. 근원적인 신학이 없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현상의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고 그걸 참 열매로 생각하니 답답할 뿐이죠. 저는 눈물의 기도나 뜨겁고 감격스러운 찬양을 좋아 합니다. 늘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제 소원 입니다.
예배에 대해 아마도 할 말씀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시대 교회들이 예배라는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소견대로' 예배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성경이나 교리적인 면 말고도 교회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교회는 성경의 제한과 무한하게 자신들이 판단할 때 교회에 유익하다 생각되면 뭐든 도입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아이콘이나 여러가지 성례들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해치거나 망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해서 이 일들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최재호님의 글에 동감합니다. 같은 사상을 가졌습니다. 의문은 소견대로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판단하느냐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박수, 소고, 북 등 모든 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사용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령과 진정은 순전히 본인에게 있는 것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지 나타나는 현상을 가지고 우리가 편리하게 아니다 맞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개혁교회는 말씀이 중심이기에 강대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죠. 상징적인 것입니다. 공예배등에서는 모든 악기들을 다 사용하지는 않죠.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악기들이죠.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행위이지 우리가 무엇을 구경하거나 내가 무엇을 받는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속에서 우리는 내려주시는 은혜를 받지만서도요. 그러나 부흥회나 기도회에서는 전 조금 열려야 한다고 봅니다. 사울의 두통은 다윗의 악기연주로 완화되어졌으니까요. 위 새론맘님... 전 예배 시간에 아니 교회당에서 장구치는 것은 아직 못보았습니다. ㅎㅎ 웃자고 한 말입니다.
이 관계성은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믿을때부터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페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오늘날 생활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지만 실제 인격체이신 주님과 참된만남의 관계는 거의 미비합니다. 우리는 본래 생명이없는 사망이 우리의 근본입니다. 사망이 생명되지 못함은 당연한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이신데 인격체이신 주님과 만남의 교제속에서만이 주님을 앎이되고 주님께서 우리안에 나타내시는 의도에 반응하는것이 생명을 낳는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주님에 관에서 많이 알고 실천해도 사망을당한 우리는 오직 주님과의 관계속에서만이 생명이라는것이죠. 선악과는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격체신 주님안에 그분과 관계속에서만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신다는것이죠. 그분이 우리안에 나타내심이 곧 인격체신 예수님을 앎이되고 그분과의 관계안에 있을때만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는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가나안 여인도 같은 공통적 특징이 예수님을 직접만날수 있기를 갈망했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이 진정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는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변화는 내안에 주님이 계실때 내안에 계시는 주님을 앎이 진정 나를 주님께 놓아가게되고 주님께 놓아가는 나의안에 주님은 당신의 의도를 나타내신다는 것이죠. 성령의 일하심은 오직 예수의 일을 성취하신다는 것이죠 우리안에 오직 예수로 접목되게하시고 예수님께 접목된 우리안에 예수그리스도를 이루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공감하면서 퍼갑니다 ^^
진지한 고민이 있는 글에 공감하며...저도 퍼가렵니다^^
진정한 고백은 실천이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사람의 열심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 요소가 되겠습니다. 예배와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와는 어떤 차이가 있겠지만 예수님께 옥합을 깨트려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기는 죄많은 여인의 행위는 자신의 열심일까요? 하나님의 요청일까요? 예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는데..... 역시 개취급받은 가나안 여인의 강청하는 기도도 사람의 열심일까요 하나님의 요청일까요?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하나요? 개혁을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좀 눌리는 기분입니다. / 위의 예배에 대한 최채호님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면 기도원에서 뜨겁게 부르짖는 기도나 열정적인 찬양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시편에 박수치며 찬양할찌어다,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춤추어 찬양할찌어다.... 하는 말씀들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에 속한다고 봅니다만.... 구약성경에 다윗은 에봇을 입고 춤을추면서 기쁨의 찬양을 한 일을 기록하고 있고, 이를 비방한 아내 미갈이 다윗의 저주로 아이를 출산하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삼하6:21~23
우리가 누구의 행위를 두고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자기평가이지요. 주께서는 그런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이니까요. 양반다리 개고 앉았다고 그는 자세부터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과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하는 문제부터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남의 행위를 일일히 자신의 잣대로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의와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 해서도 안되겠지요..
관심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정 자체가 잘못이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향한 , 어디에 근거한 열정이냐를 말한 것이지요.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주제로 나눔이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님,어진내인님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낱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표현의 뜻은 윗글에서 최재호님이 설명하듯이'성령과 진리로' 라는 뜻으로서, 구약시대의 열등한 그림자적 예배의 시대와 비교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는 신약시대 예배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비교해서 참(실재)으로 드리는 예배,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열정,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를 인간의 정성,열심같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본질이 왜곡된 열정은 우상숭배라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배의 문제적 성격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한번만 천천히 읽어봐도 알 수 있을 텐데요. 칼빈의 글이라고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교회는 공식적으로 칼빈의 가르침을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칼빈이 지금 살아있었다면 현대교회의 예배의성격을 어떻게 평가 할지....
음~ . 요한계시록에 천상의 찬양모습이 나오는데,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찬송하는데.... 예고편이라 열등한 모습일까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호수님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열정, 열심, 정성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앞에 인간의 종교적이라고 붙어있지만.... 누가 열정으로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그것은 신령과 진정이 아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다. 종교적 열심을 무엇으로 판단하시는지요. 또 성령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성령을 매우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때로는 조용하게 오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으로 열정을 가지게 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죠? 내가 아는 성령으로만 말하면 성령님이 노하십니다. 모든 것은 무엇으로 판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 열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대해 아주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때, 성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을 생각한다면 과연 몇교회가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예배중에 선포되는 말씀이 잘 못 선포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자들은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 것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특히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은 ......
제 생각에 침묵님과 어진내인님의 관점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살피고 그로 말미암는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하는데 신학의 근원적인 작업으로부터의 출발이 안되니, 가지의 흔들림만 보고 진리를 해석 하려고 하니 끊임없이 우왕 좌왕 하는 것 입니다. 광주행님이나 최재호님의 주장은 그 근원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어찌 그걸 볼 줄 아는 눈이 없는지요. 근원적인 신학이 없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현상의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고 그걸 참 열매로 생각하니 답답할 뿐이죠. 저는 눈물의 기도나 뜨겁고 감격스러운 찬양을 좋아 합니다. 늘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 제 소원 입니다.
이광호 목사의 CNB 502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7일"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기타 다른 CNB 시리즈들과 함께... 혹 침묵님이 주장하시는 '호' 추종자로 매도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구를 추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예배에 대해 아마도 할 말씀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시대 교회들이 예배라는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소견대로' 예배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성경이나 교리적인 면 말고도 교회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교회는 성경의 제한과 무한하게 자신들이 판단할 때 교회에 유익하다 생각되면 뭐든 도입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아이콘이나 여러가지 성례들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해치거나 망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해서 이 일들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루터란들이 성경에서 금하라 한 것만 아니면 도입할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개혁교회는 성경이 명한 것만 도입할 수 있다는 입장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춤이 열거되는데, 그것이 율법이라 신약시대에 사용하면 루터란이 될까요? 찬양의 도구가 그림자요 율법이라 열등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금했다고 하면 것도 이상하구요.
최재호님 말씀 옳습니다. 요즘은 개신교가 뭐든지 유익하다고 판단하면 그리 하고 있어요. 로마교회 보다 훨 심하지요. 교인들이 재밌어 하고 흥겨워하면 예배시간에 북치고 장구치고 별 짓? 다하고 있지요....
최재호님의 글에 동감합니다. 같은 사상을 가졌습니다. 의문은 소견대로 예배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판단하느냐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박수, 소고, 북 등 모든 악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사용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령과 진정은 순전히 본인에게 있는 것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지 나타나는 현상을 가지고 우리가 편리하게 아니다 맞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제한과 금지, 허용과 남용을 생각해면 좋을 것 같고 자유와 방종의 의미도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개혁자들이 그것(악기사용이나 합창)이 말씀선포에 주의력을 떨어지게 함은 물론 관심과 집중을 약화시킨다고 해서 폐지하거나 조심하도록 경고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몰라서 문제제기하는 것은 아닐텐데요.... 우리시대엔 찬양과 춤(ccm, ccd)이 말씀을 대체하는 시대입니다. 문제를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어진내인의 말씀엔 어느정도 동감합니다. 단, 우리는 늘 나와 우리, 즉 교회의 상태를 관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도 어리고 연약한 지체들을....평안하세요.^^
그렇습니다. 개혁교회는 말씀이 중심이기에 강대상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죠. 상징적인 것입니다. 공예배등에서는 모든 악기들을 다 사용하지는 않죠.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악기들이죠.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행위이지 우리가 무엇을 구경하거나 내가 무엇을 받는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속에서 우리는 내려주시는 은혜를 받지만서도요. 그러나 부흥회나 기도회에서는 전 조금 열려야 한다고 봅니다. 사울의 두통은 다윗의 악기연주로 완화되어졌으니까요. 위 새론맘님... 전 예배 시간에 아니 교회당에서 장구치는 것은 아직 못보았습니다. ㅎㅎ 웃자고 한 말입니다.
예배는 인격체신 주님과 만남의 교제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만드셨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의 성취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로 하나님과 단절된것을 회복하는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이 관계성은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믿을때부터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페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오늘날 생활속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말하지만 실제 인격체이신 주님과 참된만남의 관계는 거의 미비합니다. 우리는 본래 생명이없는 사망이 우리의 근본입니다. 사망이 생명되지 못함은 당연한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이신데 인격체이신 주님과 만남의 교제속에서만이 주님을 앎이되고 주님께서 우리안에 나타내시는 의도에 반응하는것이 생명을 낳는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주님에 관에서 많이 알고 실천해도 사망을당한 우리는 오직 주님과의 관계속에서만이 생명이라는것이죠. 선악과는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격체신 주님안에 그분과 관계속에서만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신다는것이죠. 그분이 우리안에 나타내심이 곧 인격체신 예수님을 앎이되고 그분과의 관계안에 있을때만 우리안에 생명이 있다는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가나안 여인도 같은 공통적 특징이 예수님을 직접만날수 있기를 갈망했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이 진정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는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변화는 내안에 주님이 계실때 내안에 계시는 주님을 앎이 진정 나를 주님께 놓아가게되고 주님께 놓아가는 나의안에 주님은 당신의 의도를 나타내신다는 것이죠. 성령의 일하심은 오직 예수의 일을 성취하신다는 것이죠 우리안에 오직 예수로 접목되게하시고 예수님께 접목된 우리안에 예수그리스도를 이루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을 당한 우리에겐 오직 우리안에 주님과 만남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 예수그리스도만이 진리요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