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2. 불교의 공(空)사상
2) 공(空)사상의 활용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병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저 오로지 마음속에서 죽어도 좋으니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이 병사를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옛말에 살려고 하면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산다고 하였으리라.
이 말은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할 때 윤리의 극치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사심(私心)을 이기고 순수하게 윤리적 행위를 실천할 때 그 행위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금강경》에서는 위에서 말한 청정한 마음,
곧 공(空)에 기초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착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시는 남에게 자신의 재산을 주는 착한 행동이지만,
단순히 보시만을 행하지 말고, 이러한 착한 행동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윤리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 : 대상)에 대해 머문 바〔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빛깔〔色〕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관념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하니, 상(相: 모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그러면, 왜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그렇게 보시를 행하면, 그 결과 얻는 복덕(福德)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의 복덕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이유는
이러한 보시를 행하면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복덕을 받지 않는다〔不受福德〕”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