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장 의복과 십리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 성경 특히 이 같은 난해한 구절에 올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력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떤 상태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완전한 목록을 주고 계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너희는 부르심을 받았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기억하라. 여기에 그 원칙이 있다. 가서 이 원칙들을 적용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첫째 원칙,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이것은 우리가 보복정신을 제거해야 하며 우리에게 가해지는 가해나 악에 대하여 방어하고 복수하려는 욕망을 제거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본능은 보복하려 한다. 주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 하신다.
중국 내지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날 강가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서 배를 불렀다. 이때 중국인 부자 한사람이 와서 그가 외국인인 것을 알게 되자 그를 밀쳐 진흙 속에 넘어지게 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외국인으로서 그와 같은 대접에 분개할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배 안으로 인도해 자기로 하여금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가해나 모욕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자아와 자기존중에 무관심한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라신다.
바울은 고전4:3에서 자신에게 모욕적으로 비판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쓰고 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라”
이것이 우리 주님이 설정한 원칙이다. 주님은 우리가 법과 질서를 지키는데 무관심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다른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나라 일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질서가 혼란 상태에 있건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내 일신상의 명예나 이와 같은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 술주정뱅이나 사나운 광인이 다가와서 나를 치려 한다면 그를 제어해야 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며 모욕을 주는 것에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를 학대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 가르침은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관심에 언급하고 있다.
둘째 원칙,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주님은 여기서 우리의 권리,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경향에 관심을 가지신다. 유대법에 의하면 속옷을 요구하며 송사하는 것이 합법이긴 해도 그의 겉옷을 요구하며 송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매우 어려운 문제로 이 문제를 다루는 오직 한 방법은 원칙에 집중하는 방법뿐이다. 오늘의 우리가 익숙해 있는 문제로 자기의 의무 대신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향이다. 주님은 여기서 이런 경향을 다루고 계신다. 이것은 세속정신이요, 고기 한 파운드를 받아내려는 세상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 하며, 불의를 당하더라도 우리의 법적 권리마저도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상은 이 원칙의 대략적 진술이다.
이것과 관련된 중요한 성구들이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요18:22-23)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행16:37)
이것을 여기 산상설교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겠는가? 주님은 얼굴에 일격을 받았을 때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아니하고 항의하셨고 바울도 치안관에게 자기를 석방하러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실례들은 일신상의 권리를 주장한 것의 실례가 아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을 깨뜨리는 것을 꾸짖으셔야 했고 그의 항의는 율법을 떠받들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성을 내시거나 자기에 대한 관심을 보이시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 율법의 존엄성과 면목을 상기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셨다. 사도 바울도 투옥된 것에 항의하지 않았고 치안관들이 자기를 투옥함으로써 불법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과 법을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그들이 법을 깨뜨리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에 있었다. 바울은 법의 존엄과 품위를 그들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일신상의 모욕이나 자기 방어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이 명예요, 공의와 의와 진리의 문제가 될 때에는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항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법을 존중하지 않고 깨뜨릴 때,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서 행동한다. 율법과 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모든 국가의 한계를 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정부와 치안관과,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임명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법이 준수되어야함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일신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되 불의, 불공평이 행하여질 때는 항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극히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다.
셋째 원칙,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5리를 가자고 강요하던 일은 고대 세계에 매우 흔한 습관이었다. 정부는 짐을 운반하는 문제로 사람을 징발할 권리가 있었다. 이것은 특히 다른 나라를 정복한 국가가 사용한 권력이었다. 로마 군대는 유대인에게 이와 같은 일을 자주 행하였다. 주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가주라. 10리를 가주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주의 영에 따라 그 이상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싫어하고 반대하는 법에 대하여 불쾌감과 혐오를 나타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주님은 이런 태도를 정죄하고 계신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세금을 싫어하고 혐오한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일에 분개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기꺼이 행해야하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세를 가지고 있는 정부는 이런 일을 할 권리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동의하지 않고 부당한 것이라도 우리에게는 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베드로는 여기서 주님의 가르치신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모두 국가의 사환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일을 하고 있는데 군대가 와서 짐을 5리를 지고 가자고 하면 너는 기쁘게 질뿐 아니라 10리도 가주어야 한다. 네가 그곳에 도달하면 그 군인이 “이 시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로 하여금 이렇게 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마음과 영적 상태는 그 아무 권세도 우리에게 모욕이 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여러분은 다른 영을 소유하고 있다. 어떤 곤경 앞에서도 저항하지 않는 영적상태에 들어가야 한다.
덧붙여야 할 것은, 이 명령은 우리가 정부를 교체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일은 항상 합법적인 수단을 통하여 행해져야 한다. 어떤 특정법이 불법을 내포하고 있다면 일신상의 것이나 이기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정부와 공의와 진리와 의를 위해서 항상 행해져야 할 것을 분명히 하자.
넷째 원칙,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것은 다시 자아의 부정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다” 이것은 그릇된 정신이다. 그들이 얼굴을 한 대 맞았든, 옷을 빼앗겼든, 짐을 지고 가도록 강요를 당했든, 재산과 부귀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강요를 당했든 주님은 항상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정신을 꾸짖고 계신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기꾼이나 직업적인 거지나 술주정뱅이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내 것’에 대한 이런 집착문제에 관심을 가지신다.
“누구든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우리 모두 이 길을 따라야 한다. 술이 취해 돈을 요구하거나 직업적인 거지들은 가난한 자가 아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형제가 궁핍하며 내가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도울 입장에 있다면, 나는 그를 불쌍히 여겨 쌀독의 뚜껑을 닫지 않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고 힘을 주기 위해 자기를 주는 사랑이다.
- 우리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 사람이 되어야함은 분명하다. 그 아무도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그 아무도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는 이런 삶을 살기를 소망할 수 없다. 그런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은 속 편하게 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이 같은 본문을 가지고 일주일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드린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것은 주께서 우리가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바로 그 말씀이다. 이것은 사소한 실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 인격을 다루고 있다. 성결은 집회 때에 받는 그 무엇이 아니다. 성결은 살아야 할 삶이요, 세부에 걸쳐 살아야 할 삶이다. 이것은 모두 자아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