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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명 | 覺菴先生文集 | ||||||||||||
현대어서명 | 각암선생문집 | ||||||||||||
청구기호 | 古 3428-867 | ||||||||||||
편저자(한자) | 全有慶(朝鮮) 著 | 판본사항 | 木活字 | 간행지 | [刊地未詳] | 책권수 | 3卷 1冊 | ||||||
편저자(한글) | 전유경(조선) 저 | 간행연도 | [1924] | 간행자 | [刊者未詳] | 책크기 | 29.0×20.0cm | ||||||
匡郭 | 四周雙邊, 半葉匡郭:21×16.5cm, 10行 19字 注雙行 | 版心 | 上下內向花紋魚尾(不同) | 표기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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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紙,版心,卷頭書名 | 表題:覺菴集, 版心題:覺菴先生文集, 卷首題:覺菴先生文集 | ||||||||||||
序,跋,卷首,卷末 | 序:閼逢因敦[甲子(1864)]…李直鉉, 跋:歲甲子(1864)…[全]斗漢 | ||||||||||||
表題紙,內題紙 | 表題:表紙書名:覺菴集 | 附 | 卷3:行狀, 遺事, 墓碣銘, 諸賢尺牘, 跋 | ||||||||||
藏書記,內賜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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刊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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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 全有慶(1605-1643)의 詩文集 | ||||||||||||
목차 | 卷1:詩(57首), 挽(1篇), 上疏(1篇), 書(5篇), 卷2:家狀, 祭文(2篇), 通文(2篇), 大學集解, 箴, 人心道心說圖, 道學說, 世系圖, 卷3:附錄:行狀, 遺事, 墓碣銘, 諸賢尺牘, 跋 | ||||||||||||
합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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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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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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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部분류 | 集部 別集類 一般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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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F번호 | M/F85-16-201-B |
해제
서명 | 覺菴集 | 저자 | 全有慶 저 | |||
현대어서명 | 각암집 | 간행년대 | 1924년 | |||
청구기호 | 古3428-867 | |||||
책수 | 3권 1책 | 판본 | 목판본 | 사이즈 | ||
본 문 | ||||||
全有慶(1605-1643)의 시문집이다. 전유경의 字는 汝善‚ 號는 覺菴‚ 本貫은 沃川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주로 영남에 거주하였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宋時烈‚ 李惟泰 등과 교유하였 는데‚ ≪師友錄≫에 賢儒로 소개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본집은 1924년에 8대손 斗漢과 昇漢이 간행하였다. 서문은 李直鉉이 썼고‚ 발문은 斗漢이 썼 다. 권1은 詩 57수‚ 挽 1편‚ 上疏 1편‚ 書 5편이다. 시는 古詩·絶句·律詩 등 다양하다. 전유경은 10세에 <庭下盤松>이란 시를 지을 정도로 文才 가 있었으나 많이 산일되었다고 한다. ≪小學≫과 四書를 주제로 읊은 시가 주목된다. 挽은 스승인 김장생에 대한 것이다. 상소는 <嶺南救弊疏>로서 영남 지방 賦役의 불균등을 시정하고‚ 대동법에 반대하여 山郡과 水邑에 모두 木米 元數로 分定할 것을 건의하였다. 권2는 家狀‚ 祭文 2편‚ 通文 2편‚ 大學集解‚ 箴‚ 人心道心說圖‚ 道學說‚ 世系圖이다. 통문 가운데 <呈道伯文>은 경상도관찰사에게 진휼을 건의한 것이다. <大學集解>는 ≪대학≫의 三綱領·八條目에 대한 先儒들의 글과 자신의 견해를 밝힌 부분과 總論으로 구성되었다. 箴은 事父母箴·和兄弟箴·順夫婦箴·交朋友箴·戒子姪讀書課農箴이다. 향촌사대부의 일상적 규범 을 엿볼 수 있다. <道學說>은 주자의 道學 正統을 강조한 글이다. 권3은 附錄으로 전유경에 대한 行狀‚ 遺事‚ 墓碣銘‚ 諸賢尺牘‚ 跋이다. 17세기 서인계 영남 유학자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자세한 사항은 <古 3428-867> 기해제를 참조. (이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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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해설
문집명 | 각암집 (覺菴集)(17c) |
간략서지 | 古 3428-867覺菴 全有慶의 문집. 3권 1책. |
간략해제 |
覺菴集은 1924년 全有慶의 8대손 全斗漢과 全昇漢이 9대손 全柄坤과 함께 간행하였다. 全有慶이 죽은 지 281년 후인 1924년에 그의 8대‚ 9대 후손들이 全有慶의 德이 군자의 경우에 합당한데도 아직 그의 문집이 없으니 全有慶의 뜻을 잃어버릴 것이 두려워 이를 막고자 남아있는 全有慶의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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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편저자 | 전유경 (全有慶) |
저자개요 |
1605-1643 (선조38-인조21)字: 汝善‚ 號: 覺菴‚ 本貫: 沃川‚ 父: 全海‚ 母: 密陽 孫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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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내용 |
17세기의 道學者. 1605년(선조 38)에 태어났으며 성격은 淳美하였다. 재능 또한 뛰어나서 소학을 배울 때 설명을 듣지 않고도 일취월장하였다. 그가 어려서 절개 있는 시를 짓자 모두 칭송하며 장래 성공을 예측하였다. 쓸데없는 말은 돌아보지 않았으며 오직 修齊治平의 도만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1624년(인조 2)에 과거(會試)를 보러 漢城에 들렀는데‚ 동행한 형 有翼이 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으며‚ 죽은 후에는 아들이 없는 그를 위해 몸소 장례를 치러주었으니‚ 평소의 돈독한 孝友의 발로이다. 이후 다시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부친의 명으로 沙溪 金長生에게 배웠다. 스승에게 학문의 순서를 묻고‚ 선생이 ≪小學≫‚ ≪家禮≫‚ ≪心經≫‚ ≪近思錄≫‚ 四書‚ 五經의 순서를 알려주자‚ 이에 따라 날로 익혀갔다. 김장생의 제자 중에 오직 尤菴 宋時烈과 李草廬‚ 姜潛隱 등의 몇 사람만이 全有慶과 함께 그 뜻과 기운이 가장 잘 맞아 道論과 德觀이 날로 깊어졌다 1637년에 조정이 淸과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보며 통곡하였으며 또 이에 시를 지어 그 절개를 드러내었다. 또한 다른 글을 지어 말하기를 ‘한 나라의 좋은 선비는 또 다른 나라의 좋은 선비를 벗 삼는다.’고 하여 淸과의 和議가 불가함을 역설했다. 李元生의 <師友錄>에 일컫기를‚ ‘61명의 名賢이 있는데 全有慶이 그 중 한명이다’라고 하니‚ 이 어찌 德으로써 벗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1642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슬픔이 너무 커 몸이 허약해졌다. 이를 걱정한 아버지가 검소하게라도 식사를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1643년에 병사한다. 자식으로 3남 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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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개요
내용제목 | 覺菴集 내용개요 | 청구기호 | 古 3428-867 |
1924. 李直鉉이 쓴 서문. 李直鉉과 全有慶의 후손들과의 관계는 명시되지 않았다. 全有慶의 8대손 昇漢이 조카 柄坤을 통해 서문을 부탁하였다는 경위와 함께 全有慶의 일대기를 간략히 정리하며 각각의 의의를 첨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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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言古詩: 小學‚ 大學‚ 中庸‚ 論語‚ 孟子 五言絶句: 書窓對月‚ 庭下盤松‚ 咏雪‚ 春日看山‚ 牧丹‚ 山行逢雨 五言律詩: 題尤菴宋先生飛來洞講舍‚ 次徐全歸堂‚ 連山道中贈李草廬‚ 連山邑邸待宋松牕‚ 寄具進士‚ 遊雲門山‚ 秋夜遣興‚ 暎湖樓‚ 忠州旅館 七言絶句: 壽親生朝‚ 感吟‚ 立春‚ 題禹錦汀精舍‚ 桐華寺待徐龍溪‚ 遊最頂山待朴娣兄‚ 題羅靑山精舍‚ 偶吟‚ 曉牕睡覺‚ 寄鄭月潭‚ 除夕‚ 過楓林‚ 寄徐龍溪‚ 夜賦公山村‚ 傷秋‚ 寄琴浦‚ 奉賀伯氏泰巖公登科‚ 與舍弟說夢‚ 偶吟‚ 次壻君蔡之沂日課韻‚ 霽後‚ 贈明醒上人‚ 過松林寺洞口 七言律詩: 敬次野翁亭板上韻‚ 次望江亭原韻‚ 硏經書院春享後與諸友共賦‚ 次李石屛積智亭韻‚ 次徐龍溪九月遊山韻‚ 贈別蔡翠巖‚ 訪李湖汀奉賦‚ 偶吟‚ 天道‚ 丁 丑 正 月 聞 朝 廷 與 北 虜 講 和 痛 哭因賦‚ 遣悶‚ 曉登八公山上峯‚ 山亭偶吟‚ 宿梅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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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沙溪 金長生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하늘이 文을 융성하게 하고자 그를 보냈는데‚ 이제 그가 죽으니 누가 그 뒤를 잇겠는가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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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의 賦稅제도의 문제점과 이로 인한 폐해를 밝히면서‚ 마땅히 賦稅제도를 개혁하여야 함을 상소하는 글. 嶺南의 四十四官을 山郡과 水邑으로 나누어 각각 나무와 쌀로써 賦稅를 내게 하는 조세제도는 땅이 큰 중국과 다르게 땅이 크지 않은 영남지방에서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땅이 작은 상태에서 이를 山郡과 水邑으로 나누면 비록 山郡이지만 나무가 적을 경우가 있고 비록 水邑이지만 곡식을 적게 생산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런데 지금 山郡에서는 나무로써만 부세를 내고 水邑에서는 쌀로써만 부세를 내야되기 때문에 각 지역은 그 세금으로 내기에 모자란 부분이 있게 되어‚ 서로 물물교환을 통해 부세를 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이러한 백성의 불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교환을 담당하는 사람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賦稅물품을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고 상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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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金長生의 밝은 德에서 우러나오는 가르침에 대해 감사하는 짧은 편지글. 다행히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서 그 가르침을 따르면 爲己에 있어 결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평소의 일상 動靜 사이에서 돌아가야 할 바를 찾지 못할 때 스승의 말씀을 떠올리면 막히는 곳이 없을 정도로 스승의 가르침이 소중하였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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丈人 李繼潛에게 안부를 묻는 짧은 편지글. 장인의 성품과 德敎를 말한 후 金剛山에의 유람에 대해 여행기간과 돌아올 날짜 등을 여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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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宗祐(全有慶과의 관계 미상)에게 보내는 간단한 편지글. 平天下의 방법은 결국 絜矩之道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 |||
<師友錄>에서 全有慶을 61명의 賢者 중 한 사람이라 칭했던 李元生에게 보낸 짧은 편지글. ≪中庸≫의 한 구절에 대해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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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사위 蔡之沂에게 보낸 교훈적인 편지글. 지난 번에 깨닫지 못한 경전의 깊은 뜻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으며‚ 그 모든 것이 힘써 찾으면 경전 안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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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父 全海의 家系와 일생을 간략히 적은 글. 全海는 高麗 개국 공신 全以甲의 후손으로서‚ 그의 아버지 全應參은 司馬의 관직에 오르지만‚ 무고하게 대신들을 음해하는 세력의 악행을 보고서 관직을 그만 둔 경력을 가질 만큼 절개가 있던 사람이었다. 全海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성격을 이어받아 漢城參軍의 직책에 오르지만 관리들의 禮에 어긋난 행동을 보고서 귀향을 할 정도로 강직하였다. 6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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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祖父 孫英濟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祭文. 外祖父의 성격‚ 관직생활 그리고 귀향해서의 생활을 간략히 적으면서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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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全有翼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祭文. 有翼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재능이 탁월했다. 1624년(天啓 4)에 全有慶과 함께 과거(會試)를 보러 漢城에 들렀는데‚ 과거가 끝난 후 귀향하기 전에 묵었던 여관에서 병에 걸렸다. 정성껏 간호를 받았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다. 全有慶은 아들이 없는 그를 위해 장례를 정성스레 치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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圃隱 鄭夢周의 서적 재간행에 있어 嶺南 永川의 것을 저본으로 할 것을 당시 사림들에게 권유하는 글. 정몽주는 동방의 道學을 이끈 사람인데‚ 살아서는 道가 정몽주 자신에게 있었으며 죽어서는 그가 남긴 글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서적들이 모두 유실되고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永川에 있는 것 뿐이므로 그것을 저본으로 삼아 再刊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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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관찰사에게 올린 청원서. 당시 조정에서는 大同法의 시행을 각 道에 권고하고 있었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大同法을 시행하지 않으려 하자 이의 시행을 촉구하는 글이다. 당시에 만연하고 있던 폐단과 대동법을 시행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효과를 조목조목 적으면서 시행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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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明德‚ 新民‚ 止至善의 의미에 대하여 朱子의 학설 玉溪 盧氏‚ 雙峰 饒氏‚ 番陽 沈氏 등의 의견을 참조하면서 개인적 의견을 첨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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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八條目에 대하여 朱子의 학설과‚ 玉溪 盧氏‚ 仁山 金氏 등의 의견을 참조하면서 본인의 의견을 첨가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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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령과 팔조목에 대한 全有慶 본인의 견해를 간략히 밝힌 글. 止至善이 중요 綱領이며‚ 팔조목은 모두 至善之道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至善은 곧 中庸의 道가 되며 條目들은 ≪中庸≫의 이른바 敎라는 주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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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 그 정성을 다해야 悔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 孝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간략히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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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弟는 함께 부모의 혈기를 이어받은 한 몸으로서 마땅히 서로를 위해야 함에도 지금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는 글. 사람이면서 형제간의 和가 없으면 동물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며 형제간의 和睦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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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姓의 相合은 만복의 근원으로서 夫唱婦和하면 家道가 彬彬하며‚ 夫婦有別하면 집안의 질서가 선다는 것을 깨우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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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단지 비슷한 나이이기 때문에 서로를 벗 삼지만 옛날에는 그 德으로써 벗삼았다고 하면서‚ 生死를 함께 할 수 있을 만큼 벗을 진실 되게 사귀어야 함을 일깨우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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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이 善함을 학문으로써 살피게 하며‚ 천하의 근본이 되는 농사를 廢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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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心은 惟精惟一하여 본래 善한 性이지만‚ 人心은 惟危하여 私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본성을 잘 보존하기 위하여 항상 戒愼하여야 함을 나타내는 그림과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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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를 밝히는 데 있어 程子가 기여한 바가 없지 않으나 孔子의 道를 이은 것은 오직 朱子뿐이며 주자의 尊德性道問學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다고 말하여 道學의 의의를 설명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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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 全聶에서부터 그 十一世 全有慶을 거쳐 十三世代에까지의 家系圖를 그린 것. 간략히 字‚ 배우자‚ 관직명‚ 號‚ 諡號 등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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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宋哲憲이 全有慶을 기리며 쓴 行狀. 아래의 遺事와 대동소이하며 첨가된 내용은 자라면서 立敎‚ 明倫‚ 敬身을 內本之體로 삼고 嘉言‚ 善行을 外末之用으로 삼아 실천궁행의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사실과‚ 全有慶이 지은 <道學說>‚ <五箴> 등의 글은 그 말과 뜻이 정미하고 절실하다는 간단한 평가와‚ 全有慶의 구대손 柄坤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柄坤의 族兄 柄轍의 간절한 부탁으로 行狀을 쓰게 되었다는 경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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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全有慶의 生日부터 沒日까지의 일생을 9대손 全柄坤이 흩어진 자료를 모아 적은 글. 始祖 全聶을 비롯하여 全有慶의 조상의 관직과 이름 등의 기본사항을 쓰고 그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1605년(선조 38)에 태어났으며 성격은 淳美하였다. 재능 또한 뛰어나서‚ ≪소학≫을 가르쳤는데 설명을 듣지 않고도 일취월장하였다. 그가 어려서 절개있는 시를 짓자 모두 칭송하며 장래 성공을 예측하였다. 쓸데없는 말은 돌아보지 않으며 오직 修齊治平의 道만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다. 1624년에 과거(會試)를 보러 漢城에 들렀는데‚ 동행한 형 有翼이 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해 간호를 했으며‚ 죽은 후에는 아들이 없는 그를 위해 몸소 장례를 치러주었으니‚ 평소의 돈독한 孝友의 발로이다. 이후 다시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부친의 명으로 沙溪 金長生에게 배웠다. 스승에게 학문의 순서를 묻고‚ 선생이 小學‚ 家禮‚ 心經‚ 近思‚ 四書‚ 五經의 순서를 알려주자‚ 이에 따라 날로 익혀갔다. 김장생의 제자 중에 오직 尤菴 宋時烈과 李草廬‚ 姜潛隱 등의 몇 사람만이 全有慶과 함께 그 뜻과 기운이 가장 잘 맞아 道論과 德觀이 날로 깊어졌다. 1637(인조 15)에 조정이 청과 강화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보며 통곡하였는데‚ 이에 시를 지어 그 절개를 드러내었다. 또한 다른 글을 지어 말하기를 ‘한 나라의 좋은 선비는 또 다른 나라의 좋은 선비를 벗삼는다’고 하여 淸과의 화의가 불가함을 역설했다. 1642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슬픔이 너무 커 몸이 허약해졌다. 이를 걱정한 아버지가 검소하게라도 식사를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1643년(숭정 16; 인조 21)에 병사한다. 자식으로 3남 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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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禹夏敎가 全有慶을 기리며 쓴 碑文. 우리나라에는 큰 德은 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隱士가 된 선비들이 많았는데‚ 全有慶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내용이 나온 후‚ 全有慶의 행장을 요약하였다. 그리고 나서 처음 全有慶의 8대손 在漢이 墓碣銘을 부탁했을 때 거절하였으나 재차 그가 族弟 廷漢을 보내 부탁했을 때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墓碣銘을 쓰게 되었다는 경위를 쓰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墓碣銘의 내용을 옮기고 있다. 그 내용은 金長生의 문하에는 현명한 사람이 많았는데‚ 全有慶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어려움을 만나면 더욱 그 지조가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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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時烈이 全有慶에게 쓴 간단한 사과의 편지. 구체적인 일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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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有謙(全有慶과의 관계 미상)이 全有慶의 편지에 대해 답장한 짧은 편지글. 士林의 중요한 일을 본인에게 물으니 송구스럽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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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金長生에게서 함께 배운 同學 姜恰의 짧은 편지글. 오직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서 반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울과 같은 인물이 진실로 明하다고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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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從8代孫 全斗漢이 覺菴集을 간행하게 된 경위를 쓴 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군자의 뜻은 부귀를 가지고 빼앗을 수 없으며‚ 그 마음은 곤경에 처하여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全有慶은 일찍부터 道學에 뜻을 두었으며‚ 그 아름다운 德이 이미 여러 군자의 경우에 합당하였다. 그런데도 이제 겨우 8대손인 본인과 9대손 柄坤에 와서야 그 글을 정리하려고 하니 송구스럽다. 그렇지만 이를 문중의 어른들과 상의하니 모두 기쁘게 생각하는지라 비록 노둔하지만 柄坤과 함께 晝夜로 이 글을 편집하여 간행하게 되었다. (배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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