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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능선
바위틈에서 자라난 기묘하게 생긴 소나무가 능선에 아주 많다
원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의상 능선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사모바위와 비봉능선, 앞의 응봉능선
의상능선 슬랩을 기어오르는 사람들
의상 능선에는 몇군데의 슬랩(slab) 이 있다. 슬랩이란 표면에 굴곡이 없고 매끄러운 경사를 이룬 넓은 바위를 지칭한다.
슬랩에서의 등반은 그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홀드를 얻기가 힘들므로, 등산화 바닥이나, 손바닥, 손가락의 마찰이 중요
하다. 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마찰을 감안한 장갑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슬랩은 프랑스어는 달르(dalle), 독일어는
플라텐(Platten).
의상봉
의상봉에서 당겨 찍어본 국녕사의 거대 불상
서울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면 사모바위와 비봉이 더 가까워 보인다
부왕동 암문~2011년 12월 무학산악회 송년산행시 삼천사 계곡을 통해 이곳에 올라와서 국녕사를 지나
대서문으로 하산한 적 있었다.
지금 북한산은 등반로가 너무 많이 생겨 문제지만, 50여년 전만 해도 북한산은 '깊고' '험한' 산이어서
산성을 따라가는 게 거의 유일한 '환(環)종주'코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산성이 지금처럼 정비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 돼서다. 이전에는 성문 하나, 산성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성문 기와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초석과 기단석은 흩어져 있었다. 북한산성은 한양을 지키는 도성(都城)의 일부가 아니다. 유사
시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하는 행궁(行宮)을 지키기 위해 지어진 산성이다. 즉 정묘·병자 두 호란(胡
亂)때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혼비백산하며 피해 농성(籠城)했던 경험에서 쌓은 성이다. 14성문 중 대성
문은 여차하면 바로 경복궁에서 북악산을 거쳐 형제봉능선으로 넘어와 북한산 행궁으로 통하는 문이었
다. 왕이 드나들 문이다 보니 대성문이 성문 중 가장 크다.
백제시대부터 산성을 쌓았다는 북한산성의 지금 모습은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완성됐다. 숙종·영조
용출봉 철계단길
용혈봉에서 바라본 용출봉.
용혈봉 정상에서는 비가오는 날씨에는 아주 위험하기 때문에 가지않는 것이 현명하다.
용혈봉은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 경계지역에 있는북한산의 한 봉우리이며, 용혈봉은 해발 581m, 북한산 등산코스 중 '의
상능선' 상에'증취봉'과 '용출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 몇해전 여름 용혈봉 정상 암벽에서 등산객 수십 명이 떨어져서
여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갑자기 낙뢰가 바위로 떨어지면서 그 파편이 튀어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3월초에는 용혈봉 정상에서 등산객 추락 사고가 일어나 등산객 손모(42 여)씨가 사망하고 김모(44)씨가 부상당
했다. 이 코스를 처음 지나가봤지만 상당히 위험한 암벽 횡단 구간이 있는데 국립공원에서는 안전시설 장치를 해놓지
않고있다.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에만 전시효과적으로 안전철책이나 , 계단등을 설치하지말고 정말 위험한 이런 지역에
안전 철책이나 계단을 만들어야 한다.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인수봉이 보인다. 앞의 봉우리는 노적봉.
북한산 노적봉(716m) 서벽에는 새 바윗길들이 탄생했다. 노적가리처럼 생긴 노적봉은 전설적인 산악인 고 김정태
엄흥섭씨 일행이 일제 시절인 1930년대 후반 T침니와 서북횡단코스(최고난이도 5.9), 동남직상크랙 루트를 개척한 이후
오랜 세월 개척활동이 멈춰졌다가 1970년대 초반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형제(5.9·1973년 봉암산악회), 기존
B(5.9·1973년 반도산악회), 경원대길(5.10·1996년 경원대산악부) 등 20개가 넘는 루트들이 개척되었음.
노적봉 암벽타는 락 클라이머
노적봉과 노적사의 가을 모습
북한산계곡에서 의상봉으로 올라간 다음 의상봉 능선을 따라 문수봉에 이르는 산길은 북한산의 가을 풍
취를 감상하는 최고의 능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코스는 북한산의 다른 코스에 비해 사람이 적은 편이지
만 주로 마니아 들이 찾는 곳이다. 이 능선은 북한산 백운대, 만경대와 노적봉을 조망하는데 있어서는 필
수적인 능선이다. 특히 노적봉의 대단애는 의상봉능선에서 정면에서 바라보여 기가 질리게 만든다. 백운
대와 만경대 그리고 노적봉이 그리고 있는 바위그림은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영암에서 본 월출산이나 마
등령에서 본 천화대와 범봉이나 960봉에서 본 월악산 영봉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전국의 산을 돌아다
니다가 수년만에 찾은 산꾼이 북한산을 보니 조강지처가 미인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외도만 하며 돌아다
녔다는 말들을 한다고 한다.
의상봉능선을 타려면 구파발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가서 효자동 북한산성계곡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평창동계곡이나 구기동계곡을 통해서 대남문에 이른다음 문수봉을 거쳐 거꾸로 올 수도 있다. 효자동
산성 입구에서 큰길을 따라 올라오든가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면 음식점이 몰려있는 산성아래 상가지역
에 닿게 된다. 대서문에서 상가지역으로 들어가는 고개길에서 보면 좌로는 원효봉이 허연 슬랩지대를 드
러내며 거대한 원형의 불탑같은 모습으로 솟아있고 우로는 의상봉이 하늘을 찌르는 듯이 날카롭게 솟아
있는 사이로 넓게 계곡이 펼쳐지는데 안쪽에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산일대는 웅장한 바위산의 경관으로 된 멋진 그림은 사실 국내에서는 유례가 없는 아름다운 바위산
그림이다. 계류위에 걸린 다리를 지나 계류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걸어들어가면 오른쪽 산자락아래로
국영사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높지않은 능선으로 오르는길이 나온다. 이 길이 국영사를
거쳐 용출봉과 의상봉 사이의 안부인 가사동암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북한산성계곡의 계류는 여름 한
철에는 수량도 풍부한 맑은 물이 흘러내리지만 가을철엔 수량이 적다. 주변의 산이 온통 바위산인 탓으
로 함수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사동암문에서 숲속을 따라 능선을 가면 용출봉으로 올라
가는 급경사 능선이다. 이곳에는 쇠줄난간이 있다. 의상봉은 밑으로 내려다보이고 북한산 주능선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다. 용출봉은 돌올하게 솟아 있어서 의상봉 능선의 전망대역할을 하는 산이다.
용출봉에 올라서면 작은 골짜기들이 몇 가닥 능선에서 계곡으로 내려오는 시원하게 넓은 삼천사 계곡이
내려다보이고 계곡넘어 비봉능선이 서쪽으로 멀어지는 것도 보인다. 용출봉에서 보는 의상봉 능선의 문
수봉쪽 요철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있는 산꾼들에게 재미와 스릴, 그리고 호방한 산행의묘미를 분명하
게 약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상봉 능선은 대남문에서 백운대에 이르는 북한산 주능선과 함께 북한산성계곡을 만드는 서쪽 능선이
다. 이 능선이 없었다면 북한산성은 성립이 안된다. 그리고 험준함으로 말하자면 주능선에 못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의상봉 능선은 북한산성을 서쪽을 틀어막는 자연옹벽이라고 할만하다. 용출봉에
올라서서 남동쪽을 바라보면 이 능선이 꽤 기복이 많은 긴 능선임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의상봉 능선엔 의상봉을 포함, 6개의 봉우리가 있다.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등
6개봉우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보통은 용출봉과 증취봉 사이에 낮은 암봉인 용혈봉을 빼고 5개봉우리가
의상봉능선을 이룬다고 말한다. 용출봉에서 용혈봉으로 가는 길은 암릉을 이룬 경사도 급한 곳이지만 철
제 사다리가 놓여있고 길도 별로 위험하지 않다. 용출봉이나 증취봉 정상에는 허리가 꼬부라진 소나무가
많다.
부왕동 암문에서 나월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산길을 올라오면 위험코스가 우회로를 알리는 표지
판이 있다. 용출봉에서 아득히 보이던 그 칼날 능선에 당도한 것이다. 우회로를 택하면 안전하게 갈 수는
있겠지만 삼천사계곡을 내려다보는 시원한 조망과 증취봉, 용출봉, 의상봉으로 이어지는 호방한 능선경
관은 희생해야 하므로 이제 환갑 나이지만 아직은 젊지않은가. 그래서 위험코스로 오르기로 하고 올라가
보았다. 서쪽으로 단애를 이룬 곳이 있지만 올라가기는 어렵지 않고 이곳을 넘어가면 나오는 바위사이의
크랙지대 역시 크게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여성 산행객들도 잘 지나다녔다. 아마 30산우회원들중
일부는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남문
대성문
대성문에서 30여분 내려오면 만나는 아담한 사찰 영추사(영취사) 대웅전과 5층 석탑
흰 목련 가득 핀 고요한 산사.
홀연히 떠나와 고요한 산사에서 지친 마음에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즈넉하고 소박해 보이는 절 영추사 주변으로 찬불가가 은은하게 퍼진다.
소박한 5층석탑과 자그마한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욕심을 버린듯 소탈해 보인다.
금색으로 찬란하게 치장한 도봉산 초입의 어느 큰 사찰 보다
더욱 산객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주는 듯 하다.
부질없는 욕심과 모든 번뇌 내려놓고 가라 한다.......
비워라, 비워라 한다........
오만함과 비루한 자존심과 떄묻은 욕심,
그리고 모든 잡념을 비우고 내려가라 한다....
영추사(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 남쪽의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사찰이다.
이곳의 샘터 영취천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간다.
오고 가는 산객들을 위해 긴 의자와 평상을 마련해두고 책까지 제공해
산중의 사색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소박함을 선사하는 곳이다.
약초를 달여 끓인 약차도 무료로 마실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여러장의 돌을 높게 쌓아올려 대석을 만든후 그위에 2층의 기단과 5층의
탑신을 세운 영추사 5층 석탑, 역시 소박한 모습이다.
고려말 ~ 조선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시 문화재 제 40호.
영추사(영취사) 의 소박한 대웅전. 영추란 말은 "영험한(신령스런) 매"라는 의미를 가졌다.
북한산 대동문 아래 靈鷲寺. 영추사라 하기도 하고 영취사 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뜻이 어렵다. 산행 표지판에는 분명
"영취사" 라고 씌어 있었는데 사찰 입구에는 「영추사 불사공덕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靈鷲寺의 우리말 音讀은 「영취사」)
淸나라 康熙字典에 의거한 康熙大玉篇에 따르면, 「鷲」의 訓과 音은 수리 추, 또는 독수리 추이나 俗語로는 수리 취, 독
수리 취로 발음된다고 한다. 「영추사」라고 읽힐 수도 있겠으나 佛家에서, 또 일반적으로 「영취사」로 읽고 있다고 본
다.
* 영취사(靈鷲寺) 사찰 이름의 유래 *
(석가 행적 관련)
히말라야 산록 샤키야(釋迦)족 왕국에서 인간의 生老病死(혹은 離苦得樂)에 대한 고뇌를 안고 29세에 출가한 고타마 시
타르타는 6년 후인 35세 때 伽倻 근처 한 보리수 밑에서 명상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깨달은 자)가 되었다. 득도 후 베
레나스에 있는 鹿野苑에서 같이 苦行했던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했으며 이후 45년 간 인도 전역을 돌면서 많은 설
법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釋迦牟尼(샤키야족의 성자)로 불리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涅槃에 앞서 靈山(靈鷲寺)에서 法會를 열어 법화경(法華經; 妙法蓮華經)을 설파했는데[靈山會相], 범왕(梵
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일설에는 우담바라)을 바치자 석가가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제자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은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염화시중
(拈花示衆)의 微笑]
이에 석가는 “그대만이 내 마음을 터득했느니라. 내 법문을 그대에게 물리리로다” 하고,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사
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
相無相: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석가는 북인도 쿠시나가라성[拘尸羅城] 북서쪽의 사라수(沙羅樹) 여덟 그루가 둘씩 마주서 있는 사이에 침대를 놓게 하
고 열반(涅槃)했다.
(三國遺事의 기록)
慶南 東萊에 있었다고 전하는 절 이름. 新羅 神文王 때 한 매사냥꾼이 매를 놓아 꿩을 쫓았다. 꿩은 달아나 우물에 숨었는
데 양 날개 아래 새끼 두 마리를 품고 있었고 우물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도 측은하게 여긴 탓인지 나무 위에 앉은
채 더 이상 꿩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상황을 목격한 宰相 忠元公이 점을 쳐 본 결과 그곳이 절을 세울 터전임을
알게 되어 왕에게 고한 후 절을 세우고 영취사(靈鷲寺)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 경남 양산과 전남 여수에 불교 영향으로 이름지은 영취산이 있다.
영추사에서 내려오다 보국문에서 내려오는 길과 합쳐져 정릉 청수동으로 이어진다.
산행을 마치고 한성대 입구역 부근 혜화동 칼국수집으로 이동했다. 수육에 막걸리, 그리고 그 유명한 칼국수로 저녁을 한
뒤 이른 저녁 무렵 혜화문을 지나가면서 서울시장 공관이 부근에 있었다.
시장 공관이 왜 이렇게 서울 성곽위에 붙어서 지어져있을까. 문화재를 활용하는건가?
시민이 뽑은 시장이면 낮은데로 임해야 한다. 왜 이런 높은 성곽처럼 담장이 쌓아 올려진 곳에 머무는가?
건물 바깥에 서울시장 공관 이라는 팻말은 없다. 왜 그럴까? 미안해서 일까?
서울시장 공관주변 성곽 복원공사가 2012년 10월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용하고 있는 혜화동 공관 주변 한양도성 성곽 복원공사가 2012년 10월부터 시작될 예정이란다.
현재 시장 공관은 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장 공관 구간 성곽 복원공사를 올해 10월 시작해 내년 12월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서울시는
사업비 12억700만원을 들여 길이 86m, 높이 3∼4.5m로 이 구간 성곽을 복원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이와 함께 성곽 복원과 함께 공관을 공원으로 만들고, 공원 뒤쪽에는 성곽 순례길을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서울시장 공관의 이전 시기와 이전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와 관
련 “공관 이전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이뤄지고 있으나 장기적으로 검토할 문제”라고 말했다는데, 왜 장기적으 검토할까?
그냥 중지를 모아 결정하면 될것을. 경교장 원형복원공사부터 빨리 마무리 하는게 순서 일텐데....
Dust In The Wind - Kansas 곡
The Saddest Thing - Melanie Safka 외 여러 팝 명곡들
미국 Progressive Band인 캔사스 가 1977년 히트시킨 곡 Dust in the wind 와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 외 주옥같은 팝.
Dust in the wind 는 그 가사의 철학적 멘트로 많은 젊은이들이 애창했던 팝 명곡인데 캔사스가 아닌
벨기에 출신의 실력있는 여자가수 Dana Winner가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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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lose my eyes
눈을 감아 본다.
Only for a moment and the moment's gone
아주 잠시 동안... 그러면 그 순간은 스쳐 지나갈 뿐
All my dreams
나의 모든 꿈도
Pa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단지 호기심일뿐
Dust in the wind
바람결에 흩어지는 조그만 먼지에 불과해.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 모두 티끌같은 먼지에 불과해.
Same old song
오래된 노래 또한
Just a drop of water in an endless sea
무한한 바다에서 한 방울 물일 뿐
All we do
우리가 행한 모든 흔적들이
Crumbles to the ground though we refuse to see
대지의 먼지로 사라져 간다. 보지않길 원하였겠지만....
Dust in the wind
그저 티끌같은 바람결의 조그만 먼지에 불과해.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 인생 모두 바람 앞의 먼지에 불과해.
No,don't hang on
세상사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대지와 하늘 그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
It slips away
모든것은 떠나 버린다.
And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당신의 돈도 재산도 아무 소용없다.
Dust in the wind
모든게 바람결 작은 먼지에 불과해.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는 모두 바람앞의 먼지에 불과해.
Dust in the wind
바람앞의 먼지에 불과해.
Everyting is dust in the wind
모든건 먼지에 불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