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Andrey Kathleen Ruston, Audrey Hepburn) 전 영화배우
생몰1929년 5월 4일(벨기에) ~ 1993년 1월 20일 (향년 63세) | 뱀띠, 황소자리
신체170cm, 49kg
가족아들 루카 도티
데뷔1948년 영화 'Dutch in Seven Lessons'
출생지: 벨기에 Ixelles
출처: 출생증명서
출생시 보정: 출생시가 오전 03시이나 썸머타임으로 1시간 제하므로 축시.
양 력: 1929년 5월 4일 02:00
음/평: 1929년 3월 25일 02:00 여자
시 일 월 년
乙 己 戊 己
丑 酉 辰 巳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대운: 순행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81 71 61 51 41 31 21 11 1.11
사망일자: 1993년(65세 계유년, 음력으론 임신년) 1월 20일 결장암(대장암)으로 사망함.
5세 때부터 발레를 배워 계속 발레리나의 꿈을 키웠음.
1935년 혹은 1938년 부모 이혼.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띄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
1951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지지에 출연.
1953년 《로마의 휴일》출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골든 글로브상, 에미상, 그래미상을 수상함.
1954년 9월 남자배우 멜 페러와 결혼,
1955년 유산함.
1959년 촬영 중 부상으로 유산함.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 출연,
1968년 12월 멜 페러와 이혼
1969년 1월 18일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
1970년 2월 8일 아들 Luca Dotti를 제왕절개로 출산함.
1974년 유산함.
1980년 부친(1889–1980) 사망,
1982년 안드레아 도티와 이혼, 이후 영화배우 Robert Wolders와 사망시까지 파트너로 지냄.
1984년 모친(1900–1984) 사망
1992년 결장암 발견, 11월 수술함.
1993년 1월 20일 결장암으로 사망함.
'서프라이즈' 오드리 햅번, 영화 '안네의 일기' 거절한 이유 2014.04.13
[엑스포츠뉴스=김현정 기자] 배우 오드리 헵번이 영화 '안네의 일기' 캐스팅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공개됐다.
13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는 할리우드 배우 오드리 헵번의 이야기를 담은 '그녀의 악몽' 편이 담겼다.
1950년대 오드리 헵번은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이자 만인의 연인으로 인기 정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편의 영화에 캐스팅 제안을 받은 뒤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게 됐다.
오드리 헵번이 받은 시나리오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영화화한 작품인 '안네의 일기'였다. 많은 배우들이 '안네의 일기'를 자신의 연기력을 입증할 기회로 여겼지만 가장 먼저 캐스팅 제안을 받은 여배우는 바로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오드리 헵번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제작사에 찾아가 거절 의사를 밝혔다.
과거 오드리 헵번은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나치 당원으로 가정보다 나치로서의 일을 중요시한 사람이었다. 오드리 헵번이 6세의 나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1940년 네덜란드로 이주한 오드리 헵번은 어머니와 전쟁 동안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었다.
이후 우연히 유대인들의 참상을 알게 된 그는 아버지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가해자라는 것을 알고 충격 받았다. 훗날 아버지가 죽은 줄 알고 살아온 오드리 헵번은 1958년 아버지로부터 온 편지를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다.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가 딸의 커리어를 생각해 지금까지 숨겨왔던 것.
오드리 헵번은 당장이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존재가 배우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찾아나서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영화 '안네의 일기'의 시나리오를 받게 됐고 내용에 감동 받았지만 어린 시절 기억 탓에 쉽게 출연을 결정할 수 없었다.
이후 1960년, 오드리 헵번은 영국 전범 감옥에 투옥된 뒤 아일랜드 더블린의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와 상봉한 그녀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구호 운동에 참여했고 결장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했다. 그녀의 선행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오드리 헵번, 나치 당원 아버지 대신해 평생 속죄하며 봉사해 '뭉클' 2014.04.13
13일 방송되는 MBC 예능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서는 오드리 헵번이 악몽에 시달린 사연 등을 다뤘다.
과거 오드리 헵번은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했다. 어린 나이에 유대인의 참상을 알게 됐고, 그의 아버지가 끔찍한 가해자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오드리 헵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식이 끊긴 아버지가 죽었다고 여기는 중 아버지의 편지를 보게 됐다.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편지를 일부러 숨겼던 것.
눈물을 펑펑 쏟은 오드리 헵번은 나치 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존재가 배우 오드리 햅번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봐 숨겨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1960년 오드리 헵번은 아버지를 만나러 아일랜드로 향했다. 한 요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 안소니를 만났다. 안소니는 영국 전범 감옥에 투옥됐었고, 이후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외롭게 살아왔다.
오드리 헵번은 죄를 지은 아버지를 대신해 구호활동을 꾸준히 했다. 유니세프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를 했다. 전 세계 50여 곳을 돌아다니며 봉사 활동을 했으며, 결장암 판정 이후에도 계속해 일정을 소화했다.
결국 오드리 헵번은 1993년 63세의 나이로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 날 사망했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년 5월 4일~1993년 1월 20일)은 벨기에에서 태어난 영국의 배우이자 인도주의자이다. 헵번은 《로마의 휴일》(1953),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을 통해 유명해졌으며 특히 《로마의 휴일》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골든 글로브상, 에미상, 그래미상을 수상하였으며 말년에는 UNICEF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헵번은 1993년 1월 20일 대장암으로 타계했으며, 6년 후인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선정한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100명의 스타"의 여성 배우 목록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1]
생애[편집]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의 은행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 남작 부인의 딸로,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2] 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성에 헵번을 붙이고 나서 오드리 헵번 러스턴(Audrey Hepburn-Rust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드리 헵번은 두 명의 배다른 형제자매가 있었다.[2] 또한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기도 하다.[3] 캐서린 헵번, 험프리 보가트, 모나코의 레니에 3세와도 아주 먼 친척 관계가 있다. 1935년에 헵번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나치의 추종자였던 헵번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4][5]
헵번은 암스텔담에서 살던 5살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여, 1948년에 런던으로 이사한 뒤까지 계속되었고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에 코러스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몇 개의 영국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뒤 1951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지지에 출연한 뒤, 헵번은 《로마의 휴일》(1953)에 출연하여 대중의 인기를 누린다. 헵번은 이로 인해 오스카상, 골든 글로브상, BAFTA 상을 영화 하나로 함께 수상한 첫번째 여배우가 되었다.
오드리 헵번은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식량난에 시달렸는데, 이러한 유년 시절의 어려움은 그녀가 말년에 대장암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사회 봉사를 실천하게 했다. 1954년부터 유니세프에 기부해 왔지만, 1988년부터 1992년까지는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도움이 필요한 지역에서 직접 봉사에 참여하였다.
첫댓글 2차 대전 시기와...대전이 끝나고 데뷔 전까지는...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라고 함...지지에 금이 강해...금이 투출하는 시기는 좋지 않은 듯... 식상이 기신인지...유산도 3번... 결국 금태과로... 금의 장부인 대장암 사망...
얼굴도 마음도 최고인 여인인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