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시인 유홍준
산판에서 통나무 나르고 제지공으로 종이 만들고 정신병원에서 환자 수발까지
가난하고 힘들어도 나는 시인 진주에서 맞은 새 삶이다
유홍준은 하동에 있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일한다. 혼자서 남자 환자 117명을 '관리'하는 '관리사'다. 병동에 들어가 밥도 환자들과 함께 먹으며 돌본다. 대소변 수발도 하고, 약 잘 먹었는지 입 안도 확인하고, 발작하면 잠시 묶어야 한다. 벌써 2년 넘게 일하며 한 달에 120만원쯤 받는다.어떤 시인이 "하느님인지 부처님인지 유홍준에게 인생 공부를 너무 세게 시키신다"고 했다. 그를 가리켜 '정육점의 시인'이라고 한 평론가도 있다. 그는 마흔여덟 되도록 온갖 거친 일을 했다.
진주 어느 찻집에서 만난 그의 팔뚝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다. 비번 날이라 아침에 가좌동 집 근처 밭두렁에서 쇠비름을 캐다 긁혔다고 한다. 참비름과 달리 쇠비름은 미끄덩거려 별맛이 없지만 어릴 적 생각하며 잘 비벼먹고 나왔다고 했다. 그는 나물 캐기를 산책하듯 즐긴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유홍준은 진주에서 50㎞ 떨어진 산청군 생초면 계남리, 버스도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병석에 오래 누워 있느라 논밭 다 팔고 어렵게 컸다. 그는 가난과 '가슴 속 불'을 못 견뎌 네 차례 가출한 끝에 생초고를 간신히 졸업했다. 그래도 백일장만 나가면 상을 타왔다. 써 둔 시며 소설이 대학노트 두 권을 채웠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먹고살거리를 찾아 부산까지 갔다. 범일동 한복집에서 군대 가기 전까지 2년 반 바느질을 했다. 제대 후엔 서울 용산시장에서 마른 고추를 팔다 부산에서 쇠 깎는 밀링공으로 일했다. 대구로 가서는 채소가게와 과일행상을 했다. 그래도 벌이가 안 돼 아내와 아들을 산청 집에 보내놓고 경북 영양에서 3년 넘게 고추포대 꾸리고 싣는 품을 팔았다.
고추철 지나면 양곡·시멘트 나르기, 농약 치기에 공사판 막노동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그중에 3년을 꾸준히 일한 곳이 산판이다. 통나무를 메고 비탈을 달려 내려와 하루 다섯 트럭씩 실었다. 어깨에서 터진 진물에 옷이 달라붙어 저녁마다 소주를 부어 떼어냈다. 굳은살이 박이고 어깨가 달걀 하나 들어갈 만큼 파이자 '젊은 유씨'는 "영양 최고 산판꾼"으로 불렸다.
1990년 진주 사는 누나가 그를 불렀다. 누나가 대신 이력서를 넣은 진주 제지회사에 취직이 돼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산판 일을 하다 종이를 만드니 세상에 이리 쉬운 일이 있나, 돈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
진주에서 맞은 새 삶은 그의 안에 잠자던 문학의 불을 댕겼다. 입사 첫해 구내식당에서 공단문학상 공모 포스터를 봤다. 장려상은 탈 것 같아 급히 단편소설을 써 보냈더니 대상에 당선됐다. 91년엔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시 장원을 했다. 그는 이듬해 개천예술제에 잔일을 거들러 갔다가 심사위원이던 시인 김언희를 만났다. 시인은 대뜸 "써 둔 시 좀 보자"고 했다.
김언희는 "군소 문학지로는 당장 등단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시를 쓰고 싶다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어디에도 응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다. 그녀를 스승으로 모시고 혹독한 시(詩) 수업이 시작됐다. 스승은 시 이론서부터 인문·사회·과학책까지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수시로 건넸다. 영화·비디오·화집도 골라 줬다.
7년이 지나자 스승은 "이젠 어디든 응모하라"고 했다. 곧바로 대구 시전문지 '시와 반시'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04년 첫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을 내자 문단은 "물건이 하나 나왔다"고 반겼다. 시인협회가 주는 제1회 젊은 시인상이 그에게 돌아왔다.
2년 뒤 시집 '나는 웃는다'는 1000만원을 내건 시작(詩作)문학상 첫 수상작이 됐다. 문인들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서 가장 좋은 시집으로 뽑았다. 열 개 넘는 문예지가 다투어 그의 특집을 실었다. 유홍준은 시단(詩壇)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됐다.
그는 공장 안에선 철저히 공장 일에 몰두했다. '글 쓴다며 겉멋 들었다'는 소리 들을까 봐 제지공으로 최선을 다했다. 3년 만에 작은 아파트도 장만했다. 생산부 가공과 C반 반장이 돼 "유 반장이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뢰도 얻었다. 그러던 2007년 회사가 기울면서 구조조정을 당했다.
유홍준은 알음알음으로 경기도 여주 정신병원에 관리사 자리를 얻어 떠났다. 아내도 진주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느라 남매를 돌볼 수 없어 두 달 만에 돌아왔다. 이듬해엔 진주시 장애인복지관 계약직으로 버스도 몰았다. 그러다 여주에서 일했던 인연으로 하동 정신병원에 근무하게 됐다.
그는 진주가 "힘겹게 떠돌던 나를 받아들여 정착시켜 준 곳"이라고 했다. "진주에 오지 않았다면 문학을 못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진주가 맺어준 사제(師弟), 김언희와 그는 피붙이, 살붙이 하듯 서로를 '시(詩)붙이'라고 부른다. 정작 고졸 시인 유홍준을 알아주는 곳은 도계(道界) 너머 전남 순천이다. 그는 순천대 문창과에서 시작(詩作) 한 과목을 맡아 일주일에 하루 강의한다.
그는 "공장을 다녔어도, 정신병원에서 일해도, 입성이 초라해도 나는 시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외경(畏敬)스러운 삶을 유지하려면 웬만큼 돈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에 그는 가끔씩 분노하고 좌절한다. 가난의 고리를 끊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이고, 가난 탓에 그의 시 세계를 넓히지 못한다는 좌절이다.
그는 제지공 시절 이런 말을 했다. "순백의 고급 아트지(紙)를 만들려면 순도 90% 가성소다를 넣어야 한다. 흔히 양잿물이라고 하는 독극물이다. 좋은 시에도 독극물이 필요하다." 모질기 그지없는 그의 인생행로가 '시인 유홍준'을 벼려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이형기 문학상을 타실때 서울서 뵈었지요 글을 참 잘 쓰는 시인이구나 했는데 많은 아픔이 있었네요. 강원도에서는 진주시인으로 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