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덕 괴시리 전통마을
전통건축이 잘 보존 돼있고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되고 있는 괴시리 전통마을. 이곳에는 영양남씨
괴시파종택을 비롯해 고가옥 30여호가 밀집되어 있어 옛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느낄수 있다.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이색의 시조다.
이성계 세력이 새로운 야망을 키우고 있을 때 고려를 지킬 우국지사들은 어디에도 뵈지 않음을 탄식하고
있다.
목은(牧隱) 이 색(1328~1396)은 고려 말의 유학자로 옛 고구려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다가 지은 오언율시
‘부벽루’ 등 문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을 다수 남겼을 뿐 아니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지조는 단순한 그의 정치적 태도이기보다 유교전래 가치관의 실천이었다.
본관이 한산인 그는 1328년 5월 외가가 있는 영덕 괴시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짧게 보냈다.
1341년 성균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뒤 원나라 국자감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배웠고, 이후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공민왕 때는 문하시중을 지내는 등 주요관직을 두루 거치며 최고 관직에 오르는 동안 유학의
보급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색이 한국 성리학의 뿌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고려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그의 가르침은
많은 제자를 통해 이어졌는데,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를 비롯해 권근, 변계량, 김종직 등이 있고, 역성혁명의
주역이 된 정도전 등도 원래는 그의 문하였다.
그는 유학자이기는 했으나 불교, 도교에도 관심을 갖고 유교의 입장에서 삼교를 융합하는 사상을 주장했다.
그는 사람과 하늘은 본래 하나이기에 사람은 하늘과 같이 숭고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이의 회복을 위해
‘수양철학’을 강조했다. 그런 그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의 회유와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성계 일파에게는 마땅치 않은 불편한 존재임이 분명했겠으나 이성계로서도 그를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유배를 보내기도 했고 그의 두 아들을 역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처형까지 하였으나, 평소 존경하는
정치 선배이자 중국까지 그 명성과 인품이 자자한 그를 당장 어쩌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조 4년(1395) 향리로 낙향한 그에게 태조 이성계는 다시 출사를 종용했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며 고사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도 이성계가 왕궁으로 그를 직접 초빙한 자리였는데, 태조 이성계에게 ‘전하’라 부르지 않고 고려 관직명과
‘이공(李公)’이라고 번갈아 불렀다. 이에 이성계 자신은 그와의 친분에다 그의 인품과 학식을 아껴 관대히
넘겼으나 이방원과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살아있는 한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이라 판단한 그들은
이듬해인 1936년 이 색이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좋은 기회라 여겨 일을 꾸몄다.
그들은 여강의 제비여울에서 휴식하던 이 색에게 사자를 시켜 극독이 든 술과 안주를 어주라 속이고 내려 보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신륵사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목은 이 색은 ‘명이 하늘에 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랴’면서 태조가 보냈다는 그 술을 덜컥 마신 다음 이내 배 안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충정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고매한 품격을 지키다가 의연하게 파란의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색의 나이 69세 되던 해 5월 7일이었다. 이때 술병을 막았던 댓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
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여주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색의 사망 소식을 들은 태조 이성계는 매우 슬퍼하며 음식을 거두고 사흘 동안 조회를 중단했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게 했다. 그리고 문정(文靖)이란 시호(죽은 뒤 왕으로부터 받은 호)를 내리고 한산의 문헌서원 경내에서
장사를 지내도록 했다. 사실 이방원의 독살설은 기록으로 드러내놓을 수 없는 사실이라 대개는 ‘의문의 죽음’ 정도로
사료에는 표현하고 있다. 양촌 권 근의 행장기록에는 피서를 떠나려다가 병이 들었다 하고, 다른 문헌에는 배 안에서
갑자기 사망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독살설은 목은 문집 연보에 근거한다.
왕조가 바뀌는 과도기 시대를 살았던 대문호였고 사상가였으며 충신인 이색의 삶은 풍운아적인 면모가 다분히
엿보인다. 이성계 일파의 견제와 일부 사가들에 의해 폄훼되고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은 그를 불교신봉자로 매도하기도
하였으나 목은 이 색은 신흥사대부 집안의 중심에 자리한 인물이면서 역사적으로도 비중이 높은 인물이다.
고려사에는 목은을 가리켜 ‘평생 성낸 말소리와 노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목은 성품의 온유성과 더불어
극기와 절제로 닦여진 고매한 인격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괴시리 마을에 도착해 목은 이 색 선생을 가까이서 또렷이 느끼기 위해 목은 기념관으로 향했다. 화살표를 따라 5분
정도 숨차지 않게 걸어가니 멀리 홍련암이 보이고 그 위에 정갈하게 가꾸어진 소나무숲 속에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기념관 앞쪽으로는 도보여행객들의 필수코스인 블루로드 3길이 뚫려 있다.
목은 기념관이 들어선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에는 그의 생가터가 있고 탄생과 관련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영해지역에 산천초목이 1년간 다 말랐다는 내용이 그것인데, 이런 기이한 현상은 풍수지리설에 훌륭한 사람이
태어날 때는 땅의 정기를 타고 낳기 때문이라는 속설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색은 열아홉에 당대 제일 명문인 안동 권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의 연을 맺는데, 양촌 권 근(목은의 제자이자 사돈)이 쓴 ‘목은 행장’에 의하면 혼사 논의 중에
명문가에서 사위를 고르던 자들이 하나같이 서로 자기 딸을 목은에게 주려고 혼인 전날 저녁까지 다투며 야단법석을
벌였다고 한다.
이 색의 출생지인 괴시리 마을에는 잘 꾸며진 목은 기념관 말고도 무가정터, 만서헌, 관어대, 유허비 등 목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덕군에서는 유교문화권 개발사업과 연계해 이러한 유적들을 비교적 잘 정비하여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영덕 사람들로서는 목은 이 색의 고향이 영덕이란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질 만도 했다.
더불어 괴시리에는 전통마을이 잘 정비되어 보존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널찍한 못이 있어 처음엔 호지(濠池)촌이라 부르다가 목은이 중국에 머물 때 시야가 탁 터이고 아름다운
풍광의 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과 비슷하다 하여 이름을 괴시마을로 바꿔 불렀다. 그런데 얼핏 그 ‘괴시(槐市)’란 이름의
어감이 과히 좋지는 않은데, 괴시는 홰나무(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남동쪽의 망일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이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 함창 김씨가 마을에
처음 자리 잡은 이후 16세기 조선 명종 때에는 수안 김씨와 영해 신씨가, 인조 8년(1630)에는 영양 남씨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 후 3성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만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괴시 마을은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건축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으며 목은 이 색의 고향답게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되고 있다. 이곳은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등 2백여 명의 독립유공자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지역으로서 괴시리
전통마을은 그 역사적인 애국애족의 정신적인 발상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또한 3백년 넘은 영양 남씨
괴시파종택(민속자료 제75호)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 문화재와 전통가옥 30여 동이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어
조상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마을의 특징은 한집안에서 분가를 하면 바로 옆에 새로 집을 잇는 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통적 충효사상이
잘 녹아든 마을이란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고, 마치 대를 이어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안을 의미하는
‘문종’의 분위기가 확 풍겨 오는 것만 같았다.
독서를 통해 과거에 오르고 공을 이루어 국가의 인재가 되고자 했던 지방 중소지주들의 본향이 고스란히 감지된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70년대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일부 전통 초가가 일명 ‘공갈 기와’라 불리는 조잡한 기와지붕
으로 개체 되어 전통마을의 분위기와 부조화를 이룬 대목과 문화재 지정 이전에 사유재산 가옥 몇 채가 현대식으로
개조된 부분은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가 그렇듯이 나무기둥과 대들보, 창호, 마당, 구들, 흙벽 등
괴시리 마을의 전통적 한옥이 주는 온화함과 예술성의 요소들도 국내관광객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에게 충분히
흥미를 자아낼만하다.
일본의 전통여관인 ‘료칸’처럼 전통 한옥을 고유문화와 접목해 관광자원 브랜드로 활용한다면 더욱 큰 호응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주말마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이곳 괴정(槐亭)이란 정자에서 이뤄지는 고택체험
문화프로그램은 매우 의미 있는 시도라 할만하다. 영덕문화원 주관으로 문화관광해설과 궁중무용, 월월이청청,
동해어부들의 소리 재현 등을 소개하고 마당에서는 전통 민속놀이 재현과 전통차시음도 실시하고 있다.
간간이 비가 오락가락 뿌리는 가운데 남영식 괴시리 전통마을 보존회장의 안내로 마을의 중심에서 약 5백 미터
벗어나 ‘입천정’(문화재자료 392호)으로 들어섰다. 깊은 산중도 아닌 완만한 경사 길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완벽하게 세상과 격리되어 배치된 ‘입천정’과 ‘마계정사’는 그 누구도 쉽게 범접 못할 완벽한 독립가옥이자
‘안전가옥’이었다. ‘입천정’은 남붕익이 1680년경에 건립하여 학문을 강도한 곳으로 2백여 년이 지난 후 그의
5대손 남흥수가 여러 친족과 힘을 모아 그 터에 현재의 규모로 복원된 것으로 전한다. ‘입천정(卄川亭)’이란
현판의 글씨는 당시 남흥수와 친분이 두터운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남영식 회장은 귀띔해 주었다. 입천정
2백년 된 배롱나무에 잠시 기대어서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온갖 시름을 다 벗어던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권순진 시인·칼럼니스트
<대구일보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