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 금식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려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18)
-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주님의 일반적인 진술은 이와 같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혹은 경건을)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 보여 주셨다. 첫째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문제(구제), 둘째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문제(기도 생활), 셋째로 영적 생활의 훈련(특히 금식의 문제)이다. 이 세 가지를 타인에 대한 처신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자신에 대한 처리 방법,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금식에 관한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몇 가지 예비 진술을 하고자 한다.
진리는 하나이며 항상 동일한 것이지만 교회사의 어느 특정시대는 진리의 어느 특정면을 강조할 필요를 갖는다. 제사장(행함을 강조)적 강조가 성행되고 있을 때에는 예언적 요소가 강조되었고, 선지자(신앙을 강조)적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되었을 때는 균형을 잡아 백성들에게 제사장적인 것을 상기시키고 강조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과 야고보 이 두 사도의 가르침은 서로 모순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두 사도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진리의 어떤 면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금식문제가 특히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생활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고려마저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소위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반동임이 분명하다. 카톨릭의 가르침은 항상 금식 문제에 큰 비중을 둔다. 그러나 금식은 여기 산상설교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살펴봐야 하겠다.
- 금식은 구약에서 가르치고 있다. 구약 모세 율법 밑에서 사람들은 일년에 한 번씩 금식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그런 명령을 받지 않았으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였다. 이것을 그들의 종교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다. 바리새인들은 성경보다 지나쳐 나간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금식을 결코 금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하다.(마9:15, 마4:2, 막9:20) 사도들도 금식을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언급하는 가운데 ‘자주 금식 중에’ 있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게도 그러했고 웨슬리 형제와 윗필드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 금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금식은 육신과 영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기초를 둔 것이다. 사람은 육과 정신과 영으로 되어있다.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상호 밀접한 작용을 한다. 그러나 신체의 상태와 조건은 정신과 영의 활동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금식은 신체와 정신과 영의 관계에서 고려해야 한다. 금식의 의미는 영적 목적을 위하여 음식을 금하는 것을 뜻한다.
최근 금식에 대한 주제로 쓴 글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이란 말씀이 금식의 한 가지 실례라고 하였다. 저는 이것이 금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러나 항상 금식해야 할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금식은 신앙생활 훈련의 일부로 가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예외적으로 하는 것인 반면 훈련은 영속적이요 영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나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라”는 구절은 금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음식의 절제는 금식이 아니다. 음식의 절제는 몸의 훈련의 일부이다. 금식은 어떤 특별한 이유나 처지를 맞아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음식을 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금식은 음식과 음료 문제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금식은 어떤 영적 목적을 위하여 정당하고 합당한 것을 금하는 것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 금식의 그릇된 방법
기계적인 방법으로 금식을 하거나, 금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든다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계획을 세워서 계획표에 맞추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이것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금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종의 율법 아래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듣고 싶어 한다. 일 년 중 어떤 일정 기간에 음식을 금하거나 적게 먹는 일 등이다. 이것에는 교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금식을 단순히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규칙이나 기계적인 방법으로 행한다면, 성경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깨뜨리는 것이다.
금식을 훈련의 관점에서 볼 때 유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훈련은 항상 해야 하고 영구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을 훈련의 일부에만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묵상과 강렬한 중재 등 영적으로 보다 높은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잘못된 방법은 금식으로부터 직접적, 즉각적 결과를 기대하는 소위 ‘자동판매기’식 금식관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만일 어떤 조건들을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며 즉각적, 직접적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축복이 금식이나 기타 다른 어느 것과도 관계되어 있음을 발견되지 못한다. 직접적인 결과를 위해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것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었다고 하는 순간 우리가 축복을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 모욕이다.
또 다른 실례를 들면 십일조 문제로 십일조에는 매우 타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십일조 문제를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여러분이 번영하고 싶으면 십일조를 하시오, 그러면 그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축복을 원하거든 십일조를 하시오”라고 말이다. 이런 가르침은 모두 비성경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금식의 가치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것이다.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처음 3.4일 고통을 겪은 후 특히 5일 이후에는 비상하게 맑은 정신 상태가 됨을 말하며 이것을 순전히 영적인 것인 양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일정기간 금식을 하면 이런 일을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금식이 적절히 행해지면 사람의 몸에 이러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자연적 차원에서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을 이적이라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의 대의에 해를 끼치게 된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과의 혼동인 것이다.
- 금식의 옳은 방법
금식은 항상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하며, 목적 그 자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 금식이란 영적 이유로 해서 마지못해 하거나 이끌릴 때에 한해서 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사순절이나 어느 때에 금식하기 때문에 금식을 해야 할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일을 기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훈련은 어떤 일정기간에만 해서는 안 된다. 훈련은 일년중 내내 해야 하는 것이다. 금식은 어떤 강한 영적 목적에 열중해 있을 때 규칙에 얽매어서가 아니라, 내 몸 전체를 집중하여 하나님께 드리도록 성령의 인도가 느껴질 때에만 금식하는 것이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금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끌어서는 안 된다. 주님은 그 뿌리와 가지를 모두 정죄하였다. 자기가 행하고 있는 것을 공포하거나 그것에 주의를 끄는 것은 주님께 철저하게 비난당할 일이다. 기도의 경우나 구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정확히 같은 원칙이다. 이것은 금식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 전체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이것은 동시에 경건한 모양을 가장하는 것을 정죄한다.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옷을 입었고 ‘그 차는 경문을 넓게’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의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다르게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냐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속물들과 같지 않도록 바라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참으로 말해 주는 것은 우리의 옷이다 라고 말하는 위치에 서서는 안 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것이 그들의 보상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금식의 옳은 길은 무엇인가?
가능한 한 바리새인들같이 별나게 극단적으로 나가는 것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힘써야 하며 그 반대의 인상을 주어야 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정상적이며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너희는 금식할 때 자연스러워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므로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여겨지고 비참하게 보이는 것을 너무 두려워 한 나머지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중층해지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옷을 입는 사람들만큼이나 잘못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원칙은 이와 같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잊어버려라. 너 자신도 잊어버려라. 그리고 너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라. 하나님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라.
우리의 관심사가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일들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금식의 방법이나 옷을 입는 방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자기를 잊고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신약성경은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먹고 마시고 옷 입는 방법을 알 것이라고 말해준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런 사람의 보상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 중요한 것의 한 가지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르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일이다. 이것에 관심을 갖는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 일임해도 좋다. 하나님은 보상을 수년간 보류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 약속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아신다. 그리고 저 큰 날에 온 세계 앞에서 보상이 선언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