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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기 | 한 서 | 후한서 | 삼국지 | 진 서 |
흉노 | 흉노 | 동이 | 오환선비동이 | 동이 |
남월 | 서남이양월조선 | 남만서남이 |
| 토욕혼 |
동월 |
| 서강 |
| 흉노 |
조선 |
| 서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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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흉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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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환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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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기』 열전 중에는 조선열전이 있으며, 『한서』 열전 중에는 서남이양월조선전이 있다. 즉, 『사기』 와 『한서』 에는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열전이 있으나,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는 조선열전은 없어지고 동이열전으로 편집되어 있다.
즉, 『사기』, 『한서』,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위만조선이 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마치 서기전 108년에 멸망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위만조선)과 한(漢) 무제 유철이 서기전 109~108년 기간 중에 전쟁을 했다는 기록만 뎅그러니 남아있는 꼴이다.
이어서 『후한서』 이후에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은 사라지고 동이전에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등에 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데,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등의 많은 나라들이 마치 조선(朝鮮)이 망한 후에 비로소 새로 생긴 나라들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즉, 부여에 관한 기록이 『사기』와 『한서』에는 없다. 또 『삼국유사』 에 따르면, 『후한서』를 인용하면서 해모수(解慕漱)가 마치 서기전 59년에 북부여를 흘승골성에서 건국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표 2> 각 사서별 조선열전(또는 동이열전)의 내용
사 기 | 한 서 | 후한서 | 삼국지 | 진 서 | 위 서 | 북 사 |
조 선 | 조 선 | 부 여 | 부 여 | 부 여 | 고구려 | 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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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 루 | 읍 루 | 마 한 | 백 제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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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고구려 | 변 한 | 신 라 | 신 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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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옥저 | 동옥저 | 숙 신 |
| 물길(읍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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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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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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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명(明) 초에 명(明) 대의 사관(史官)들이 부여에 관한 기록을 『사기』와 『한서』에 남기지 않았으니, 조선의 사관(史官)들은 『삼국유사』에 부여에 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 화식(貨殖) 열전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燕)의 주위에 제(濟), 조(趙), 부여, 조선 등이 [그림 5]와 같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趙)는 서기전 403년에 생겨서 서기전 228년에 망했으며, 연(燕)은 서기전 222년에, 제(濟)는 서기전 221년에 각각 망했으므로 [그림 5]의 상황은 최소한 서기전 403~228년 기간 중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부여와 조선은 최소한 서기전 228년 이전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앞서 18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周, 서기전 1046~256년)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다면, 조선은 이미 서기전 1046년경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림 5] 『사기』 화식열전
또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한 북부여는 서기전 714년, 654년, 또는 594년 중에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해부루가 건국한 동부여는 북부여 이후에 건국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해모수(解慕漱), 해부루, 북부여, 동부여 등은 현재의 중화인민국 25사(史)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다.
다만,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夫餘)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동부여와 내용이 거의 같으나, 부여(夫餘)란 국호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당요(唐堯, 요임금)와 우순(虞舜, 순임금) 이전 시기에 여러 종족이 북방의 만지(蠻地)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1,300년 후반 은(殷) 무정(武丁) 시대 갑골문에 토방(土方)이라 불리던 이민족이 변경을 침략하여 주민과 가축을 약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周, 서기전 1046~256년) 대 『주례(周禮)』와 『역경(易經)』에 토방(土方), 귀방(鬼方), 마방(馬方)이라고 불리던 종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서주(西周, 서기전 770~256년)) 말 청동기 명문에 험윤(玁狁)이라는 유목민을 낙수(洛水) 북방에서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秦) 목공(穆公, 서기전 659~621년) 때에 롱(隴) 서쪽에는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등의 융(狁)이 있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의 융(狁)이 있었다고 한다.
또 진(晉, 서기전 1042~376년)의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었고, 연(燕, 서기전 1046~222년)의 북쪽에는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림 6] 롱, 기산, 양산, 칠수, 경수 등
또 진(晉)의 도읍지 곡옥(曲沃)과 강(絳),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의 위치는 각각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연도(燕都)의 위치는 현재까지 현 북경시로 알려져 있으나,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상기한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 임호(林胡), 누번(樓煩),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이 ‘흉노(匈奴)’의 직계 선조라는 기록은 없다.
‘흉노(匈奴)’란 용어는 『사기』 진본기(秦本紀)에 처음 나타나는데, 진(秦, 서기전 900년경~서기전 206년) 혜문왕 7년(서기전 318년)에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濟) 등 5개국이 흉노를 거느리고 함께 진(秦)을 공격했는데, 진(秦)이 이들을 무찌르고 팔만 이천 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전 221년에 진(秦) 영정(嬴政)이 전국시대 6개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 서기전 221~210년)가 되던 시기에 북방에서도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었는데, ‘흉노(匈奴)’의 선우(單于)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두만의 아들 묵돈[冒旽, 묵독(墨毒), 묵돌(墨突), 서기전 209~174년)이 선우가 되었다고 한다.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도읍지를 선우정(單于庭)이라고 불렀는데, 대(代)·운중(雲中)의 땅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대(代)의 본래 위치는 앞서 19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심원(沁源)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서기전 200년에 ‘흉노(匈奴)’의 묵돈(冒旽, 서기전 209~174년) 선우(單于)와 한(漢) 고조 유방은 평성(平城)과 백등산(白登山)에서 전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성(平城)은 현재의 산서성 임분시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등산(白登山)은 임분시 동북쪽에 있는 현재의 곽태산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위치는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평성(平城)과 백등산(白登山)이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 인근에 있었던 것처럼 변이되어 있다.
묵돈(冒旽, 서기전 209~174년) 선우(單于)에 이어서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서기전 174~160년)이 선우가 되었다. 그 후, 노상의 아들 군신(軍臣, 서기전 160~126년)이 선우가 되었다.
묵돈(冒旽)과 노상(老上)이 선우(單于)이던 시기에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월씨(月氏)를 공격하여 누란, 오손, 호게, 근린 등 26개국을 평정하여 모두 흉노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군신(軍臣) 선우(單于)의 태자 어단(於單)은 군신의 아우 이치사(伊稚斜, 서기전 126~114년)로부터 공격을 받고 선우(單于) 자리를 빼앗기자 도망쳐서 한(漢)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한(漢) 무제(武帝) 유철(서기전 141~87년)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올랐으며, 월씨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월씨(月氏)로 파견(서기전 139~126년)하였다고 한다.
[그림 7] 평성, 백등산, 대 등의 변이된 위치와 본래 위치 추정지역
서기전 129년, 124년, 123년, 121년에는 한(漢)과 흉노(匈奴)간에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며, 서로 수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漢)은 서기전 115~73년경 사이에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 돈황 등 하서지구에 사군(四郡)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또 한(漢)은 서기전 109~108년에 조선(朝鮮)을 공격하여 낙랑, 현도, 임둔, 진번 등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朝鮮)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을 위사(僞史)로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하서지구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도 위사(僞史)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치사(伊稚斜) 선우(單于)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오유(烏維, 서기전 114~105년)와 오유의 아들 아(兒, 서기전 105~102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또 오유의 아우 구려호(句黎湖, 서기전 102~101년)와 차제후(且鞮侯, 서기전 101~97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으나, 이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이어서 차제후(且鞮侯)의 아들 호록고(서기전 97~85년), 호록고의 아들 호연제(서기전 85~68년), 호연제의 아들 허려권거(서기전 68~60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으나, 그 후에는 아(兒, 서기전 105~102년)의 아들 악연구제(서기전 60~58년)가 선우(單于)를 되었다.
그 후, 다시 허려권거(서기전 68~60년)의 아들 호한야(서기전 58~31년)가 선우가 되었는데, 이어서 호한야의 여섯 아들 복주루(서기전 31~20년), 수해(서기전 20~12년), 차아(서기전 12~8년), 오주류(서기전 8~서기후 13년), 오루(13~18년), 호도이시도고(18~46년)가 차례로 선우(單于)를 이어갔다.
이어서 호도이시도고의 아들 오달제후(46년)와 오달제후의 아우 포노(46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다.
그런데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호한야(서기전 58~31년) 선우(單于)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금와(金蛙) 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에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으나, 지황[地皇, 왕망(王莽) 신(新) 연호, 20~23년] 3년 임오(壬午, 22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無恤, 제3대 대무신왕(재위: 18~44년)]이 이를 치고 왕 대소(帶素)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부여 금와(金蛙) 왕이 흉노(匈奴) 호한야(서기전 58~31년) 선우(單于)라면,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누구인가?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허려권거(虛閭權渠, 서기전 68~60년)의 아들이므로 허려권거가 해부루여야 하겠는가?
아니면 가장 윗대로 올라가서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 선우(單于)를 해부루로 볼 수 있겠는가?
또 금와(金蛙) 왕의 태자 대소(帶素)는 호한야(呼韓耶) 선우의 첫째 아들 복주루(서기전 31~20년)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금와(金蛙) 왕의 여섯째아들 호도이시도고(呼都而尸道皐, 18~46년) 선우(單于)가 대소(帶素)여야 할 것인가?
즉, 상기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22년에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부여왕 대소(帶素)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22년에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대소(帶素)가 죽었으나, 부여가 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文咨王) 3년(494년) 2월에 부여의 왕과 왕비, 왕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이며 상징적이므로 곧이곧대로 기록된 데로만 이해하려고 할 일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음,..이번엔 ‘부여’시군요...현,통설을 기준해서 본다면,...‘한국사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하겠지요...그래서 우리고대사를 정립하는데 있어서...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지요. 올리신 내용의 진위를 떠나서 매우 의의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그런데,...글의 논거가 된다고 보이는 부분들에서 조금 미확인된 근거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네요...간단히 간추려서 몇가지 ‘확인용질문’을 드립니다. [‘문제점지적’이 아니니 오해없으시길]
(1) ‘『후한서』 열전 중에 북흉노전과 남흉노전이 있다’라는 것의 ‘사료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2) ‘『사기』 흉노전에 따르면, 한(漢) 무제 유철이 장성(長城,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서쪽의 임조(臨洮)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한다.’라고 하셨는데,...‘소위 말하는 만리장성’을 진시황이 아니고 한무제가 축성시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그러시다면, 그 ‘사료적 근거’를 좀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역시 ‘[『사기』 흉노전에]...장성(長城)의 경계지역에 해당하는 지명으로서 서쪽에서부터 임조·농서·북지·상군·운중·안문·대·조양·양평·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12개 지명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셨는데,...그 지명들이 기록된 것은 일단 그렇다하더라도... ‘(그 지명들이) 장성(長城)의 경계지역에 해당된다’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말씀하시는가요?...
@카오스 [즉, .‘소위 말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통설)’을 현,산서성홍동현북쪽으로 비정시키기 위해 ‘12개의 지명들이 장성(長城)의 경계지역에 해당하는 지명이다’라고 무리하게 추론하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검토를 해보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4) 아래부분의 그림6에서는 '대청광여도를 인용해서 롱, 기산, 양산, 칠수, 경수 등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글의 앞부분에서는 ‘『대청광여도』, 모두 위사임’이라고 단정하시더군요,....‘대청광여도를 모두 위사로 단정하신 근거 혹은 이유'가 궁금하군요..[아울러 ‘대청광여도의 성격’을 어떻게 보시는지?...]
@카오스 1. 후한서 열전 목록입니다. 2. 진시황이 장성을 쌓았는데, 착오입니다. 아직 편집중이죠. 3. 12개 남흉노 거주지역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는 내용은 후한서에 있을겝니다. 또 선우정이 대, 운중에 있었죠. 4. 12개 지명들이 대청광여도에서 변이되어 표기되어 있으니 위사라고 한 것이지요. 아직 편집중입니다.대청광여도의 지명 약 60%는 변이되어 있죠.
@광화세계 예, 감사합니다... 이왕 언급되었으니,...몇가지 의견....
1. '후한서 열전 목록'에 '남흉노열전'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북흉노열전'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즉, 일단 '남흉노'의 항복을 받은 한나라의 입장에서는 굳이 '북홍노'를 따로 구분해서 열전씩이나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었다고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어쨋든 '북흉노열전'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남흉노가 흉노 전체를 대변'하는 세력 정도로 보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굳이 '부여=북흉노'로 한정해서 해석하는 것은 조금..[남당유고에서는 呼韓邪 單于를 부여의 일부로 보기도 하므로 조금 신중한 접근이 필요?]
@카오스 2. 만리장성의 축성은 진시황시대의 사건이므로 '전체적인 부여역사의 맥락'을 정리하실때 혼선이 없었으면 합니다...
3. [물론, 카오스도 대청광여도에서와 같이 여러지명들을 장성의 남쪽에 일열배치한 것은 역사왜곡으로 보고잇습니다만,]... 설령 '남흉노 거주지역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하더라도 '흉노전체=남흉노'를 표현하는 상황이라면,...'남흉노열전에 거론되는 지명들 모두가 장성의 남쪽이다'라고 '특정화해서 해석하는 것'은 조금 신중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게다가 그 '특정화된 해석'이 '현,산서성홍동현북쪽의 성곽이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다'라는 논거로 사용된다면,.. 논리상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카오스 4. '카오스가 보는 대청광여도의 성격’ : 이 지도 자체가 '지리지의 지도'가 아니라 '각종 고대역사서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보조지도'로 보고 잇습니다. 즉, 18세기의 중국인학자들이나 일본인학자들도 역시 지금 우리들과 같이 '고대사서에서 언급하는 지명들을 비정시키는데 아주 큰 혼선을 겪고 잇었던 것'입니다....그래서 각종 역사서에서 언급된 지명들을 지도 제작자 나름의 판단으로 당시의 실제지도상에 일단 배치해 본 것이기 때문에 같은지명들이 여러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지도를 보고 어느 지명비정이 맞다 틀리다라고 판정할 수는 없고, 다만 '그들도 나와 같은/틀리는 생각을 했구나!'라는
@카오스
後漢書 卷八十六 南蠻西南夷列傳 第七十六
後漢書 卷八十七 西羌傳 第七十七
後漢書 卷八十九 南匈奴列傳 第七十九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 第八十 烏桓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 第八十 鮮卑
後漢書 志第三 律曆 下
권 88을 북흉노전으로 추정할 수 있지요. 부여의 건국은 최소한 서기정 228년 이전이지요. 근거: 사기 화식열전. 남흉노 북쪽에 장성을 쌓았으며, 장성 북쪽에 부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청광여도는 명 대 초에 지명변이가 이루어진 이후에 작성되었으므로 변이된 위치에 지명들이 표기되어 있고 일부는 그대로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광화세계 '후한서권88'은 ‘後漢書卷八十八/西域傳第七十八’...이 아닌가요?
[참조 : https://zh.wikisource.org/wiki/%E5%BE%8C%E6%BC%A2%E6%9B%B8 ]
아마, ‘한국사DB’의 목록을 보신 것으로 여겨지는데,...국편에서 ‘卷八十八/西域傳第七十八’이 한국측의 역사연구에 별로 관련되지 않으므로 목록에서 생략하고 그 내용도 제외시킨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사기/화식열전'에... '남흉노 북쪽에 장성을 쌓았으며, 장성 북쪽에 부여가 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가요?...어떤 판본인지?...좀 알려주시길...[혹시, 들어있더라도...'본문'이 아니라 '주해석'의 내용이 아닐지? {'주해석'은 후대인의 의견일 뿐이니 감안해야 합니다}]..
@카오스 西域傳이 있었군요. 큰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西羌傳과 西域傳은 통째로 갈아꼽은 것 같군요. 또 한국사db에는 西域傳이 없습니다. 특히 삼국지 烏桓鮮卑列傳은 위사 투성이죠. 현재 기억으로 현재의 우리나라 지명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을 겝니다.'사기/화식열전'은 부여 건국시기에 관한 근거입니다. 12개 지명은 사기에 있으며, 임조에서 요동까지 1만리 장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잇습니다. '남흉노' 지명은 후한서에 있습니다. 사기와 후한서의 지명들은 같습니다. 각 지명들을 이으면 북쪽의 장성이 되지요. 장성 북쪽에 부여가 있다는 기록은 후한서에 있습니다.
@광화세계 '한국사db'에는 한국사연구에 필요한 것만 발췌하다보니 西域傳을 생략한듯하네요.
[참고 : 카오스는 '西羌傳(서강전)=>현[청해+신장+키르키스+타지키+우즈벡]지역을 대상'으로하고, '西域傳(서역전)=>현[티베트]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우리(동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왜곡을 가미시킨 열전일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고대사역사왜곡'은 1차적으로 우리(동이)역사를 규명한 다음에, 서강,서역,흉노(몽골),남만(베트남)의 역사왜곡까지 규명되어야 마감될 것으로 봅니다. 아주 갈길이 멀지요]
그리고, '장성북쪽에 부여가있다'는 기록이있더라도 '부여는 남흉노가 아니다'라고 단정하는 필요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신중히 접근하시길
@카오스 모처럼 전폭 동감되는군요. 순서가 우리역사 먼저하고 서강,서역,흉노(몽골),남만(베트남)의 역사왜곡까지 규명되어야 하겠지요. 흉노는 꽤 밝혀지고 있습니다만, 서강,서역 등 할 일이 많군요. 북흉노가 대대로 선우를 했고, 장성 북쪽에 부여가 있으니 북흉노라고 한 것입니다. 북흉노는 동이전 부여가 되겠군요.
@광화세계 굳이... '부여=사라진북흉노'로 보시는 것까지는 무방하다고 여겨집니다만, '부여가 장성의 북쪽'이라는 '역사왜곡프레임'에 갇히지 마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즉, 부여가 장성의 북쪽이든지?, 북흉노이든지?에 너무 집착하면,
'부여가 포함되지 않은 장성남쪽의 남흉노는 중국국가(漢)에 흡수된 지역이다'라는 선입견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본다면, 남흉노라고 하는 세력들은 일시적으로 秦과 漢에게 격파당하긴하였지만, 영원히 秦과 漢에게 흡수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이는 열전이 만들어진 우리(동이)가 영속적으로 중국국가(漢)에 예속된 세력이 아님과 같은 맥락입니다. 좋은결과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지명의 위치를 명료하게 찍으려고 하다보니까..
몇가지 맥락이 확인되었으니,...이제, 조금 ‘본론(역사왜곡의본질)’에 접근하는 이야기를 거론해 보겠습니다.
(1) ‘진시황이 축성했다’는 ‘만리장성의 실체(지리적범위)’에 대한 것인데, ‘萬里(10,000리)라는 규모의 의미’와 ‘長(늘,장)자의 의미’ 및 ‘城(성)이라는 구조물의 형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1-1) ‘萬里(10,000리)라는 것은 길이(length)가 아니라 면적(space)이다’이고, (1-2)‘長(늘,장)’자는 ‘늘,항상(恒常),恒久的인’의 의미로 보아야하며, (1-3)‘城(성)은 築臺(축대;담벼락)가 아니라 築臺(축대;담벼락)로 둘러쌓인 마을(邑)’로 보아야합니다...
참고로 해 보시기 바랍니다
(1-1) 먼저, 현재의 통설은 ‘萬里(10,000리)=길이(length)’라는 의미를 고착화시켜서 현재의 만리장성이 대청광여도와 같은 모습으로 현,산해관까지 그리고 있습니다만, 고대인들은 면적을 나타낼 때, ‘길이의 단위인 里(리)’를 이용하여 ‘地方xxx里와 같은 형식을 사용’하였었고, 때때로 ‘地方(지방)’이란 접두어가 생략되기도 햇었습니다. 따라서 ‘萬里=地方萬里=면적(space)’인 것이므로..[임조(臨洮=현,감숙성민현)를 고정하면]..‘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현,감숙성+섬서성)지역의 황하로 둘러쌓인 지역에 한정’됩니다..
[참고 http://blog.naver.com/kms5824/80039957515 ]
@카오스 즉, 이 한정된 지역의 넓이(면적)가 ‘地方萬里’였었던 것인데, 역사왜곡할 때 면적을 길이로 바꿔치기해서 대청광여도처럼 북쪽에 ‘긴築臺(축대)’로 그려놓고 그것을 萬里長城(만리장성)이라고 왜곡했었던 것입니다.
(1-2) 다음, ‘長城(장성)’이라는 단어에서 ‘長(장)’자와 ‘城(성)’자를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長(장)‘자의 의미는 ’길다‘가 아니라 ’늘,항상(恒常)=즉,恒久的인‘의 의미로 해석하여야 합니다.
@카오스 (1-3) 다음, ‘城(재,성)’자는 원래 ‘築臺(축대=담벼락)’의 의미이긴하지만, 그 사용목적이 항상 ‘도읍(邑),나라(國),도시(市)를 보호하는 築臺(축대=담벼락)’였었으므로 여기서도 ‘城(성)=마을(邑)’로 보아야합니다. 즉, 몽념이 새롭게 개척한 ‘마을(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결국, ‘長城(장성)=긴築臺(축대=담벼락)’이 아니라 ‘長城(장성)={(몽념이 새롭게 개척해서) 항구적(長)으로 (진나라소속이 되게한 새로운) 마을(邑)}’의 의미가 됩니다.
@카오스 따라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현,감숙성+섬서성)지역 중 황하로 둘러쌓인 중북부지역[地方萬里]에서 몽념이 새롭게 개척한 진나라의 항구적(長)인 마을(邑=城)들’이 됩니다. 그래서.. 원래는 (현,감숙성+섬서성)지역의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었었던 12개(?)의 지명들을 ‘대청광여도와 같은 모습으로 긴築臺(축대)의 남쪽에 동서로 길게 일렬배치한 것’이므로 ‘통설에 따른 지명들을 기준으로 해서 장성의 위치를 찾거나 혹은 통설의 만리장성의 위치에다 지명들을 배치하는 것은 모두 이미 역사왜곡의 함정에 빠지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참고가 되시길,...
면적으로 본다는 생각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또 길이로 왜곡되었다는 설도 매우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근거가 제시될 수 있어야 하나의 설로 홀로서기가 가능할겝니다.
12개 지명은 진나라와 연나라 위치가 산서성 남부지역으로 확인되므로 각 지명의 위치가 적절히 추정된 것으로 봅니다.
12개의 지명들이 모두 '원래 (현,감숙성+섬서성)지역에 잇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만,...아직 그 부분까지 논란하기 싫어서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카오스는 일부는 처음부터 현,산서성지명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물론 '면적->길이'로 바꿔치기한 것은...'작은 중국땅을 현,중국대륙의 크기로 (동서남북으로) 뻥튀기하기위한 숫법'이지요...그래야 조선을 한반도로 몰아낼 수 있으니까요...'지방xxx리'를 잘 연구해보세요...['연무xxx리', '폭원xxx리'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음, 광화님께서 위 본문에서.../고구려27영류왕이 631년에 쌓게했다는 천리장성의 위치를 설명하는 기록[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에서 '西北->東北'으로 변조했다/고 보고 천리장성의 위치를 [그림3]과같이 '현,산서성태원~현,산동성'으로 비정하셨는데, 삼국사기의 기사는 '西北->東北으로 변조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기사입니다.
즉, [築長城, 東北 自扶餘城東南 至海千有餘里. >장성을 쌓게했는데,...(장성은) 동북인 부여성의동남(扶餘城東南)에서 시작하여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리였다]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장성의 끝인 바다가 서남이고, 장성의 기점인 부여성의동남이 동북이 되는 배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여성이 어디인가요?
@광화세계 예, 카오스는 '扶(夫)餘城=현,내몽골자치주의 呼和浩特시'로 보고잇습니다.
@카오스 끝장 토론 한 번 해 볼까요? 지든 이기든 별 문제는 아니죠. 궁극적으로 하나밖에 없었을 지명 부여의 강역이 확고히 규명될 수 있겠죠.
@광화세계 그냥, 물으시니까 답한 것인데,...무슨 '끝장토론'씩이나요?...지금의 주제는 '西北->東北'인지? 아닌지?를 논리적으로 검토하자는 이야기이지...'부여성이 어디인가?'는 [築長城, 東北 自扶餘城東南 至海千有餘里]이란 문장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지요...즉, '부여성의 위치'를 먼저 정하지 말고....'西北->東北'으로 변조됐다는 증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시면 좋겠네요...
어쨋든, 삼국사기에서...'631년의 천리장성 기사'와 '642년의 천리장성기사'는 '628년의 봉역도기사' 및 '642년의 연개소문구테타기사'와 관련지어서 보셔야 '부여성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이 기사들 사이에 엮인 퍼즐을 생각해보시길..
마지막으로,..광화님께선 부여성을 찾으면서, /『후한서(속한서)』 군국지에.. 낙양에서 동북쪽 4,000리 거리에 현도가 있고[玄菟郡 : 雒阳东北四千里]..『후한서』 동이전에..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부여(夫餘)가 있다[夫餘國,在玄菟北千里]/..라는 정확한 근거자료를 거론했으면서도.. '雒阳(락양)'을 '洛陽(낙양)'으로 오인하신 것을 알아채지 못해서.. 엉뚱하게 /삼국사기 연개소문의 천리장성[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으로 부여성을 찾다보니, '부여성=현,산서성태원'으로 낙착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천리장성으로 부여성을 찾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雒阳(락양)=洛陽(낙양)'으로 오인한 것이 더 큰 문제가됨
'西北->東北'으로 변조됐다는 증거는 위에 설명되어 있는 논리입니다. 사서들이 친절하게 상세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왜곡되어 있기 대문에 진사와 위사를 분별하여야지요. 적혀있는 문구에 연연하면, 왜곡됭 위사에 바져들기 쉽상이죠. 에를 들면 백제 동성과 서성 두 수도는 삼국사기에 북성과 남성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雒阳(락양)=洛陽(낙양)'은 주나라 시절에 혼용했다고 합니다.
@광화세계 (1) 앞의../'西北->東北으로 변조됐다'는 것에 대한 카오스의 지적/은 검토하지 않으시면서 처음의 광화님주장만 그대로 되풀이하고 계시는군요. 즉, '앞의 東北'은 천리장성의 깃점이 '천리장성 자체를 기준해보아서 東北이라는 것'이고, '뒤의 東南'은 천리장성의 깃점이 '扶餘城의東南이라는 것'을 말하므로 '천리장성의 종점인 海는 당연히 西南이 되는 것'으로서 '西南'이 생략된 것입니다. 즉, 본문을 있는그대로 해석하지않고, 임의로 '西北->東北으로 변조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게다가 그 주장을 근거해서 '부여성=현,산서성태원'이라고 단정하고, 또 거기서 또다른 주장을 발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카오스 (2) 예로 들으신 '백제의 2城(성)'은 실사에서는 '서북과 동남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서 '북성과 남성'으로 볼 수도 있고, '서성과 동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현,한반도로 지명이동시켜 역사왜곡하는 입장에서는 '북성과 남성'으로 기록해야 유리함.
(3) '역사왜곡'을 다루는 분께서.. /'雒阳(락양)=洛陽(낙양)'은 주나라 시절에 혼용했다고 한다/..라는 근거없는 추측성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시는 것입니까?...사서에 엄연히 기록된 '東北'을 용감하게(?) '西北'으로 고치시는 입장과는 완전히 배치되는군요...일단, '雒(락)'과 '洛(락)'은 글자도 다르고 위치도 다르므로 집중적으로 추적해 보시길..
락양이 어디인가요?
먼저, '洛(락)'은 물이름이지만, '雒(락)'은 물이름이 아니라 땅이름(or산이름)이라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비록, 현재는 '洛陽(락양)=현,하남성낙양'으로 고착화되어 있지만, 그렇게만 보지마시고, [좀 더 근원적으로] '洛陽(락양)=洛(물이름,락)의北(북)쪽'임을 살피셔야 합니다. 즉, '洛(물이름,락)'이라는 물이름이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그 '洛(물이름,락)의 北(북)쪽'은 어디든지 '洛陽(락양)'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따라서 '洛陽(락양)'이라는 고대지명은 '洛(물이름,락)의 수원지(洛源)'가 어디인지를 찾아서 '洛(물이름,락)'자가 만들어진 이유[즉, '雒(땅이름,락)'자]를 찾으시면 '雒阳(락양)=雒(락)의南(남)쪽'을 찾을수 있을것입니다
@카오스 洛陽(락양)은 洛(물이름,락)의 북쪽이 아닌가요? 산의 남쪽에 陽을 붙이고 수의 북쪽에 陽을 붙이는게 아닌가요?
@광화세계 이크!!!,....(죄송)....'洛(락)'자와 '雒(락)'자에 집중하다보니,....카오스가 혼란을 일으켰네요...예, '산의 남쪽에 陽을 붙이고 수의 북쪽에 陽을 붙이는 것'이 고대인들의 기본 인식이었지요...즉, '背山臨水(배산임수)'의 개념이지요...
일단, 위의 댓글에는 수정해 두었습니다...카오스가 실수는 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좀 더 신중했어야했는데,...잠시 '자만(?)'했나 봅니다...
이거, 카오스도 이제 '조금씩 맛이 가고있는 것'같아 초초해지는군요...더위탓인가?...나이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