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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나름대로의 관심사를 글로 엮어 제 홈페이지(www.cosmoscan.pe.kr)에 올려놓았던 것인데 조용현 교수님 홈페이지에 링크되었습니다. 당초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는 글의 성격상 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출전을 정리하지 못하였고 읽은 책들을 말미에 정리해 놓기만 했습니다. 이 글은 여기저기서 읽은 글(아래 출전)들은 짜깁기하여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철학을(과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 아니므로 재미로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Why Music Moves Ⅰ (음악은 왜 감동적인가 Ⅰ)
어린시절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개구장이 스머프(Smurfs)' 란 만화가 있었다. 사악한 마법사 가가멜(Gargamel)은 스머프 수프를 끊여먹기 위해서 스머프들은 잡으려 하고 스머프들은 힘을 합쳐 가가멜을 골탕먹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스머프 만화영화의 장면 장면에 클라식이 배경음악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가가멜의 집에서는 Schubert의 "The Eighth Sympony - The Unfinished"
스머프들이 이즈라엘에게 쫓길 때에는 Beethoven 의 "Appassionata"
슬픈일이 있을 때는 Tchaikovsky의 "Pathetique"
악당이 등장할 때는 Liszt의 "Piano Concerto No. 1" 이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2차원적인 단조로운 영상은 배경음악으로 인하여 깊이 있는 3차원 영상이 된다.
개구쟁이 스머프는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대한 우화이다. 스머프 마을은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공동 생활체의 완벽한 전형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막스(Karl Marx)로 상징하며 자신의 생각 때문에 종종 공동체로부터 조롱당하는 똘똘이 스머프는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Trotsky)를 상징한다. 농부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편리 스머프, 목수 스머프, 요리사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수선이 스머프들은 각기 다른 직업과 특징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평등하다. 마법사 가가멜은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그는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며 개인욕구 충족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가 기르는 고양이 이즈라엘(Azrael)은 자유시장 속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를 상징한다. 이즈라엘은 소리를 낼 수 없으므로 불평할 수가 없으며,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지력도 없다. 스머프 게임을 하시려면 |
이와 유사한 사례는 많이 있다. 기하학적 도형이 움직이는 단순한 에니메이션에 음악이 첨가되면 그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움직이는 도형에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 시트로앵 자동차 광고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는데 음악의 생동감과 정밀성이 자동차의 속성으로 전이되어 탁월한 광고효과를 보았다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영화의 완결성 정도는 음악의 완결성 정도와 깊은 상관관계를 갖는다고도 한다. 이렇듯 음악에는 사람의 특정한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기제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1935년 음악심리학자 'Hevner' 는 8개의 비슷한 의미를 가진 67개의 형용사 검사표를 만들어 피험자들이 어떤 특정한 음악을 듣고 느낀 기분에 가장 부합하는 형용사를 선택하도록 하는 실험을 하였다. 시험결과 피험자들은 특정음악에 대해 모두 유사한 기분을 느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예를 들면
장조 음악은 (Bach - Preludes and Fugues BWV 846, C장조) 행복한, 우아한, 쾌활한
단조 음악은(Bach - Preludes and Fugues BWV 847, C단조) 슬픈, 어렴풋한, 감상적인
박진감있는 리듬은(Pomp And Circumstance) 활발한, 강건한, 당당한
흐르는 리듬은(Pat Matherny - If I Could) 행복한, 우아한, 꿈꾸는 듯한, 감미로운
불협화음은(Ravel - 현악4중주 g단조 작품 10) 흥분되는, 동요되는, 활발한, 슬픈
협화음은(Peter, Paul & Mary - Puff The Magic Dragon) 행복한, 우아한, 평온한
느린템포는 위엄있는, 평온한, 슬픈 (Handel - Sarabande)
빠른 템포는 들뜬, 행복한 (Elton John - Crocodile Rock)
높은 음고의 음악은(Inspector Gadget Theme) 명랑한, 유머러스한
낮은 음고의 음악은 (Bach - Cello조곡 G major BWV 1007) 슬픈, 위엄있는, 장엄한 느낌이 듣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반응들은 음악교육을 받은 정도,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일반적인 것으로 관찰되었다.
8 category 로 된 형용사 검사표
고귀한 (dignified), 당당한 (lofty) 엄숙한 (solemn) |
침울한 (gloomy), 슬픈 (sad) 비극적인 (tragic) |
꿈꾸는듯한 (dreamy), 슬픈듯한 (plaintive) 감상적인 (sentimental) |
느긋한 (leisurely), 서정적인 (lyrical) 잔잔한 (serene) |
우아한 (graceful), 쾌활한 (playful) 유머러스한 (humorous) |
유쾌한 (cheerful), 명랑한 (gay) 행복한 (happy) |
동요된 (agitated), 흥분시키는 (exciting) 기분이 들뜬 (exhilirated) |
의기양양한 (exaltin), 장엄한 (majestic) 강건한 (robust) |
시각, 청각으로부터의 고립
인간은 주변의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이 상호 작용이란 자극에 대한 '동'과 '반동'의 끊임없는 과정이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균형'에서 '균형'으로, '긴장'에서 '완화'로, '동'에서 '정'으로, '필요'에서 '충족'으로, '행동'에서 '휴식'으로 움직여 가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체가 환경에 반응을 계속하는 한 살아 있는 것이며 상호작용을 멎는 순간은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다.
환경과의 반응은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지각을 통하여 세계를 해석하며 이해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감각으로부터 고립되면 어떻게 될까?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아주 특별한 실험을 하였다.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방에서 인간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 하는 실험이었다. 아주 특별한 경험을 맛보기 위해 자원한 피험자들은 촉각을 둔화시키기 위해서 손에 장갑까지 끼어야 했고 침대앞에 있는 냉장고에서 음악을 꺼내 먹으면서 견디어야겠다. 이 대학의 대학원생 톰 워너코트는 이 방에서 4일을 버티었다. (왼쪽은 적외선 사진으로 촬영되었으며 피험자는 자신을 촬영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4일이 지나 해방된 그는 구멍 속의 막대를 구멍 주위에 닿지 않도록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사진의 우측 하단) 시각, 청각, 촉각을 상실한 사람은 한참동안은 내면에 축적된 것을 모아 합리적인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의 지각은 왜곡되고 뒤틀려 진다. 시간흐름의 속도를 알 수가 없게 되며, 고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환각이 오기도 했다.
동굴
동굴에 갇힌 죄수는 손, 발, 머리가 결박되어 있어 동굴의 벽만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그들 뒤에 동굴은 좁은 출구가 있으며, 이곳을 통해 밖으로부터 동굴에 사는 사람들의 등 뒤쪽으로 빛이 동굴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의 그림자들이 마주 놓여 있는 벽에 어른거리게 되어 있다. 정면만 보도록 결박되어 있는 죄수들은 그저 벽에 드리워진 그들 자신의 그림자만을 볼 뿐이다. 죄수들 뒤에는 하나의 통로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도구들을 가지고 지나다니고 있다. 이들 도구들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맞은 편 벽에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으로서 볼 수가 있다. 죄수들은 벽에 보여지고 있는 그림자의 세계가 진짜라고 믿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그람자의 동작과 형태를 관찰하고 해석하며 세계를 이해한다.
동굴에 갇힌 죄수에게 있어서 지각이란 실재를 파악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 듣는 것은 모두 그림자의 세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각지각과 청각지각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차이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보이는 세계, 들리는 세계
프랑스의 귀족 드 브로이는 '물질파' 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입자를 하나의 파동현상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물질을 하나의 파동현상으로 파악한다면 세계의 근원적 실체는 없으며 단지 관찰이 근원적 실체가 현상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때 현상하는 실체는 '실재' 이라기 보다 인간에 의해 해석된 '가설' 일 뿐이다. 따라서 칸트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 실체는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며, 인간이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속에서 재구성한 실재의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시각적 지각은 빛이 망막에 닿는 순간, 전기적인 성질과 화학적인 성질을 겸한 신호로 전환함으로써 얻어진다. 그 신호는 빛으로 인해 이미 빛의 성질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 빛은 실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망막의 광수용체에서 파동은 디지털신호로 바뀐 다음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 신호를 미리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재구성해서 이미지의 형식으로 출력한다. 요컨대 시각적 지각은 실재의 재구성이지 실재 자체가 아니다.
여기에 반해 청각적 지각은 파동으로서의 실재를 파동으로서 수용한다는 점에서 실재의 '이미지' 에 한층 접근해 있다. 청각적 지각은 실재와의 공명 (resonance)즉 동조의 방식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각과 같이 실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동조방식으로 카피하는 것이다. 2대의 바이올린을 똑같이 조율하여 그 중 한 바이얼린의 G선을 켜면 다른 바이올린의 G선도 똑같이 울린다. 이것은 첫 번째 바이올린에서 발생한 공기의 파동은 두 번째 바이올린에 가서 부딪히면서 방출된 음과 똑같이 조율된 두 번째 바이올린의 선은 우선적으로 그 파동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파동의 진동수와 자신의 고유한 진동수가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계 즉 2개 이상의 동조된 진동자로 이루어진 체계를 공명체계라고 하는데 우리의 귀가 외계를 지각하는 방법은 원리적으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보이는 세계' 에 비해서 '들리는 세계' 가 훨씬 실재의 본연의 그것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은 다섯 살 소녀가 베이스트럼의 언저리를 붙들고 손으로 전달되는 진동과 보청기에서 드리는 소리를 비교하면서 소리를 배우고 있는 모습이다. 소녀는 태초에 원생생물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몸을 드럼소리에 동조시킴으로서 소리를 느끼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위대한 음악은 위대한 과학이나 철학보다 훨씬 더 실재에 가까이 다가 있으며 실재의 보다 근사한 '그림' 인 것이다.
무엇으로 보기, 무엇으로 듣기
인간의 시각은 생존가치면에서 가장 뛰어난 지각기관이다. 그러므로 시각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를 해석하여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선과 패턴으로 이루어진 순전히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덩어리조차도 무언가로 보야야 할 정도로 강한 해석지향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순간 억제될 수 있을지라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할 뿐 아니라 오래 지속하지도 못한다. 그것이 우리가 로스차크 잉크 얼룩에서 무언가를 보는 이유이다. 아무것도 아닌 시각정보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볼 수 없는 즉 재현적으로 무력한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우스갯 소리 한 정신과 의사가 자기의 환자에게 로스차크의 잉크얼룩 심리검사를 하고 있었다. 의사는 첫 번째 잉크얼룩을 보여주며 무엇으로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복슬개 두 마리가 서로 엉켜서 교미를 하고 있군요." 두 번째 잉크얼룩을 보여주며 무엇으로 보이는지 물어보았다. "이건 발가벗은 여자가 창문에 기대서서 창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모든 남자들에게 들어와서 섹스를 하자고 손짓하고 있군요." 의사는 세 번째 잉크얼룩을 보여주었다. "이건 가랭이 없는 여자용 속바지로군요." 바로 그때 시간이 다 되어서 의사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환자는 일어서면서 모자를 쓰더니, 떠나기 전에 의사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 의사 선생님. 저런 야한 그림들을 더 좀 보여줄 수 있어요?" |
하지만 청각은 좀 다르다. 인간에게 있어서 청각은 그 예민함을 잃었고 따라서 생존가치면에서 중요도가 떨어짐으로서 일종의 도태가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도태란 위험의 신호를 알리는 데 있어서, 먹을 것을 찾는데 있어서 청각 정보의 중요성은 시각 정보에 비하여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청각 신호를 회화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은 퇴화되었다. 그래서 어떤 소리는 추상적이고 비해석적일 수 있다. 귀는 눈처럼 해석의 성향이 강하지 않다.
로고는 기업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전통적인 LG 로고가 웃는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CJ 로고는 무엇으로 보기성향을 아주 우아하게 무력화시키고 있다. 아무 의미가 없으니 신경쓰지 말고 편안하게 Enjoy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기발한 디자인이다. |
그렇다고 청각에 해석지향성향 즉 '무엇으로 듣기(hear as)'의 성향이 전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수도원의 종소리 를 들어 보면 처음에는 하나의 종소리가 울리다가 차츰 그 종의 수가 늘어나 마침내는 수십 개가 될 듯이 느껴지는 높고 낮은 여러 개의 종이 울려, 새들이 하늘을 나는 듯한 환영을 재현하는 듯 하다. 그리고 해질녘 땅거미가 내리는 명암의 사잇길로 조용히 울리는 에밀레 종소리 에서 쇳물에 아이를 던져놓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청각에도 해석지향성향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청각의 해석지향성향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언어적 발화로 해석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음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로 증명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음악을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는데 그래서 뒤죽박죽인 소음이나 심지어 정연한 규칙적인 소리와는 달리 음악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악을 언어적으로 들으려는 청각의 성향은 의미론적 수준에서는 쉽게 좌절되지만 정서적 수준에서는 쉽사리 포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 기악음악에서 무언가를 듣는 것이다.
귀의 기원
왼쪽의 사진은 투명한 몸체를 가진 오펠리아 해파리다. 중앙의 네모진 부분이 입이고, 그 주변의 4개의 알 같은 것은 생식기관이다. 그리고 바깥에 숱을 이루고 있는 촉수의 뿌리부분에는(사진의 목걸이 같은 부분) 평형포라고 불리우는 평형기관이 있다. 평형포의 기능은 단순하다. 해파리의 몸체가 수중의 흐름이나 해류로 인해 갑자기 기울어 졌을 때 즉시 반응하여 몸체를 수직으로 바로잡도록 신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평형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평형포는 포유류의 내이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데 청각기관의 진화는 이 평형포로부터 시작된 듯 하다.
물고기는 복부에 있는 공기가 가득 찬 달걀 모양의 부례 덕택에 뜰 수 있다. 한데 이 부레는 다른 부가적인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리를 모으는 것이다. 소리가 부레에 있는 공기를 흔들어대면 내이로 가는 조직들이 움직인다. 물고기들이 땅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동물들은 드디어 30억 년의 진화 과정에서 처음으로 듣기 시작했다. 그들의 유모세포가 광범위하게 진화를 시작하면서 특정한 소리들을 감지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듣기 시작했다. 소리들은 이제 더 이상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고 내려가고 고동치고 떨리며 그들만의 생명을 얻었다. 민감도가 증가하고 진동수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모든 발전 단계를 조정하게 위해 두뇌가 진화했고, 점차 단순히 소리를 감지하는 수준을 넘어 분석하고 해석하며 식별하기 시작했다.
생존에 있어서 소리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보다 소리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소리의 위치파악은 시각이 양쪽 시각에 상이 맺히는 차이를 가지고 거리를 파악하는 것처럼 소리가 양쪽 귀에 도달한 소리의 도착시간과 강도를 비교하는 방법을 취한다. 어떤 올빼미들은 한쪽 귀를 한쪽 귀를 다른 쪽 귀보다 높게 둔 비대칭적 두 개골을 가지고 있어서 아래와 위에서 오는 소리들이 시간 차이를 가지고 위치추적을 한다. |
공기의 진동
현의 진동은 공기의 압력을 변화시킨다. 그 압력의 변화는 주변의 기압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세밀하게 만들어낸다. 소리가 전달되는 것은 바로 이 세밀한 기압의 변화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파동이다. 파동은 공기중의 한 입자가 소리가 전달된 거리만큼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입자가 소리가 전해지는 방향으로 아주 조금 움직이고 나면, 그 옆의 입자가 자극을 받아 움직이고 다시 그 옆의 입자가 움직이고 하는 모습으로 전달된다. 음파는 음파는 공기 압력의 미세한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기의 흔들림인데 그 흔들림은 아주 미세하다.
악기가 내는 보통 크기의 소리는, 정상적인 기압과 비교할 때에, 100만 분의 1의 압력 변화가 생김으로서 발생된다. 악기가 연주되고 있는 동안 계속되는 이 미세한 변화는, 수면의 물결이 이차원의 파형으로 수면위로 전달되는 것과는 달리, 삼차원의 모습으로 공기 속으로 전파된다. 진원지를 구심점으로 한 구면 모양으로 공기 중에 전파되어 나간다. 수면의 물결이 퍼져나가듯, 공기 속으로 압력 변화로서 퍼져나가는 것이다. 음파가 공기 중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속도는 초당 331미터이다.
진동의 포착
파동이 귀바퀴에 닿는 순간 귀바퀴는 그 크기에 따라 특정한 범위의 진동수를 증폭시킨다. 인간의 귀바퀴는 작아서 저주파의 파장을 잘 받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1초에 20번에서 2만번까지의 진동을 잡아낼 수 있다. 1초에 20번 진동하는 소리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소리이며, 1초에 2만법 진동하는 소리는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이다. 동물중에는 얼굴자체가 퀴바퀴 역할을 하는 가면올빼미가 가장 귀바퀴를 가진 동물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새의 머리전체가 '귀'인 셈이다.
외이를 통과한 공기의 진동은 고막을 때린다. 고막은 중이의 첫 번째에 위치한 추골(Malleus)을 밀면, 그것이 두 번째에 놓인 침골(Incus)을 치고, 또 침골은 세 번쩨에 있는 등골(Stapes)을 뉴런들이 기다리고 있는 유동체로 채우진 내이의 입구를 흔들어댄다. 공기의 진동을 고막으로 전달해주는 공기 분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은 뼈들은 각각의 음에 담겨 있는 각각의 진동수를 단번에 감싸안아 복합적인 패턴으로 진동시킨다. 중이가 없으면, 내이는 오늘날 뱀들이 하듯 주로 턱을 사용하여 지면에서 겨우 진동을 감지해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양서류와 파충류, 그리고 조류들은 여전히 단 한 개의 잔뼈를 갖고 있다. 오로지 포유류만이 턱뼈의 일부를 변형시켜 추골과 침골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진동수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중이의 잔뼈들은 중간 파장의 소리를 증폭시킨다. 잔뼈들이 이 같은 진동수에 맞도록 진동하면서 우리의 귀는 다른 어떤 소리들보다 언어에 민감하게 되었다. 많은 포유동물들은 풀숲을 스쳐지나가는 육식동을을 감지하기에 알맞도록 한 옥타브 더 높은 범위에 적응했다. 박쥐들은 극초단파를 확대시키는 미세한 잔뼈들을 갖고 있어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다. 반대로 캥거루쥐는 큼직한 잔뼈를 가지고 있어 올빼미의 날갯짓이나 슬슬 기는 뱀의 은근한 저음을 증폭하여 들을 수 있다.
진동에서 신경으로
귀가 대단히 민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귀바퀴에서 감각세포에 이르는 전 과정은 필연적으로 기계적일 수밖에 없다. 소리란 원래 진동이며 그것의 전달은 기계적인 충돌이지 때문이다. 귓바퀴, 귓구멍, 고막, 잔뼈, 중이의 근육들과 달팽이관 내의 유동체를 통과한 소리는 드디어 신경계를 만나게 된다.
코르티기관은 유모세포(Hair Cell)라 불리는 특수한 뉴런 다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부 유모세포 하나와 외부 유모세포 서넛이 길이를 따라 반복하여 분포되어 있다. 뉴런 다발들은 서로 다른 음파, 즉 달팽이관 입구에서는 고음부의 음들, 그리고 나선의 끌에서는 저음부의 음들에 각각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모세포에 나 있는 미세한 털들의 일부는 한쪽에 고정되어 있으며, 그 위에 떠 있는 젤라틴 성분의 막을 자극한다. 중이로 부터의 진동이 유동체를 타고 퍼지면서 유모세포의 털들을 흔들면 그 끝의 K+ 이온 통로가 기계적으로 열리고 닫힘으로써 신호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유모세포가 구부러지면서 생긴 공간으로 화학물질이 들어가면서 신경신호가 활성화되는 과정도 사실도 기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이것이 들리는 세계는 재구성이 아니라 카피라고 말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순간 소리라는 공기의 진동은 물리학의 세계를 떠나 그 속에 담긴 의미, 즉 심리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짜잔 ~~)
신경신호의 해석
신경세포를 통해서 뇌에 전달된 청각 신호는 먼저 1차 청각피질(Primary Auditory Cortex)에서 처리한다. 이곳 피질에는 저음에서 고음까지 각각의 진동수에 상응하는 길고 얇은 띠들을 지니고 있다. 어느 단일 주파수의 소리가 귀에 다다르면 곧 그 주파수의 피질 띠가 반응을 보인다. 1차 청각피질에서 감지된 소리들간의 관계설정은 1차 피질을 둘러싸고 있는 2차 청각피질(Secondary Auditory Cortex)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통해서 두뇌는 진동수, 강도, 출처, 변화속도 등 다양한 특징들간의 관계와 그 관계들간의 관계들, 또 그 관계들 등을 계속하여 파악한다. 말하자면 소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반구의 청각피질은 동시에 발생하는 소리들간의 관계에 주목하기 때문에 화성체계에 집중을 한다. 따라서 순수한 진동수로 구성된 소리가 들릴 때는 좌뇌보다 나을 바 없지만 상음이 풍부한 음이 들려오면 실력을 발휘한다. 또한 언어에서 하모니가 고도로 발달된 모음 소리를 분석하는 일에 월등하다. 반면 좌반구의 청각피질은 연속적으로 들리는 소리들의 관계에 주목하기 때문에 리듬에 집중을 한다.
선천적인 음악능력이 청각피질의 크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간과할 수 없다. 바하는 대단히 음악적인 가계에서 태어났는데, 그 가계에서 바하 전후 200년 동안 무려 50명의 음악가르 배출한 것으로 보아 음악적 능력이 타고난다는 믿음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또한 1차 청각피질이 위치하는 우뇌반구의 측두엽의 물리적인 크기가 유전적으로 음악적 능력을 나타낸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며, 30명의 음악인의 뇌를 비음악인의 뇌와 비교하여 절대음을 가진 음악인들에게서 커다란 크기의 측두엽을 발견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음악은 어디에 있는가?
공기의 진동은 현상이지 실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안에는 감각적 질로서의 소리가 있다. 그렇다면 소리로서 현전하는 그 감각적 질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왔는가? 공기의 진동이 소리라는 감각적 질로 바뀐다는 사실은 바싹 마른 흙가루가 의식내에 존재하는 물에 젖어 반죽이 된 진흙 덩어리로 바귀는 것과 같은 은유될 수 있다. 말하자면 외부의 비유기적 상태의 진동이 유기성을 가진 시간적 지속체로 인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음이 의식에 현전하면서, 음과 음의 관계인 음정이 이루어진다. 음정 역시 마른 흙가루인 공기의 진동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 아니다. 반죽과 같은 접착성이 없이는 두 음의 관계인 음정이라는 관계를 만들 수가 없다.
음악은 우리 마음에 잠시 존재한 다음 없어진다. 그것은 기억에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존재는 기억에 의지한 존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현전하는 소리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우리가 소리이라고 말하는 바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의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진 정보가 우리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모습은 외부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에 존재하는 소리는 공기 진동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 진동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음악이 신비로운 것은 그것이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고 있는 소리는 우리의 마음 안에만 존재한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소리는 없다. 진동을 소리로 바꾸어 줄 귀가 없기 때문이다. 공기의 진동이 우리에게 감지되어 우리의 의식 안에 소리라는 대상으로 존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공기 진동이 소리로 전환되는 것은 비유해 말하자면 소리가 물질로 바뀌는 것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다. 공기의 진동으로부터 얻은 소리라는 존재의 모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의 소리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음악적인 음과는 다르다. 바람이 때로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거나 시냇물이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가 마치 선율처럼 들릴런지는 모르지만, 자연이 만드는 소리는 대부분 소음이다.
출전 :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자연의 소리가 비록 소음일지라도 우리는 소리 자체의 감각적 성질에 매료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바람 부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대해 우리는 다른 종류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들은 범주화되어 있으며 사물에 밀착되어 있음의 정도가 다르다. 그릇이 깨지는 소리에 비하면 바람소리는 인식해야 할 물체로부터 자유롭다. 때로 바람소리는 나무 가지를 인식하게 하지만 전혀 인식할 대상이 없는 공기 속을 지나가는 바람일 수도 있다.
사물과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소리가 음악적 소리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음향학적으로 보자면 새가 우는 소리가 훨씬 더 음악적이지만 바람 소리와 물소리에서 음악적 정취를 더 많이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소리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음악의 재료로 쓰이는 모든 소리는 자연의 사물로부터 자유로우며 개념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자유로움이 음악적 세계의 조건이다.
소음에서 악음으로
기타의 줄을 퉁기면 줄 전체는 기본진동수로 진동하지만, 그 진동을 위 아래로 이등분하면 각각은 독립적으로 기본진동수의 두 배로 진동하고, 삼등분하면 각각 기본 진동수의 세 배로 진동한다. 이 진동들이 합쳐져서 기타의 줄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높은 진동수의 소리를 상음이라고 하는데 상음이 규칙적인 패턴으로 정렬되면 악음이 된다. 악음은 단일 진동수를 가진 소리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
음악에 쓰이는 음은 음높이, 음길이, 음크기, 음색 의 속성을 지니고 잇다. 음높이는 일반적으로 진동수, 음길이는 지속되는 시간, 음크기는 진동의 폭에 따라 달라지며 음색은 파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진동의 속성집합과 음높이 구별된 음들의 집합사이에는 전단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진동과 우리가 주관적으로 듣고 있는 음높이 사이에는 1:1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르게 말하면, 의식에 지각된 바의 것은 외부 세계의 하나 이상의 요인에 기인함을 뜻한다. 이것은 음높이, 음크기, 음길이, 음색이 원래에는 서로 얽혀 있다가, 우리의 지각 기제가 진화하면서 분화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길이의 선분이지만 그 양끝에 모양에 따라 다르게 지각되는 것은 주변의 모양이 그 길이 지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변의 다양한 상황이 정확한 지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길이에 대한 시각적 감각의 특성이거나 감각이 정확한 대상 파악이 발전되어 오는 과정에서 파생된 현상인 것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착시현상
음색은 음고와 음량이 같고 길이가 비슷해 보이는 두 음을, 청자가 분간할 수 있도록 하는 청 감각의 성질이다. 이 정의는 음량과 음고의 일차원적 성질이 동일하게 유지될 때의 음색의 다차원적 역할을 보여준다. 음고와 크기 외의 소리의 다른 모든 성질은 음색에 기여한다. 배음의 스펙트럼, 파형, 음압, 퍼만트(formant)의 수와 주파수, 음색 인식에 큰 역할을 하는 경과성, 초기 잡음 등이 관련된다.
옥동자의 성대모사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놀랍다. 사람이 아닌 어떤 사물을 모사한다는 것은 음색을 흉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옥동자가 성대모사한 지하철 소리는 실제와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똑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지하철 소리의 부분적 특징을 증폭시킨 결과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소리의 캐리컬쳐인 것이다. |
음고
우리의 두뇌는 가청주파수대의 소리를 진동수에 따라 여러범위로 세분화하고 소리를 그 세분화된 위치에 대응시키면서 정체성을 확인한다. 우리는 가청주파수대의 소리를 대상으로 1천 300개 정도의 음고차이는 구별할 수 는 있지만 이것은 생존전략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는 없다. 그래서 두뇌는 주파수대를 크게 나누어 작은 수의 하위 범위, 즉 범주만을 추적함으로써 소리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따라서 어느정도의 차이는 무시되며 하위 범위의 어느 근처에 해당되면 그 범주에 속한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1천 300개의 음고 범주를 유지하며 이것을 G-플랫-플랫-샤프-플랫 익 다음 것은 F-샤프-플랫-샤프-샤프 라고 확인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색상샘플 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더 이상의 구분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나 생존에 더 유리한 것은 아니다. 두뇌의 이런 전략은 음원을 구별하는데에도 사용된다. 우리의 귀는 1천분의 1초 차이로 들이는 두 개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20분의 1초 정도의 시간차를 가지고 들리는 소리는 독립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처음에 들었던 소리의 음량을 증가시킬 뿐이다. 우리의 두뇌는 음고를 크게 범주화하고 소리의 반향음을 무시하도록 진화함으로서 두뇌가 이해해야 하는 세계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음악적 음의 아름다움 이면에는 간단한 산수가 존재한다. 중간 'C' 보다 두 옥타브 아래인 'A' 는 1초에 110사이클의 진동수를 가지고 있다. 진동수는 한 옥타브씩 올라갈 때마다 두 배로 모든 'A' 음의 진동수는 220, 440, 880 이다. 옥타브간은 1 : 2 의 진동수 비를 갖는 음높이 관계이고 우리는 모든 'A'를 비슷하다는 옥타브 등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옥타브 등가성의 개념은 세계의 모든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옥타브 등가성이 모든 음악 문화권에서 발견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선천적 기능일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조건 절차를 사용한 실험에서 동물에게도 옥타브 등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했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옥타브 배음의 높이를 일정하게 유지한 채, 기음의 음고만을 변경한 음들을, 기음을 변경하지 않은 음과 비교시킴으로서 이루어진 실험을 통해서 옥타브 등가성 역시 학습의 결과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론적으로 배음은 정확한 정수비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약간의 오차를 가지고 있다. 낮은 쪽의 배음은 정수비보다 낮게 나타나는 반면, 높은 쪽의 배음은 높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본음이 진동수 100 이라고 할 때 5 배음은 499, 6 배음이 599 로 낮게 나타나는 반면, 16 배음은 1610 으로 높게 나타난다. 또한 옥타브 스트렛치 현상이라고 있는데 이것은 진동수 비가 정확하게 2 : 1 이 되었을 때, 그 음정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옥타브의 범주적인 간격 보다 조금 좁게 느껴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것이 옥타브 음정으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진동비가 조금 더 커져야 하는데 이같은 스트렛칭 현상은 옥타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며 넓은 음정 일반에서 일어나며 세계의 여러 문화권의 음악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배음의 관계는 무의식적으로 학습하는 과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현상이 왜 옥타브 등치성이 문화적으로 학습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절대음고, 상대음고
색깔의 인지는 복잡한 문제이지만 신경학적으로는 망막에 있는 세 개의 뚜렷한 수용세포들이 제각기 주요 색을 한 가지씩 다룸으로써 시작된다. 파란색에 대한 수용세포가 근처의 빨간색과 녹색의 수용세포들보다 훨씬 더 큰 자극을 받으면 우리는 파란색을 보게되는 것이다. 음고의 인지는 달팽이관내에 진동수 범위에 따라 길게 늘어선 유모세포의 위치에 따라 구별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망막에 있는 파란색 감지기처럼 특정 음고에 대한 감지기는 달팽이관에 없다. 따라서 음고는 심리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상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음고를 정확히 인지한다. 말하자면 개는 E-플랫장조로 짖어대며 에어컨은 F-샤프 단조로 윙윙댄다고 느낀다. D조는 D의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G조는 G의 독특한 성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순백과 눈의 관계처럼 각 소리는 고유한 본질을 나타낸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A들은 특정한 'A 다움' 을, 모든 B는 특정한 'B 다움'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절대음감 소유자와 비소유자 사이의 생리적 차이를 주장하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절대음감 소유자와 비소유자가 달팽이관 울림 길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절대음감 소유한 음악가 뇌의 왼쪽 측두평면 지역이 오른쪽 반구의 해당지역보다 50~60% 더 크다는 보고도 있다. 가장 최근에는 600명이 넘는 피험자에 대해 테스트한 결과 절대음감이 유전적이라는 최근의 보고도 있다.
그와 반대로 절대음감이 학습에 의한 결과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지지되고 있다. 4살 ~ 7살사이에 음의 성격을 확인하는 학습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며, 음고가 중요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디아 사람들은 음정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절대음감을 소유한 것으로 조사된 대다수의 성인들은 결정적인 시기 동안에 음악훈련을 경험하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절대음감을 학습을 하는데에는 중요한 시기가 있다. (절대음감이 학습에 의하여 얻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어린 아이들은 독립된 소리 즉 개별음고에 집중을 하지만 음악을 더 경험하면서 형식, 구조, 그리고 음조 관련 등에 더 집중을 한다. 아동들이 부르는 노래를 분석해본 결과 음고의 정확도와 선율패턴의 정확도간에의 상관관계는 반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나이가 어린 그룹은 가장 정확한 음고관계에서 노래 불렀고, 가장 나이가 많은 그릅은 선율 패턴을 가장 정확하게 불렀다. 이 결과는 나이가 더 어린 아동은 음고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연령이 증가되거나 개념이 발달이 되면 선율 패턴의 특성에 더욱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절대음감을 소유한 것으로 보여지는 사람들은 사실 4 ~ 5개의 음고만을 정확하게 식별하며, 이 식별된 음을 통해서 다른 음고를 추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몇 개의 음고를 기준으로 하여 다른 음고를 상대적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모든 음고를 정확히 인지하는 진정한 절대음감 소유자는 극히 드물다. 절대음감 소유자들은 영구적인 판 또는 내적 기준음 세트를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그들의 기억속에 있는 음고의 표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음고판 때문에 그들이 들은 음의 표상을 바로 전에 주어진 기준음의 표상에 비교하지 않고도 음의 이름을 인출해낼 수 있다. 반면 상대음고 피험자들은 이동하는 개념적 판을 갖고 있어서 들어오는 음고 정보를 계속 음계 표상과 비교해야 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음계
그리스 음계의 조율은 분명히 피타고라스에 의해 발달되어진 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조율 체계는 지금은 피타고리안 음계로 불려니는데 그것은 상성부의 음과 하성부 음들의 각각의 주파수간에 간단한 비율, 3 : 2로 된 맥놀이가 없는 5도 순수 음정들의 모든 음들의 주파수로부터 왔다. 선율음악을 이조와 전조 또는 반음계 음을 사용하여 연주할 때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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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
주파수 |
256 |
288 |
324 |
341.3 |
384 |
432 |
486 |
512 | |||||||||
주파 수비 |
인접 |
|
9/8 |
9/8 |
256/243 |
9/8 |
9/8 |
9/8 |
256/243 |
| |||||||
도 |
- |
9/8 |
81/64 |
4/3 |
3/2 |
27/16 |
243/128 |
2/1 |
피타고라스 음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으로 15, 16세기에 순정율이 발전되었다. 순정율이란 명칭은 그것의 음정이 배음열의 음들간에 비율을 일치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진 것이다. 이것은 피타고리안 조율보다 음들간에 좀 더 간단한 비율을 사용하고 있다. 즉 5도는 3:2, 4도는 4:3 비, 장3도는 5:4 비, 단3도는 6:5 의 비율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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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
주파수 |
256 |
288 |
320 |
341.3 |
384 |
426.6 |
480 |
512 | |||||||||
주파 수비 |
인접 |
|
9/8 |
10/9 |
16/15 |
9/8 |
10/9 |
9/8 |
16/15 |
| |||||||
도 |
- |
9/8 |
5/4 |
4/3 |
3/2 |
5/3 |
15/8 |
2/1 |
평균율이란 명칭은 옥타브를 12개의 동등한 반음으로 분할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모든 음들이 동일한 간격을 유지하도록 인접된 음들과의 비율을 모두 1 : 1.05946 로 조율한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음보다 주파수를 5.9% 증가시킨 것이다. 이러한 조정은 음계의 음들간에 존재하던 분수비율을 없애 버렸으며, 그 결과로 생긴 음계를 쇠를 고르게 편것처럼 잘 조율됐다는 의미로 고르게 조율된(Equally Tempered)음계라고 부른다. 평균율은 조에 상관없이 다른 음정들의 관계에 일관성을 가지게 됨으로서 다른 음계가 가지는 이조, 전조가 가지는 제한점, 피타고라안에 내재된 반음계의 사용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해결해준다.
평균율 음계는 센트라고 불리는 100개의 동등한 부분으로 분할되는데 반음은 100센트이고 온음은 200센트 이다. 평균율로 된 5도는 700센트이며 이것은 7가지 반음을 포함한다. 옥타브는 12가지 반음으로 만들어진 반면 1200센트와 동일하다. 각 음계를 센트단위로 나타내면 아래표와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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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피타고리안 |
0 |
204 |
408 |
498 |
702 |
906 |
1110 |
1200 |
순정율 |
0 |
204 |
386 |
498 |
702 |
884 |
1088 |
1200 |
평균율 |
0 |
204 |
400 |
500 |
700 |
900 |
1100 |
1200 |
음계를 만드는 일은 C라고 부를 수 있는 진동수를 선택함으로서 시작된다. 그것을 배가하여 옥파브를 만들고 그 중간값을 선정하여 G를 얻는다. G를 배가하여 옥타브를 만들고 또 그 중간값을 선정하여 D를 얻는다. D는 다음 옥타브의 기초로 사용되며 12음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같은 방법으로 진행한다. 이 같은 진행을 반복하면 12음계가 아주 깔끔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레미' 는 첫 영역이고 '솔라시도'는 두 번째 영역이다. 첫 영역에서 둘째 영역으로 멜로디가 옯겨 가는 것은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나들이 가는 사건에 비교될 수 있다. 첫 영역의 네 음중 주인은 '도' 이고 둘째 영역의 주인은 '솔' 이다. 그래서 이 두 영역이 합쳐진 것이 당연히 여겨지게 되는 옥파브의 음계 체계에 들어서면 '도' 는 본부장격인 Tonic이 되고 '솔' 은 지부장 격인 Dormonant 가 된다. 인도의 음악에서는 첫 영역의 주인인 S 와 두 번째 영역의 주인인 Pa 는 항상 음높이가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 음들은 음높이가 조금씩 바꿀수 있다. 음높이를 바꿈으로써 다음 음계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10분간 연주되는 교향곡 1악장의 구성은 3분의 1이 조금 넘게 '도' 의 영역에 머물다가 곡이 끝나기 전까지 얼마간 '솔' 의 영역으로 옯겨간 후 다시 '도' 의 영역으로 되돌아 온다. 곡이 이러한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조성적이라고 한다. |
피타고라스 음계와 그로부터 파생된 음계의 음정들간의 관계에 간단한 수학이 존재함으로서 그 시스템은 정연하고 규칙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경계가 피타고라스 음계류를 더 질서 있는 음악의 방식으로 이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연적 음계라는 것은 없으며 만약에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면 모든 문화는 같은 음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옥타브 등가성을 가지고 있지만 특정한 음계를 선천적으로 더 선호한다는 증거는 없다. 음계란 음고 영역에 관하여 사회적으로 동의한 방식을 학습을 통하여 습득한 것일 뿐이다.
음악적 체계는 인간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다. 체계가 발달되어감에 따라 빈도율에 의하여 선의 질서를 충족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느낌과 지각에 의하여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음악이 사회 문화적인 현상이 아니라면 음계에 대한 필요성도 없을 것이며 각 사람은 자신만의 개인 음계 시스템을 발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평균율 온음계 체계는 사회적 가장 영향력 있고 권위가 있어 가장 많이 학습된 음계일 뿐이다.
o 인도의 라마음악은 반음사이를 3등분한 음악을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있다. o 드뷔시 미분음 음계를 시도하였고 스스로 악기까지 제작하였다. o 크세너키스는 연속음을 도입해서 정수비로 이루어진 음계를 파괴하였다. o 최근에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모든 주파수의 음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
협화음, 불협화음
주파수비 : 1 / 2 3 / 4 5 6 7 / 8 9 10 11 12 13 14 15 16 / ...
배 음 : 도 / 도 솔 / 도 미 솔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시 도 / ...
위에서 왼쪽에 나타나는 음정간의 관계는 서로 잘 어울리는 비슷한 성격을 갖는 음이다. 수학적으로 자연수 배열에서 빨리 나타나는 서로소 관계인 두 수의 주파수비를 갖는 두 음을 음악에서는 잘 어울리는 화음, 즉 협화음으로 해석하는 반면, 자연수 배열에서 늦게 나타나는 서로소 관계인 두 수의 주파수비를 갖는 두 음을 어울리지 않는 화음, 즉 불협화음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1 : 2 (도 : 도)는 한 옥타브 간격으로 두 음은 완벽한 울림을 보여서 마치 한 음인것처럼 들립니다. 앞서말한 옥타브 등가성이 이 예이다. 2 : 3 (도 : 솔)의 주파수비를 가진 음은 완벽하게 어울리는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3 : 4 (솔 : 도)의 주파수비를 가진 도 : 솔관계를 뒤집은 것에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어울리는 음정이다. 이 세 가지 주파수 비율 1 : 2, 2 : 3, 3 : 4를 각각 8도 음정, 5도 음정, 4도 음정이라고 하며 음악적 용어로 '완전(Perfect)음정' 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 나타나는 주파수의 비는 4 : 5(도 : 미) 장3도 음정이며 그 뒤로 5 : 6(미 : 솔), 6 : 7(솔 : 시♭) 단3도 음정이 나온다. 이 음정들은 완전음정 보다는 불완전한 울림으로 들리기 때문에 중세의 교회음악에서는 이 3도 음정조차도 귀에 거슬린다하여 음악에서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듯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경계가 수적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명확히 보이므로 선천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완전음정이냐 아니냐를 정한 기준은 어디까지나 시대적이고 주관적인 인간의 판단이 들어갔을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다. 모든 음은 동등한 관계에 있고 각기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이러한 사상을 반영하여 쉰베르크는 12음렬기법을 도입하여 협화으므 불협화음 개념 자체를 해방시켰다.
음악의 특성
음악은 비물질성, 이상성, 타자성, 퇴행성이라는 네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비 물질성은 음악을 만드는 소리는 외부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안의 현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의식 안에만 있는 소리는 따라서 현실의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소리는 현실의 물질이 지니는 한계인 중력, 부피, 충돌 등의 현실로 부터 자유롭다. 소리는 어떤 물체의 진동 상태이고 그 진동이 공기를 통해 우리 귀에 전달됨으로서 비로소 존재한다. 음악의 비 물질성은 그 자체로서 힘이 이었다. 소리 뒤에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의 세계는 음악가들에 의해 지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성은 목소리의 특권이다. 청각은 시각처럼 눈을 감아 감각을 차단하거나 가까이 가서 대상의 뒷면을 보지 못하지만 그 대신 목소리를 사용해서 자신이 지각할 대상을 만들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말함이 자아의 실현이듯 음악적 대상은 자아의 이상적 실현이다. 연주뿐 아니라 감상 역시 자아의 실현이다. 음악을 듣는 것이 자아의 실현인 이유는 음악이 청취가 수동적 행동이 아니라 능동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음악을 들었을 때에 즉 소리로부터 음악을 만들었을 때에 우리는 음악을 듣고 무엇인가 성취했다고 만족감을 갖게 된다.
타자성은 소리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리잡는 방법이다. 우리가 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것은 시각적 대상을 볼 때처럼 나와 분리된 객체로 간주할 수가 없다. 우리는 들려오는 소리를 거부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소리를 거부할 수 없다면 타자는 마음속에 언어가 성립되는 순간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타자는 들려오는 말을 거부할 수 없음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적 대상인 경우 자아와 대상이 유아기에 분리가 되지만 청각정 대상인 경우 성인이 된 이후에도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우리로부터 완전해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소리가 나의 의지를 개의치 않고 우리 마음속에 멋대로 들어와 있음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로서의 음악이 바로 그건 경우에 해당된다.
퇴행성은 언어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음악적 심성이 언어적 감성과 결별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언어 의미 회피가 바로 음악의 퇴행성이다. 음악적 소양의 발생은 언어 발생의 회피 또는 긍정적 퇴행에서 시작된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그것을 모방해 말을 배울 때 아이는 정확한 발음이 실패할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어투와 목소리의 굴곡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말하자면, 언어를 배우기 전에 언어의 어투를 이용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언어로부터 한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이 진전의 유보 또는 퇴행이 음악적 감성의 시작인 것이다.
( 원문 : 소리와 음악의 해체 )
음악의 3요소
깜깜한 방 안에 전구 두 개의 전구를 나란히 놓고 하나씩 교대로 켰다 끄기를 반복해보자. 이 과정을 천천히 반복하면 하나의 전구가 앞 뒤로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빠르게 반복하면 이번에는 두 개의 고정된 전구가 깜박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 처럼보이는 것을 파이현상(Phi Phenomenon)이라고 한다. 빠르게 반복하는 불빛을 보면서 두뇌는 하나의 전구가 저렇게 빨리 오갈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가 아닌 두 개의전구로 보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음악을 인식하는 경우에도 일어나는데 도약이 느리게 일어날 때는 한 소리로 들음으로서 하나의 선율로 인식하며 빠르게 일어나면 다른 소리로 인식한다.
멜로디는 높이가 다른 음의 수평적 결합이고, 하모니는 둘 이상의 음의 수직적 결합이다. 수평적 결합이 음악적인 것이 되려면 시간적인 질서, 즉 리듬을 포함하여야 한다. 이 멜로디, 하모니, 리듬을 음악의 3요소라고 한다. 두뇌의 좌반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들간의 관련 즉, 언어의 문법적 변형, 분석적 사고, 신체의 연속적이고 복합적인 움직임, 리듬 유형의 인식과 생성 등을 주로 담당하고 두뇌의 우반구는 공간들간의 관련성, 신체가 현재 놓여져 있는 상태, 음악의 코드를 포함하여 동시에 일어나는 소리들간의 관련성 등에 대한 인식을 주로 담당한다. 이러한 인식은 동시에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을 파악하고 종합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좌반구는 멜로디와 리듬에 좀 더 많은 집중을 하며, 우반구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간의 관련성을 엮어내는 역할, 즉 하모니에 더 많은 집중을 한다.
멜로디 (선율)
멜로디는 우리 마음 속에 근원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것임은 틀림없지만 우리가 어떻게 멜로디를 이해하며 왜 어떤 멜로디는 다른 것들보다 더 아름답게 들리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음악이 왜 우리를 감동시키는가 하는 큰 질문을 답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멜로디 지각은 시각지각에 대한 형태심리학에서 기인한 법칙인 근접성의 원리(The Laws Of Proximity), 유사성 (Similarity), 공통방향(Common Direction) 을 따른다. 근접성의 원리에 따라 멜로디는 시간과 공간상 근접해 있는 음들이 그렇지 않은 음들보다 선율의 단위로서 쉽게 지각되어 지며, 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비슷한 음들은 또한 하나의 단위로서 지각되는 경향을 갖는다. 또한 선율은 특정한 음이 빈번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반복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무작위로 선택한 멜로디를 보면 도, 미, 솔 음은 모든 음들의 45퍼센트를 차지하고, 시, 레가 첨부되었을 때는 69퍼센트로 상승하였다. 분명히 대부분의 서양음악의 선율은 아주 빈번하게 특정한 음으로 돌아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서양음악의 멜로디는 음들간에 차이가 적은 근접한 음정, 특정음의 빈번한 사용, 종결감을 형성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쓰이는 몇 가지 유형을 사용하고 있다.
멜로디의 좋고 나쁨은 구조적, 심리적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가 구조적 측면만을 평가한다면 근접성, 반복, 종결감과 같은 특색들이 평가적 준거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반면에 심리적 측면에서는 선율이 얼마만큼 패턴으로 지각되어지는지 또는 주어진 선율이 익숙한 스타일 내에서 얼마만큼 지각되어지는지가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선율이나 선율유형에 대한 익숙함은 인간이 선율을 지각하는 데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인간은 그의 문화에 속한 음악과 상호작용 함으로써 그 문화의 선율적 관습을 배우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선율에 대한 경험은 특정한 기대감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음악적 지식은 언어로 표현되어질 수 있지만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음악적 예상감을 안내하는 인간의 인식 구조가 작용하는 내적인 것이다. 비슷한 스타일로 된 새로운 음의 연결을 접할 게 될 때에 인간은 이러한 음의 연결이 그가 선율이라고 학습한 기대감과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정보이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하모니 (화성)
하모니는 중세의 교회의 공간이 커짐에 따라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발생하였다. 하모니는 특수한 지역에서만 나타난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C-E-G 로 이루어진 C장조의 3화음은 현대인의 귀에 특별히 조화롭게 들려 C장조 코드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왜 3화음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하모니의 중심에 있을까?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 는 선율이 매우 아름다운 곡이다. 최근에 이것을 힙합버젼으로 래메이크 한 곡이 거북이의 '사계' 이다. 이곡은 원곡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리면서 하모니를 더해서 주제 선율의 깊이를 더해준다. 비트가 강해지고 빠른 랩이 가미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멜로디와 하모니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가 된다. 리메이크 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롤 보여주는 훌륭한 곡이다. |
소리는 달팽이관의 기저막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유모세포들을 자극한다. 기저막은 특정한 진동수와 관련된 부분에서 가장 많이 변환되고 수용세포들 역시 가장 활발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양쪽에 있는 수용세포들도 같이 반응한다. 이러한 활성화의 범위를 소리에 대한 임계진동수대(Critical Band)라고 한다. 만약 동시에 들려오는 두 개의 소리의 임계진동수가 겹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불협화음으로 듣는다. 중간 C에서 C-샤프까지의 반음정은 아주 불협화하지만 C에서 D까지의 음정은 다소 덜하다. 불협화를 피하려면 좀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협화음, 불협화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문화적 현상이라는 주장이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개인은 그가 속한 문화권의 음악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선율적 예상감이 형성되어지는 것처럼 화성적 예상감도 발달되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감상자는 익숙하지 않은 화성을 들으면 화성적 예상감이 빗나가면서 그것이 뭔가 이상하다거나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불협화음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화성의 수용도 역시 선율에 있어 우수성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문제이며, 개인이 경험하고 개발되어져 온 예상감과 관련이 있다.
리 듬
세계의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음악들에 가장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리듬이다. 선율이나 화성이 없는 음악은 있을 수 있지만 리듬이 없는 음악은 존재할 수 없다. 리듬은 에너지의 원천이며 그 일차적인 기능은 질서를 가져오는 데 있다. 리듬은 음악이 계속 진행되도록 하며 진행과 변화의 과정에서 음악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덜 리듬적인 음악은 덜 역동적이며 역동적인 음악은 리듬적 진행을 가지고 있다. 리듬은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리듬이 없으면 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 처럼 정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그것은 매듭이 없는 실타레일 뿐이며, BLANK가 없는 디지털 신호가 해독불가능 한 것처럼 우리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너무나 많은 정보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음악이 리듬을 타면 연속적인 정보를 그룹화시킴으로서 일정단위로 지각을 하는 것이다. |
복잡한 리듬은 하모니상의 불협화음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리듬에도 예상감이 존재하며 그 예상감이 빗나갈 때 불협화음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예상감은 하모니에서처럼 문화적으로 습득한 것이라기 보다는 생리적 현상으로 보인다. 리듬에서 당김음이란 악센트가 원위치인 강박이 아니라 약박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는 반복적인 당김음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재미있게 들리는 이유는 두뇌는 계속해서 강박에 악센트가 있어야 한다고 예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습득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Taco 의 'Puttin' On The Ritz' )
서양음악은 하모니의 불협화음을 가장 철저하게 추구한 반면, 몇몇 비서구 문화들은 리듬의 불협화음을 추구해 왔다. 복잡한 박자는 인지상의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는 시간이 필요하므로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인지상의 단기기억을 심하게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두뇌는 자연스럽게 하모리를 더 편하게 느낄 것이다. (리듬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 심장박동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과 뇌의 자율근육활동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2편에서 다시 이야기 하겠다.)
Led Zeppelin 에 드러머 존 본헴이 연주한 Bonzo's Montreux 와 Rush 의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러쉬의 YYZ 에 나오는 드럼 연주부분은 드럼만으로도 리듬, 화성,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는 적절한 예시이다. Led Zeppelin 의 드럼연주는 몇 번 들어보면 이 폴리리듬에 어느정도 익숙해져서 진행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다. 말하자면 적당량의 정보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Rush 의 드럼연주는 리듬의 패턴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정보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소 지루하다. (그저 내 생각이다.) |
미학이론
미학이론의 기본적인 철학적 입장은 '절대주의' 와 '관련주의' 로 양분될 수 있다. 절대주의자들에게 있어 음악의 의미는 소리 자체에 내재된 어떤 것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관련주의자들에게 있어 음악의 의미는 음악적 이상, 감정, 이야기, 심지어 정신적인 상태까지를 포함한 소리가 표현하고 있는 어떤 것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절대주의는 다시 '절대 형식주의' (Absolute Formalism)와 '절대 표현주의' (Absolute Expressionism)로 구분된다.
< 절대 형식주의 >
절대형식주의자에 의하면 예술 작품의 의미는 그 작품의 특질속에 있다. 음악의 경우에는 음 자체에 미적 특질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 미적 경험하려면 음 외적인 세계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음악에서의 음은 단지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비음악적인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감상하면서 느끼는 정서는 실생활에서 느끼는 정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음악을 경험함으로서 우리는 실생활의 흐름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와 미적 고양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절대 형식주의자에게 있어 예술 경험은 형식 그 자체를 인식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인식과 감상은 지적행위이지만 절대 형식주의자들은 이를 미적정서 (Aesthetic Emotion)라고 부른다. 이 정서는 매우 독특한 것으로서 다른 정서적 경험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의 명확한 감정이나 정서는 음악으로는 구현할 수 없다. 현실세계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형식적 관계를 이해하는 이지애의 작용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그 음악은 뛰어난 것이고 그 경험도 그만큼 미적인 것이다.
물론 절대 형식주의자도 음악 작품이 그 작품 외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이 그 음악 작품의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 뿐이다. 회화예술을 비유하여 예를 들면 화가가 어떻게 그렸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무엇을 그렸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램브란트가 해부학을 가르치는 의사를 그렸을 때나 종교적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그렸을 때나 그는 똑같은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 오른쪽 그림이 뭘 그린 것인지 아시는 분은 게시판에.. )
극단적 형식주의자의 한 사람인 '한스릭' 은 음악의 의미는 전적으로 음악적 구조속에 내재되어 이쓴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음악이란 악보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떠한 연주도 악보에 포함된 구조의 불완전한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한(true)' 음악은 악보상으로만 존재할 뿐 완전하게 실현화될 수 없으며 또는 형이상학적인 영적인 상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 낸 영속성이 없는 일시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단지 그러한 것에 근사하게 모방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악보는 음악을 연주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지시(Indication) 체계인가 아니면 이상적인 소리를 대신하는 표현(Expression) 체계인가? 악보를 지시체계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인 조건, 즉 악기, 연주자의 현실의 세계 안에서 그 값을 갖는 기호이다. 악보가 표현체계라고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바의 이상적인 소리를 대신하는 기호가 된다. 악보가 지시 체계라고 한다면 악보를 떠난 이상적인 음악적 존재에 대한 논의는 허구적인 것이 되지만, 악보가 표현체계라고 한다면 그 표현적 기호가 가리키고 있는 이상적인 음악의 존재를 논의할 수 있다. 절대형식주의자에 있어서 악보는 '표현체계' 인 것이다. 위의 사진은 Bach의 2성 인벤션 No. 1 C장조 (BWV772 ) 자필악보이다. 그가 이 악보에 무슨 악기로 연주하라는 표시를 하지 않은 이유는 악보가 표현체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악보 출전 : Great Bach ) |
그렇다면 형식을 인식하고 감상하는 것이 왜 미적정서를 불러일으키는가?
우리는 깊은 산중에서의 낙조, 겨울바다의 거센 파도, 봄의 징조, 나무와 꽃의 싹틈, 여름의 푸르름 속에서 생명의 리듬을 본다. 생명은 움직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리드미컬한 운동속에서 어떤 의미를 보는 것이다. 자연속에서 이런 의미를 보는 것은 감각적인 기쁨보다 훨씬 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사물의 존재방식을 음악의 미적 특질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음악속의 멜로디, 하모니, 리듬, 음색, 텍스쳐, 형식이 만들어내는 구조는 사물의 존재방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의 경험은 미적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관련주의 >
관련주의자에게 의하면 예술 작품의 의미는 그 작품속에는 없다. 그것은 그 작품이 나타내고 있는 음악 외적인 정서, 사상, 사건속에 있는 것이다. 음악이 나타내고 있는 미적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면 그 음악이 나타내고 있는 세계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의 역할은 그 음악외적인 세계를 이야기하고, 상기시키며, 이해시켜줌으로서 간접경험을 시키는 것이다. 음악이 음악외적인 세계를 얼마나 잘 경험시켜주는냐가 그 음악의 얼마나 감동적이냐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음악을 감상하면서 느끼는 정서는 실생활에서 느끼는 정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가 어떤 사람의 등을 바이올린 체로 긁어줌으로서 감상자로 하여금 어떤 정서를 경험시켜 줄 수 있다면 음악은 불필요한 것이다.
음악속에서 어떤 전달 내용을 찾아내는 행위, 음악을 이야기로 이해하려는 행위, 음악을 그림으로 이해하려는 행위, 음악의 성격을 표현하는 적정한 정서어를 찾아내려는 행위, 주제의 유사에 따라 음악 작품을 다른 예술 형식의 작품과 비교하는 행위, 성악곡 속의 가사의 의미를 연구하는 행위, 이런 행위들은 음악에 대한 관련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 그림들은 클릭하면 그림에 해당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관련주의자인 '쿡' 은 음악이 가지고 있는 지시 대상을 뚜렷이 하는 작업의 첫걸음으로 장음계, 단음계, 반음계의 음과 멜로디를 분석하여 각각의 정서적 지시 대상을 찾아내려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번역작업이고 암호해독작업이다. 단2도 : 원기없는 고뇌, 결말의 문맥 단3도 : 금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비극 장3도 : 기쁨 증4도 : 악마적인 적의가 있는 강한 힘 장7도 : 결말의 문맥 속의 강렬한 동경, 열망 상행1-(2)-3-(4)-5(장음계) : 기쁨의 외향적, 활동적 정서 상행1-(2)-3-(4)-5(단음계) : 고통의 감정-슬픔, 불만의 주장, 불운에 대한 항의 하행5-(4)-3-(2)-1(단음계) : 고통에 찬 정서, 깊은 슬픔에 대한 인종 또는 굴복, 낙담과 의기 소침, 수동적인 고통, 죽음과 결부된 절망 |
< 절대 표현주의 >
표현주의자들은 관련주의와 형식주의가 근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 어느쪽도 어느 정도의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절대 표현주의자들은 지적이든 정서적이든 음악 작품을 비 음악적인 실생활의 용어로 번역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관련주의자의 주장은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음악 작품의 경험이 일상에서의 경험과 무관한 순수한 미적 경험이라는 절대 형식주의자의 주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음악이 미적 특질을 내재하고 있으면서도 일상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표현주의자들은 절대형식주의자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의미는 그 작품의 특질속에 있다는 것은 동의한다. 그리고 그 특질은 인간의 모든 경험속에 본래 갖춰져 있는 특질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람이 작품의 미적인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특질을 공유하면 인간의 모든 경험의 구성 요소인 여러 특질까지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특질은 가장 깊은 레벨에서 실생활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감상자는 비 음악적인 관련물을 음악의 외부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지닌 미적 특질 속에 보다 깊이 들어감으로서 공유하는 것이다.
음악은
주관적 현실, 경험의 특질, 정서적 생활, 감정의 유형, 감정 생활, 직관, 존재의 깊이,
인간의 개성, 감동의 영역, 의식의 유형, 경험의 의의
↓
을 표현한, 과 유사한, 과 동일 구조인, 에 상당한, 과 같은 형을 지닌, 과 닮은,
을 투사해보인, 을 경험시키는, 을 이해시키는, 을 보여주는, 을 의식시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음악이 특정 정서를 표현하고 있을지라도 그 표현성이 미적일 경우에만 음악은 미적인 것이 된다. 소금이 낱알로서의 특징을 잃으면서도 스프에 특정한 풍미를 곁들여 스프의 맛을 두드러지게 하듯이 음악적 음도 상징으로서의 특징을 잃으면서도 음악 전체에 미적 표현성을 나타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이 언어수준에 머무는 한 그것은 미적이 아닌 것이다. 연주회장에서의 연주가의 해석이 자기 표현에 가까워져 있는 경우는 그 연주는 훌륭한 연주라고 불 수 없다. 비극을 쓰고 있는 예술가가 격동 속에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울부짓고 있는 갓난 아기쪽이 어떤 음악가보다 더 감정을 토로하고 있지만 우리는 갓난아기의 울부짖음을 들으러 음악회장에 가지는 않는다. 음악이 정서의 표현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것은 미적인 것은 아니다.
음악은 왜 감동적인가?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떤 정서적 상태에 놓여 있다. 공기가 사람 몸의 일부인 것처럼 정서도 사람 생활의 일부이다. 게다가 우리들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어떤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느낌으로써 알고 있는 것이다. 정서는 육체적, 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표면을 덮고 있는 부수적인 것은 아니다. 정서는 우리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음악은 항상 어떤 특정 정서를 유발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음악이 어떻게 그리고 왜 정서를 유발하는지에 대해서는 공통된 견해가 없다. 정서론자(Emotivists)들은 청자가 어떤 음악을 듣고 슬프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음악이 듣는 사람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슬픈 음악이란 청자에게 슬픔을 불러 일으키는 음악인 것이다. 인지론자(Cognitivists) 역시 정서론자처럼 음악이 정서적으로 감동시킨다고는 생각하지만 슬픈 음악이 청자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슬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슬픔이란 청자가 음악 속에서 인지하는 음악의 표현적 속성일 뿐이다. 정서론자와 인지론자의 대화를 들어보자.
< 정서론자 vs 인지론자 >
인지론자 : 당신네 정서론자들은 청자가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는 이유는 음악이 그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이겠다. 내가 9시 뉴스에서 새만금 간척사업의 수주를 한 건설업체 사장이 사업계획이 무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환경전문가를 매수해서 간척사업이 환경파괴에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연구결과를 발표하게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고 가정하자. 그 때 나는 그 사장에게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무엇이 당신을 화나게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뉴스를 이야기 하면서 건설업체 사장이 나를 화나게 했다고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음악 작품을 듣고 화가났다면? 나는 왜 화가 난 것일까? 누구한테 화가 난 것일까? 그 음악에게? 그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에게? 아니면 인공적으로 조합된 소리들의 구조물에게? 도대체 그 사장에 해당되는 것이 음악 어디에 있는가?
정서론자 : 그러면 당신은 내가 그 건설업체 사장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이 단지 그가 뇌물로 환경전문가를 매수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좀 더 심층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도식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러브록의 가이아 란 책을 읽고 갯뻘의 파괴가 인류의 생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암시받았기 때문에 그 분노를 더 강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니면 TV 화면에 나온 건설업체 사장의 수염을 통해서 어린시절 당신을 학대했던 선생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더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지론자 : 물론 나도 내가 그 사장에게 분노를 느끼는 이유가 그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의 분노에 대한 설명은 더 확대되고 더 심화될 수 있으며 심지어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말의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내가 화난 것에 대한 설명이 확대, 심화, 대체되기 이전에 나의 분노의 대상이 확실히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건설업체 사장의 매수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출발점부터 심리학이 필요하다. 어째서 그런가? 왜 처음부터 그렇게 어려운 설명이 필요한가? 바로 그것이 내가 당신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정서론자 : 물론 어떤 특정 정서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나도 당신네와 의견을 같이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상이 있을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대상 없는 정서가 생기지만 그것의 표현적인 힘이 청자로 하여금 적절한 대상을 찾도록 유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막연한 불안감에 새벽잠을 깨는일이 없는가?
인지론자 : 좋다. 내가 어떤 음악을 듣고 분노를 느낀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내가 정말로 분노한 상태에 있다면 나는 음악을 즐길 수 있를까? 말하자면 음악에 대한 집중력을 잃을 것이 아닌가? 분노한 사람이 어떻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가?
정서론자 : 당신의 분노 상태, 즉 어떤 정서적 상태에 있음 자체가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당신이 정서적 상태에 있지 않으면서 음악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들은 감정이란 청자가 음악속에서 인지하는 음악의 표현적 속성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 이론에서 건설업체 사장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지론자 : 조스깽의 '아베마리아' 를 들어보라. 이 음악을 듣고 처음 느끼는 것은 아마 소리의 밀려옴과 물러남 속에서 펼쳐지는 순수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의 순수함에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음악적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조스캥이 자유롭게 선율들을 결합하여 각 선율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동시에 전체적으로도 듣기 좋은 음조를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나는 음의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조스캥이 사용한 대위법의 솜씨에도 감동 받는다. 정서적 흥분의 대상은 이제 소리의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완벽한 다성 음악이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조스캥의 '아베마리아' 가 어떻게 나를 정서적으로 감동시켰는지 또 내가 그 음악에 의해 감동받은 것으로 기술한 정서적인 반응을 어떻게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건설업체 사장식의 설명이다. 그것은 내가 현실세계에서 느끼는 분노를 설명하는 평범한 설명인 것이다.
정서론자 : 하지만 나는 대위법이 뭔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음악용어인줄은 알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든다. 하지만 나도 아베마리아의 선율들의 결합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청자가 조스깽의 대위법 솜씨에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데 대위법이 뭔지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감동을 받는가?
인지론자 : 물론 당신은 대위법에 대해서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모른다고 그것을 즐기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음악 이론적인 기술 아래 그것을 즐기지 못할 뿐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 나름대로의 적절한 수준을 가지고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 조스깽과 같은 수준의 전문지식을 알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9급 바둑 실력자도 이창호의 묘수에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을 즐기는데 있어서 전문가와 당신의 차이는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양적인 문제이다. 테카르트가 인간의 이등변삼각형과 같은 것에 대해서 본유관념(innate ideas)을 갖고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모든 이들이 이러한 관념을 즉각적으로 의식에 떠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은 적당한 조건만 주어지면 실현될 수 있도록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을 기술하는 능력도 적당한 조건이 주어지면 실현될 수 있는 데카르트의 본유 관념과 비슷한 무언가로 당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정서론자 : 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을 들으면 과거에 본 영화장면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 남자가 혼자 공연장에 남아 이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이 떠올리며 어떤 격정을 느낀다. 당신 말에 의하면 나의 격정은 라흐마니노프가 사용한 음악적 기법 때문인데 나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작곡가가 그 음악에 사용한 어떤 음악적 기술을 분석할 만한 여유가 없다. 음악을 계속 흘러간다. 나는 음악이 흘러가는 도중에 그의 작곡기법에 대해서 즐길 수는 없다. 음악을 즐긴다는 것은 당신이 말하듯 의식적인 과정이 될 수 없다.
인지론자 :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지각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음악전문가가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들으면서 그 음악에 대해 의식적으로 사고한다면 자신이 음악에 대해 사고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알고 또한 그 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사고와 대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같은 일반적인 청자들이 음악을 들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조차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이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사고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도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대해서 사고하는 동시에 자신이 사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정서론자 :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그렇다고 치자. 아주 낮익은 선율 Green Sleeves의 기타연주를 들어보라.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곡처럼 분석하고 생각할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전문가는 이 곡을 선율이 D로 시작할 때 B#로 인해 도리안 모드를 예상하게 되는 것을 즐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저 그 음악의 고풍스러움과 소박함이 마음에 들고 기타의 부드러움을 즐길 뿐이다.
인지론자 : 음악을 들으면서 인식하는 지적 즐거움은 복잡한 음악기법에 좀 더 많겠지만 그 보다 덜 지성적인(?) 단순한 형식의 음악에도 음악적 즐거움의 설명하기에 충분한 재료가 있다. 단순한 선율도 하나의 음악의 구조일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선율을 즐기고 있다면 그는 그 가락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언가를 지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소가 없다면 즐거움도 없다.
정서론자 : 그렇다면 나도 당신과 똑같은 질문을 해보겠다. 그 음악적 구조가 건설업체 사장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인지하는 것은 왜 즐거운가?
인지론자 : 컬링게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처음에 그 게임을 관전했을 때 무척이나 황당함을 느꼈다. 빗자루로 얼음바닥을 미친 듯이 쓸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만족감을 얻고 있는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그 경기의 규칙을 알고 얼음바닥을 얼마만큼의 강도로 쓸어줘야 하는지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게임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들이 하는 일을 이해했다. 이것이 바닥을 쓸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지에 대한 설명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을 인지함으로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왜 즐거워하는지. 음악을 지각함으로서 왜 즐거운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흥미롭고도 심오한 질문이다. 나는 거기에 대해 나는 침묵할 것이다. 테니스 라켓의 부드러운 부분으로 친 공이 네트위로 살짝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 일임을 틀림없지만 왜? 라고 물으면 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서론자 : 도대체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컬링선수가 바닥을 쓸면서 느끼는 만족감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건설업체 사장이 왜 나를 화나게 했는지 모른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인지론자 : 당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당신들은 음악이 청자에게 비통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비통한 것이고 바로 그래서 감동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매우 비통하지만 감동적이지 않은 음악이 있지 않은가? 텔레만의 음악은 실로 비통한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그는 음악을 비통하게 만드는 기술을 아는 작곡가인 것 같다. 비통함을 느끼는 적절한 음악적 재료를 고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감동적이지는 않다. 감동을 주려면 단지 비통한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비통한 음악을 작곡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작곡자 혹은 청자가 느낀 정서와 음악 자극의 다양한 측면에 의해 지시된 정서적 상태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서론자 : 비통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감동적이지 않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 정서론자들의 치명적인 반론으로 인정하겠다. 하지만 감동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당신의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당신들도 우리를 납득시켜야할 것이 하나 있다. 당신들은 음악이 청자가 인지하는 정서적 성질을 소유한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음악이 어떻게 정서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음악적 소리들이 행복하거나 화날 수 있을까?
인지론자 : 내가 당신에게 명확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알지는 못한다. 아마 우리의 대화가 끝나고 나올 내적 생명력, 플라톤의 대이론, 음악과 열반, 피보나치 수열과 황금비등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을 것같다. 미안하지만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이다.
정서론자 : 당신의 이론을 뒷받침한다는 플라톤의 대이론, 황금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우리 정서론자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사실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너무 어렵게 가는 것이 나도 조금은 버겁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자. 나는 정보이론, 정신분석이론, 분류욕구 등을 우리의 이론을지지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싶다. 이제 그만하고 필자의 이야기나 들어보자.
정보이론
두뇌는 감각들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효율적이다. 정보의 효율적 처리를 위하여 두뇌는 하나의 전략을 취한다. 그것은 정보를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패턴을 찾아 능동적으로 분류해나가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에 인간은 어떤 특정한 인식 없이 끊임없이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새로운 패턴을 이전에 학습한 패턴의 기억과 비교해 간다. 아무리 생소한 음악을 듣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성향은 좌절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은 장기를 둘 때도 잘 나타나는데 장기를 두는 사람은 경기의 흐름을 자신의 경험에 따라 예측하고 그에 따라 미리 대응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전략이란 음악의 흐름을 자신이 알고 있는 형식에 비추어 예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하면서 얻는 느낌은 감각에 대한 예측과 실제 감각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음악심리학자 '메이어'는 음악을 듣고 있는 청자는 앞으로 나올 선율과 화성에 대한 얼마나 예상을 할 수 있는가는 음악의 구조가 지각적 조직화의 법칙에 얼마만큼 일치하고 있는가의 정도와 청자가 그 음악형식을 학습한 정도 즉, 문화적 잉여성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나의 음악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중복되는 선율과 화성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 음악은 쉽게 예측이 가능하고 따라서 지루하게 느낄 것이다. 그 반면 선율과 화성의 흐름이 자신의 예상한 것과 너무 다르면 두뇌는 예측을 포기하게 되고 그것 또한 지루하게 느낄 것이다. 정보가 너무 많아 예측이 너무 쉽게 되는 대중음악도, 정보가 너무 없어 예측이 전혀불가능한 전위음악도 지루한 것이 되는 것이다.
청자는 자신이 예상한 바대로 음악이 진행이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예상한 기대가 어긋났을 때에도 감동을 받는다. 오히려 심오한 수준의 감동은 기대가 어긋나면서 생긴다. 청자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는 장조음악은 행복한, 우아한, 쾌활한 느낌을 주고, 예상한 기대와 다르게 진행되는 단조음악은 슬픈, 어렴풋한, 감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주 감동적인 음악은 청자의 예상을 쉽게 만족시키지 않는다.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곡이 전해줄 감동의 크기를 슬며시 보여기도 하고 때로는 음악의 전체적 흐름을 일시에 보여주는 듯하다가, 전혀 다른 종류의 종지법을 이용하여 다시 빠져나온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에 화음, 리듬, 음색, 강약법 등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기대감을 만족시킨다. 이런 큰 감동을 전달하는 비결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곡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곡을 쓰는 것이다.
서양 음악을 경험해보지 못한 인도네시아 사람이 장조모우드와 단조모우드를 듣고 반대의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선율과 화성에 대해 서양 사람들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그 사람이 들었던 단조 음악은 그의 예상과 딱 맞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꼈고, 장조음악은 그의 예상을 모두 밧나갔기 때문에 슬프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문화적으로 학습된 내용의 차이일 뿐이다.
< 증거 1 : 갈등이론 >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John Dewey)' 는 음악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를 '갈등이론' 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갈등이론에 따르면 정서나 감정이란 반응하고자 하는 어떠한 성향이 방해되어지거나 억제되어질 때 야기된다는 것이다. 음악은 어떤 예상이 일어나도록 하고 이를 계속 만족시킨다. 그런 기대를 계속 불러일으키고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다. 그러다가 흐름을 갑자기 변화시켜 사람들의 예상을 깨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감동적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사실 정보이론은 갈등이론을 약간 변형한 것 뿐이다.)
갈등이론을 뒷받침하는 단서로서 웃음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리아이의 가장 중요한 신호는 울음, 미소, 웃음이다. 울음을 태아날 때부터 시작하며 많은 종류의 동물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신호이다. 인간은 생후 약 5주일이 되면 미소를 짓고, 그때로부터 약 4~5개월 후부터는 웃을 수 잇다. 울음은 다른 많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거나 불안을 느낄 때 발생하지만 미소와 웃음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신호이다. 웃음은 아이가 자기 어머니를 인지하게 되는 무렵부터 나타난다. 그 이전의 유아는 웅얼거리거나, 목구멍을 캭캭하고 울리거나 또는 울기는 해도 웃지는 않는다. 만족스러울 때는 목구멍을 울리며 불만스러울 때는 운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이러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특수한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어머니가 그를 놀라게 하는 일 즉 장난으로 공중에 던져올리기라도 하면 유아는 이중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 위험한 것 같지만 엄마이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모순된 감정이 부분적으로 놀란 데 따른 울음, 그리고 부분적으로 만족한 데 따른 목구멍 울음이라는 반응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가 이른 바 웃음인 것이다. 그래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웃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바이블 '중용' 에서는 인간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의 현상을 희노애락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방식에 의하면 '희' 와 '락' 은 곧 웃음에 속하며 '노' 와 '애' 는 울음에 속한다. 웃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동양학자 김용옥의 주장에 따라 인간의 모든 진리는 인간의 몸을 떠나지 않는다는 기철학적 입장에서 '웃음이란 인간의 어떤 상태에서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며 그것은 모순된 기의 양면성의 동시적 발견이라고 주장한다. 웃음은 자연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성 즉 인간의 문화화의 관련성의 맥락속에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기의 모순성이란 인간이라는 동물의 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몸에 축적된 자연성의 기와 또 새롭게 축적된 문화성의 기의 갈등인 것이다.
아래 사진들을 클릭하면 웃음이란 예상된 흐름이 깨질 때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절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동영상은 웃음이란 인간의 몸에 축적된 자연성의 기와 문화성의 기의 갈등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최적의 예시라고 생각한다. | |||
< 증거 2 : 음악치료 >
음악심리학자 '게스통' 은 음악치료의 원리를 다음 세가지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음악은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개인으로 하여금 타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음악은 청자가 자신의 가치를 느끼고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아개념을 구체화시킨다. 셋째 리듬은 음악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시간을 환기시키며, 질서를 만들어 주며, 이 음악적 질서는 청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의 순서들을 지시하는 역할을 함으로서 인간의 활동에 에너지를 제공한다.
세 번째 원리에 주목해 보자. 유아가 눈앞에 있는 장난감을 집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유아는 단 한번에 그 장난감을 집어들지 못한다. 유아는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치나 갈지자 모양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접근한다. 두뇌는 일방적으로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치도록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 지시를 이행했을 때 느끼게 되는 감각을 예측하고, 또 자신의 손의 움직임을 관찰한 것을 두뇌로 계속 신호를 보내면서 목표물과의 직선거리로 부터의 오차를 줄여간다. 만약 자신의 예측과 실제의 움직임의 차이가 클 때면 하던 동작을 멈추게 된다.
파킨슨병은 두뇌의 신경세포가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 의도하는 바를 동작으로 옮기지 못해 생기는 질병이다. 이때 증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음악이다. 음악은 두뇌에 어떤 정보의 흐름을 만들어 단계적으로 음악의 흐름에 대한 예상을 하도록 하여 두뇌 활동에 생기를 불어넣고 두뇌가 조화롭게 활동하도록 해준다. 그래서 음악은 파킨슨병 환자로 하여금 더 높은 수준의 인식 활동에 빠져들도록 하여 이 병의 증세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다소 무리가 있지만 음악에 대한 예측을 함으로서 두뇌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는 의미에서 정보이론의 증거가 될 수 잇다고 생각한다.)
< 증거 3 : 분류욕구 >
우리가 꽃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형태, 크기, 색채를 가진 대상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처음보는 꽃을 바라볼 때 조차도 우리는 이전에 보았던 다른 꽃을 대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바라보게 된다. 두뇌는 꽃에 관한 모든 지식을 비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꽃을 보자마자 시각적인 충격으로 인해서 순간적으로 저장된 정보를 모두 검색하게 되며 상호비교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이것은 꽃이구나 라고 알 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두뇌는 거대한 분류기계로 작용하며, 우리가 경치를 구경하며 걸어갈 때마다 두뇌는 새로운 경험을 입력하고 새로운 경험과 옛 경험과 비교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유인원은 모든 동식물의 형태, 색깔, 패턴, 움직임, 소리와 냄새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식이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분류욕구(Taxophilic) 가 있기 때문이다. 이 욕구는 성욕, 식욕, 수면욕만큼 기본적이고 분명한 것이다. 이 과정이 지닌 의의는 분명하다. 나무위에 살던 유인원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먹거리, 포식자들은 대면하게 되었을 때 새로운 정보의 수용가능의 여부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을 것이다. 시각정보, 청각정보, 후각정보가 무차별적으로 밀려들어왔을 것이며, 이러한 정보는 체계적으로 분류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내 동료 유인원이 먹고 죽은 독버섯의 색깔과 모양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뿐 아니라, 독버섯들의 특징을 찾아 유형별로 체계화하여 새로운 버섯을 발견하였을 때 이것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하는데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적 경험의 근저에는 이러한 분류욕구가 있다. 우리가 새로운 새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한번도 보지 못한 정원에 들어설 때, 소리로 만든 신기한 구조물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낀다. 이런 아름다움의 원천은 노래 자체나 정원 자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과 이전의 경험들은 비교 분석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파생된 것이다. 이 대목이 다소 석연치 않을 수 있다. 왜 감정이 파생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어떤 사람이 들판에서 코뿔소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는 즉각적으로 두려움에 흽싸일 것이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허파에 산소를 빠르게 공급하고, 그의 심장은 더욱 빠른 심박수를 유지하며 다리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고 순간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긴장상태를 유지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코뿔소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판단한 순간 그는 뛸 것이다. 이때 그의 머리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두려움일 것이다. 어떠한 다른 생각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은 살아남기 위한 최상의 선택인 것이다. 코뿔소의 행동습관을 분석한 결과 그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그 순간 그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분류과정에 감정이 개입됨으로서 분류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된다. )
최적의 해법
매미의 알이 부화되어 애벌레가 되면 이들은 깨어 나오자마자 땅을 파고들어가 굴속에서 대부분의 일생을 보내게 된다.어떤 종은 13년 간을 땅속에서, 어떤 종은 17년간을 땅속에서 생활한다.이들은 나름대로의 생체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 긴 기간을 정확히 측정하여 정한 해가 되면 몇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제히 땅속에서 기어나와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 13년, 17년일까?
매미는 영양가 매우 높은 음식이다. 그래서 이것들을 먹고 싶어하는 온갖 동물들이 널려 있다. 이런 조건에서 살아남아서 성장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들은 '생존' 이라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매미가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첫 번째 전략이 바로 '포식자 포만(predator satiation)' 전략이다. 이들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서 동시에 땅속에서 나옴으로서, 그것도 아주 많은 유충이 동시에 나옴으로서 포식자들이 다 먹어치우지 못할만큼 많은 유충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13년, 17년일까? 그것이 매미의 두 번째 전략이다. 자신이 땅속에서 나오는 주기를 가능한한 길게 하면서 동시에 그 주기가 포식자들의 라이프 싸이클과 어긋나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매미의 주기가 15년이고 그 포식자의 주기가 5년의 싸이클을 갖는다면 매미 유충은 이 포식자의 새끼들을 3세대마다 살찌울 것이다. 하지만 매미의 주기는 17년이기 때문에 매미 유충과 포식자 새끼의 시기는 5 x 17 = 85년마다 맞아떨어지게 되며 포식자는 매미 유충을 주식으로 삼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해바라기의 꽃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의 씨앗들이 두가지 다른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시계방향으로 배열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시계반대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런데 그 맨 바깥쪽에 있는 씨앗의 수와 바로 그 안쪽 테두리에 있는 씨앗들의 수는 각각 21,34 이다. 종류에 따라 큰 해바라기의 경우 55, 89, 심지어는 89, 144 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씨앗의 수에는 어떠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비가 모두 21/34 = 0.618, 55/89 = 0.618, 89/144 = 0.618 인 것이다. 왜 하필 0.618 일까?
만약 그 비율이 0.618 이 아니고 0.5라고 하자.그러면 0.5회전마다 씨앗이 하나씩 놓여지게 되어 결국 씨앗이 직선상의 두방향으로 뻗어가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은 공간이용 측면에서 보면 비효율적이다. 좀 더 좋은 방식은 나선형으로 성장해가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씨앗을 더 밀식시킬수 있고, 형태상 비바람에도 더 잘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 비율이 0.48의 경우에는 0.5 보다 작으므로 약간씩 직선에서 벗어날 것이며 그 결과 팔랑개비와 같은 나선상의 회오리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13회전에서 출발점의 씨앗과 같은 직선상에 놓일 것이다. 이것보다는 0.43의 경우가 밀식에는 더 효율적이다. 이것은 43회전에서 원점과 동일직선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앞의 경우보다 더 효과적으로 빈틈을 촘촘히 채울 수 있다.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러한 예는 꽃잎의 수에서도, 파인애플 비늘 배열에서도 나타난다. '자연은 항상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한 최적의 해를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최적의 해인 0.618 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의 문제인 것이다.
( 원문 : 황금비와 식물의 아름다움 )
미의 대이론
플라톤은 이 현실계에 존재하는 수 많은 아름다운 사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존재하며 이것이 곧 미의 이데아라고 하였다. 현실계에 수많은 사물들이 아름다운 것은 이것의 원인이 되는 아름다움의 원형이 이상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면 아름다운 사물은 비록 감각적인 세계에 속해 있어 불완전하긴 하지만 참된 미의 원형을 모방하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미의 이데아를 어렴풋하게나마 일깨워 주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미인중의 하나는 유럽의 중심부에서 발굴된 작은 돌도각인 빌랜도르프의 비너스이다. 기원전 2만년전의 미스 구석기라고 볼 수 있는 그녀의 신체수치는 96-89-96 이었다.(돌조각을 사람이라고 가정했을 때) 기원전 2000년 전에 미스 인더스 벨리의 신체수치는 45-34-63, 청동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1500년 전의 미스 사이프러스의 신체수치는 43-42-44 였다. 그 후 기원전 1000년 의 미스 암라쉬 는 놀랍게도 38-44-78 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같은 시기의 미스 시리아는 현대인과 거의 같은 31-26-36의 수치였다. 1970년대 미스 월드대회에 참가한 여자의 평균 신체지수는 35-24-35 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
또한 그는 현실계의 아름다움을 적절한 비례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일찍이 음악이론을 정초한 피타고라스에게 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음악에서 아름다움이란 용어는 '하모니아' (Harmonia)라고 하였는데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하모니아는 수의 비례에 입각한 수학적 배열이다. 그는 현악기의 줄은 그 길이가 간단한 숫자들과 관계되어 있을 때 조화로운 소리를 낸다고 하였으며 현의 길이의 비율이 1 : 2일 때, 2 : 3일 때, 3 : 4일 때 아름다운 소리로 들린다고 하였다. (1편에서 협화음, 불협화음에서 설명) 피타고라스에서 유래한 이러한 미의 개념을 '미의 대이론(The Great Theory)' 이라고 한다. 이 이론은 앞서말한 형식주의자(혹은 인지주의자)에게 지지를 받을만 한데 이 이론에서 미는 아름다움이란 사물들의 객관적인 속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비례는 그것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관조자의 흥미를 끌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황금비
12세기 말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는 한 쌍의 토끼가 계속 새끼를 낳을 경우 몇 마리로 불어나는가를 수열로 나타냈다. 이 수열은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가 된다. 이 수열은 모든 숫자가 앞선 두 숫자의 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피보나치의 수열에서 앞의 숫자를 뒤의 숫자로 나누어 보면 즉 5/8=0.625, 8/13=0.615, 13/21=0.619, 21/34=0.618, 34/55=0.618, 55/89=0.618 ... 로서 0.618에 수렴되어감을 알 수 있다. 앞서 보여준 해바라기씨의 배열에서, 파인애플 비늘배열에서 볼 수 있는 수이다. 이 수가 황금분할 또는 황금비율의 등식이라고 한다.
황금비율은 자연이 선택한 최적의 비율이며,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 가장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이다. 우리는 소라껍질의 소용돌이 모양에서, 해바라기씨의 배열에서, 불국사의 석굴암의 석불의 얼굴에서, 신용카드의 가로 세로비율에서 심지어 비너스 조각상의 발바닥에서부터 배꼽까지가 몸 전체의 61.8%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황금비율은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것의 근원은 수’라고 생각했던 고대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에게는 경이적인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수적 연관성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그것은 음악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앞서 이야기 했듯이 피타고라스에서 파생된 음계는 각 음정간에 어떤 비율이 존재한다. 평균율 체계에 있어서 음정의 주파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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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
레 |
미 |
파 |
솔 |
라 |
시 |
도 |
주파수 |
256 |
287 |
322 |
342 |
384 |
431 |
483 |
512 |
이다.
각각의 차이를 차이는 31, 35, 20, 42, 47, 52, 29 로서 아무런 규칙성도 없어보이지만 이 수열에도 어떤 수학적 통일성이 존재한다. a = 261.6, r = 1.05946 으로 놓으면 위의 수의 배열은 a, ar2, ar4, ar5,ar7, ar9, ar11, ar12 이 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평규율의 정의(?) 에 의해서 반음계 상승할 때마다 5.946% 주파수비가 증가한 것이다.)
현대음악가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은 대담한 화성과 불협화음, 불규칙한 리듬, 그리고 황금율에 기초를 둔 기하학적인 화성구조를 사용하여 대단히 개성적인 자신만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특히 황금율이라는 양식을 곡의 수평적 구조(악장의 구성, 반복 등)와 수직적 구조(화성)에 동시에 적용하였다. 대표적인 곡으로 '2대의 피아노와 타악기를 위한 소나타' 가 있는데 이 곡은 형식의 큰 부분에서 뿐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의 구성까지도 황금비에 의하여 분할되고 있으며, 각각의 악장, 음향효과, 선율의 구성도 피보나치 수열을 기초로 구성되어 있다. ( 악보, 음악 이음악과 악보는 위에 설명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 )
내적 연관성
16세기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방대한 양의 천문관측자료를 남겼다. 그가 남긴 자료중에는 태양계에 속하는 행성의 공전주기(T)와 태양으로부터 거리(D) 에 자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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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성 |
금 성 |
지 구 |
화 성 |
목 성 |
토 성 |
주기(T) |
0.24 |
0.615 |
1.00 |
1.88 |
11.68 |
29.457 |
거리(D) |
0.387 |
0.723 |
1.00 |
1.524 |
5.203 |
9.539 |
이 관측결과를 보아서는 주기와 거리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관측자료를 물려받은 케플러는 자연이 보여주는 '수' 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자연은 반드시 수학적 모델을 따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수치적 관계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관계를 밝혀냈다. 그것은 태양계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수식으로 쓰면 이며 이것의 케플러의 3번째 법칙인 '천체의 조화법칙' 이다.
그러면 왜 주기와 궤도반경간에 이러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 관계뒤에 숨어있는 신의 암호는 무엇일까? 이 암호는 뉴턴을 풀었다. 뉴턴은 케플러의 운동의 3법칙의 분석을 통하여 이 수치적 일치는 거리의 제곱에 역비례하는 힘이 주어질 때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만유인력' 의 법칙이다. ( 자세한 것은 원문을 보시라. )
자연의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은 음악을 즐기는 방식과 유사하다. 자연의 암호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각 단계마다 원리와 가정을 검토하듯이, 우리의 귀와 머리는 음악속에 내재된 패턴과 비례의 구조물을 검증해 나간다. 귀는 시간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꾸준히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음악에 내재된 아름다움인 패턴과 비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앞선 구조물와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비교하는 방법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러한 내적 연관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변주곡은 기본 테마를 유지하면서 리듬, 모티브, 화성, 선율, 속도를 변화시킨다. ( 모차르트 K 265 - 반짝반짝 작은 별 ) 변주곡의 아름다움은 변화하지 않는 것과 변화하는 것의 함축과 관계의 네트워크의 절묘함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 크세너키스는 음악은 지성에 의한 창조물이고 뛰어난 지성이 표현된 음악이 훌륭한 음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적인 음악의 창조하기 위하여 확률통계론, 게임이론, 집합론 등 수학적인 논리를 도구로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음악을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부터 끌어내어 지성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작업이 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을 응용한 음악의 예시로서 프렉탈음악을 소개한다. 이 음악은 사진의 프렉탈 도형을 생성한 공식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만들어졌다. (작곡가 홈페이지 brainew.com ) |
인간은 음악을 어떻게 파악을 할까?
음악을 들을 때에 우리는 잡다한 것을 듣는다. 어떤 음악은 나 자신에게만 특별한 느낌을 주고 나의 개인적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한 모든 것을 벗겨 버리고 나면 누구에게나 인정되는 음악의 소리가 남는다. 이 소리의 본질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음악이 듣는 것은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강변을 천천히 지나가면서 경치를 파악하는 것과 유사하다. 우리는 창밖에 천천히 움직이는 경치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차린다. 그러나 아이가 버스 안에서 태어나 버스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는 창 밖의 경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며칠, 몇 개월, 몇 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이가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첫 단계는 대상과 나와의 갈등이다. 갈등의 단계에서 아이는 창 밖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본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손으로 만지려고 하고 입에 넣어 먹어보려고 한다. 다음 단계에서 아이는 창 밖 경치의 움직이는 방향과 연속성을 파악한다. 저것은 앞서의 초록색이 창 뒤로 사라지는 것이고 이것은 푸른색이 띠처럼 연속되어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다음 단계에서 그 초록색이 이름은 모르지만 '나무' 이고 푸른 띠는 '강' 이라는 사실이 파악된다.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은 모른 채 정체성만이 파악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아이는 그것들을 인과적 사건으로 파악한다. 성냥을 벽에 문지를 때에, 불꽃이 이는 것을 보고 '문지름' 과 '불꽃' 이라는 두 사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에 이르면 이 모든 파악을 종합해, 내가 있는 장소와 한계성을 알게 된다.
갈등, 연속, 정체, 인과, 한계라는 이 다섯 단계를 시간 파악의 현상학적 서술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각 경우에 음악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갈등의 단계에서 우리는 음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소리를 먹고 싶은 것이다. 서양음악의 소리는 이 '먹고 싶음' 에 있어 세련되어 있다. 음 하나 하나가 깨끗하다. 일본 음악 역시 깔끔함을 추구한다. 국악이 추구하는 맛은 걸직함이라고나 할까? 인도의 음악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음의 맛에 무관심한 듯이 보인다.
2. 연속 파악의 단계에서 우리는 음들이 어떻게 움직여 가고 있으며 음들이 어떻게 무리 짓는가를 파악한다. 현재의 폭을 설정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로큰롤 음악이 두 박자의 짧은 현재의 폭을 갖는 반면 인도 음악의 경우 음들은 강한 접착성을 갖는다. 음들이 끈적끈적한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국악은 연속성을 자연스러움에 맡기 듯 보인다.
3. 정체 확인의 단계에서 우리는 선율의 단위를 파악하고 그 선율과 선율 부스러기들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음악을 알기 시작하는 것이다.
4. 인과의 단계에서 우리는 무리들의 인과적 관계를 파악한다. 이 선율 다음 저 선율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느낌을 갖는 단계이다. 서양음악의 경우 일반적으로 인과의 논리가 강하다. 국악의 경우 인과의 논리는 약한 편이다. 대중 음악은 인과성에 무관심하다. 인도 음악의 경우 인과성은 질기고 질기다는 느낌을 받는다.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운명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5. 최종의 단계 이르면 음악을 듣고 있는 내가 있는 곳을 아는 단계다. 서양음악의 경우 우리는 투자한 노력의 결과인 성취가 이루어지는 세계 안에 있다. 인도 음악은 현실을 떠난 < 비어 있는 곳 >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마음의 속박을 떠난 자유로운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수재천(壽齋天)의 경우 우리는 < 도도한 흐름 >의 세계에 머물고, 거문고 산조의 경우 우리는 < 적막한 곳 >에 머문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 승리한 곳 >으로 우리를 안내하는가 하면, 부르크너의 교향곡은 아름답지만 < 결코 기억해 설명할 수 없는 곳 >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곳은 그가 꿈꾼 천국 다시 말해 그의 마음속이었을 것이다.
아동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면서 행동을 관찰하였다. 아동들은 다음 5단계로 행동을 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위의 글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아 소개한다.) 단계 1 (흡수) : 아동은 먼저 어떠한 반응 또는 의도적 행동없이 단지 존재함으로써 정보를 흡수한다. 단계 2 (주의집중) : 아동은 주변의 음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계속한다. 단지 순간 순간 음악에 대한 반응을 한다. 어느 순간 아동은 놀기를 멈추고 음원을 계속 쳐다본다. 아동은 음악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들으며 주위의 다른 것들은 잊은 듯이 보인다. 단계 3 (모방) : 조금씩 아동은 들리는 음악에 자신의 움직임을 연관시키거나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아동은 자신이 음악과 별개의 존재임을 인식하고 음악을 듣는다. 잠시 후 아동은 자신이 보는 것, 청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체 움직임은 지각된 움직임이나 음악의 흐름과 어울리거나 일치되지는 않는다. 단계 4 (반응) : 모방 직후에 아동은 음악에 더 의식적으로 반응하고 지속적 음과 규칙적인 펄스에 대해 음악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단계 5 (협응) : 심적 표상의 발달이 진행된다. 아동은 노래의 움직임과 조성적, 리듬적인 특성을 보다 정확히 인식한다. 물론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음악적 의미를 인식한다, 이제 아동은 자신의 신체를 지각된 움직임과 맞추려고 노력한다. 아동은 지신이 인식한 것을 자신이 지각한 것과 하고자 하는 것 (노래하고, 움직이고, 흥얼거리기)과 일치시키고 새롭게 발달된 인지적 도색에 행동을 적응시킨다. 이 단계의 끝에서 아동은 자신의 움직임과 노래를 조화시키게 된다. |
판소리
서양음악과 동양음악의 차이는 '존재(being)문화' 와 '생성(becoming)문화' 의 차이이다. 이러한 대비는 '플라톤의 기하학주의' 와 '노자의 유기체론'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존재문화는 존재의 이상적 질서 즉 수학적(기하작적) 질서를 진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음에 있어서도 존재적 요소를 강조하게 된다. 음의 요소를 크게 음고, 지속, 크기, 음색으로 나눈다면 존재문화에서는 이 중에서 음고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다.
음의 종적구조 즉 음고라는 개념으로 대변되는 기하학적 질서를 강조하게 되면 음의 상황적 현실성보다는 음의 이상적 가능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여인을 조각하는데 있어 여인의 현실적 자태를 조각한 것이 아니라 이데아적 이상 형상을 조각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미의 대이론) 이처럼 음에 대한 기하학적 질서추구는 인간의 몸의 행위와 독립적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동양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음색이다. 사실 이것은 인류가 음을 인식하는 자연상태에서는 음고보다는 음색이 훨씬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다. 따라서 동양의 음악은 단선율 구조내에서의 음색의 합주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 궁중아악이다.
음의 생성성, 즉 음의 색깔 중심의 생성적 음악은 인간의 몸의 타행위와 결합되는 흡인력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음색이란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나 느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체계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즉 천둥소리는 무서운 느낌의 메시지를, 살랑이는 바람소리는 한가로운 고적의 느낌의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에 그러한 음색은 인간의 의미의 총체성으로 분화될 수가 없다. 따라서 음색은 인간 행위의 가장 정교한 의미체계인 언어와 분리될 수가 없다. 바로 이 말과 음색의 결합의 최고의 예술적 표현이 바로 판소리인 것이다.
최승희 선생의 춘향가를 들으시려면 여기 를 누르세요.
출전 : www.pansoree.com |
음악과 언어
언어를 처리하는 곳은 두뇌의 대뇌피질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좌반구에 있는 브로카(Broca)영역은 말을 하는데 필요한 영역이고, 베르니케(Wernicke)영역은 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영역이다. 따라서 브로카 영역이 손상되면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하는데에는 지장이 없다. 반면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되면 말은 거침없이 할 수 있지만 이해를 할 수 없다. 이 두 영역은 신경다발로 연결되어 있는데 것이 손상되면 말의 이해에도 지장이 없고 말도 유창하게 하지만 이해한 것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20세기 작곡자 '모리스 라벨' 은 베르니케 영역을 다쳐 실어증 환자가 된다. 그래서 단어를 말하고 들을 수는 있지만 문장 안에서 단어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어 버렸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베르니케 영역을 다친 이후 작곡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뇌에서 떠오른 음악 패턴을 악보로 표현하는 기능을 잃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곡 기능을 완전히 잃어 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머리속에서 만큼은 음악을 계속 작곡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종이에 오선지로 옳기는 능력을 잃어 버린 것이다. 언어능력과 음악능력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좌뇌를 심하게 다쳐 언어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중에도 중 상당수가 노래는 부를 수 있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언어능력을 잃어 버린 사람도 기계적으로 하는 인사나 욕 같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언어활동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재연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영국의 Rock 밴드 Deep Purple 의 초창기 앨범중에 Hush 란곡을 들어보면 반주부분의 키보드 연주가 무슨 말을 하는 듯하다. 그리고 Deep Purple 의 Lazy 와 Led Zeppelin 의 The Lemon's Song 를 들어보면 기타와 키보드 그리고 보컬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연주를 하는데 이것은 악기가 사람 목소리의 음색을 흉내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억양을 흉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 음악은 언어의 긍정적 퇴행이라는 다음 주제를 암시해주는 듯 하다.) |
음악은 언어의 긍정적 퇴행 (정신분석학적 접근)
음악이란 유아가 청각과 발성을 경험하면서 구어적 논리와 분절의 위험을 피하고 자신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긍정적 퇴행을 찾으면서 시작된다고 정신분석학자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음악에는 명확한 지시물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안전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유아가 무의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표현되는 분위기를 이해하는 능력, 어머니가 말하는 언어의 의미적 내용보다는 음색, 속도, 억양 등 음악적 성질을 이해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유아들이 파악하는 음악적 양상은 말투에 근거하는 선율적 외형인데 이 외형은 친절함, 짜증스러움, 편안함 등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거나 표현할 수 있다.
몇몇 심리학자들은 '움직임의 마술' 로서의 일차적 경험으로 퇴행하게 하는 음악의 기능을 강조한다. 음악의 움직임에 반응할 때, 청자는 자아와 외부 현실 사이에 경계가 없어지는 일차적 상태로 물러서며 그 상태를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음악적 향유를, 프로이트의 말을 빌린다면 '바다의 감정' '"긴장의 해소를 조절하는 리듬' 이라고 하였다. 수동적 청자는 음악에서 저항의 해소를 추구하는 반면, 능동적 청자는 흐트러진 대상에서 질서를 추구한다.
물론 같은 음악이라도 청자의 자세에 따라서 저항을 해소할 수도 있고, 질서를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음악이 특수한 역할을 할 수 도 있다. 말하자면 John & Vangelis의 Polonaise 는 청자로 하여금 저항을 해소토록 하는 반면, Harry Potter OST 중에서 Proloue 는 내재된 질서를 보여주는 듯 하다. |
음악 그 떠도는 기의
어떤 대상을 물리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을 '기표(記標)' 라고 하고, 그 표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을 '기의(記意)' 라고 한다. 예를 들어 ‘소’ 라는 글자는 기표이고 그 기표가 의미하는 진짜 '소' 가 기의이다. 손으로 달을 가리키는 경우를 빗대면 손을 '기표' , 달을 '기의' 라고 할 수 있다. 기표는 우리의 손처럼 실체이고 기의는 달처럼 그림인 셈이다.
손도 있도 달도 있는 것은 언어이다. 우리의 일상언어는 손과 달의 엄격한 관계 안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시는 그로부터 벗어나 손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싶어한다. 손은 있지만 달이 없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의 손은 아름답지만 음악의 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마음속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달이 없다면 음악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손도 없고 달도 없는 경우 그러니까 둘 다 정해져 있지 않는 경우가 수학이다. 수학에서는 손이 있으면 달이 생기고, 달이 있으면 손이 생긴다. 무리수를 표시하는 방법이 생기면 무리수가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선분은 구멍을 메꾸어 연속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음악은 유아가 언어의 논리와 음절 발음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정서적 표현의 힘에 의해 긍정적 퇴행을 촉진한 결과물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음악이 언어와 달리 한 단어가 기본적으로 하나의 뜻을 의미한다는 기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에서의 은유나 환유의 형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한 기표가 해석되어야 할 기의를 가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은 고정된 기의를 찾아야 하는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따라서 음악의 기의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전제해야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기표/기의의 연결 법칙 이전에 있는 상상계의 떠도는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음악이 기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외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외워질 수 있다는 것은 기표의 연결에 질서가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그 기표들은 질서를 가진 세계, 즉 상징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음악은 그것이 외워진다는 점에서 상징계에 머물지만 그것이 고정된 기의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상상계에 머무는 것이다. 기표는 상징계에, 기의는 상상계에 머무는 기호이다.
|
공기의 진동 |
대상 |
대상 |
지시 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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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적 자극) |
(기표) |
(기의) |
(사물) |
1 |
∥------------------------- 지시상황의 언어 --------------------------∥ | |||
2 |
∥------------------ 비지시 상황의 언어 ------------------∥ |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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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언어 ----------∥ |
|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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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된 선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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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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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도는 기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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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시 상황의 언어를 뜻한다. 말하자면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가 있는 기표가 있으며 그 기표가 지시하는 기의가 있고 그리고 지시대상인 사물이 있다.
2 는 비지시적 언어 혹은 메타언어라고도 한다. 우리는 지시대상이 없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밖에 비가 오지 않더라고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라고 거짓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실어증 환자는 밖에 비가 오는 경우에 한해서만 비가 온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 환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대상이 없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3 는 의식 안에서의 언어로서, 후설은 이를 침묵의 언어 또는 현상학적 목소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음속 말하는 능력이다. 말하자면 사유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언어에는 마음속으로 말한 다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언어도 포함된다. 생각하면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은 침묵의 언어와 외계의 지시물과의 연결을 뜻한다. 즉, 침묵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만 존재할 수도 있고 외부의 지시물과 연결될 수도 있다.
4 는 상상된 선율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려본 멜로디를 말한다. 아직 악보에 적지 않은 마음속의 멜로디는 이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상상된 선율은 그것이 우리의 느낌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 항에서 말할 떠도는 기의를 배경으로 갖는다.
5 는 떠도는 기의는 음악에 충실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호학자이거나 언어학자이거나 모두 기호 없는 의미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기표가 없는 기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라캉의 무의식의 기호 이론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라캉은 떠도는 기의를 설정함으로써 기표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기의를 가정하였다. 음악의 경우에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떠도는 기의의 개념은 가정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떠도는 기의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한 느낌을 갖는다든지 어떤 소설을 읽고 나서 어떤 심적 상태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든지 하는 경우의 의식의 전체적인 느낌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아마도 라캉이 말하는 바의 상상계의 세계가 우리의 의식과 연결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떠도는 기의는 허전한 느낌처럼 전체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보다 구체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느끼는 연정의 감정 역시 떠도는 기의일 것이다. 이 기의가 기표를 찾아 헤매는 정열이 결국 마음에 드는 상대방을 찾았을 때에 나타나는 감정일 것이다. 그 기의는 기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그러한 기의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기의가 언어로 표현될 만큼 구체적일 수가 없다. 만일 그것이 구체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언어로 꼬집어 표현해야 한다. 음악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이 떠도는 기의를 그 음악이 잡았을 때에 이루어진다. 음악이 떠도는 기의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을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 어렵다. 뜻을 생각하지 않고 대본을 읽는 연기자의 말에서 우리가 무미건조함을 느끼듯이 우리는 떠도는 기의를 잡지 못하고 악보에 그려진 대로 연주하는 음악에서 똑같은 무미건조함을 느낀다. ( 원문 : 음악 그 떠도는 기의 )
한글 국어 큰사전(최현배)에는 '거시기' 를 찾아보면 대명사와 형용사로 분리되어 사용된다. 형용사 "거시기"는 얘기하다 말문이 막히면 이어가는 낱말이 쉽게 생각되지 않을 때(에- 또-)와 같이 쓰이며, 대명사는 어떠한 사물을 칭할 때 대신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 ; 거시기 가서 거시기 가져오너라 아들 ;예 아들 ; 거시기 여기요 ( 아들은 신문을 가져온다 ) |
작곡으로
작곡은 모든 음악적 과정 중에서 가장 이해되어지지 않는 분야이다. 작곡의 두 단계를 나누어 질 수 있다. 첫 번째 '영감(inspiration)의 단계' 는 골격을 이루는 주제가 의식에 떠오르는 단계이고 두 번째 '실행(execution)의 단계' 는 아이디어가 좀 더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확장, 변형, 생성되는 단계이다. 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은 '떠도는 기의' 에 잠겨 있는 의식이 음악이라는 기표를 붙잡아 구조를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율은, 더 나아가서는 음악은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찾아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영감의 단계' 즉 허공에 떠도는 기의가 의식이라는 수면위에 떠오르는 단계인 것이다.
작곡자는 자신의 감정을 음악을 통하여 전달하기 위해서 작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는 작곡자의 감정을 감상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아니다. 그것은 전달이 아니라 공유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형식주의자의 입장인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감상자들은 음악작품을 접했을 때 그것이 어떤 전달 내용을 전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몹시 초조해 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시'를 듣고 도대체 월 말할려고 하는 것인지 따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면 무엇을 공유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음악의 미적 내지 표현적 요소인 리듬, 멜로디, 하모니, 음색, 형식이다. 어느 예술형태에서나 이러한 요소는 있다. 예컨대 회화에서는 색, 선, 질감, 양감 일 것이며, 시에서는 비유, 이미지, 압축, 운율, 구조 등이며 무용에서는 동작, 근육의 긴장과 이완, 형, 디자인, 중량감 등일 것이다.
존케이지의 "4분 33초" 1악장 - 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소리 2악장 -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소리 3악장- 사람들이 얘기하거나 걸으면서 내는 모든 종류의 흥미있는 소리 |
음악의 선호도
음악의 선호와 개인의 기질의 문제를 연구한 'Payne' 는 훈련된 음악가들 중 외향적인 사람들은 감정적인 음악을 선호하며, 내향적인 사람들은 형식적인 구조의 음악을 선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수적인 사람은 익숙하지 않는 고전음악보다는 익숙한 고전음악을, 외향적인 사람들은 재즈를,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드락을, 정신병적 인자를 가진 사람은 하드락과 불협화음을 선호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음악의 선호를 개인의 기질만으로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분명 사회적 압력이 선호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음악의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1, 2, 3학년들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음악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 아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음악 양식, 클래식, 대중음악, 민족음악 그리고 전자음악를 여과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4학년과 위 학년 학생들은 이러한 음악을 들려주면 귀를 막고, 움츠리며 동급생들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본다. 그들이 선호한 음악은 락 그리고 컨트리 음악이다. 음악이란 집단의 유대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긴장해소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가 될 듯 싶다.
음악의 선호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선호하는 음악의 대부분은 성년기 초기에 자주 듣던 종류의 음악인 것이다. 이것은 특정 음악에 대한 지식 습득정도와 관련이 있는데 젊은 세대들은 90년대 선율과 가사의 조합으로 기억해 내는데 있어서 어려움일 겪지 않았던 반면, 나이든 세대들은 많은 어려움을 나타내었다. 각 세대들은 일상적인 음악활동을 통해 자신이 선호하는 양식의 음악에 대한 지식을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람들이 공식적인 학습 경험뿐 아니라 비공식적인 방법으로도 광범위하게 내재된 음악 지식과 최소한의 기본적인 연주기술을 습득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7,80년대 대중가요 의 선율은 가사의 단위가 음악의 단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반면 최근의 대중가요 선율은 가사의 단위가 음악의 단위와 일치하지 않고 있다. 각 세대들은 그들 세대에의 음악양식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기 때문에 그 양식의 음악을 선호하게 된다. 중장년 층이 랩 음악을 따라부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
비트와 대중음악
아프리카 부족에 있어서 타악기 연주는 성적 행위를 상징한다. 이 행위의 상징성으로 인해 기독교 문명에서는 타악기의 연주가 금기시되어, 음악은 타악기를 수반하는 음악과 수반하지 않는 음악으로 분리되었고, 그 결과 기악 음악이 춤이 없이도 음악으로서 성립될 수 있게 된다. 중세이후 교회 음악에는 타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타악기에 대한 성적상징을 인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타악기는 교회 안에서 쓰이지 않는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락음악이나 한국의 사물놀이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타악기 금기에 대한 파괴를 뜻하고 자유와 개방 또는 폭력의 허용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비트' 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글이 서양음악 중심의 글들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현대 대중음악은 다양한 드럼과 거대한 베이스 스피커를 동원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며, 악구와 형식 또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무기로 삼는 고전 음악은 강한 비트로 무장한 팝음악의 습격에 거의 사망직전에 직면해 있다.
태아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자궁보다 더 확실한 보호처는 없다. 그리고 임신 후기에 태아는 접촉과 소리에 민감해진다. 태아는 자궁벽의 아늑한 포옹과 어머니의 체온을 느낄 수 있으며 매분 72회를 뛰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최초의 인상이며 그런 만큼 영속적인 영향을 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포대기에 편안하게 감싸여 어머니의 팔에 안겨서 어머니의 심장곁에 놓였을 때 갓난아기는 자궁 속의 편안함의 신호를 얻게 된다. 어머니는 포옹하는 일 말고도 때때로 갓난아기를 규칙적으로 흔드는 동작을 하는데 이것은 자궁 신호인 심장 박동음의 리듬을 상기시켜준다. 얼핏 보아서도 좌우로 흔드는 동작은 어머니가 걸을 때 몸을 좌우로 흔드는 동작을 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개의 어머니는 무의식중에 심장 박동음과 아주 비슷한 속도로 흔들게 된다.
갓난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관찰한 결과 80퍼센트가 무의식중에 왼팔, 즉 심장 곁에 아이를 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른손잡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완손잡이 어머니만을 관찰해봐도 여전해 78%가 왼손에 안고 있다. 화화의 역사에서 어떤 시기에 그려진 성모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아도 조사한 466점의 그림들 가운데 373점의 그림이 마리아가 왼손으로 그리스도를 안고 있다.
신생아실에 어머니의 심장 박동음을 들려주는 실험을 한 사례도 있다. 이때 유아들의 울음소리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잠드는 시간을 관찰한 결과 소리가 없을 때는 46분, 심장 박동음의 레코드 소리를 들려주었을 때는 23분으로 측정되었다. 분명 심장박동음은 진정 신호로서는 특별한 성질이 있다. 어른이 되고나서 대중 음악에서 사용하는 베이스 드럼의 낮은 장단이 우리에게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는 대중 음악은 심장 박동의 속도와 같은 약간 느린 장단의 음악이다. 분명 비트는 음악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면 이제 비트가 있는 음악, 락(Rock)의 세계 로 들어가 보자.
o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들어야 한다. 듣지 않고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
o 이 글에서 논의된 내용은 대부분 서양음악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o 서울대학교 서우석 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많이 퍼왔다. 여러 가지 음악미학에 관한 글 속에 그 심오한 담론을 담아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음악, 그 떠도는 기의', '소리와 음악의 해체' 등과 같은 글들은 그대로 축약해서 올렸다. '음악과 열반' 는 건드리면 아름다뭄이 퇴색될 것 같아 원문만 링크한다.
o '음악심리학' '음악미학' 에서는 음악미학에 대해서 형식주의와 표현주의, 관련주의로 구분하고 있고, '순수음악의 미학' 에서는 인지주의, 정서주의 로 구분하고 있다. 인지주의는 형식주의를 그리고 정서주의는 관련주의를 지칭하는 것 같지만 그 구분이 모호하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관점을 별도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형식이라도 다르게 해야 혼돈이 적을 것 같아 인지주의, 정서주의의 관점은 대화형식으로 정리하였다.
o 음악이 감동을 주는 이론에 대해서 정보이론(갈등이론), 부분적 회상이론, 정신분석학적 접근, 플라톤의 대 이론 등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것이 정확히 어느 미학이론에 해당되는지 명확하게 할 수가 없어서 구분 없이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것이 구분이 되는 것인지 조차 모르겠다.)
o 잘못된 부분이 많을 것이다. 재미로 읽어주기 바란다.
출 전
서울대학교 서우석 교수님 홈페이지 (음악에 관한 모든 것)
음악의 연구 (서우석 저)
음악, 마음의 산책 (서우석 저)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 (로베르 주르뎅 저)
순수음악의 미학 (피터키비 저)
음악심리학 (루돌프 라도시, 데이비드 보일 공저)
수학과 음악 (에드워드 로스스타인 저)
음악미학 (라이머 저)
음악 마인드 과학 (한국음악지각인지학회 옮김)
Chopin's Homepage (인공지능과 관련한 글들도 많음)
인제대학교 조용현 교수님 홈페이지 잡기장 중에서
-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 피보타치수열, 황금비 그리고 식물의 아름다움
- 피타고라스-플라톤적 비전과 자연의 암호
아름다움과 추함 (김용옥 저)
맨 위칭 (데스먼드 모리스 저)
소리와 청각 (라이프/인간과 과학 시리즈)
마음의 세계 (라이프/인간과 과학 시리즈)
인간행동과 심리학 (오세진외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