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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교도의 실천신학
청교도 실천 신학은 유럽 대륙의 개신교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륙의 교회들이 청교도의 실천신학을 얼마나 크게 평가했는가는 그들의 번역들의 수를 볼 때 알 수 있다. <경건의 실천>은 계속 유럽어들로 번역되었다. 퍼킨스의 영어 작품들은 라틴어, 화란어, 스페인어, 아일랜드어 그리고 웨일즈어로 번역되었다. 박스터는 폴란드와 항가리까지 널리 읽혀졌다. 청교도의 실제적인 저서들이 온 유럽 전체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우리도 그 가치를 깨달으려는 준비를 하게 한다.
이 경건 문헌이 단순하게 표현되었고 어떤 전문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중적이었으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청교도 저자들은 박학하고 정신력이 강하고 책을 많이 읽는 퍼킨스의 전통을 따르는 학자적인 사람들이었다. 퍼킨스는 그의 시대에 서유럽 전체에 최고의 개혁 신학자로 알려졌다. 전세계가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은 교회 질서에 대한 문제들 뿐만 아니라 교리에 대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대논변가들이었고 이러한 논변을 자신들의 목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성경의 진리는 영양을 주는 것이며 인간의 그릇된 생각은 죽이는 것이므로 신령한 목자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존 오웬은 말한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진리, 곧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복음의 교리를 보존하고 모든 반대에 대해 진리를 변호하는 것은 의무이다. 이것은 목회에 있어 한 가지의 중요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의무에 대한 죄악된 태만은 교회를 해치고 타락시켜 온갖 간악한 이단과 그릇된 생각들의 큰 원인이 된다.” 오직 진리의 직접적인 해설과 적용만이 긍정적인 방법으로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다. 청교도 실천 서적들의 고의적인 단순성의 뒤에 명석하고 학문깊은 신학자들의 배려와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문헌의 참된 가치를 평가하는 준비를 갖추게 된다.
다섯 가지의 결정적인 자질들로 인해 청교도 저자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지금까지 현대의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이룩하게 되었다.
1) 그들은 영혼의 의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가 죄인들의 삶에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퍼킨스가 신학을 “영원히 복된 삶의 과학”으로 정의할 때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식에서 기인하는 생명은 복되도다”라고 덧붙인다. 즉 신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인 문제이며 직접적으로 실제적인 목적을 갖고 연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복음의 교리는 순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자는 가장 실천적인 신학자이며, 가장 실천적인 신학자가 가장 성경적인 신학자일 것이다. 그리고 도처에 실천적인 적용과 도전들을 수반하는 설교 형식이 가장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방법일 것이다.
청교도들은 순종된 진리는 낫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이다. 이 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는 심령을 황폐하게 하여 죽이는 질환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죽을 병에 걸린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중생한 자들도 여전히 병에 걸려 있지만 은혜의 역사가 그들의 삶에 계속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나아지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아무도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 없고 누구나 항상 병이 도질 수 있는 병원이다.
목회자들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압박에 의해, 그리고 그들의 이익과 쾌락과 자만으로 인해 그들 자신도 성경의 약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단계에 있는 자신들의 영혼을 위한 약으로서의 성경 진리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기 반성과 자기 지식은 그들의 심령을 얼밀히 조사하여 죄를 못박고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를 도덕적인 악과 영적 악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숙련된 기술의 비결이다.
2) 그들은 양심을 향한 해설자들이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교리)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양육, 훈련)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성경 자체에서 터득된 청교도 설교학은 기록된 말씀을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과 상호 관계를 제시하는 것이며, 사랑의 언약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되는 길이며, 일단 이 관계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에 따라 사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청교도의 해석 방법은 본문이 제시하는 교리들- 즉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원리들- 을 설명한 다음 그 교리들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청교도 저자들을 ‘실제적’, 또는 ‘실천적’이라 칭한 이유이다. 그들의 적용들은 양심, 즉 스스로 판단하는 실천 이성, 각각의 현실적 순간에 있어 자신의 의무와 자신의 공과와 자신의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심사 숙고하는 이성을 향한 것이었다. 청교도는 이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성경적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된 신령한 진리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부여함으로, 자기 판단 과정을 시작케 함으로, 그리고 내려진 판단에 적절한 응답을 유발시킴으로 말씀을 존귀케 함에 있어 성령께 의지하였다. 이 응답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전 영역에 미치는 것이었다.
곧 회개, 겸손, 자기 불신, 자기 부정, 헌신, 순종, 찬송, 감사, 간구 여기에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집착과 하나님과의 교제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성향의 ‘애정’(단지 지나가는 감정의 기복이 아니라 정서를 수반한 심령의 확고한 기울임)이 추가된다. 청교도의 이 성향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이 성향들(기쁨, 슬픔, 갈망 등등의 특유한 대상을 지향하는 성향들)을 일깨우고 강화하려는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은 이 저자들이 ‘애정깊은’ 저자들로 칭해진 이유를 설명해 준다.
틴데일은 말한다. “성경은 자체에 대해 증언하였고 언제나 또 하나의 밝혀진 본문에 의해 자신을 해석했다”. 해석의 열쇠는 믿음에 의한 칭의이며 들어가는 문은 로마서이다. 틴데일은 로마서를 ‘성경 전체를 밝히는 빛이며 전체로 통하는 길’이라고 칭하고 로마서에 대한 루터의 판단을 “밝은 빛, 모든 성경을 밝히기에 충분한 빛”이라고 번역한다. 이 해석의 원리들은 퍼킨스에 의해 청교도 형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는 만일 로마서로 공부를 시작하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을 공부한다면 전체 성경을 여는 열쇠를 소유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원리들은 사실상 모든 청교도의 성경 해석에 있어 공리였다는 것이 분석 결과 드러났다.
청교도의 믿음- 칭의로 이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그에 의해 생활하는 믿음- 에 대한 설명은 모든 면에 있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초점과 활동과 열매들에 대한 청교도의 설명은 칭의와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점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의 빛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언약의 자비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양심과 관련하여 구성되었다.
개혁자들이 교회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교리의 고전적 조직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믿음과 양심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영적 요구에 그 교리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고전적으로 설명한 대표자들이라고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개혁자들이 고전적인 신학자들이라면 청교도들은 고전적인 목회자들이며 신령한 안내자들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저서들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곧 깨달을 것이다.
3) 청교도들은 정신 교육자들이었다. 이 점은 그들의 교육 방법과 관련이 있다. 17세기와 18세기는 교육 이론에 대해 많이 생각한 시기였다. 출발점은 믿음과 순종이 가능할 수 있게 되기에 앞서 정신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한다는 그들의 확신이었다. 박스터는 “무지는 거의 모든 죄이다”라고 기술했고 설교에 대해 그가 즐겨 사용하는 금언들 중의 하나는 “먼저 불을 붙인 다음에 뜨겁게 하라”는 것이었다. 불꽃이 없는 열기, 교육학적 정밀성을 갖추지 않은 설교의 열정은 아무에게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교회 출석자들의 쪽으로 볼 때 설교에서 믿음을 배우고 교훈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은 불성실의 표적이다. “만일 당신들이 회개를 했다면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수고하라”고 박스터는 노동자 신도들에게 말했다. 그는 말했다.
“사리를 아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박식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가 사는 목적을 알아야 하며, 그의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서 자신의 뜻을 그대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무지함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학자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이 만일 지식에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랑과 모든 순종에서도 면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이 없다면 이것 중 어느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들이 직업에서 일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늘의 일들의 지식을 얻고 싶어한다면 오늘이 가지 전에 이를 시작할 것이며 그것을 얻기까지 어떠한 희생이나 고통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자신의 직업을 익히는 데는 7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문제들을 부지런히 배우는 데는 칠 년 중 하루도 바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청교도들은 지식없는 종교적 감정이나 경건한 정서는 무익하기보다 악한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진리를 느끼고 있을 때의 정서라야만 바람직한 정서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느끼고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고 지식없는 감정에 의해 지배될 때 그것은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확실한 표적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순종 없는 지식이 영혼에 파멸을 초래하는 것과 같이 지식과 분리된 감정과 어두운 정신의 충동들도 영혼에 파멸적인 것이다. 진리를 가르침이 목회자의 제일 과제인 것처럼 진리를 배움은 평신도의 제일 과제다.
4) 청교도는 진리의 시행자들이었다. 그들은 재치있는 설교자들이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와 궁정에서 얻는 명성을 버렸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위해 명백하고 솔직한 형식, 엄숙하지만 활기있고 소박한 형식을 택했다. 굿윈은 회심 후에 자기 과시를 포기했다. “나는 재치의 허식과 웅변의 허영이 없이 완전히 확실하고 건전한 말로 설교하겠다는 이 확고부동한 원칙에 도달했다.” 이것은 전형적이었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청교도는 설교자가 할 일은 자신의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며 자신이 박수 갈채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설교를 계획하는 것이라는 점에 있어 명확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 설교는 성경 신앙의 세 가지 즉 타락, 구속, 중생을 중심으로 회전하였으며 이 복음 진리들에 고의적인 단순성이라는 눈부신 옷을 입혔다.
존 플라벨은 말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문체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설교자들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신중성은 화려한 단어들보다는 딱딱한 단어들을 택한다. 단어는 내용의 종에 불과하다. 바위의 자물쇠에 꼭맞는 강철 열쇠는 보물 창고의 문을 열지 못하는 황금 열쇠보다 더 유용하다. 신중성은 양심을 꿰뚫고 심령에 도달하는 하나의 단어를 위해 천 개의 세련된 단어들을 버린다.” 우리도 평범성이 하나님의 열정과 능력의 통로라는 것을 경험한다.
5) 청교도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고 주님을 섬기는 데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있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삶의 주된 세 가지 특징이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회자>는 목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권고들로 시작한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결여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한 여러분의 은혜가 활발하고 생기에 넘쳐 계속 발휘토록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연구한 설교를 자신에게 하라. 그러므로 자신의 심령을 지켜보라. 육욕과 정욕과 세속적인 기호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라. 믿음과 사랑과 열심의 삶을 유지하라. 집에서 하나님과 많이 거하라. 여러분의 모범이 여러분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의 혀로 말한 바를 취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설교를 잘하는 법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처럼 잘 생활하는 법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설교를 구성하는 법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에 가장 많은 도움이 되는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법을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실제로 위대한 청교도들이 행한 바였다. 그리고 그들의 저술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에 대해 증거한다.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신의 영혼에 설교를 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잘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음식을 자신이 먹고 잘 소화시켜 보지 않은 사람은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지 못한다.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능력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퍼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한 삶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익하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납같은 생활이 해를 주는 것만큼 그들의 금같은 말이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박식하고 거룩한 성직자보다 더 존경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종하고 음탕한 생활로 자신의 가르침을 수치스럽게 하는 사람보다 더 경멸하여 마땅하고 그로 인하여 더 비참하게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칼빈은 말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첫째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강단에 올라갔을 때 목이 부러지는 것이 그에게 더 좋을 것이다.”
청교도 교육자들은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이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뛰어나게 거룩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인쇄된 말이 전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 자체의 권위일 뿐 아니라 그들이 성경의 조명하고 적용하는 힘으로 인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경험적인 성경의 권위이기도 했다. 청교도들이 타인들의 심령과 양심에 말하는 바는 그들이 가르쳐야 하는 진리를 철저하게 자신의 심령과 양심에 실행한 다음에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고 하는 바울의 공식을 이행했다.
영적 권위는 말로 꼭 집어서 나타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권위와 마주칠 때 알아볼 수 있다. 영적 권위는 성경에 대한 양심의 신실성과 합성된 산물이며, 하나님의 실재와 위대성에 대한 생생한 인지이며,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확고한 열망이며, 깊은 자기 조사와 철저한 자기 부정이며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사모함이며, 인간을 향한 편견없는 동정이며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솔직한 순진성, 곧 솔직성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반면에 지식에 있어서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신적 권위에 복종함으로 권위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형은 죽음과 같은 무거운 짐 아래에서 초자연적으로 일으킴을 받은 세례의 형태이다.
위대한 청교도들은 그들의 시대에 이 원형으로 살며 나쁜 건강과 환경적 혼란과 빈궁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나태한 심령과 싸우며 ‘생명과 빛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므로 3세기 반후에 그들이 설교를 위해 준비한 바를 읽는 우리들은 그들의 권위가 우리에게도 여전히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애정깊고 실제적인 영국 작가들’의 저술들을 참조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의 시야는 밝아지고 그의 생각은 정화되고, 그의 심령은 분발된다. 그는 겸손하여져 가르침을 받아 활기를 얻고, 회개 가운데 낮아지고 보장 가운데 높아진다. 이보다 더 유익한 경험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슬프게도 라오디게아인들이다. 그들은 자만하고 잠들어 있고 천박하고 숨이 막혀 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영혼의 창문을 열고 17세기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