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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투망도投網圖 / 홍해리
무시로 목선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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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網圖』선명문화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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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지는 꽃에는 향기가 있다
한겨울 잠든 지붕 아래
밤새도록 도굴한 하얀 뼈
백지에 묻는다
내 영혼늬 그리운 밥상, 따순
뼈와 뼈에 틈색 난다
빛을 내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그대와 나의 살피
그곳에 피어나는 노래
-----영원을 노래하라 우주를 노래하라
생명을 노래하라 자연을 노래하라
영원은 찰나 속에 묻고
찰나는 영원 속에 있어
그들을 잇는 밀삐는 하나라네-----
절필하라 절필하라 외치며
추락하는 마침표들
백지 위에 허상의 집을 짓고
향기 나는 뼈로, 부드러운 뼈로
현현한 나의 시여
지지 않는 꽃에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모순으로 마감하는
나의 뼈여, 나의 시여.
시집『푸른 느낌표』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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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35) 절정을 위하여
조선낫 날 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위 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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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종(鐘)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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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초여름에서 늦봄까지
38) 난蘭과 시詩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인女人의 중심中心 실한 무게의 남근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졸시 "난꽃이 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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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가을 - 홍해리
만났던 이들을
모두 버리고
이제 비인 손으로
돌아와
푸른 하늘을 보네
맑아진 이마
오랜만에
만나는
그대의 살빛
無明인
내가
나와 만나
싸운다
~~~~~~~~~~~~~~~~~
40) 가을 단상
한때는
오로지 올라가기 위해
올라서기 위하여
올라갔었지마는
이제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
내려가는 일
아름답게 내려가는 일
산천초목마다
저렇듯 마지막 단장을 하고
황홀하게 불을 밝히니
하늘이 더 높고 화안하다
들녘의 계절도
무거운 고개를 대지의 가슴에 묻고
깊은 사색에 젖어
이제 우리 모두 우주의 잠에 들 때
맑게 울려오는 가락
천지 가득 퍼지고
잔잔히 번지는 저녁놀
들판의 허수아비를 감싸안는다
산자락 무덤가의 구절초도
시드는 향기로 한 해를 마감하고
그리고
과일이 달려 있던 자리마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가 되니,
오르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기 위하여
아름답게 내려가기 위하여
깊이 깊이 껴안기 위하여
오르는 것뿐.
~~~~~~~~~~~~~~~~~~
41) 가을 연가
이런
저녁녘에 홀로 서서
그대여
내 그대에게서
숨 막히게 끝없는 바다를 보노니,
그 바다를 가로지르는
맑은 바람 속에서
물소리에 씻겨
막막하던 푸르름
애타던 일
모두 잔잔해지고,
맑은 넋의 살 속
흘러가는 세월의 기슭에
그리움이란 말 한 마디
새기고 새기노니,
기다린다는
쓸쓸함이란 아픔도
화려하기만 한
이런 가을 저녁에
그대여.
~~~~~~~~~~~~~~~~~
42) 가을빛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깨이다
비온 다음
투욱 툭
튀어나오는 가을빛
맑은 살의 깊은 잠을 위하여
햇살은 부숴지고 있느니
이 따스함이여
솔잎 사이
부드러운 바람은 영글어
혼자서 생각으로 일어서고 있느니
반야여
별빛도 익어
뚜욱 뚝 떨어지는 가을밤
은빛 이마에 빛나는
수수밭 위의 기러기 울음
한 점
두 점
깊어가는 작별인사.
~~~~~~~~~~~~~~~~
43)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먼저 떠나간 시인들의 눈빛이
비취로 풀려 하늘에 찬다
하늘 가득 보석으로 반짝이다
지상으로 지상으로 내린다
그들이 남겨놓은 노래들이
노을처럼 그리움처럼
밤새도록 적막강산을 가득 채우고
사람들은 저녁이 와도
등불을 밝히지 못한다
가을이 오면
허공중에 떠돌던
마른 뼈다귀 같은 비애를 안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으로 가라
한 줄의 시를 찾아
허수아비 목쉰 노래를 따라가면
저 높고 푸른 하늘밑
누구도 채우지 못하는 공간을
맑은 영혼의 가락으로
저들 노래들이 와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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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하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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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5월에 길을 잃다
팍팍한 길 나 홀로 예까지 왔네
나 이제 막막한 길 가지 못하네
눈길 끄는 곳마다
찔레꽃 입술 너무 매워서
마음가는 곳마다
하늘 너무 푸르러 나는 못 가네.
발길 닿는 곳마다 길은 길이니
갈 수 없어도 가야 하나
길은 모두 물로 들어가고
산으로 들어가니
바닷길, 황톳길 따라 가야 하나
돌아설 수 없어 나는 가야 하나.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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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사랑이여 가을에는
- 향부자香附子
사랑이여 가을에는
네 몸에 불을 질러라
다 태워버려라
한여름 피어오르던 짙은 젊음
이제 마른 풀잎으로 남아
시든 허상뿐
겉불을 질러
겉으로 무성한 허무의 껍질
다 태우고 나면
허망한 잿더미
바람에 풀풀 날리고
다 쓸려가고 나면
남을 것은 이 지상엔 없다
땅 속 깊이 묻혀
불로도 타지 않고,
죽지 않고 박혀 있는
사랑의 뿌리
다시 캐내어
불로 사루고 사루면
까맣게 남는 새까만 알갱이
그것도 사랑은 아니다
다시 씻고 부시고 닦으면
한 줌 금으로 남을까
다 타서 없어진
네 사랑이 향기로울까
사랑이여
이 가을에는
네 몸에 불을 질러라
다 태워버려라.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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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시詩를 찾아서
세상이 다 시인데,
앞에서 춤을 추던 놈들
눈으로, 귀로 들어와
가슴속에서 반짝이다
둥지를 틀고 있다
바다에 그물을 친다
나의 그물은 코가 너무 커
신선한 시치 한 마리 걸리지 않는다
싱싱한 놈들 다 도망치고
겨우 눈먼 몇 마리 파닥이는 걸
시라고, 시라고 나는 우긴다
오늘밤엔 하늘에 낚시를 던져
별 한 마리 낚아 볼까
허공의 옆구리나 끌어당겨 볼까
물가에 잠방대는 나의 영혼
지는 노을이나 낚을까 하다
미늘만 떨어져 나가고
수줍게 옷고름 푸는 별도 잡지 못하고
천년이 간다
길은 산보다 낮은데
나는 산 위에서
우모羽毛 같은 몸으로
천리는 더 가야 하리라
시를 만나려면.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48) 사랑의 뿌리
지난 봄날 나는 너를 보냈다
그 동안 든 정 때문에 찰칵
마지막 사진을 찍고
모를 것이 정이라고
그간 서로 붙어 살아왔다고
떠나려 하지 않는 너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했지만
뿌리는 두고, 너는
몸만 가버렸다
필요 없는 사랑은 화근거리
사랑이면 은밀히 묻어두었을 것을
사랑의 오독이었을까
시간이 가면
뿌리도 저절로 솟아오르리라
지층 깊이 박혀 있는 너를 보내려
다시 입 꽉 다물고 촬영을 하고
몽혼을 하고
집게로 뿌리를 물고 뽑아올린다
바르르 바르르 몸이 떨리고
자지러질 듯 혼절할 듯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너도 나도 울고 있었다
나도 너를 떠나보내기 아쉬웠던가
재차 마취를 하고
무지막지하게 떨치려 해도
옴짝달싹도 않던 너---
드디어 손을 놓고 너는 울었다
너 있던 자리 얼기설기 꿰매고
허탈과 통증으로 일그러진 한밤
시커먼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너의 흔적이, 너의 상처가,
뼛속의 적막이 온몸을 찍어누른다
사랑은 부드러운 힘,
지독한
또는
악랄한.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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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금란초金蘭草
무등無等의
산록
금빛
화관을 이고
황홀한
화엄세계를
꽃
한 송이로
열고 있는
여자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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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상사화相思花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 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시집『푸른 느낌표!』2008,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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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산벚나무 꽃잎 다 날리고
―隱寂庵에서
꽃 지며 피는 이파리도 연하고 고와라
때가 되면 자는 바람에도 봄비처럼 내리는
엷은 듯 붉은빛 꽃 이파리 이파리여
잠깐 머물던 자리 버리고 하릴없이,
혹은 홀연히 오리나무 사이사이로
하르르하르르 내리는 산골짜기 암자터
기왕 가야할 길 망설일 것 있으랴만
우리들의 그리움도 사랑도 저리 지고 마는가
온 길이 어디고 갈 길이 어디든 어떠랴
하늘 가득 점점이 날리는 마음결마다
귀먹은 꽃 이파리 말도 못하고 아득히,
하늘하늘 깃털처럼 하염없이 지고 있는데
우리들 사는 게 구름결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가는 길이 물길 따르는 것일지라
흐르다 보면 우리도 문득 물빛으로 바래서
누군가를 위해 잠시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있으랴
재자재자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소리 따라
마음속 구름집도 그냥 삭아내리지마는
새로 피어나는 초록빛 이파리 더욱 고와라.
(시집『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
52) 먹통사랑
제자리서만 앞뒤로 구르는
두 바퀴수레를 거느린 먹통,
먹통은 사랑이다
먹통은 먹줄을 늘여
목재나 석재 위에
곧은 선을 꼿꼿이 박아 놓는다
사물을 사물답게 낳기 위하여
둥근 먹통은 자궁이 된다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도 어둡고
먹통도 깜깜하다
살아 있을 때는 빳빳하나
먹줄은 죽으면 곧은 직선을 남겨 놓고
다시 부드럽게 이어진 원이 된다
원은 무한 찰나의 직선인 계집이요
직선은 영원한 원인 사내다
그것도 모르는 너는 진짜 먹통이다
원은 움직임인 생명이요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직선이 된다
둥근 대나무가 곧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듯
탄생의 환희는 빛이 되어 피어난다
부드러운 실줄이 머금고 있는
먹물이고 싶다, 나는.
~~~~~~~~~~~~~~~~~
53) 엽서
시월 내내 피어오르는
난향이 천리를 달려 와
나의 창문을 두드립니다
천수관음처럼 서서
천의 손으로
향그런 말씀을 피우고 있는
새벽 세시
지구는 고요한 한 덩이 과일
우주에 동그마니 떠 있는데
천의 눈으로 펼치는
묵언 정진이나
장바닥에서 골라! 골라! 를 외치는 것이
뭐 다르리오마는
삐약삐약! 소리를 내며
눈을 살며시 뜨고
말문 트는 것을 보면
멀고 먼 길
홀로 가는 난향의 발길이
서늘하리니,
천리를 달려가 그대 창문에 닿으면
'여전히
묵언 정진 중이오니
답신은 사절합니다'
그렇게 받아 주십시오
그러나
아직 닿으려면 천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
54) 지독한 사랑
나,
이제
그대와 헤어지려 하네
지난
60년 동안 나를 먹여 살린
조강지처
그대를 이제 보내주려 하네
그간 단단하던 우리 사이
서서히 금이 가고
틈이 벌어져
이제 그대와 갈라서려 하나
그대는 떠나려 하지 않네
남은 생을 빛내기 위해
금빛 처녀 하나 모셔올까
헤어지는 기념으로
사진도 두 번이나 찍고
그대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던
나의 나태와 무관심을 나무랐지만
그대를 버리기
이렇게 힘들고 아플 줄이야
이 좋은 계절
빛나는 가을에
오, 나의 지독한 사랑,
6번 어금니여
나 이제 그대와 작별하려 하네!
~~~~~~~~~~~~~~~~~~~~
55) 白宮 속 까만 씨앗을 위하여
1
작년 여름
죽을둥살둥 죽-을-둥-살-둥
2층 지붕 TV 안테나까지 감고 올라가
하늘등을 달고 종을 울리던
말라버린 나팔꽃 줄기를 본다
아직도 쇠 파이프를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다
이미 길은 끊어지고
목숨도 다했지만
죽어서까지도 필사적이다.
2
올라갈수록 이파리도 커지고
줄기도 튼실해지던 너
네가 떨어뜨린 씨앗들이
올해도 마당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길을 찾아가는 것은 길을 내는 일
꽃을 피우는 일은 잠깐
그 아름다운 찰나를 위하여
너는 온몸으로 몸부림을 쳤다
얼마나 힘든 노역이었더냐
너의 몸이 손이었다
일손이었다.
3
몸으로 파이프를 장악하여 너는
왼쪽으로, 위로만 방향 지시를 했지
그것이 무슨 예언이었을까
아래쪽의 비난의 소리를 묵살하고
고통의 달콤한 맛을 즐기려 했을까
父祖의 권위를 지키고 싶었을까.
4
밑에서 뿌리를 잘라 놓아도
몸 안의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짜 올려
마지막 꽃송이를 피우고 나서야
잎은 시들고 줄기는 말라 파이프에 매달렸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힘으로
천리 먼 길 白宮 속 까만 씨앗을 익혀
피의 족보를 쓰는 독기와
서럽던 역사도 있어 너는 아름답다.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56) 찔레꽃 필 때
제 가슴속
하얀 그리움의 감옥 한 채 짓고
기인긴 봄날
홀로
시퍼렇게 앓고 있는 까치독사
내가 줄 게 뭐냐고
먼 산에서
우는 뻐꾸기
해배될 날만 기다리는
오동나무 속
새끼 딱따구리
까맣게 저무는 봄날---.
~~~~~~~~~~~~~~~~
59) 조팝나무꽃
숱한 자식들
먹여 살리려
죽어라 일만 하다
가신
어머니,
다 큰 자식들
아직도
못 미더워
이밥 가득 광주리 이고
서 계신 밭머리,
산비둘기 먼 산에서 운다.
~~~~~~~~~~~~~~~~~~~~
60) 꽃다지꽃
꽃에서 꽃으로 가는 완행열차
나른한 봄날의 기적을 울리며 도착하고 있다
연초록 보드란 외투를 걸친 쬐그마한 계집애
샛노랗게 웃고 있는 앙증맞은 몸뚱어리
누가 천불나게 기다린다고
누가 저를 못 본다고
포한할까 봐 숨막히게 달려와서
얼음 녹아 흐르는 투명한 물소리에, 겨우내내
염장했던 그리움을 죄다 녹여, 산득산득
풀어 놓지만 애먼 것만 잡는 건 아닌지
나무들은 아직도 생각이 깊어 움쩍 않고
홀로 울고 있는 초등학교 풍금소리 가득 싣고
바글바글 끓고 있는 첫사랑,
꽃다지꽃.
~~~~~~~~~~~~~~~~~
61) 고추꽃을 보며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오랫동안 햇빛에 취한 너를 보며
내 홀로 골몰하는 것은
너의 우화등선
아니 수중 침전을 위해서인가
드디어
네가 죽어 눈앞이 환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어, 시원해,
잘 익어 곰삭은 고추장 만세!
~~~~~~~~~~~~~~~~~
62) 사랑은 덧없는 덫
-나팔꽃
1
금빛
햇살로
열려
바르르
떨다
주름주름
말리는
陰脣
2
허공만
가득한
대낮,
소리없이
지는
통꽃잎,
꽃잎들
3
사랑은
덧없는
덫.
~~~~~~~~~~~~~~~~
63) 點心에 대하여
점심은 한가운데 점을 보는 것이다
오늘 점심은 마음에 까만 점을 놓는다
아니, 가슴에 불을 켠다
배꼽은 텅 빈 바다에 둥둥 떠 돌고 있다
오늘 점심은 2500원짜리 자장면으로 때운다
매끄러운 면발의 먼 길을 들고 나면
전신으로 졸음이 솔솔 불어온다
자장자장 자장가도 흘러든다
금방 그릇 가득 희망과 절망이 출렁인다
2500원이면 퇴계 선생 두 분과
은빛 하늘을 날아가는 학이 한 마리
자장면을 비울 때는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해야 짜장,
맛이 더 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와 나 사이의 틈새를 날릴 소주 한잔 속에
가벼운 봄날을 새 한 마리 졸고 있다
도포를 입으면 도포짜리
삿갓을 쓰면 삿갓짜리가 되지만
도포도 없고 삿갓도 없어
봄날이 짜릿짜릿하다
슬픔의 힘은 아름답고 점심은 즐겁다
퇴계 두 분과 한 마리 학을
까만 자장면과 바꾸는 일은 위대한 거래다
눈을 감으면
세 마리 학이 나른나른 날고 있다.
~~~~~~~~~~~~~~~~~~~~
64) 추억, 지다
한여름 다 해질녘
봉숭아 꽃물을 들인다
꽃을 따 누이의 손톱마다
고운 물을 들인다
이쁜 반달 손톱 속에는 벌써
첫눈이 내린다
매미 소리 한철 같은 누이의
첫사랑이 내린다
추억이 짓는 아스라한 한숨소리
손톱 속으로 스며들고
손가락 꼭꼭 싸맨 그리움이
추억추억 쌓이고 있다
해 설핏한 저녁에 꽃물을 들이는
눈썹 마당에 이는 바람인 듯
슬슬슬 어스름이 내릴 때
가슴속에선 누가 북을 치고 있는지
다소곳 여민 적삼 안으로
그리움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입술 촉촉 젖어 살짝 깨무는 소리
어스레한 누이의 젖은 눈가로
봉숭아꽃 하나 둘 지고 있었다.
~~~~~~~~~~~~~~~~~~~~
65) 처음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겨우냐
'첫'자만 들어도 가슴 설레지 않느냐
첫 만남도 그렇고
풋사랑의 첫 키스는 또 어떠냐
사랑도 첫사랑이지
첫날밤, 첫새벽, 첫정, 첫걸음, 첫나들이
나는 너에게 마지막 남자
너는 나에게 첫 여자이고 싶지
첫차를 타고 떠나라
막차가 끊기면 막막하지 않더냐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지만
세상은 새롭지 않은 것 하나 없지
찰나가 영원이듯
生은 울음으로 시작해 침묵으로 끝나는
물로 시작해 불로 끝나는
홀로 왔다 홀로 가는 긴 여로
처음이란 말이 얼마나 좋으냐.
~~~~~~~~~~~~~~~~
66) 찔레꽃
장미꽃 어질머리 사이
찔레꽃 한 그루
옥양목 속적삼으로 피어 있다.
돈도 칼도 다 소용없다고
사랑도 복수도 부질없다고
지나고 나서야 하릴없이 고개 끄덕이는
천릿길 유배와 하늘 보고 서 있는 선비.
왜 슬픔은 가시처럼 자꾸 배어나오는지
무장무장 물결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리움으로
세상 가득 흰 물이 드는구나.
밤이면 사기등잔 심지 돋워 밝혀 놓고
치마폭 다소곳이 여미지도 못하고 가는
달빛 잣아 젖은 사연 올올 엮는데,
바람도 눈 감고 서서 잠시 쉴 때면
생기짚어 피지 않았어도
찔레꽃 마악 몸 씻은 듯 풋풋하여
선비는 귀가 푸르게 시리다.
~~~~~~~~~~~~~~~~~~~
67) 처녀치마
철쭉꽃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
68) 황홀한 봄날
우이도원牛耳桃源 남쪽
100년 묵은 오동나무
까막딱따구리 수놈이
딱딱딱, 따악, 따앆, 따앜,
빨간 관을 자랑하며
동쪽으로 문을 내고
허공을 찍어 오동나무 하얀 속살을
지상으로 버리면서
집짓기에 부산하고,
암놈은 옆의 나무에서
따르르르, 따르르르, 옮겨 앉으며
딱, 딱, 딱,
먹이를 캐고 있다
새들마다
순금빛 햇살에 눈이 부셔
물오른 목소리로 색색거리고,
연둣빛, 연분홍, 샛노랑 속에
세상을 오르고 내리면서
버림으로써, 비로소, 완성하는
까막딱따구리의
황홀한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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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투명한 슬픔
봄이 오면 남에게 보이는 일도 간지럽다
여윈 몸의 은빛 추억으로 피우는 바람
그 속에 깨어 있는 눈물의 애처로움이여
은백양나무 껍질 같은 햇살의 누런 욕망
땅이 웃는다 어눌하게 하늘도 따라 웃는다
버들강아지 솜털 종소리로 흐르는 세월
남쪽으로 어깨를 돌리고 투명하게 빛난다
봄날은 스스로 드러내는 상처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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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개화開花
바람 한 점 없는데
매화나무 풍경이 운다
아득한 경계를 넘어
가도 가도 사막길 같은 날
물고기가 눈을 뜬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꽃 피는 소리에 놀라
허공에서 몸뚱이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
꽃그늘에 앉아
술잔마다 꽃배를 띄운던
소인묵객騷人墨客들
마음 빼앗겨
잠시 주춤하는 사이
뼈만 남은 가지마다
폭발하는,
오오, 저 푸른 화약花藥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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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바늘과 바람
내게 허공이 생길 때마다 아내는 나의 빈 자리를 용케도
찾아내어 그 자리마다 바늘을 하나씩 박아 놓습니다 한 개
한 개의 바늘이 천이 되고 만이 되어 가슴에 와 박힐 때마다
나는 신음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비인 들판을 달려 갑
니다 동양의 모든 고뇌는 다 제 것인 양 가슴 쓰리며 하늘을
향하여 서른 여섯 개의 바람을 날립니다 이제까지는 그 바
람이 바람으로 끝이 나고 말았지마는 이제는 바람의 끝에서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새벽녘 아
내의 아지랑이로 넘실대는 파도의 기슭마다 은빛 금빛 비늘
을 반짝이는 고기 떼들이 무수히 무수히 하늘로 솟구쳐 오릅
니다.
(시집『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1980)
홍해리 시인
본명 洪峰義,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시집 『투망도』(선명문화사, 1969) 『화사기』(시문학사, 1975) 『무교동』(태광문화사, 1976) 『우리들의 말』(삼보문화사, 1977)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민성사, 1980) 『홍해리 시선』(탐구신서 275, 탐구당, 1983)『대추꽃 초록빛』(동천사, 1987) 『청별』(동천사, 1989) 『은자의 북』(작가정신, 1992) 『난초밭 일궈 놓고』(동천사,1994) 『투명한 슬픔』(작가정신, 1996) 『애란』(우이동사람들, 1998) 봄, 벼락치다 (2006년)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현재 <우리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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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홍해리 시인님의 신작이 올라 온 줄 알고 클릭을 했습니다. 오늘 올리신 작품은 제가 2년 전에 이 공간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새로운 작품 부탁해도 될까요?
좋은 시 감상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