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 방경일
3.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1) 업보윤회의 성립 시기
업보윤회는 붓다의 출세 이전에 이미 그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에 의해 업보윤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보다 오랜 전통을 가진 자이나교의 경전에
"자제와 고행에 의해서 과거의 모든 업을 소멸하고
최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붓다가 설한 ‘업과 의식과 갈애의 결합’에 의해
윤회가 전개된다는 사고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업이 윤회의 동력인자라는 인식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조준호는 일반적으로 붓다 이전에 나타난 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전변설(轉變說:우주자아인 브라흐만(Brahman)이 세상을 만든 후
스스로 세상 속으로 투사해 들어갔다는 주장)과
범아일여설(梵我一如說: 개별자아인 아트만(Ātman)이
우주자아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될 때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주장)을
붓다 이후에 만들어진 사상으로 본다.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은 한 쌍의 잘 짜여진 진리체계로 볼 수 있는데
그 중간에는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합일하지 못하면 업보에 의한 재생,
즉 업보윤회를 계속해야 한다는 연결고리가 있다.
전변설 → 업보윤회설 → 범아일여설
<도표1. 전변설, 업보윤회설, 범아일여설의 관계>
여기서 전변된 아트만들이 업을 극복하고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이다.
→예 → 윤회의 종식
Ātman → Brahman과 합일--
→아니오→윤회의 지속
<도표2. 범아일여설의 구조>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에 대한 조준호의 주장이 옳다면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 업과 윤회의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인데
이는 ‘원래 바라문교나 힌두교에는
업과 윤회라는 개념이 없었다.’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업과 윤회라는 인식은 바라문교나 힌두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것이었으며
붓다를 비롯한 사문종교의 고유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현생에 만든 업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라는 업보윤회의 사상은
카스트제도에 의해 고정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브라만 계급에게는 일종의 위협이다.
따라서 바라문교가 힌두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사문종교의 업보윤회 사상을 흡수하였다는 가정이 타당성을 가진다면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은 불교의 탄생 이후에 성립된 사상체계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업보윤회라는 개념의 성립 시기가
붓다 이전이라면 윤회와 무아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다.
2) 붓다 깨달음의 핵심 내용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 크고 작은 성과를 얻은 사문 고타마가
우루벨라 숲의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의 가르침을 통해 추론해 보면 연기와 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체가 인연생기(因緣生起)한 것임을 말하는 연기는
독립되고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다는 무아임을 보증하는 것이므로
결국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의 핵심 내용은 무아인 것이다.
연기 ---보증---→ 무아
<도표3. 연기와 무아의 관계>
게다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 붓다의 출가 동기를 생각해 보면
무아가 사문 고타마를 붓다로 만들었다는 데 더욱 확신이 간다.
사문 고타마가 극심한 고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행에도 불구하고
생로병사에서 오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자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정을 통해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무아를 깨닫고 난 즉시 생로병사의 고통이 사라졌던 것이다.
생로병사를 겪는 자아가 없다면 생로병사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3)무아의 의미와 역할
(1) 무아의 의미
무아는 산스크리트로 'Anātman'인데 ātman이라는 단어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an이 붙어서 형성된 단어이다.
여기서 문제는 ātman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점이다.
ātman에는 재귀대명사인 자기 자신과
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Ātman)의 의미가 있는데
붓다는 과연 어느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 접두어 an을 붙였을까?
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를 부정하려고 했다면
당시에 이미 우주자아와 개별자아의 개념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전변설과 범아일여설을
고타마 붓다 이후에 형성된 사상으로 보는 조준호는
무아가 Ātman(우주자아의 일부인 개별자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
‘일반적인 자아개념이나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준호의 주장은 초기불교의 경전과 우파니샤드의 문헌들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한 것이므로 상당히 타당성이 높다.
필자가 조준호의 주장에 동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후에 힌두교에서 출현한 진아(眞我)라는 단어의 개념 때문이다.
‘The Self’라는 영어로 번역되는 진아의 원어는 바로 Ātman인데
개별자아인 동시에 우주자아로 볼 수 있는 이 진아(Ātman)의 개념이
불교의 무아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붓다가 주창한 무아의 의미를
‘우리가 평소에 나라고 인식하는 것은 없음’이라고 정의한다.
무아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무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붓다는 나를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로 해체하여
살펴봄으로써 무아임을 증명하는데 이는 ‘자아해체’를 통한 ‘자기소멸’이다.
다시 말해 무아라는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아해체를 통한
자기소멸이라는 방법론적인 측면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무아의 역할
무아는 불교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윤회와 관련된 역할은 윤회의 고리를 끊게 하는 것이다.
윤회의 기본전제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아의 경우에는 자아 즉, 윤회할 주체가 없으므로
윤회라는 법칙이 아예 성립할 수가 없다.
안옥선과 같이 업보윤회를 통해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사람은
윤회의 기본전제는 업이므로 자아가 없어도 윤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업을 성립시키는 것은 오온으로 성립된 임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아이므로 자아가 없는 쪽이
보다 확실하고 완벽하게 윤회를 단절하는 것이다.
업보윤회의 발생 과정이 '자아→업→윤회'이므로
최초의 단계인 자아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발생하지 않아 윤회는 자동적으로 단절된다.
다시 말해 무아는 업을 발생시키지 않으므로
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윤회는 당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무아이면 윤회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아를 체득한 붓다라 할지라도
그의 임시 자아가 만들어 내는 업은 의식과 갈애를 만나 윤회를 성립시키게 된다.
만약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가 업을 만드는 생명체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붓다는 갈애가 없고 사후 그의 의식은 단절될 것이므로
그의 사후에 그가 만든 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윤회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불교 수행자가 아닌 누구라도,
나아가 무아를 깨닫지 못한 생명체라도
갈애가 없는 사람은 결코 윤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붓다도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전자의 경우에는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
갈애를 없애는 것 외에 특별한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문제가,
후자의 경우 아무리 수행해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문제가 각각 발생한다.
따라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아이면 윤회는 없다’는 명제를 인정하는 방법뿐이다.
4)무아와 윤회의 관계
윤호진과 조준호의 연구를 통해 볼 때 윤회라는 개념은
고타마 싯다르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인도 사람들은
생명체가 죽게 되면 재생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고통인지 행복인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하더라도
윤회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진리체계로 자리 잡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나중에 불교에서 받아들여 체계화한 것으로 보이는 업보윤회 역시 마찬가지다.
생로병사를 고통으로 파악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를 단절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는데 무아를 체험하고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물론이고 생로병사의 원인인 윤회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붓다가 제시하는 무아는 윤회의 주체를 없애 버림으로써
윤회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자내증이란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 무아임을 깨달은 사람은
현재의 생을 마친 다음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무아는 윤회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의 진리체계인 것이다.
이렇게 발생의 순서로 보나, 종교적인 교리체계로 보나
무아는 윤회라는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므로
둘 사이에는 어떤 충돌이나 모순도 발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진리체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무시하고 무아와 윤회를
두 개의 독립된 주장으로 본다면 충돌과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