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당회의 기원
칼빈의 제네바와 초기 네덜란드개혁교회
1537넌에 제네바 정부에 제출한 「제네바의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조항 (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 glise et du clute a Gen ve)」에서 파렐 (Farel)과 칼빈은 교회치리와 교회치리법의 제정이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주장했다. 제네바 당국은 이 제안을 수락하는 것 보다 파렐과 칼빈을 추방하는 것을 선택했다. 파렐과 칼빈은 1538년에 제네바를 떠나야 했고, 파렐은 뇌샤뗄 (Neuchatel)에 칼빈은 부써에 의해 강요된 초청으로 스트라쓰부르크에 각각 정착하게 되었다. 추방 사건 후 3년만인 1541년에 제네바 당국은 치리회 (consistoire. 이 단어는 오늘날 당회로 번역됨) 설립을 인준하는 「교회법 (Ordonnances eccl siastique)」을 통과시킨다.
이 치리회의 설립동기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당시 정치적으로 베른 (Bern)의 영향 아래 있었던 제네바가 1540년에 베른으로부터 영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치리회 설립을 강요당하게 되는데, 이것을 치리회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유력한 이론이다. 그때 제네바는 자신의 도시가 작다는 핑계로 그런 기구가 불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해 뒤에 치리회는 설립되었다. 제네바는 1540년에 칼빈에게 제네바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나, 칼빈은 부써와 함께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요청에 즉각 부응하지 않았다. 대신에 칼빈은 스트라쓰부르크 목사들의 충고에 따라 제네바 정부에 삐에르 비레 (Pierre Viret)를 초청하도록 권면했고, 제네바 정부는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비레는 1541년 1월 중순경에 제네바에 도착했고, 그의 주도아래 동년 4월 5일에 치리회의 초안이 작성되었으나, 인준은 즉각 이루어지지 않고 연기되어,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한 (9월 13일에 도착) 이후인 11월 20일에야 인준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제네바 치리회는 명칭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미 존재했던 이웃 도시들인 베른 (쮸리히의 예를 따라 1528년 설립)이나 쮸리히 (1525년에 설립)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베른과 쮸리히의 치리회 (명칭: Chorgericht = Ehegericht = Consistorium)는 모두 6명, 즉 소의회에서 2명, 대의회에서 2명, 그리고 목사 2명으로 구성된 반면에, 제네바의 치리회원은 약 25명으로써, 해마다 선출되는 12명의 장로 [소의회에서 2명+60인회에서 4명+200인회에서 6명]와 제네바시의 모든 목사 [시대별로 9명에서 25명까지]들로 구성된다.
베른과 쮸리히 치리회는 정부 주도적인 시민 법정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제네바 치리회는 사회-도덕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목회적 성향을 지닌 교회 법정이었다. 이러한 목회적 치리회의 성격은 스트라쓰부르크의 치리회 (Kirchenpfleger. 7개의 교구에서 각 3명씩 모두 21명으로 구성)와 비슷하다. 제네바 치리회의 목회적 성격은 칼빈이 장로의 자격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적인 지혜를 지닌 (sur tout craignans dieu et ayans bonne prudence spirituelle)’ 사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1561년의 「제네바 교회의 교회법 (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de l'Eglis de Geneve)」에는 당시 제네바 주위 도시들의 치리회 (Consistorium)와 구분되는 ‘교회치리회 (Consistoire Ecclesiastique)’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제네바 치리회의 이런 교회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치리회를 오늘날 개교회의 당회와 비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성형태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당회와는 달리 당시 제네바 치리회는 제네바시에 있는 모든 교회를 감독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그 일은 교회만의 일이 아니라, 시정부와의 공동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이성에 대한 고려 없이 칼빈 시대의 제네바 치리회를 오늘날 당회의 실제적인 기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제네바 치리회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개교회의 당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치리권을 가진 시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541년과 1561년의 「교회법」외에 칼빈의 「기독교강요」4권 11장에서도 치리회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모든 사법권은 도덕적 권징에 속하는 것이며 (Tota autem Ecclesiae iurisdictio pertinet ad morum disciplinam, ...)’, 따라서, ‘교회에 세워진 법원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징계를 다루는 (constituta in Ecclesiis iudicia quae censuram de moribus agerent)’ 곳이다.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사법권의 근거를 마태복음 18장의 묶고 푸는 열쇠권능 (potestas clavium)에서 찾는다. 그는 이 열쇠권능을 마 16장과 요 20장에 근거한 말씀선포로서의 열쇠권능과 구별한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 치리권이 시민적인 강제권과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며, 교회가 그와 같은 자신의 영적 권세 (spiritualis potestas)를 행사하지 않고는 바르게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영적 치리권은 기독교 정부나 기독교 국가에서도 폐지될 수 없는 교회의 고유한 영구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이 에라투스주의 (Erastianism: 기독교 국가와 정부에서 교회의 치리권은 국가와 정부에 귀속된다고 주장한 에라스투스에게서 유래됨)의 지지자가 아님을 밝힌다. 칼빈은 교회의 치리권이 한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장로회 (=당회. consessus Seniorum)’에 맡겨진 것으로 보면서, 이 장로회를 시의회 (Senatus)에 비교한다. 4권 12장 7절에서 칼빈은 군주든 평민이든 이 교회의 권징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장로회에 의한 치리권 행사가 소수독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회전체가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내가 다만 여기에 추가하는 것은 사람을 출교시킴에 있어서 이것이 바울이 증거하는 합법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장로들만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시 그 내막을 알고 승인함으로써 동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명한 것은 다수의 평민이 직접 행동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소수의 욕망에 따라 처리되지 않도록 증인과 감시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민적 처벌과 구분되는 교회의 영적 치리권의 독립성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후대의 칼빈적 개혁교회가 영적 치리권의 독립성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근거와 계기가 된다.
1541년과 1561년의「교회법」둘 다 교회직분을 네 가지, 즉 목사 (pastors=pasteurs)와 교사 (=교수. doctors=docteurs)와 장로 (anciens)와 집사 (diacres)로 제시한다. 거기서 목사의 임무는 설교와 성찬집행과 치리시행에 있고, 교사의 임무는 무지나 악한 교리들로부터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을 참된 교리로 교육하는데 있으며, 장로의 임무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감독하는데 있으며, 집사는 두 종류로서 구제와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와 병자, 가난한 자, 과부, 노약자들을 돌보는 집사로 구분된다. 이것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네 직분 가운데 목사와 장로만이 제네바 치리회를 구성한다.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과 1561년의 「벨직 신앙고백」모두 교회의 직분을 세 종류, 즉 목사 (Pasteurs)와 감독 (Surveillans)과 집사 (Diacres)로 분류한다.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이 세 직분이 교회치리회 (=당회. Senat de l'Eglise)를 구성한다. 1571년의 엠던 (Emden) 총노회는 여기에 기초하여 각 교회의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함께 최소한 매주 한 번 당회로 모일 것을 결의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개념과 대동소이한 당회 (kerkeraad), 시찰회 (classis), 지방노회 (provinciale synode), 총회 (=총노회. generale synode)의 명칭과 개념정의는 이미 이 총노회에서부터 나타난다.
1574년의 도르트레흐트 (Dordrecht) 총노회는 엠던 총노회의 당회구성에 대한 조항을 해설함에 있어서, 각기 그 목적에 따라 목사와 장로의 모임과 집사들의 모임이 각각 따로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장로가 부족한 곳에서 집사는 당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함으로써 목사와 장로의 위치와 집사의 위치를 구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581년 미덜뷰러흐 (Middelburg) 총노회에서는 장로가 적은 교회에서는 집사가 당회원이 될 수 있다는 예외규정을 인정했지만, 집사들로 구성되는 집사모임에 관한 조항을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당회에 관한 조항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다룸으로써 당회는 실제로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명시했다. 그리고 이 총노회에서 처음으로 교회직분에 교수직을 포함시킴으로써 네 가지 직분의 기원이 되었다. 1586년의 스흐라펀하허 ('s-Gravenhage) 총노회와 1618-1619년의 도르트레흐트 총노회에서는 한 두 명의 정부인사도 당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당시 교회와 정부의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이어서 각 지방 노회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도르트레흐트 총노회의 이와 같은 결정을 수정하거나 거부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정부인사의 당회 참여는 화란개혁주의 전통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되었다.
노회에서의 성찬 시행 역사: 초기 네덜란드개혁교회
엠던 총노회에서는 노회 폐회시, 노회를 개최한 교회의 여건이 허락될 경우 그 교회와 함께 성찬을 집행할 것으로 결정했다. 1578년의 도르트레흐트 총노회에서는 엠던 총노회의 결정을 수용했으나 ‘그 교회와 함께’라는 문구는 사라졌다. 미덜뷰러흐 총노회에서는 노회가 개최되는 곳에서 성찬이 거행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교회의 여건에 따라 할 수 있다고 대답함으로써, 노회나 총회의 폐회시의 성찬시행은 관례로 자리잡기보다는 선택의 문제로 약화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