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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光 大師 嘉言錄 21
염불의 불가사의한 인연과 공덕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장조각(張朝覺) 여사에 대한 답신
조각(朝覺) 여사 보시오.
서(徐)씨 노부인이 향잿물(香灰水)을 마시고 위독한 병세가 다소 안정될 기미를 보인다니, 이는 그 가족들의 정성스런 마음이 가져온 감응이리다.
하덕목(何德牧) 거사가 시(詩)나 말하기 좋아하고 염불에 마음 쏟지 않는 것은 업장의 힘에 이끌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모르기 때문이오. 가령 어린애에게 동전을 주면 좋아하며 받겠지만, 만약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준다면 그게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받지도 않을 것이오.
거지가 남의 돈 몇 푼을 속여 빼앗기 위해서라도 염불을 하기만 하면 몹시 커다란 착한 뿌리〔善根〕를 심는다는 거 아닌가요? 청(淸)나라 광서(光緖: 마지막 황제의 연호) 18년(1892년) 내가 북경 부성문(阜城門) 밖의 원광사(圓廣寺)에 묵을 때였소. 하루는 한 스님과 함께 절의 서쪽 바깥에서 절로 되돌아 가는데, 열댓 살 남짓된 한 거지 아이가 별로 굶주린 낯빛도 아닌데 동냥을 달라고 계속 뒤따라 오는 거였소.
그래서 내가 염불 한 번 하면 1전(錢)을 주겠다고 제안했다오. 그러나 그가 염불하지 않기에 내가 다시 염불 열 번 하면 10전을 주겠노라고 말했지요. 그래도 염불하지 않기에, 내가 대략 4백전 남짓 들어 있는 돈주머니를 꺼내어 그에게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소.
“네가 염불 한 번 하면 1전을 주마. 그리고 네가 계속 염불하기만 한다면 이 돈주머니의 돈이 바닥날 때까지 1전씩 더 주마.”
그런데도 이 거지는 안타깝게 여전히 염불을 하지 않는 거요. 그래서 내가 끝내 울음이 터져 나오길래 그냥 1전짜리 하나 내던져 주고 떠났소. 이 거지 아이는 정말로 착한 뿌리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던 게오. 돈을 동냥하기 위해서조차도 염불을 하려 하지는 않았으니 말이오. 그 거지가 정말 착한 마음으로 염불을 했다면 매우 큰 이익을 얻었을 것이며, 설사 돈 몇 푼 동냥 얻기 위해서라도 염불만 했다면 역시 커다란 착한 뿌리를 심었을 것이오.
나는 예전에는 대비주(大悲呪)를 지송(持誦)하지 않았소. 그러다가 민국(民國) 21년(1932년) 소주(蘇州)의 보국사(報國寺)에서 폐관(閉關: 結制․安居)할 때였소. 오항손(吳恒蓀) 거사는 그때 북경에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지자 그의 아내가 급히 북경에 전보를 쳐서 그에게 돌아오라고 알린 뒤, 사람을 보국사에 보내어 나에게 대비주를 염송하여 관세음보살 자비 감로를 가피 받은 대비수(大悲水)를 마련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소.
이에 내가 대비주를 세 번 염송한 뒤 가지고 가게 했는데, 그 물을 마시고 금방 위급한 숨을 돌리고 안정되었다는 거요. 그래서 항손이 안절부절할까봐 다시 급히 전보를 쳐서 병세가 더 이상 위급하지 않게 되었으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알렸다오.
그런데 또 그의 아홉 살 난 어린애가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 온몸에 작은 종기가 돋기 시작했다오. 봄철만 되면 유난히 더욱 극성을 부리는데, 해가 갈수록 끊이지 않고 되풀이하며 아무리 약을 써도 별 효험이 없었다는 게오. 그래서 다시 대비수(大悲水)를 간청하길래 해주었더니 마시고 또 금방 나았다오.
이렇게 하여 금세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계속 대비수를 청해 와 매일 몇 번씩 대비주를 염송하게 되었소. 나중에는 요청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길래 큰 그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소. 그러다가 재작년에 영암사(靈岩寺)로 피난 왔는데, 주지가 대비수를 계속 가피해주어야 하겠다고 말해요. 그래 내가 “지금은 병을 살 수도 없고 또한 병 살 돈도 없으니 쌀로 대신합시다”고 대답했다오.
향재(香灰)는 전에 보국사에서도 함께 썼소. 먼 길에 물은 부칠 수 없어도 향의 재는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오. 물론 가까운 곳이라면 재를 쓰지 아니하오. 무석(無錫)에 아주 나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원세개(袁世凱) 총통 아래서 친위병을 하면서 성질이 아주 못되게 길든 모양이오. 술 마시고 노름하며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는데, 담배인도 몹시 심하게 박혔다오. 나이 쉰일고여덟이 되어 금방 밥도 굶을 형편에 눈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지 뭐요.
마침 그의 형이 죽자 진효로가 조문 간 길에 그가 몹시 고생하는 걸 보고 아주 적극적으로 그를 훈계하고 타일렀다오. 그래서 그가 그 날로 술 담배와 고기를 완전히 끊고 매일같이 늘 염불하기 시작했는데, 눈도 금세 다시 좋아지고 완전히 착한 새사람으로 탈바꿈한 거요. 그 뒤 염불을 적극 제창하고 나섰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무서워하여 감히 가까이 할 엄두도 안 냈다오.
그러던 중 학질(말라리아)이 크게 번졌는데, 이 사람이 이 학질 처방으로 동네 환자들을 하나하나 치료해 주어 모두 나았다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 의지하게 되었소. 그래서 지난 4월에는 그가 여나믄 명을 직접 데리고 와서 귀의하기로 하였는데, 과연 어엿하고 노숙한 한 재가 수행인이 되어 있었소. 이 사람 성씨는 화(華)이고 이름은 관천(貫千)인데, 나이가 이미 예순너댓 살이나 되었다오. 이사람 같으면 정말 용감하게 개과천선했다고 말할 수 있겠소.
이번에 향재(香灰) 한 포를 함께 부치니, 이웃 사람들한테 필요한 경우에 쓰기 바라오. 또 학생수양덕목 5권을 보내니 어린아이들에게 읽게 하시오. ‘상례 제례 때 알아야 할 사항’(喪祭須知)도 2권 보내오. 그대의 시부모와 고모, 하덕목의 어머니, 그리고 서씨 노부인들이 모두 연로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일이 닥치면 이 책으로 인연 따라 잘 일깨우고 이끌어 주라는 뜻이오. 절대로 세속의 풍습에 따라 부모나 친지에게 죄악과 허물만 덧보태 주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는 못하게 하시오.
요즘 세상은 옛날 예법이 모두 스러지고 없어서, 상중(喪中)에도 술과 고기를 먹고 심지어 노래 부르고 춤까지 추니 정말 체통이 말이 아니오. 듣건대 어떤 상인 한 사람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대렴(大殮) 때 큰 효자 노릇 한답시고 찾아온 조문객과 함께 술 마시고 소란스럽게 주먹질하며 즐겼다는 구려. 그 마음이 이미 다 죽고 없는 게지요.
만에 하나 타고난 착한 성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결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외다. 정말로 인간짐승이 다 된 거지요. 하지만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兎死狐悲)는 속담도 있지 않소? 그들은 오히려 이런 짐승만도 못한 것이오.
장조각(張朝覺) 여사에 대한 답신 2
조각(朝覺) 여사 보시오.
15일 편지를 받고 서씨 노부인의 병이 크게 호전된 것을 알았소. 무릇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정신의식이 혼미한 경우, 대비주(大悲呪)를 염송하여 관음보살의 자비력을 가피 받은 물〔大悲水〕이나 향잿물〔大悲香灰水〕이나 쌀뜨물〔大悲米水〕을 마시게 하면 모두 밝게 정신을 되찾을 수 있다오. 또 주위에서 염불로 도와주면 본인 스스로 염불하면서 갈 수가 있소. 최근 일이 년 사이에 벌써 세 사람이나 그렇게 하였다오.
염불 공부로 금생에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성으로 간절히 늘 염송해야 하오. 그러나 단지 내생의 착한 뿌리만 심기로 한다면, 비록 장난이나 억지로 한 번 염불한 것도 후세에 반드시 수행할 수 있도록 착한 인연의 싹을 틔우게 되지요.
사실 옛 사람들이 사찰이나 탑을 크게 세운 것도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한 번 쳐다본 인연공덕으로 착한 뿌리를 심게 되길 바랐던 마음에서라오. 이 한 구절의 염불 소리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터전 가운데 심어져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어떤 노인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수행하려 했다오.
그런데 오백 명의 성중(聖衆: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성문 제자들)이 혜안(慧眼)으로 그 노인을 살펴보니 8만겁(劫) 동안 어떠한 착한 뿌리도 심은 것이 없길래, 출가수행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뒤 그를 받아주지 않고 돌려보냈다오. 그래 그 노인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바깥에서 크게 소리 내어 울었소.
이 소리를 들은 부처님께서 그를 불러들여 설법해 주시니, 그도 곧 아라한과를 증득했다오. 당연히 오백 성중은 어찌 된 까닭인지 어리둥절하며 부처님께 여쭈었소.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오.
“이 사람은 무량겁 이전에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급한 김에 나무 위로 기어 올랐는데, 그때 엉겁결에 ‘나무불(南無佛)’ 한 구절 염송한 공덕으로 지금 나를 만나 도(道)를 증득한 것이다. 너희들 성문 대중의 도안(道眼)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인연이 결코 아니란다.”
이걸 보면 스스로 염불하기만 하면 정말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소. 그러나 본인이 염불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사람에게 염불 소리를 듣게 해주기만 하면 역시 착한 뿌리를 심게 된다오.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으면 그 공덕은 정말 커지오.
무석(無錫) 지방에 요즘 염불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오. 어떤 사람이 채식 요리를 잘 하여, 7일간의 염불법회〔佛七〕를 열 때마다 으레히 그를 불러다가 요리를 시켰지요. 그래 그 사람이 매일같이 염불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이 금방 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요.
“아무래도 제가 죽을 것 같은데, 공덕이 없어 좋은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부처님을 저에게 좀 주시면 제가 곧 좋은 데로 갈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대답하였소.
“나는 염불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디에 부처님이 있겠냐?”
아들이 다시 말했다오.
“아버지의 부처님은 많기도 매우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단지 그러마고 한 마디만 말씀하시면 저는 곧 좋은 데로 갈 수 있는 걸요.”
그러자 아버지가 응락했다오.
“그렇다면 네가 필요한 만큼 부처님을 가져 가거라.”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이 죽었다오.
자신은 본디 염불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부처님이 있겠느냐고 말하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다르오. 요리할 때 부엌이 염불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염불하는 소리를 늘상 듣기 때문에, 그 공덕만도 그만큼 매우 크다는 거요.
이는 무심코 듣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만약 유심히 듣는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더 크겠소? 독경 소리 같으면 구절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요. 설사 유심히 듣는다고 하더라도 뚜렷하기 어려울텐데, 하물며 무심코 귓가에 스치는 독경 소리를 얼마나 알아듣겠소? 그래서 염불의 공덕이 특히 뛰어나다고 하는 거라오.
印光 大師 嘉言錄 22
불광(佛光)의 참뜻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불광(佛光)이란 십법계(十法界)1)의 평범한 중생과 성인 부처가 마음 자체에 본래 지니고 있는 지혜의 본체〔智體〕라오. 이 본체는 영명(靈明)스럽고 통철(洞徹)하며 맑고 고요히 항상 존재하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소. 세로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관통하여 시간을 구분지으며, 가로로 시방세계를 두루 퍼져 공간을 감싸버리지요.
텅비었다〔空〕고 말하기에는 만 가지 공덕을 너무 원만히 나투며, 있다〔有〕고 말하기에는 한 티끌조차 전혀 세우지 않으니, 일체의 법(法)에 스며 있으면서 일체의 모습〔相〕을 떠난 것이지요.
범부라고 줄어드는 법 없고 성인이라고 더 늘어나지도 않소. 비록 오안(五眼)2)으로도 볼 수 없고 사변(四辯)3)으로도 표현할 수 없지만, 법(法)마다 모두 그 힘을 이어받고 도처에서 누구나 그를 만날 수 있지요.
다만 중생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광(佛光)을 받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불가사의한 힘을 받아 미혹을 일으키고 악업을 지으며 업장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당하면서 끊임없이 생사윤회를 되풀이하는 거라오. 항상 존재하는 진실한 마음〔眞心〕을 가지고 나고 죽는 허깨비 같은 과보〔幻報〕를 받는 셈이지요.
비유컨대 사람이 술에 몹시 취하면 천지가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천지는 돌지 않으며, 또 길손이 길을 잃으면 사방이 뒤바뀐 듯 생각하지만 역시 사방은 바뀌지 않은 것과 같소. 이는 완전히 허망한 업장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따름이지, 진실한 법〔實法〕은 얻을 만한 게 하나도 없소. 그래서 석가세존께서 부처의 도를 성취하여 불광(佛光)을 완전히 증득하셨을 때 이렇게 탄식하신 것이오.
“참으로 기이하고 또 기이하도다. 일체의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단지 망상과 집착 때문에 증득할 수 없구나.”
만약 망상과 집착만 떠난다면 일체의 지혜〔一切智〕, 자연의 지혜〔自然智〕, 막힘 없는 지혜〔無碍智〕가 저절로 앞에 나타날 것이오. 또 능엄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소.
“미묘한 성품, 원만한 광명, 모든 이름(개념)과 모습(형상)을 떠나 있으니 세계니 중생이니 본래 존재하지도 않다. 허망으로 말미암아 생겨남이 있고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사라짐이 있으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허망이라 부르고 이러한 허망이 사라지는 것을 진실이라고 부른다.”
이는 여래의 더할 나위 없는 보리〔無上菩提〕와 대열반이라는 두 전의(轉依)4)를 일컫는 호칭이오. 한편 반산(盤山) 스님은 이렇게 읊었소.
“마음의 달 홀로 둥그러니 떠, 그 빛 만물을 다 집어 삼키네. 빛이 경계를 비치는 것도 아니고 경계 또한 존재하지도 않네. 마음과 경계 모두 존재하지 않는데 다시 무슨 물건이 있으랴?”
그리고 위산(僞山) 선사는 이렇게 말했소.
“신령스런 빛 홀로 빛나면서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모두 벗어나 있네. 그 자체 항상스런 진실〔眞常〕을 드러내며 말과 글자에 구애되지 아니하네. 마음과 성품은 물듦이 없이 본디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단지 잡념 망상만 떠나면 그대로 여여부동(如如不動)한 부처인 것을!”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갖가지 설법과 가르침은 한결같이 중생들이 본디 지니고 있는 심성을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되돌이켜 원래 근본자리를 찾으라고 가리킴을 알 수 있소. 그런데 중생들은 근기의 우열이 상당히 다르고 미혹의 정도도 각양각색이라, 갖가지 가르침으로 일깨워주고 다양한 법문으로 고쳐 주지 않으면 미혹의 구름이 텅빈 본성을 뒤덮고 있을 터이니, 어떻게 하나하나 자기 마음의 달을 분명히 보게 만들 수 있겠소?
그래서 여래께서 맨처음 불도를 이루신 뒤 대화엄경을 연설하사 곧장 사바세계 바깥의 큰 법을 말씀하시면서, 먼저 숙세의 근기가 뛰어나고 인연이 무르익은 법신대사들만 항상스런 진리를 증득하여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도록 이끄셨소.
그 다음 근기가 둔한 중생들을 순순히 잘 유도하시면서 그들에게 걸맞는 오계(五戒)나 십선(十善)을 연설하여 인간과 천상의 두 부류에게 불도에 들어가는 훌륭한 인연을 맞도록 하거나, 또는 사제(四諦)·십이인연(十二因緣)·육도만행(六度萬行)으로 성문·벽지불·보살의 세 부류에게 불도를 빨리 증득하는 인연을 베풀기도 하였소.
이렇게 아함경(阿含經)으로부터 시작하여 반야경(般若經)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맞추어 설법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점차 수행을 증진하여 본래 심성의 집에 되돌아 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오. 그러나 이때는 부처님의 본래 회포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고 은밀히 감추어져 있었소.
법화회상(法華會上)에 이르러 권법을 열어 실법을 드러내고〔開權顯實〕, 흔적을 열어 본체를 드러내셨으니〔開迹顯本〕, 인간과 천상, 권법과 소승을 모두 일승(一乘)으로 포용하여 세 근기의 중생에게 두루 수기(授記)를 내리시고 출세간(出世間)의 본래 회포를 크게 펼쳤소. 그래서 맨처음의 화엄경과 수미쌍관(首尾雙貫)을 이루면서 처음과 끝이 서로 부합하게 되었으니, 하나의 대사인연(大事因緣) 전체를 남김없이 모두 전하고 당부하신 셈이오.
그런데 또 말세 중생의 근기가 너무도 형편없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여래께서 다시 정토법문 하나를 특별히 열어 상·중·하 모든 근기의 중생들이 성현이나 범부를 가릴 것 없이 현생에 곧장 이 사바 고해를 벗어나 저 극락세계에 왕생한 다음 거기서 점차 무량 광명과 무량 수명의 부처를 증득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소. 이러한 대자대비심은 실로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하고 심오한 것이라오.
불법은 바다처럼 몹시 넓고 깊으니, 어떤 범부중생이 그 근원을 철저히 궁구하여 한 입에 싹 흡수할 수 있겠소? 그렇지만서도 올바른 신심을 낸다면 각자 자기의 분수와 역량에 맞는 이익을 얻을 수 있소. 마치 코끼리나 모기가 바닷물을 들이킬 때 각자 자기 배를 채우고 나면 그만이듯 말이오. 여래께서 세상에 나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하여 각자 이익을 얻도록 하신 것도 이와 마찬가지오.
그런데 말세의 중생은 업장이 몹시 두터운데다가 선근(善根)은 매우 얕고 마음은 좁으며 지혜는 보잘 것 없고 수명은 짧기 그지 없소. 게다가 선지식은 몹시 드물고 악마와 외도는 종횡무진하고 있소. 다른 법문을 수행하여 현생에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며 생사윤회를 벗어나기란 실로 몹시 어렵고도 드문 일이오.
오직 정토 법문 하나만큼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 수행의 성공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했느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믿음과 발원에만 달려 있소. 믿음과 발원만 갖추면 비록 아비지옥에 떨어질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열 번 만의 지극하고 간절한 염불로 부처님 자비가피를 받아 극락왕생할 수 있다오.
여래의 대자대비가 한 물건도 남김없이 두루 제도하는 줄은 정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가운데 이 정토법문이 특히 가장 주도면밀하고 진지함이 감탄스럽기만 하오.
염불 법문의 유래는 진실로 오래 되었소. 우리들의 일념심성(一念心性)이 허공처럼 항상 불변하기 때문이오. 비록 항상 불변하지만, 또한 일념일념이 인연에 따르지요. 그래서 부처세계의 인연에 따르지 않으면 아홉 중생계의 인연에 따르게 되고, 성문·벽지불·보살의 삼승 인연에 따르지 않으면 곧 육도중생의 인연에 따르게 되며, 인간과 천상의 인연에 따르지 않으면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 인연에 따르게 되오.
따르는 인연의 청정과 오염이 다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은 과보로 판이할 수밖에 없소. 비록 본체는 전혀 변하는 게 없지만, 그 작용과 형상은 천양지차가 나는 것이오.
비유하자면 허공에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두운 것과 같소. 허공의 본체는 비록 구름이나 해로 말미암아 늘거나 줄어드는 법이 없지만, 밝게 드러나고 어둡게 가려지는 모습은 함께 나란히 말할 수 없지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래께서 중생들에게 부처를 생각〔念佛〕하는 인연을 짓도록 두루 권하셨소.
“만약 중생의 마음이 부처를 기억하고〔憶佛〕 부처를 생각하면〔念佛〕 현재와 미래에 반드시 부처를 보게 되고 부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법계의 몸〔法界身〕으로 모든 중생의 마음 생각〔心想〕 가운데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할 때 이 마음이 곧 32상(相) 80수형호(隨形好)이다. 이 마음으로 부처를 지으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 모든 부처의 정변지(正偏知)5)바다도 마음생각으로부터 생겨난다.”
印光 大師 嘉言錄 23
믿음을 일으키고 의심을 제거하라
글: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보통 사람들의 불교에 대한 온갖 시비논쟁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마디로 범부중생의 지식 견해로 부처님의 지혜를 추측하는 망상일 따름이라고 하겠소.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으로는 몸과 마음에서부터 밖으로는 사물 경계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왜 그러한지 이유를 알 수 있으리오?
경험 지식이 쌓이면서부터 앞 사람들이 행하는 바를 보고 자기 또한 따라 행하여 몸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며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 아니겠소? 그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유자재로이 활동하면서 그 이익을 받아쓰는 것이리다. 그런데 여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처가 부처인 까닭과 정토가 존재하고 설법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부처님과 조사들의 성실한 말씀을 믿으려고도 않는구료.
예컨대 우리가 하루종일 밥 먹어 굶주림을 채우고 옷 입어 추위를 막는 일상생활의 근본 이유〔所以然〕를 알겠소? 모르겠소? 만약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들랑 아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끄집어 말해 보시오. 딱히 이렇다고 말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앞 사람들이 해온 대로 옷 입고 밥 먹는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생사해탈을 인도하는 최고 제일의 미묘법문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먼저 안 다음에 믿음을 내겠으며,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간절하고 성실한 말씀만 듣고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고집하는 거요?
또 사람들이 병에 걸려 약을 먹어야 하는 경우, 먼저 스스로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두루 뒤적여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직접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전을 쓰고 약을 지어 먹겠소? 아니면 곧장 훌륭한 의사를 초청하여 맥을 짚게 하고 그가 내린 처방에 따라 지어주는 약을 달여 먹겠소? 만약 곧장 의사 처방대로 약을 먹는다면, 질병 치료(생사 해탈을 위한)와 불교 수행이 서로 어긋나게 될 것이오.
설령 자신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두루 펼쳐보고 약의 성질과 병의 원인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이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려는 수행과는 서로 다르게 되오. 왜냐하면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 자체도 앞사람들이 경험지식을 쌓아 편찬한 말씀이므로 우리들이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이 아니거늘,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만약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부처님과 조사나 선지식들의 말씀은 어찌하여 모두 믿지 못하고 반드시 몸소 보고 확인한 다음에 믿겠다고 우긴단 말이오?
만약 이러한 지식견해대로 엄격히 진실을 따지자면, 마땅히 어떤 약이 어떤 경락(經絡)을 통하여 어떤 질병을 치유하는지를 먼저 보고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처방을 내리고 약을 복용하여야 하리다. 그리고 본초강목이나 진맥비결 같은 의약서적에 적힌 내용대로 처방을 내려 약을 복용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오. 왜냐하면 자신이 몸소 보고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지금 사람들은 굶주림을 채우고 추위를 막으며 병을 치료하는 근본 원리를 직접 보지 못하면서도 누구나 밥 먹고 옷 입으며 약을 복용하고 있소. 그런데 부처가 되고 정토에 왕생하는 근본 원리만큼은 자신이 몸소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령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성실한 가르침 말씀을 죄다 믿지 않으려고 고집불통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이겠소?
이는 다른 게 아니라, 전자는 목숨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비록 모르더라도 감히 그대로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반면, 후자는 생명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므로 스스로 고명(高明)하다고 뻐기면서 반드시 그 법문을 철저히 보고 안 다음에 비로소 수행하겠다는 차이뿐이오. 옛 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수많은 천재와 영웅호걸들이 이러한 지식 견해 때문에 평생토록 부처님 정법의 실익을 얻지 못한 줄 아시오?
그들이 어리석은 지아비와 아낙이라고 비웃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역시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앞 사람들이 하던 대로 따라 염불 수행을 믿고 받아들여 행하다 보니, 점차 부처님의 지혜와 은밀히 통하고 오묘한 도에 부지불식간에 합치하게 되고 마침내 업장을 짊어진 채 극락왕생하였다오. 그 가운데 더러 미혹과 번뇌를 다 끊고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과위를 곧 증득하게 될 것이오.
반면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고 뻐기는 자들은 의심 때문에 비방까지 서슴치 않아 영겁토록 삼악도에 떨어지오. 그래서 그들이 어리숙하다고 비웃었던 평범한 지아비와 아낙들이 염불수행으로 극락왕생하여, 도리어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하여 구원해 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다오. 왜냐하면 전생에 믿지 않고 비방한 죄악의 업장이 그들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도 세간의 총명한 재주꾼들은 마치 막야(莫邪)와 같은 훌륭한 보검(寶劍)을 가지고 진흙 덩어리나 자르는 데 쓰듯 자신들의 고귀한 지혜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구려. 보검으로 진흙을 잘라 보았자 진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칼날만 손상될 것이 불보듯 뻔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부처님 법은 마음의 법으로, 세간의 어떠한 법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소. 부득이 비유를 쓰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의리(義:이치, 뜻)를 알아차리도록 전함이오. 그런데 어떻게 구체적 비유 사실에 집착하여 틀에 박힌 듯이 추상적인 본체를 논할 수 있단 말이오? 부채를 들어 달을 가리키면 반드시 부채 위의 광명을 쳐다보고, 나뭇가지 흔들림으로 바람을 비유하면 나뭇가지 위의 공기 흐름을 알아차리는 것도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소?
꿈 속의 경계〔夢境〕는 가짜이고 인과(因果)는 진짜인데 꿈 속의 경계로 인과를 비유하여 본체와 서로 부합시키는 것도 상관 없소. 왜냐하면 허망한 마음〔妄心〕이 원인이고 꿈 속의 경계가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오. 만약 허망한 마음이 없다면 꿈 속의 경계도 결코 없을 것이오. 이는 만고불변의 확정된 이론이오. 선악이나 수행하는 마음 같은 사실은 원인이고, 선악과 수행의 과보를 얻는 것이 결과인 줄을 그대는 믿겠소, 못 믿겠소?
허망한 마음이 꿈의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꿈 속의 경계를 얻(보)듯이, 염을 하는 마음이 부처의 원인이 되어 가까이는 서방극락에 왕생하고 멀리는 결국 부처의 도를 원만히 성취하는 과보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대의 의심을 더욱 키우겠소, 아니면 그대의 믿음을 일으키겠소?
부처가 궁극의 존재인지 여부는 우선 접어두고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부처의 존재 여부 자체를 따지려고 하는 점부터 봅시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궁극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바로 그 판단은 과연 누가 말하고 기술하는 것이오? 또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고 기술하는 자(주체)를 한번 정확히 끄집어 내 보시오. 말(언어)이란 목구멍과 혀가 의식 및 마음과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오. 글(문자)도 단지 손과 붓의 움직임을 통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오.
말과 글 이 두 가지는 모두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오온(五蘊)일 뿐, 어느 것도 우리들 자신은 결코 아니오. 이 다섯 가지 법을 떠나 뭔가 끄집어 낼 수 있다면, 부처가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정말 대지혜의 질문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고 자신의 존재 여부조차 딱히 끄집어 낼 수 없으면서 먼저 부처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따지겠다면, 이는 헛되고 쓸데없는 미치광이 질문일 뿐, 결코 자신에게 절실하거나 진리를 궁구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오.
부처가 궁극에 존재하는 사실은 우리들 범부 중생의 감정이 아직 깨끗이 세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볼 수 없는 것뿐이오. 우리들 자신도 또한 확실히 존재하고 있소. 다만 우리들의 오온이 아직 텅 비지 못해서 색·수·상·행·식을 떠나서 그 뭔가를 정확히 끄집어 낼 수 없을 따름이오.
금강경에서는 보리심을 낸 보살들에게 일체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남김없는 열반을 증득시키되, 어떤 한 중생도 결코 제도되어 열반을 얻었다고 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소. 또 빛〔色〕이나 소리〔聲〕·냄새〔香〕·맛〔味〕·만짐〔觸〕·생각〔法〕에 머물러(집착하여) 보시를 행하지는 말라고 일깨우고 있소.
보시는 육도만행(六度萬行)의 으뜸이오. 보시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와 만 가지 행실 모두가 빛이나 소리·냄새·맛·만짐·생각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 당연하오. 금강경의 문장이 간략하게 보시만 거론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시 안에 포함시킨 것이오. 요컨대 마땅히 머무르는(집착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고〔應無所住而生其心〕, 나나 사람이나 중생이나 수자(壽者)라는 모습(형상)이 전혀 없이 일체의 착한 법〔善法〕을 닦으라는 가르침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도(道)라는 것은 도대체 모습(형상)이 있겠소, 없겠소? 이처럼 광대무변한 광명의 모습이 우주 허공〔太虛〕을 꽉 채우고 있는데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타고난 장님과 무엇이 다르겠소?
금강경에서 한 중생도 제도 못한다거나, 형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거나, 나나 중생의 모습이 없다거나, 머무르는 바 없다고 말씀하신 전제는 사람들에게 범부의 감정이나 성인의 견해 같은 형상 집착에서 자유롭게 벗어나라는 뜻이오. 그리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남김 없는 열반을 증득시키고, 보시를 행하고, 마음을 내고, 착한 법을 닦으라고 말씀하신 본론은 사람들에게 자기 성품에 알맞게 자신과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법을 익히고 닦아 자기와 남이 함께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길 기약하자고 권하신 것이오.
바로 여기에 착안하지 못하고 모습(형상) 없음〔無相〕이 궁극의 경지인 줄로 집착하는 과대망상은 마치 술지게미〔酒糟〕를 맛보고 최고라고 여기는 술꾼과 똑같은 지식 견해에 불과하오. 이런 자를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소?
믿음이 얼마나 일으키기 어렵고, 의심은 어찌도 이리 제거하기 어려운고?! 그대들 자신이 결정코 믿음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또 결코 의심을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면, 비록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 친히 설법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오. 하물며 나 같은 범부중생이 자질구레한 말로 납득시킬 수 있겠소?
印光 大師 嘉言錄 24
광명을 회복하는 최고 최상의 지름길
글: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부처의 허실(虛實)을 알고자 하면서, 어찌하여 정토문(淨土文)과 서귀직지(西歸直指:서방정토로 돌아가는 길을 곧장 가리킴)에서 논하고 있는 이치와 거기에 수록된 사례를 의심없이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오? 이러한 논설과 사례들이 모두 날조한 헛소문이기 때문에 거들떠 볼 가치도 없다고 내팽개칠 참이오?
이러한 견해를 지닌다면, 그 영혼은 틀림없이 다른 오도(五道)에도 떨어지지 못하고 오직 아비(阿鼻:無間) 지옥에 갇힐 것이오. 거기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자기 마음따라 나타나는 펄펄 끓는 용광로나 검수도산(劍樹刀山) 같은 지옥의 경지에서 온갖 즐거움을 자유자재로이 즐기게 될 것이오. 그 즐거움은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소.
부처가 정말 존재하는지 허실을 반드시 알고자 하면서, 정토문이나 서귀직지에서 말하는 내용은 모두 진실이 아니고, 오직 자기가 몸소 보고 경험해야만 진실이라고 고집한단 말이오? 여기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들어 물어 볼테니 어물쩡하게 넘기거나 피하려 들지 말고 솔직한 마음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오.
북통주왕(北通州王)인 철산(鐵珊)이란 사람은 청나라 말엽에 광서성(廣西省)의 번대(藩臺:布政使의 별칭, 성(省)의 두세 번째 실권자)를 지냈다오. 그 당시 광서지역에는 토착 무장도적들이 몹시 많았는데, 그가 군대치안을 담당할 때 그들을 섬멸하려고 계획 세워 살해한 자가 아주 많았다오. 그런데 4년 전 중병에 걸려 눈만 붙였다하면 몹시 크고도 시커먼 집안에서 자신이 수없이 많은 귀신들에게 사방에서 핍박당하는 모습이 너무도 뚜렷이 보여 깜짝 놀라 깨어나곤 했다오. 한참 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다시 똑같은 장면이 나타나 또 섬짓 놀라 깨어나기를 되풀이하여, 사흘 밤낮 동안 꼬박 두 눈을 뜬 채로 지새워 그저 숨결만 겨우 이어지는 정도였다오.
그래서 그 아내가 보다 못해, "당신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겠소? 당신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염송해 보시오. 염불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것이오."라고 권했다오.
철산은 아내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죽어라고 염불했는데, 얼마 안 되어 이내 잠들어 한바탕 실컷 자고 나도록 어떠한 모습이나 경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요. 병도 점차 다 나아서, 그때부터 계속 재계(齋戒)하며 염불하고 있다오. 이는 철산이 재작 년 진석주(陳錫周)와 함께 산에 올라와 나에게 직접 털어 놓은 이야기요.
가령 그대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부처의 존재 유무를 확인해 안 다음 염불하겠소, 아니면 한번 듣는 대로 곧장 염불하겠소? 만약 이 때 부처의 허실을 따져볼 겨를 없이 즉시 염불한다면, 지금은 어찌하여 옛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록으로 전해준 부처(염불·정토)의 허실에 관한 언론과 사례들을 모두 허황된 거짓말로 치부한단 말이오? 오직 급박한 구원이 필요한 정신없는 상황에서만 눈물을 흘리며 구하고 싶소? 부귀공명도 한낱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거늘, 어찌하며 편협한 집착은 헌신짝으로 여겨 아주 말끔히 내버릴 수 없단 말이오? 그대는 혹시라도 이러한 지식견해가 도에 들어가는 문인 줄만 알고,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고속도로인 줄은 모르오?
꿈으로 부처를 비유하는 경우에는 허망한 마음이 원인이고 꿈속의 경계가 결과지요. 마찬가지로 염불이 원인이 되고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함이 결과로 얻어진다오. 어떻게 금강경의 여섯 가지 비유(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이슬·번갯불 같다고 설법한 비유게송을 가리킴)로 증명할 수 있겠소?
무릇 세간의 말과 글자는 비록 한 단어라 한 가지 일이라도 높고 낮음(尊卑)이나 아름답고 추함(美惡) 등 상반되는 두 뜻으로 동시에 해석될 수 있소. 예컨대 아들 자(子) 한 글자만 보아도, 부자(夫子:공자에 대한 존칭에서 스승님을 뜻함)라 부를 때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고, 보통사람들을 가리키는 접미사로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며, 아이(兒子)를 부를 때도 홀로 쓰이기를 좋아하오. 그래서 반드시 문맥에 따라 정의해야 하며, 부자(夫子)라고 부르는 곳에서 결코 아이(兒子)라고 새길 수는 없소.
불국토가 꿈속의 경지라는 견해는 모름지기 우리들이 부처가 되기를 기다려서 그 뒤에나 말해야 할 줄 아오. 지금 이 순간 곧장 지껄이는 것은 오직 손해만 가져올 뿐 결코 이익이 되지 않으리이다.
사실과 이치, 성품과 형상, 텅빔과 있음, 원인과 결과 등의 상대개념은 서로 뒤섞여 잘 구분되지 않는 법이오. 그러니 다만 평범하고 어리숙한 지아비나 아낙들처럼 착실하게 염불하는 수행이나 배워 오직 간절하게 정성과 공경을 다할 일이오. 그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염불하다 보면, 죄업이 소멸되고 지혜가 밝아지며 업장이 다 사라지면서 복덕이 저절로 높아질 것이오.
이러한 의심이 철저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부처의 존재 여부나 자신의 유무, 불법에 들어가는 문과 피안에 이르는 확실한 근거 따위도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이 저절로 밝아지오. 그러나 만약 마음과 뜻을 다해 염불에 전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 기울여 알아보려고 할 것이오. 이런 사람은 금강경을 보여 주어도 참모습(實相)을 알지 못하고, 정토문이나 서귀직지를 보고도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오. 업장이 마음을 뒤덮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오.
이는 마치 장님이 해를 쳐다보는 것과 같소. 해가 분명히 하늘에 떠 있고 정말 눈으로 쳐다보고는 있지만, 햇빛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예 쳐다보지 않을 때와 다름이 전혀 없소. 가령 장님이 광명(시력)을 회복한다면 단번에 햇빛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염불 법문이야말로 바로 광명(지혜, 마음 또는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최고 최상의 첩경이라오. 참모습(實相)의 형상을 보려거든 마땅히 이 법문 수행에 정성을 다해야 하오. 그러면 틀림없이 통쾌하게 소원을 이루고 회포를 푸는 때가 있으리다. 참나(眞我)를 몸소 보는(親見) 일은 확철대오하지 않으면 안 되오. 더구나 참나를 증득하려면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오. 그리고 원만히 증득하려면 세 미혹을 완전히 끊고 두 죽음을 영원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되오.
우리들이 영겁토록 윤회하고 또 지금 이치에 어긋나게 시비나 따지는 것도 모두 참나의 힘을 받아 행하는 것이오.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 힘을 진실하게 받아쓰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오. 비유하자면 호주머니 속의 보배구슬을 애시당초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있는 줄을 깜박 잊고 공연히 생고생 사서 하는 것과 같소.
세간의 모든 것은 한결같이 중생들의 생겼다 사라지는 마음(生滅心)으로부터 비롯되오. 육신 같으면 개인의 개별 업장〔別業〕으로 타고 나고, 세계 같으면 모든 구성원의 공동업장〔同業〕으로부터 형성되오. 이들은 모두 생겨났다 사라짐이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하오. 육신은 생로병사가 있고,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지요. "만물이 극도에 달하면 반드시 돌이키다(物極必反)"는 말이나 "즐거움이 극도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樂極生悲)"는 말이 바로 그러한 뜻이오. 원인 자체가 벌써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또한 생겨났다 사라지지 않을 수 없소.
극락세계는 아미타불께서 자기 마음이 본디 지니고 있는 불성을 철저히 증득하여 마음에 따라 나투어 낸 불가사의한 장엄세계라오. 그래서 그 즐거움이 다할 때가 없소. 비유하자면 허공이 끝없이 넓고 크게 펼쳐져 삼라만상을 포용하고 있는데, 세계가 제 아무리 수 없이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기를 계속 되풀이 하더라도 허공은 끝내 조금도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소.
사람들이 흔히 세간의 쾌락을 가지고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우습게 알고 비난하지만, 과연 극락의 즐거움을 맛볼 수나 있는 처지요? 우리가 비록 허공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도 없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천지간의 허공만이라도 바뀌거나 변하는 모습을 누가 본 적이 있겠소?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본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불께서 우리들에게 염불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가르치신 것이오. 아미타불의 대자대비 서원력에 의지하여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말이오. 거기서 몸은 연꽃 봉오리 안에 자연스레 생겨나(蓮華化生) 생로병사의 고통을 모르고 세계는 아미타불 성품에 걸맞는 공덕으로 이루어져 성주괴공의 변화가 없다오. 성인조차도 그 경지를 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범부 중생이 생겼다 사라지는 세간의 법으로 이를 의심하고 비방한단 말이오?
정토법문은 여래께서 철저한 대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두루 제도하시는 법문이오. 미혹을 끊을 힘이 없는 범부 중생들에게 믿음과 발원으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여 금생에 생사를 해탈하고 관세음보살 및 대세지보살과 함께 불도 수행의 반려자가 되도록 가르치신 것이오. 위로 부처의 과위에 바로 이웃한 등각(等覺) 보살조차 극락왕생하여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룬다오. 그래서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총망라하여 가장 빨리 수행을 성취하는 지극히 원만한 법문이고, 여래께서 평생 설한 모든 법문을 초월하는 특별 법문이오.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아미타경을 설할 때에 동서남북 상하 육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동시에 넓고 긴 혀(廣長舌)를 드러내어 한 목소리로 찬탄하며 "불가사의한 공덕을 지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보호 염려〔護念〕하는 경전"이라고 일컫고, 우리 석가세존께서 몹시 어렵고 드문 일을 하고 있다고 칭송하셨소.
印光 大師 嘉言錄 25
사음(邪淫)하지 말라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태상 감응편(太上感應篇)에 ‘다른 사람의 예쁜 여자를 보고 사통하려는 마음을 일으킴(見他色美, 起心私之)’조차 죄악으로 규정했다. 사음의 마음을 일으키기만 해도 안 되거늘, 하물며 실제로 그러한 짓을 드러내고, 또 고의로 습관화해서야 되겠는가?
옛 사람은 딸을 바치는데도 받지 않았거늘, 하물며 나는 온갖 계략을 총동원하여 도모한단 말인가? 옛 사람은 어둑어둑한 밤중에 바람나 찾아온 여자도 거절했거늘, 하물며 나는 협박과 강요로 억눌러 더럽힌단 말인가? 옛 사람은(몸값으로 지불한) 황금을 내버리면서까지 첩(妾)을 돌려보냈거늘, 하물며 나는 온갖 수단 방법으로 꾀어낸단 말인가?
또 옛 사람은 자기 돈으로 혼수를 마련하여 하녀(노비)를 시집보내 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신분과 위세를 빙자하여 간음한단 말인가? 옛 사람은 자기 돈으로 천민을 속죄(贖罪:죄인이나 천민의 구금 · 예속 신분을 재물 헌납으로 풀어 줌)시켜 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남의 궁박한 위기를 틈타 위협한단 말인가? 옛 사람은 금은을 들여 남의 부부를 화합시켜 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이간질하여 빼앗는단 말인가? 옛 사람은 자기 돈을 내어 남의 시집 · 장가를 도와주었거늘, 하물며 나는 음험한 모략으로 남의 혼사를 파탄시킨단 말인가?
이러한 온갖 사음의 죄는, 은밀한 경우에는 안방 규수의 수치가 되고, 밖으로 드러난 경우에는 온 집안의 모욕이 되며, 작게는 평생의 원한으로 맺히고, 크게는 목숨을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또 살아생전에는 천지신명께 부끄럽고 남편과 자녀 · 부모 · 형제를 대할 면목이 없으며, 죽은 뒤에는 암흑세계에 떨어져 서로 함께 지옥 · 아귀(餓鬼) · 축생의 삼악도(三惡道)를 윤회(輪廻)하게 된다.
사음을 저지른 나의 죄는 정말 피할 도리가 없지만, 애꿎은 상대방의 원한은 끝내 풀릴 길도 없이, 내생(來生)에 대대로 악업(惡業)의 인연을 이어 가며, 또 자자손손 대대로 참혹한 과보를 받게 될 테니,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한 순간의 욕망과 환락은 금방 지나가지만, 그로 말미암은 죄악의 과보는 미래 여러 생(生) 동안 끝없이 계속된다.
이 모두가 결국은 허망한 텅 빈 꽃(空花)을 진짜로 착각하고 오인하여, 욕정의 바다(수렁) 속에 깊이 빠져든 것에 불과하다. 풍류(風流)로 진 감정의 빚을 언제나 갚고, 욕정으로 맺은 원한의 죄를 어떻게 풀려고 하는가? 모름지기 여색(女色:性)은 허망하고 텅 빈 줄 간파(看破:達觀)하고, 한 순간 음욕(성욕)의 충동을 잘 참아 넘겨야 한다. 만약 잘 참아 넘기지 못한다면, 이는 아직 덜 간파(달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아내나 딸을 보면, 마땅히 자기 집 가족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이 든 어른은 어머니로 보고, 손 윗 분은 누나로 보며, 젊은 여자는 누이 동생이나 딸처럼 여겨라. 그러면 음욕의 마음이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화엄경(華嚴經)에는 ‘보살은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항상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菩薩於自妻, 常自知足).’는 말씀이 있다. 자기 안사람에 대해서도 음욕을 지나치게 부려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남의 귀한 아내와 딸을 감히 범하여 어지럽힐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속보록(速報錄:신속한 인과응보의 실록)에는 ‘내가 남의 여자를 간음하지 않으면, 남도 나의 아내를 간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다. 또 명률(冥律:명부 · 저승의 율법)에는, ‘남의 딸을 간음한 자는 자손이 끊기는 과보를 얻고, 남의 아내를 간음한 자는 자손이 음란한 과보를 얻는다.’고 하였다. 이 밖에 고금의 간음죄에 관한 실제 사례가 계음보훈(戒淫寶訓) · 태상감응편 · 음질문(陰 文) 등의 서적에 수 없이 수록되어 전해진다. 그런데도 감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색의 모습은 본디 텅 비어(色相本空), 요염한 애교와 자태도 허깨비(幻) 같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그림 같은 꽃병에 똥만 가득 담겨 있고, 비단 같은 푸대(피부) 속에는 칼날만 섬뜩하게 숨겨 있다. (장미의 가시는 눈에 띄게 겉으로 돋아 있어 그래도 낫다:옮긴이) 그러니 어두운 방안에 홀로 한가히 거처할 때라도 허튼 망상을 일으키지 말며, 설사 사음할 인연이 묘하게 들이닥치더라도 결코 양심을 잃지 말라. 지혜의 힘(慧力)으로 잘 관조하고, 올바른 생각(正念)으로 자신을 잘 지켜라.
자기 마음의 양식(良識:본디 良知라 부름)이 또렷또렷 내 안에 지키고 있고, 허공의 신명과 귀신들이 삼엄하게 나를 감시하며, 머리 위의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이 초롱초롱 나를 굽어보고, 집안의 부뚜막신〔조神〕과 몸 안의 삼시신(三尸神)이 늠름하게 나를 엿보고 계신 줄을 마땅히 항상 생각하여라.
천당(天堂)과 극락(極樂)의 복락(福樂)도 눈길 한번 바로 돌려 금세 올라갈 수 있고, 지옥의 고통스런 윤회도 발 한번 잘못 디뎌 그냥 빠져들 수 있다네. 벼랑 끝에 내몰려서 말에 채찍질을 가하듯,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바다(눈물의 골짜기)에서 고개 한번 돌리면, 피안(彼岸)이 바로 거기라네.
천만 번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운 그 순간에, 억만 번 침범할 수 없다는 생각을 크게 품게나. 문창제군(文昌帝君)이 내린 음욕 방지의 글이나, 종리조사(鍾離祖師)가 내린 음욕 절제의 노래를 익히 읽고 외워 힘써 지키세. 은밀히 어리석은 죄업을 짓지 말고, 덕행을 망치는 짓일랑 하지 말세.
창녀나 기생(접대부)을 비천하다고 몰인정하게 함부로 대하지는 말며, 머슴이나 하녀를 상놈이라고 무자비하게 막 부리지는 말세. 음란한 여자가 바람나 스스로 찾아 든다고 덩달아 맞장구치며 음욕의 불길을 지피지는 말며, 아내는 늘상 한솥밥 먹는다고 허물없이 욕정을 부려 몸을 망치지는 말세. 위아래(長幼)의 신분과 나이도 잊고서 윤리강상을 어지럽히지는 말며, 여스님(수녀)의 청정한 수행을 더럽혀 신(하느님)의 분노를 건드리지는 말세. 사람과 짐승의 경계를 어지럽히면서 수간(獸姦)의 인연을 맺지는 말며, 원수 척진 집안이라고 해서 규방의 여자들에게 분풀이를 하지는 말세.
음란 서적이나 그림을 보아 사음의 마음을 일으키지는 말며, 음란한 말이나 글을 지껄여 남들의 마음을 미혹시키지는 말세. 스스로 사음을 범하는 것 이외에, 양가(良家) 집안 자제들을 음탕하게 유혹하거나, 음란 서적과 음란 그림을 만들고 음담패설을 지껄이기 좋아하여, 남의 욕정을 돋구는 짓은, 모두 음란 교사라네. 또 남이 음욕을 저지르는 걸 보거나 듣고 기뻐하며 찬성하는 짓도, 스스로 범하는 것과 똑같은 죄악일세.
그래서 능엄경(楞嚴經)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시방 삼세(十方三世)의 모든 여래(如來:부처님)께서는 육안(肉眼)으로 음욕을 행하는 (보는) 것도 모두 음욕의 불길(慾火)이라고 부르신다. 보살은 음욕을 보기를, 마치 불구덩이 보듯 피한다.”
“만약 음욕을 끊지 않고서 선정(禪定)을 수행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서, 설령 백천 겁(劫)을 지나더라도(수행하더라도) 단지 뜨거운 모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엄격히 진실대로 논한다면, 굳이 꼭 음욕의 사실(행위)이 있을 필요도 없이, 단지 한 생각(一念)의 사사로운 마음만 품어도, 모든 죄악의 으뜸이라는 사음을 범하는 것이다. 무릇 항상된 성품(恒性)은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육신의 생명(元命)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미색을 보고서 음욕의 마음을 일으키면, 바깥 사물에 미혹되어 항상된 성품의 줏대(주체성 · 주인 의식)를 빼앗기게 된다. 그러면 하늘이 부여해 준 성품을 한번 모독하는 게 되어, 큰 불충(大不忠)죄가 된다 (忠은 中心이란 뜻으로, 속으로 속임이 없음을 가리킨다. 스스로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기 때문에 不忠죄라고 부른 것이다.).
또 바깥 유혹에 육신 생명의 뿌리(精氣)를 크게 뒤흔든 셈이 된다. 그러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한 바탕 크게 훼손한 것이니, 큰 불효〔大不孝〕죄가 된다. 음욕을 한 차례 일으키면, 곧 한 차례 (생명의) 이치(理)와 기운(氣)을 소모하고, 또 한 차례 하늘의 성품〔性〕과 부모의 육신 생명(命)을 내버리며, 한 차례 최고 으뜸의 죄악(사음)을 범하게 된다.
오호라! 어린애 시절 한 점 흠도 없는 백옥처럼 순결하던 성품과 생명이, 청년이 되면서 암흑의 죄악 얼룩만 산더미처럼 늘어가는구나. 그래서 군자는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正心〕 근원을 깨끗이 정화하며, 그 다음에는 욕정을 줄여〔寡慾〕 덕행을 두텁게 함양한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욕정을 제멋대로 부려, 하늘을 거스르고 진리를 어그러뜨린단 말인가? 그 결과 복록(福祿)을 덜어내고 수명을 단축시키며, 온갖 재앙을 받을 것은 생각지도 않는가?
화엄경(華嚴經)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사음(邪淫)의 죄도 또한 중생들을 삼악도(三惡道:지옥 · 아귀 · 축생)에 타락시킨다. 만약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 첫째는 아내가 정숙하지 못하고, 둘째는 뜻대로 따르지 않는 가족을 만나게 된다.”
또 세간에는 이런 격언도 전해 온다.
“세상에 사람의 욕심보다 험악한 게 없네.(世上無如人欲)
몇 사람이나 한 평생 그르치지 않을런가?(幾人能不誤平)”
정말 슬프고 안타깝도다!
印光 大師 嘉言錄 26
사음(邪淫)의 12해악
글: 보적(寶積) 김지수 옮김
모 기종(冒起宗)이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의 주석을 달면서, “다른 사람의 예쁜 여자를 보고 사통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다(見他色美, 起心私之).”라는 구절에서 이렇게 적었다.
다른 사람의 아내나 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간사(奸邪)한 사심(私心)을 일으킴을 말한다. 이러한 염두가 한번 일어나면, 비록 실제 그런 일까지는 없더라도, 이미 귀신의 정벌을 피하기 어렵다. 무릇 모든 죄악 가운데 사음이 으뜸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이해득실을 잘 모르고서 이러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이제 사음의 각종 해악을 말하니, 어리석은 미혹을 일깨우기 바란다.
1. 천륜(天倫)을 해친다.
남녀가 각자 배우자를 갖는 것은 바로 하늘이 정한 윤리(이른바 天定配匹)이다. 따라서 남의 배우자를 범하면, 설사 그 부부간에 금슬과 정의(情義)가 이미 깨어진 상태라 할지라도, 그들의 천륜을 내가 어지럽히는 게 된다. 그러면 털을 뒤집어쓰고 꼬리를 달고 다니는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옷을 입고 모자(갓)를 쓰는 인간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 인간의 정절(貞節)을 해친다.
부녀자의 한평생 가장 큰 덕성은 오직 ‘절(節:정절·절개)’ 한 글자에 있다. 남의 여자를 범하면, 곧 그 여자의 정절을 잃게 만든다. 깨어진 기왓장을 어떻게 다시 완전하게 만들겠는가?
3. 명성(名聲:명예·소문)을 해친다.
그대가 제 아무리 기밀(機密)을 유지할지라도, 추악한 소문은 금세 멀리 퍼져 나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우리 속담에도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한다:옮긴이) 남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은 뻔하며, 여자의 친척들조차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체통을 잃는다.
4. 집안 기풍(門風:家風)을 해친다.
여자의 친정 부모와 시부모를 수치스럽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남편·형제 자매·자손·며느리까지 수치스럽게 만든다. 한 집안 식구가 모두 이맛살과 미간(眉間:눈썹 사이)에 ‘부끄러울 치(恥)’ 자를 달고 다니며, 통한(痛恨)이 마음과 뼛속까지 사무치게 된다. 실로 한 집안 3대(代)를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5. 성명(性命)을 해친다.
더러 간음을 당한 부녀자가 치욕을 심하게 당하여 죽기도 하고, 더러 그 남편이 분통해서 죽기도 한다. 또 더러는 남편이 간음 당한 아내를 죽이기도 하고(明나라, 淸나라, 律에는, 남편이 아내를 간음 현장에서 죽이면 무죄였고, 죽이지 않은 경우 남에게 팔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明律을 그대로 적용한 조선시대에도 법률상은 똑같이 그러하였다:옮긴이), 더러는 아버지가 딸을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더러는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기도 하며〔요즘에야 바람 피우는 남편을 아내가 죽일 수도 있겠지만, 옛날에는 간음한 아내가 간부(奸夫)와 함께 모의해서 남편을 처치하는 범죄가 적지 않았다:옮긴이〕, 더러는 남편이 간음한 남자(奸夫)를 죽이기도 한다.〔남편이 아내의 간음을 목격한 경우, 현장에서 아내뿐만 아니라 간음한 남자(奸夫)를 함께 죽여도 무죄였다:옮긴이〕 또 더러는 간음한 남자가 군중에게 몰매 맞아 죽기도 하고〔신약 성경에는 군중이 간음한 여인을 돌팔매질하는 장면이 나온다:옮긴이〕, 더러는 주인에게 간음 당한 하녀가 안주인(마님:부인)의 질투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옮긴이 보충:예로부터 ‘여자 안 낀 범죄 없다.’고 말하고, 특히 ‘살인에는 으레 여자가 낀다.’는 말이 전해 오는데, 바로 이러한 간음죄를 둘러싼 인명 살상 범죄를 주로 가리키는 듯하다. 여기서 그냥 ‘생명(生命)’이라고 하지 않고, ‘성명(性命)’이라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른 일반 살인처럼 단지 육신의 생명(목숨)을 끊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전에 인간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품(天性:불교로 말하면 佛性)을 잔인하게 철저히 유린하고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음을 모든 죄악의 으뜸이라고 하는 것이다.〕
6. 풍속(風俗:사회 기강)을 해친다.
동네에 이처럼 염치라곤 조금도 없고, 사람 탈을 쓴 짐승 마음(人面獸心)의 간음자가 버젓이 존재하면, 순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를 본받기 쉽다. 그들이 친구가 되어 떼 지어 나쁜 짓을 일삼으면, 미풍양속을 크게 해치고, 사회 혼란과 민심 불안의 요인이 된다. 그래서 이러한 악습은 틀림없이 재앙을 초래한다.
이상 여섯 가지는 남을 해치는 것이다.
7. 심술(心術:마음씀)을 해친다.
음욕의 염두가 한번 일어나면, 온갖 나쁜 생각(惡念)이 꼬리를 물고 파생된다. 환상과 망상, 탐착과 미련, 요행을 바라고 기회를 엿보는 마음, 질투심 등이 잇따라 생긴다. 그래서 생각으로 일으키는(짓는) 죄악이 가장 무겁다.
8. 음질(陰 :陰德과 비슷하게 통함)을 해친다.
질( )은 보통 정(定)으로 해석하는데, 하늘이 무형 중에 은근히 사람들을 안정(安定)시키는 도리(道理)를 뜻한다. 즉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래 착한 성품이며, 사람이 된 태원(胎元)이다.
지금 간음을 범하여 항상적인 도리(常道:윤리강상의 도)를 어지럽히고 덕행을 망가뜨리면, 곧 천리(天理)를 해치고 양심을 죽이게 된다. 그래서 음질(陰 )을 깎아 덜어내고, 결국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9. 명리(名利:부귀영화)를 해친다.
태상감응편에도 삼태성(三台星)과 북두성(北斗星), 그리고 몸 안의 삼시신(三尸神)과 부뚜막신이 우리 몸을 따라 다니며, 잘못을 관찰하여 기록한다고 나와 있다. 깜깜한 한밤 중에 보는 사람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고 해서, 하늘(천지신명)도 모를 리가 어디 있겠는가?
예컨대 이등(李登)은 간음을 범하여, 장원 급제에 재상이 될 운명을 박탈당했다. 또 의흥(宜興)의 목재 장수 아무개는 간음을 범하려다, 검은 호랑이한테 목덜미를 물려 가고 말았다. 부귀영화를 누려야 할 운명조차 완전히 삭제되고 말거늘, 하물며 얄팍한 복록을 가진 운명이야 얼마나 낭패가 극심하겠는가?
10. 수명(壽命)을 해친다.
귀신들이 사람의 수명을 삭탈(削奪)함은 간음의 죄악에서 가장 심하다. 하물며 음욕의 불길이 치열히 타오르면, 정기신(精氣神)이 바닥나고 골수(骨髓)가 고갈되지 않겠는가?
또 더러는 깜짝 놀라거나 두려워 죽기도 하고, 너무 피로하여 기진맥진해 죽기도 하며, 악질 종기가 나서 죽기도 한다. 여색을 좋아하면 반드시 수명을 단축시켜 요절하거나 급사하기 마련이다.
11. 부모와 조상을 해친다.
조상과 부모께서 대대로 이어 와 우리에게 물려주신 혈통의 맥을 도대체 어디에다 내버린단 말인가? 이거야말로 가장 불효 막심하고 패역 무도한 길이다. 자기 한평생의 복록을 완전히 삭탈당함은 물론, 집안의 명예도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 결과 조상의 제사마저 끊기고, 저승의 조상들은 죄다 굶주린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원통과 한은 얼마나 지극하겠는가?
12. 처자식을 해친다.
불경(佛經)에 보면, 자식이 없는 것은 남의 아내를 범했기 때문이고, 자기 아내나 딸이 음란한 것은 남의 아내나 딸을 간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아내나 딸을 가지고 간음의 빚을 갚고, 게다가 후손까지 끊기는 것이다. 이는 단지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세상의 음란한 자들을 한번 살펴 보라. 이미 세상을 떠난 음란한 자들이 하나 하나 모두 이 모양이다. 그래서 아직 세상을 뜨지 않은 음란한 자들도 모두 이 모양이 될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여섯 가지는 자기를 해치는 것이다.
이상 12해악은 모두 사음을 경계하는 격언(格言)과 인과응보의 실록에 나오고, 또 지금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일들이다. 우리 동지(同志)들은 미리 사음의 해악과 과보를 분명히 인식하여, 유혹과 충동이 들이닥칠 때, 흐리멍텅하게 미혹되지 말길 바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南無阿彌陀佛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