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병의 종류, 이종(異種)의 기병을 운용한 각각의 이유
주석만큼이나 그 내용도 모호하다는 평을 항상 듣는 것이 소위 무가 칠서라고 하는 동아국 공통의 무과 대비 기본 수험서들이지만,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군 체계를 훑는 데에는 이만한 자료도 없다. 이 중 하나인 <이위공문대>는 당조의 태종 이세민과 그의 충복이자 명신, 명장인 이정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태종이 숱한 시석을 뚫어 가며 실전을 경험했지만, 직접적인 군에서의 커리어와 공업이 훨씬 뛰어난 이정에게 병서에서나 실전의 상황에서 궁금했던 점, 혹은 그토록 무수한 만족 정토 등에서 상승(常勝)했던 이유를 묻고 그에 답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개중에 위 무제(조조)가 군법에서 주력 기병을 분류해 놓은 것에 대해 태종이 묻는 대목이 있다. 전-중-후 3대와 익측의 예비대 비슷한 편성에 대해서도 일일이 다른 이름이 달려 있는 것에 대해 태종이 “꼭 이렇게 세목화해서 운용해야 했나? 이들이 그 무장이나 운용에 있어서 개개의 차이가 있었던 것인가?”라고 묻자 이정의 답이 절창이다. “아닙니다. 무제는 다만 그 지휘 계통을 명백히 하기 위해 각 대를 긴밀한 조직으로 세분했고, 이러한 자잘한 구분이 오히려 상대에게는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바, 기실 이들은 무구 일습이 같은 갑병들이었습니다.” 그러자 태종이 웃으며 이렇게 답한다. “모두 멋지게 무제에게 속아 넘어간 꼴이구려.”
사실 지난 과제에서 전한조의 기병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내용이지만, 이들은 경장기병과 중장기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조합적 기병 형태이며 그 무장도 발사무기와 밀리 웨픈의 활용이 거의 반반의 적비를 이루고 있다. 결국 한조의 그림자가 아직은 짙게 남아 있던 2세기 조위의 기병에 대한 위의 <이위공문대>의 언급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한 대에서 조위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대륙에서의 기병은 그 역분과 운용처가 몇 가지로 분리되어 있었다기 보다는, 좁은 의미의 화병(和兵)으로서 전장 내의 ‘Versatile Unit’의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1].
중갑 기병의 본격적 도입 이전 중국 대륙 정주국들의 기병 운용은 이러한 혼합적 양상을 띠었지만, 명백히 세계적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두 가지 경향이 존재하기는 했다(어느 쪽에 비중을 두든, 한조처럼 완전 혼종하든, 혹은 아예 한쪽의 질성만 갖든 간에). 하나는 소위 몽골식 망구다이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는 경장 기마 궁수이고, 다른 하나는 중장 기병이다.
경장 기마 궁수는 다수의 유목 민족이 주력으로 택하는 병종이었다. 사적(史的)으로 이러한 병종을 주로 하여 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 및 민족은, 그 포괄성을 무시하고 서술하면 아시리아[2], 흉노, 스키타이, 몽골[3], 타타르, 서남아시아계 투르크[4], 훈[5], 마사게테[6], 아바르족, 불가르족, 마자르족, 코사크인, 거란[7] 등이다. 이들 사례의 다수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공통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1. 초원에 주거를 둠 2. 수해, 삼림으로 덮인 곳이 아니어야 함 3. 정주 문명과의 일정한 거리 유지(지나치게 원격해서도, 지나치게 가까워서도 안 됨)정도가 될 것이다.
우선적으로 초원에 거주하는 것은, 경장 기마 궁수의 양성에 필수적인 말의 ‘절대수’ 확보와 정묘한 마술을 익히는 데에 가장 유리하다. 근경 제 환경에 수해-삼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조건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원주지가 현재의 슈바르츠발트와 라이히스발트에 이르는 진짜 수해(樹海)에 걸쳐 있던 게르만 제 부족이 그러한 환경에 적응, 습지와 숲 지대에서 유리한 경장 보병 중심으로 군을 구성했던 것을 보면 이는 명백해진다. 정주 민족과의 일정한 거리 역시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다. 지나치게 가까울 경우, 한조식 화병으로서의 기병의 개념을 배워 가기 쉽다. 반대로 지나치게 멀 경우, 남러시아의 슬라브족 일부가 그랬듯 가장 단순한 비정형 경장 보병 편성 위주가 되기 쉽다[8].
이러한 제 조건 중 최소 2가지만 만족시킨다 하더라도 해당 민족이 경장 기마 궁수를 주력으로 했을 것으로 대체적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경장 기마 궁수의 무구는 일반적으로 지난 과제에서 흉노와 스키타이의 장비에 대해 조사한 내용에서 밝혔던 내역과 유사하다. 먼저 주 무장은 수렵 생활을 통해 몸에 익었을 단궁이 된다. 마상에서 운용하는 만큼 그 크기와 그에 따른 사거리의 한계는 분명 있지만, 청동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개량된 컴퍼짓 보우(Composite Bow: 합성활)의 구조를 통해 상당한 강도와 사거리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9]. 6세기 비잔틴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자신의 직속으로 편성한 유목 민족(훈족, 마사게테인 등) 출신의 화병적 기병(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창안하고 벨리사리우스가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10]. 밀리 웨픈으로 장창-장검, 투사 병기로 1.2m 정도의 합성활을 함께 운용했다[11])에 대해, 그의 친우이자 충실한 서관인 프로코피우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격찬을 늘어놓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12]. 주 무장을 활로 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생활 속에서 익숙한 병기라는 것 외에도 다른 이점이 있다. 즉 지난 과제에서 알아보았듯, 최신-최량의 제련술-제강술 등을 습득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유목 민족이 무비를 갖추려 할 때 가장 부담 없이 편성이 가능한 병기인 것이다.
방호구의 경우, 무턱대고 ‘미개한 만족이니 헐벗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적절한 거리’로 인한 ‘제한된 교역량’으로 인해, 정주국의 군병들 만한 방호력을 가진 갑주를 썼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흉갑이나 개갑의 존재 정도는 이들도 군사적-경제적 접촉을 통해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고, 일부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착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방호구 착용은 경장 기마 궁수에게 필수적인 경쾌한 기동성의 상실을 가져오게 되는 데다, 이러한 장구를 갖추기 위해서는 보통 상당한 재력을 필요로 하므로 그 운용 범위는 극히 좁았을 것이다. 실제로 13세기의 몽골군에 대한 언급에서도, ‘가죽으로 만든 간단한 몸통옷과 투구라고도 하기 힘든 가죽 모자를 썼을 뿐이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13].
이러한 장비와 더불어 초원 생활로 체득한 뛰어난 마술(심지어 튼튼하고 안락한 안장과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도)을 갖춘 경장 기마 궁수대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지난 과제에서 조사했듯 ‘스웜(Swarm) 전술’이다. 말 그대로 경장 기마 궁수대가 여러 소집단 제단으로 편성되어, ‘떼’가 짓쳐 왔다가 빠져 나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스웜 전술 제 행동의 기본 단위는 펄스(pulse)다. 펄스 첫 단계에서 개개의 기마 궁수는 돌격, 사정선-포위선 안에 들어서면 화살을 직사(돌입으로 인한 목표물의 근접)하고 후퇴, 다시 어깨 너머로 곡사(후퇴시 목표물과의 거리 차로 인한 필요 사거리 증가)를 해 짧은 펄스를 마친다. 이러한 펄스를 미리 편성된 여러 제단이 파상적으로 여러 축선에서 동시 혹은 시간차를 두고 반복, 적에게 누적적인 손실을 입히고, 최종적으로 적의 유기적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때 원하는 전역에서 적을 궤멸시키는 것이다. 이 스웜 전술은 대회전의 상황(레그니차 전투와 같은[14])에서도, 기동 병력에 대한 습격에서도 각각 엄청난 실효를 거둔 전과가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질이다.
한편 중장 기병은 유목 민족들이 주력으로 택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병종이었다. 중장 기병을 운용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는 정주권 외 국가와 민족으로는 투르크-돌궐[15], 후한 대~서진 대까지의 강족, 서강인(티베트인), 여진인(금, 이후의 후금과 청을 포함함)이 있다. 이들에게서도 공통성을 추출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1. 자생적 준 국체-국체의 비교적 빠른 형성 및 그를 길게 유지함 2. 상대적으로 큰 정주 문명과의 교류량이다. 실질적으로 1은 2를 가능케 하는 근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역으로 2가 1의 정체 형성의 자양분을 제공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증대된 정주 문명과의 교류에 의해, 이들은 ‘중장화’에 필수적인 방호구의 제작과 관련된 제 기술을 보다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고, 그 효용의 경중을 계산해 밀리 웨픈과 레인지 웨픈을 병용하는 혼합식 기병이나 밀리 웨픈을 주로 다루는 중기병을 편성하게 된 것이다.
동아(東亞)에서의 중장기병 전술은 동대의 유럽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것은 약 6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를 때까지, 양자 모두 아르퀴뷔지에(Arquebus)-머스킷(Musket), 조총-철포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의 era에서 오히려 뚜렷하다. 보다 정확하게 구분한다면, 중장 기병 전술에 있어서는 유럽이 아주 독특한 사례였고, 이외의 투르크나 페르시아계 왕조,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마이야조-아바스조와 비잔틴-사산 조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는 동북아와 함께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유럽의 중장 기병 전술은 직접적으로 중장 기병 ‘전술’이라고 할 만 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선 소집된 기병 개개인의 장비에(여기서는 주로 방호구가 아닌 병기를 말한다) 공통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따라서 특화된 병장에 의해 역분을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전술 단위의 편성은 기본 단위인 ‘랜스(lance)’가 모여 배너렛 기사(knight banneret)의 지휘를 받는 ‘배너(banner)’를 구성하고, 이 배너가 모여 가장 큰 단위인 ‘배틀(battle)’을 구성한다[16]. 배틀은 보통 ‘전위(van)’, ‘본대(main)’, ‘후위(rear)’로 명명되어 삼분 편성이 되었지만, 이것을 들어 전술적 제단 편성과 역할 분담이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야말로 이름 뿐으로, 실제 배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17].
대략 14세기 초까지의 이들 중기병 부대의 기본 전술은 가장 간단한 단 한가지: ‘차지(charge)’였다. 즉 적 진형을 분단시킬 만한 전열을 구성한 다음, 교전 초기에 중기병이 돌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기병이니까’ 그 주속(走速)이 ‘질풍과도 같았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러멜러 아머(미늘 갑옷)나 체인 메일이 보편적이었던 유럽 중기병 성기의 초창기에도 이러한 갑주와 병장을 포함한 기사 개인의 중량은 상당했으므로, 그 속도는 기수가 아무리 갤럽(gallop)으로 달리기 위해 재촉을 해도 경장기병과는 운니의 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8]. 게다가 후일 운용의 정묘함을 더하게 되면서 개개인의 무궤한 갤럽(gallop)이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어 제진을 짠 후에는 질주하지 않고, 트롯(trot:일종의 총총걸음으로 볼 수 있다)이라는 보속과 박자를 맞춘 기동만을 하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던데다(이것은 이후 크롬웰의 ironsides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19]) 플레이트 아머를 도입한 이후로는 말에 마갑까지 씌우게 되어 결국 ‘질량’과 ‘속도’라는 기동전의 두 가지 요소 중 질량만이 불균형적으로 발달하는 데에 이르렀다. 어쨌든 이러한 돌격의 효용은 전개된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데에도 있었지만, 보다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심리적인 효과였다. 온갖 컬러(colour)와 배너(banner), 갑옷 위에 걸친 형형색색의 갬비선(gambison:갑옷 위에 걸치는 얇은 덧옷)과 함께 한 덩이로 몰려 오는 중기병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훈련되지 않은 보병들이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징모된 농병(serf)들에게는 엄청난 공포였을 것이다. 이러한 초전의 돌격(charge)에서 적이 궤주해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중기병측이 위험하다. 한번 ‘충격력’의 발현이 끝나고 나면, 일반적으로 그 ‘질량’ 때문에 이동 축선을 마음대로 변경하기는 어렵고, 결과적으로 속도까지 줄어들면 적 전열 뒤쪽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차지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곧바로 아측 전열로 귀환하면서 이를 산병(skirmisher) 역할을 해 줄 경보병이나 중보병들이(창병과 석궁병 등) 엄호한 다음, 다시 진형을 짜 돌격해야 했다. 이것이 되풀이되는 것이다[20].
그러나 이것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징모되어 훈련받거나, 군역을 중앙의 정체로부터 확실히 배정받아 공통 군장을 국가에서 지급하는 등의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당대의 유럽에서, 이런 중기병대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각지의 호족들과 소위 명가를 이루는 귀족들이었고, 보다 고위의 요청에 의해 소집되는 이들에게서 통일되고 조직적인 작전 행동의 수행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인 것이다. 게다가 지휘 계통이 이렇게 분산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질-천질이 뛰어나고 고명한 장령이라 하더라도 세가 큰 권귀가 지휘권을 전단하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지휘관의 자질이 부족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들 기사 개개인의 자질 역시 변변치 않아서, 주로 차지 시에 개인적 무용과 전투 기술을 과시하는 것만 생각했을 뿐이다[21]. 결국 어떤 면에서 이러한 유럽의 이러한 중갑 기병 편제와 전술은 그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에는 어쩔 수 없으면서도 딱 적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반적인 중기병 전술’은 이보다 훨씬 체계화되어 있었다. 보통 이러한 중장기병 운용은 파르티아의 뒤를 이어 서아시아에서 로마-비잔틴과 지속적으로 항쟁을 벌인 사산 조 페르시아에서 발전시키기 시작해[22], 비잔틴의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장비와 운용 개념, 역할 분담을 확립시키고[23],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이를 실전에서 운용하며 정립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24]. 그러나 동세기의 중국 대륙에서 조위(曹魏) 대에 중장기병이 부각되고, 서진 대에 보편화되며, 남북조기 북조 황조들에서 군의 주력이 되고 수-당조에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볼 때, 전세계적 경향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이 ‘일반적인 중기병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명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타격력’이다. 즉 어설프게 심리적 효과를 크게 기대하며 무질서하게 차지(charge)만 해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산 조 페르시아와 비잔틴의 경우, 회전에서 중장 기병은 쐐기형의 대형을 짜서 양익에 배치되었다. 7세기에서 8세기 말에 이르면 이 쐐기형 대형은 더욱 심층적으로 짜여져, 1열은 20명, 2열은 24명, 3열은 28명..의 순으로 후열로 갈 때마다 4명씩 증가, 마지막 12열은 64명이 이루어진 구성으로, 한쪽 익측의 1개 기대가 504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25]. 중앙을 스쿠타투스(scutatus:그리스어로 ‘방패’라는 뜻이다[26])라 불리는 중보병과 프실로이(psiloi)라 불리는 산병(skirmisher) 개념의 경보병이 맡고, 적의 파상 공세에 방어진을 짠 다음(차폐물을 만들어 이용하기도 했다) 버티다가, 적이 전열 재정비를 위해 퇴각 페이즈에 들어가 회두하면 그 틈을 노려 양익의 중기병이 돌격, 공격해 온 적 병력과 적 본대를 분단시켜 섬멸하고 본대의 뒤로 우회해 들어가는 것이다[27](타지나에 전투에서 비잔틴군을 지휘한 나르세스도 이러한 전법으로 동고트군에 승리했다[28]). 물론 이러한 체계적인 작전 기동 하에서 개인의 무용을 과시하는 것이 무의미하면서 위험함은 말할 것도 없다. 12세기의 여진계 금 황조도 중장 기병을 군의 주력으로 삼아 이러한 전술을 즐겨 썼다. 이들 역시 양익에 최정예의 중장기병을 배치, 적기를 노려 돌입한 다음 적 본대를 포위 섬멸하는 전술적 기조를 갖고 있었다[29].
이 ‘일반적 중장기병’의 병장은 어떻게 보면 전한 대에 운용된 혼합식 기병과도 유사하다. 비잔틴의 중기병을 동시대의 표준으로 놓고 보자. 이들은 주 밀리 웨픈으로 사르마티아인과 알라니족(각각 중앙 아시아와 라인-도나우 강 상류의 유목민이다[30])에게서 배워 온 3.6m의 장창과 스파테온이라 불리는 91cm가량의 장검, 이와 같은 길이의 파라메리온이라는 외날 검을 썼다. 이외에 타격 무기로 발도쿠온 혹은 마투조키온이라는 메이스(mace)를 썼다. 투사 무기로는 길이 약 1.2m의 합성 활을 썼는데, 이것은 훈족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전해진다[31]. 노 대신 활을 쓴 것만 빼면 혼합식 기병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차이는 바로 밀리 웨픈에 중점을 두고 운용했다는 것이다. 즉 보다 종합적인 타격력(All-range reach)을 위해 밀리 웨픈과 투사 무기를 병용한 것이지, 아예 산병 개념이나 스웜 전술을 위해 활을 장비한 것이 아니다. 즉 비잔틴인은 주변 만족으로부터 이러한 궁기병 개념을 빌려 와 흡수한 것이지, 그들의 경장 기병을 중갑화시켜 카타플락타이와 크리바나리우스라는 중기병을 만든 것이 아니다.
중장 기병은 기본적으로 중점 돌파 부대이다. 즉 적진의 방어를 무너뜨리고 전국 결정을 위해 투입되거나 적 전열의 결절점을 분단시키기 위해 투입하는 등 그 용법이 지극히 한정된 병종이다[32]. 군의 중핵이기는 하지만, 회전 상황에서 일종의 ‘결정 병기’로 운용된 것이다.
[1]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151
[2] 나카자토 유키, <패자의 전술> p.80, p.152
[3] 나카자토 유키, <패자의 전술> p.182~184
[4]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113~116
[5] 에드워드 기번 저, 김영진 역 <로마제국 쇠망사> 7권 p.93
[6] 에드워드 기번 저, 김영진 역 <로마제국 쇠망사> 7권 p.94
[7]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17~218
[8]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9]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84
[10]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11]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88
[12] 에드워드 기번 저, 김영진 역 <로마제국 쇠망사> 7권 p.88~89
[13] 나카자토 유키, <패자의 전술> p.175
[14] 나카자토 유키, <패자의 전술> p.171~184
[15]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113~115
[16]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50
[17]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06
[18]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07
[19]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20]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07
[21]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06
[22]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82~84
[23]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24]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25]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199
[26] 버나드 로 몽고메리, <A history of Warfare>
[27]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198~199
[28] 나카자토 유키, <패자의 전술> p.156~170
[29]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218
[30]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88
[31] 이치카와 사다하루, <Men-at-Arms> p.88
[32] 나카자토 유키, <패자의 전술> p.168
*출처: 디시 인사이드 역사갤러리 'ㅂㅂㅂㅂ'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