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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암유고[ 可庵遺稿 ]
유형 문헌
시대 조선
성격 시문집
편저자 김구주(金龜柱)
제작시기 1826년
권수·책수 2권 1책
간행·발행·발급자(처) 전경채
소장처 규장각 도서
정의
조선 중기의 학자 전익구(全翼耉)의 시문집.
내용
2권 1책. 목판본. 1826년 무렵에 그의 현손 경채(景采)가 편집,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찬(贊)과 권말에 정필규(鄭必奎)의 발문, 그리고 경채의 지(識)가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에 시 95수, 서(書) 43편, 권2에 소 1편, 서(序) 4편, 제문 5편 외에 부록으로 만사·묘갈·기 각 1편, 증시(贈詩) 10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가면성학소(請加勉聖學疏)」는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낸 대표적 문장이다. 그 요지는
① 정치의 득실은 곧 국민의 생활과 직결된다는 것,
② 임금이 마땅히 하여야 할 근본문제,
③ 붕당을 없애 조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
④ 국비를 아끼고 수령방백을 잘 독찰하라는 것,
⑤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성학을 진흥시킬 것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수천 언(言)에 이르는 장편이다.
참고문헌
『목재집(木齋集)』
『입재집(立齋集)』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가암유고 [可庵遺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암유고(可庵遺稿)
[연구사업]한국학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분야 문학
유형 문헌
시대 조선
출전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 문집 해제
본문
序
立齋 鄭宗魯주①가 지은 문집 서문이다. 전익구의 先親인 雲溪公全以性이 鄭宗魯의 先祖인 鄭經世의 門人이었던 것을 상기시켜 두 집안의 道義之交를 언급하였다. 전익구의 人品과 學識이 훌륭함을 말하고 勝景을 노래한 詩文을 주고받은 것을 모아 유고로 만들었음을 밝혔다.
卷1
詩(81首)
庵中卽景‚ 夜坐口占‚ 翠壁堂八詠‚ 卜居‚ 落可庵遺稿成‚ 風月庵‚ 拱仙峰‚ 砥柱石‚ 雲錦壁‚ 題詩壁‚石龕‚ 書陶山雜詠四十四絶揭諸壁上坐臥而目擊朝暮焉諷誦怳然一區雲物移在眼前有若親承杖屨於佳山勝水之間而見得上下同流之氣像矣不知足之蹈之手之舞之敢吟一絶爾其所樂於心云爾‚返廬‚ 自述‚ 敬次愚伏先生韻‚ 寄贈洪木齋伯源(汝河)‚ 次贈鄭無忝鳳輝(道應)‚ 次螺角寺韻贈李隣哉(相華)‚ 贈金自新‚ 淫雨小霽‚ 次洪木齋韻題寄店堂黃上舍(霧)二首‚ 敬次諸老先生韻寄鄭無忝‚至日吟(癸丑)‚ 曉起口占寄洪季良(覿)求和‚ 次廬龍湖韻(景命)‚ 次贈鄭無忝‚ 次贈權子鞱(甲萬)‚贈盧翼之(翼命)‚ 次贈奉化倅盧龍湖‚ 贈洪彦明(覩)‚ 淸晨口占寄呈石門案下‚ 復次前韻謝贈石門袖惠瓊琚‚戊戌新成茅屋吟一律與盧翼之洪伯源鄭無忝洪彦明相和‚ 又次前韻贈翼之‚ 次洪季良韻‚次贈金則野(昌文)‚ 與洪季良入觀音寺敬次愚伏先生韻(戊戌)‚ 次沈隱侯韻贈洪彦明‚ 贈金則野‚敬次愚伏先生韻求和木齋無忝二首‚ 在聞喜次李瑞山韻‚ 述懷‚ 綸垂石吟‚ 謝贈鄭無忝‚ 園菊方盛風雪無端有感而吟寄贈鄭無忝‚ 敬次退溪先生韻贈洪季良‚ 次洪季良韻‚ 次洪伯源韻贈李學官‚ 贈李勉叔(允洙)二首‚ 人日用前韻奉贈勉叔‚ 立春又用前韻奉勉叔‚ 在愚山又用前韻贈勉叔‚ 敬次退陶李先生和東坡韻却贈木齋無忝‚ 次歌芝洞韻贈主人鄭無忝‚ 又次前韻寄贈無忝‚ 與洪季良呼愉檻字‚ 贈盧龍湖‚ 次盧龍湖排律十六韻‚ 次洪季良求和東坡韻以贈‚ 在鍾院求別語猝構一絶(壬子)‚在愚山‚ 二月再入愚山‚ 登懷遠臺‚ 贈僧希運‚ 觀梅緣葉偶吟‚ 病中偶吟‚ 在愚山呼韻‚ 寄贈洪木齋‚送鄭無忝之任舟城(幷序)‚ 水回洞道中‚遊歌芝洞口占一絶‚ 寄贈昌寧倅鄭鳳輝二絶‚ 贈洪木齋‚ 溪亭夜坐卽景‚ 有懷口占‚ 鍾淵道中‚ 月夜口占示滄老
書
與洪木齋伯源(1670) 17
1670년에 木齋 洪汝河주②에게 보낸 편지이다. 외조부가 돌아간 것과 원고 교정으로 병이 든 것에 대해 위로하는 내용이다.
與宋同春(浚吉,1666) 18
1666년에 同春堂 宋浚吉주③에게 보낸 편지이다.愚山의 경치가 빼어나 은거함에 더욱 좋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答宋同春(1669) 18
1669년에 송준길에게 답장한 편지이다.愚伏 정경세가 지냈던 愚山이 황폐해지려고 하니,상주목사에게 完文을 보내 우산이 황폐해지는 것을 막아달라는 내용이다.
答鄭無忝鳳輝 18
鄭道應주④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비가 오는 가운데 함께 仙遊洞을 유람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때 수창한 시도 편지에 실어 언급하고 있다.
答鄭鳳輝 19
鄭道應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자신은 여전히 우산에 머물고 있으며, 목재 홍여하의 자식이 죽었다는 말도 전하고 있다.
答鄭鳳輝 19
鄭道應에게 답장한 편지이다.愚山에 은거해 지내면서 학문은 진보가 없고 병만 더 깊어짐을 언급하면서, 며칠 전에 친구들이 방문해서 호탕하게 놀다갔음을 전하고 있다.
與鄭鳳輝 20
鄭道應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을 날씨가 좋아 공부하려고 하나 文字에 막혀 제대로 진전이 없음을 언급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10일 분량의 양식을 가지고 와서 心經 에 대해서 토론하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答鄭鳳輝 20
鄭道應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흉년이 들어 수령으로서의 고초가 힘들 것임을 위로하면서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픈 마음을 전하고 있다.
答黃石堂玉相 21
石堂 黃霦주⑤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자신의 집을 ‘大笑’라 이름붙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이유는 자신이 세상에 큰 비웃음거리가 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白首이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이요, 둘째 馮婦처럼 지조가 없으면서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이요, 셋째 내세울 것이 없는데도 세상에 공명을 떨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 대한 겸사이면서 스스로 경계로 삼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끝부분에 날씨가 따뜻해지면 찾아가겠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與李士增(元祉,1678) 21
1678년에 李元祉에게 보낸 편지이다.兄喪을 당한 것을 위로하면서,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것에 대해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與張監察(遇一,1668) 22
1668년에 司憲府 監察 張遇一주⑥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동안 자신의 아들을 맡아 공부를 가르쳐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아울러 노둔하고 게으른 자식놈의 기질을 변하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라서 자식놈을 다시 자신에게 보내 달라는 당부의 내용이다.
與金重擧(釴)22
金釴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에 함께 토론했던 최씨 姓을 가진 사람의 기상은 천 길 낭떠러지에 우뚝이 서 있는 듯한 기상을 지니고 있는데, 자신은 보통 이하의 것만 고수하려는 습속을 지닌 것에 대한 탄식을 전하고 있다.
與金重擧 23
金釴에게 보낸 편지이다. 칩거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전하면서 東寺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차질을 빚게 되어 안타깝다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아울러 다시 한 번 기회를 갖자는 내용이다.
與金重擧 23
金釴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익의 筆法이 有蒼古氣하므로 屛風에다 글을 써 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答洪彦明(1689) 23
1689년 洪覩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홍도의 妹兄인 丁公의 죽음을 위로하고 그의 학덕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또한 眉叟許穆의 篆書는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훌륭하다는 말은 언급하고 있다.
答洪彦明 24
洪覩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공부를 하면서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물어 볼 친구도 스승도 없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언급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거리가 멀어 그렇게 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與趙報恩(渭叟,1671) 25
1671년에 報恩縣監 趙渭叟주⑦에게 보낸 편지이다. 어제 한 번 호소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자신이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李生을 보내달라는 청을 하고 있다.
與李徽彦(在寬,1669) 26
1669년에 李在寬에게 보낸 편지이다. 동생의 죽음을 위로하면서 愚山에 사는 鄭公이 短命하여 애통하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與李徽彦 26
李在寬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 번 가르쳐 준 내용에 대해서는 깊은 복응하여 마치 謝良佐가 땀을 흘릴 정도이며, 주자가 말한‘呂祖謙같은 이를 어느 곳에서 얻겠는가?’라고 한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슬픈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는 내용이다.
與李徽彦 26
李在寬에게 보낸 편지이다. 오늘 木齋 洪汝河가 죽어 매우 슬프다는 말을 전하면서 이는 나라의 슬픔이자 斯文의 아픔이라는 내용이다.
與宋文卿(道昌) 27
宋道昌주⑧에게 보낸 편지이다. 무더위를 피해 여름 한철을 黃霦의 山齋로 피서 갔음을 전하면서, 날씨가 시원해 진 지금은 전원에서 분수에 맞게 살아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答鄭希伯(錫僑) 27
鄭錫僑주⑨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정석교 先親의 行狀에 增減을 했으니, 그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교감을 봐 달라는 내용이다.
與鄭希伯 28
鄭錫僑에게 보낸 편지이다. 스승과 벗의 도움 없이 하는 공부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 학문에 아무런 진보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答鄭希伯 28
鄭錫僑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촌음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면 자식 놈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진일보하게 될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與鄭希伯 29
鄭錫僑에게 보낸 편지이다. 자식 놈이 공부에 취미가 없기 때문에 촌음을 아껴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도와 편달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與鄭希伯 29
鄭錫僑에게 보낸 편지이다.“배움은 미치지 못하는 것같이 하고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學如不及猶恐失之]”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되새겨 조금 더 공부에 매진하면 빛을 보게 될 것임을 전하고 있다.
與鄭希伯 29
鄭錫僑에게 보낸 편지이다. 꾸준하게 반복해서 독서를 하게 되면 그 속에 담긴 속뜻을 저절로 이해하게 될 것이니, 평소에 독서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이해하여 마음과 행동에 두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與或人 30
혹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다.修身하는 요체와 학문하는 방법 및 정치의 도리를 北宋의 유학자인周敦頤·張載·程顥·程頤·朱熹등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내용이다.
與裵參奉公瑾(尙瑜) 34
參奉 裵尙瑜(字公瑾)주⑩에게 보내는 안부편지이다.
答李伯崇(在雅,1677) 34
1677년에 李在雅에게 답장한 편지이다.黃生이 進就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니, 학습의 강도를 조금 더 강하게 해서 가르쳐 달라는 내용이다.
答李伯崇 34
李在雅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적막한 산속에서 朱子의 시 구절과 蘇東坡의 말을 되새기면서 지내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與趙樂夫(遠朋) 35
趙遠明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단양군수의 배려로 함께 배를 타고 남쪽지방을 유람했다는 말과, 조원명이 중용과 대학 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與李鄰哉(相華,1677) 35
1677년에 李相華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나이도 젊고 재주도 뛰어나니 행동을 민첩하게 하고 배움을 좋아했다면 뒷날 대성할 것임을 전하면서 최근에 지은 斷酒詩가 百尺竿頭에서 進一步하였음을 칭찬하고 있다.
與盧吉甫(思憲) 36
弟子盧思憲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안부를 묻고 과거에 낙방한 것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答盧吉甫 36
盧思憲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과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힘써서 공부하라는 내용이다.
答盧吉甫 36
盧思憲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서 ‘笆籬邊物’등의 말은 科擧文에는 옳으나, 학업에 있어서는 도중에 그만두는 것과 같으니, 주자의 말을 교훈삼아 더욱 열심히 공부하라는 내용이다.
與盧吉甫 37
盧思憲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朱書節要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음을 전하고 있다.자신이 살고 있는 곳 뒤편에 있는 절은 예전에 穌齋盧守愼이 독서하던 곳으로, 후학들이 마땅히 장수해야 하는데, 지금 나쁜 사람이 점거하고 있어 심기가 불편하다는 내용이다.
答盧吉甫 37
盧思憲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겨드랑이에 종기가 나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지난번 암자에서 있었던 토론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보내준 책을 잘 받았음을 전하고 있다.
與李秀才天賚 38
李天賚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通鑑 보다는 차라리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을 번갈아 읽으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寄長兒五徽 38
맏아들 五徽에게 부치는 편지이다. 세월은 빨리 흐르고 학문에는 진보가 없으니 寸陰을 아껴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이다.
寄五徽 38
맏아들 五徽에게 부치는 편지이다.山房으로 보낸 이유는 조용해서 공부하기에 적합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니, 잡념을 끊고 학업에 매진하라는 내용이다.
寄仲兒五彩 39
둘째 아들 五彩에게 부치는 편지이다.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은 先生이 杖屨하면서 후학들을 흥기시킨 곳이므로 더욱더 격앙해서 공부에 매진하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당부이다.
寄五彩 39
둘째 아들 五彩에게 부치는 편지이다.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다는 말과 함께 日用간에 촌음을 아껴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이다.
卷2
疏
請加勉聖學疏 1
1675년에 國王에게 올린 소로,聖學에 힘쓸 것을 청하고 있다.顯宗때의 민란(1671)을 보며 국가의 위기를 느껴 지난번에 상소한 것을 보충하는 내용으로 상소한다고 밝혔다.내용은 현재의 위기가 일차적으로는 朋黨의 폐해에서 온다고 보아 임금이 公平無私한 원칙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인재 등용은 곧 이들을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임금이 갖추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 經筵을 통해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며 賢臣을 가까이 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적게 거두어야 하며 수령을 잘 선정하는 등 근본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상소는 일부 내용이 빠져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 상소에는 공자나 맹자‚ 또는 朱子의 말을 인용하여 원론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내용이 많으나 당시 정치 쟁점중의 하나였던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고 군주에게 聖學을 강조하여 경연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있다.
序
送洪木齋之任鏡城序 15
1658년에 鏡城判官으로 가는 洪汝河를 전송하면서 쓴 序이다. 홍여하와 世交가 오래되어 친형제처럼 지낸 사실을 말하고 홍여하가 크게 쓰일 인물인데도 등용되지 못하다가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말을 전하고 있다. 또한 경성이 비록 험한 곳이라 하더라도 홍여하의 인품과 학식으로 충분히 감당할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送鄭無忝之任昌寧序 17
창령현감으로 가는 鄭道應을 전송하면서 지은 서문이다. 여름에 떠나는 노고를 위로하면守令의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觀人說贈李士興(元祿)序 18
觀人說을 지어서 李元祿에게 주면서 쓴 서문이다.君子와 小人의 道를 논하면서 大人·君子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며 공을 세워 천하를 책임지는 자이나,小人은 그렇지 않음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이원록의 군자됨을 알기에 觀人說을 지어 보낸다고 하였다.
四友稧序 21
四友稧를 만들며 지은 서문이다. 저자가 可庵에 있을 때 10명이 찾아와 稧를 만들 것을 요청하였기에‚ 군자는 재물로 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뜻과 의리로서 계를 만드는 것이라 하여서 사우계를 만든 연원을 밝혔다. 또 사우계의 뜻은 文房四友에서 따온 것으로 문방사우의 덕을 본받아 修身하자고 하였다.
祭文
祭沈泛齋(大孚)文 23
沈大孚주⑪의 인품과 학덕을 칭송하고 특히 의리를 지키는데 秋霜같이 엄했음을 아쉬워한祭文이다.
祭洪木齋文(1675) 24
1675년에 지은 것으로,洪汝河와 친형제처럼 지내며 서로 권면하였는데‚ 그를 볼 수 없게 되었음을 매우 애통해 하고 있다.
祭鄭無忝文 25
鄭道應과 나누었던 교분을 회상하고 그의 학덕을 기린 祭文이다.
祭盧野老(道立)文 27
盧道立의 일생을 기린 祭文이다.
祭盧咸悅(道一)文 27
盧道一의 일생과 長壽를 기린 祭文이다.
附錄
輓詞 28
參奉 李在寬이 지은 저자의 만사이다.
墓碣 29
鄭宗魯가 찬한 저자의 墓碣銘이다.
可庵記 30
목재 홍여하가 지은 기문이다. 저자의 집을 ‘可庵’이라 붙인 이유에 대해서 홍여하가 묻고可庵子인 저자가 답하는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남들이 저자와 집에 대해서 ‘可’, ‘不可’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可庵의 주인인 저자 자신이 진정 ‘可’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寄贈可庵八景詩 31
목재 홍여하가 可庵八景에 대해서 읊은 시다.
次贈可庵韻 32
石堂黃霦이 저자의 可庵詩에 대해서 차운해서 준 시다.
敬呈可庵函丈案下 32
저자의 문인인 盧思憲이 지은 시다.
跋 33
鄭必奎주⑫·全景采·全熙一등이 지은 문집의 발문이다.
(黃萬起)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
주① 정종로[ 鄭宗魯 ]
요약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었다.
주요저서
《소대명신언행록(昭大名臣言行錄)》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자는 사앙(士仰)이고, 호는 입재(立齋)·무적옹(無適翁)이다. 경상도 함창(咸昌: 지금의 문경군 영순면)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상정(李象靖)에게 학문을 배워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었다. 관직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매진하다가 만년에 천거로 광릉참봉(光陵參奉)·의금부도사·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강령현감·함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내려가 성리학의 연구와 후학양성 및 저술에 힘썼다.
〈태극권자설(太極圈子說)〉과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 등에서 태극과 동정을 분리시키는 이원주의 이론을 비판하였고, 〈이강기약설(理强氣弱說)〉과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을 통하여 주리론적 입장을 관철하였다. 또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사람과 사물의 성품은 서로 같을 수 없다는 상이론(相異論)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이원조(李源祚)·강엄(康儼) 등 여러 학자가 배출되었다. 우산서원(愚山書院)에 위패가 배향되었다. 저서로 《소대명신언행록(昭大名臣言行錄)》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종로 [鄭宗魯] (두산백과)
주② 홍여하[ 洪汝河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주자학에 밝았다.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주요저서
《목재집 (木齋集)》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라고도 한다. 대사간을 지낸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5)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進士) 2등(二等) 18위로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으며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정언으로 있을 때 효종에게 시사(時事)를 논하는 소를 올려 왕의 가납은 받았으나 반대파의 배척으로 좌천되어 사퇴하였다.
1658년 다시 경성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인해 황간(黃澗)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원년)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병조좌랑에 복직되었으며 후에 사간(司諫)을 지냈다.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士林)들이 존경하였다.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목재집 (木齋集)》을 남겼으며 편서로 《주역구결(周易口訣)》, 《의례고증 (儀禮考證)》, 《사서발범구결 (四書發凡口訣)》 등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여하 [洪汝河] (두산백과)
주③ 송준길[ 宋浚吉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했으며 서인에 속해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동춘당집》 《어록해》
주요작품
〈충렬사비문〉 〈윤영순절비문〉
본관 은진(恩津).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시호 문정(文正). 영천군수였던 송이창의 아들이다.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의 천거로 발탁되었다. 부사, 진선, 장령을 거쳐 집의(執義)에 올랐고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김자점과 원두표, 이완을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였지만 김자점(金自點)이 북진정책을 청(淸)나라에 밀고하여 자신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다. 그 뒤 벼슬길에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1658년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당시 송시열은 이조판서의 위치에 있으면서 송준길과 함께 국정을 주도하였다. 1659년 병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右參贊)·좌참찬 겸 좨주(祭酒)·찬선(贊善)을 지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를 비롯, 공주(公州) 충현서원(忠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서인에 속하여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쓰는 한편,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을 때 남인(南人)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朞年制: 만 1년)를 관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문집 《동춘당집(同春堂集)》과 《어록해(語錄解)》가 있고, 글씨에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부산), 〈윤영순절비문(尹榮殉節碑文)〉(남양)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준길 [宋浚吉] (두산백과)
주④ 정도응[ 鄭道應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대군사부와 세자시강원 자의 등을 지냈다.
주요저서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소대수언(昭代粹言)》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자는 봉휘(鳳輝)이고, 호는 무첨(無忝)이다. 판서를 지낸 정경세(鄭經世)의 손자이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있어 칭송을 들었다. 1648년(인조 26) 왕이 대신들을 만나 인재에 관해 논할 때,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의 천거를 받았다. 이듬해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왕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효종이 즉위한 후 세자시강원의 자의(諮議)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657년(효종 8) 다시 자의에 임명되었으나 왕에게 상소를 올려 사직할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이때 왕은 그에게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말 한 필을 내렸다. 이듬해에도 왕의 부름을 받고 자의를 지냈으나 1년 만에 다시 향리로 돌아갔다. 저서로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소대수언(昭代粹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도응 [鄭道應] (두산백과)
주⑤ 황빈(黃霦)
[생원시]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3위(3/100)
주⑥ 장우일[ 張遇一 ]
정의
조선 후기 구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경중(經仲), 호는 귀로정(歸老亭).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증이조참판 장계증(張繼曾)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장희(張熙), 아버지는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 어머니는 도시인(都是仁)의 딸이다.
활동사항
장우일은 당시의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에서 태어났으며 종숙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 생원시와 문과에 동시에 급제하여 1664년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을 시작으로 사헌부감찰, 고성군수, 성균관사예, 장악원정, 승문원판교, 봉상시정, 장례원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숙종 20) 정국이 바뀌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거처하는 곳에 ‘귀로정(歸老亭)’이란 편액을 걸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696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1708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묘소는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율리 동편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우일 [張遇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⑦ 조위수[ 趙渭叟 ]
정의
1630(인조 8)∼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상보(尙甫). 광조(光祖)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군수 송년(松年)이다.
내용
남원부사·수원토포사(水原討捕使)·수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남원부사 시절 관사를 잘 다스렸다 하여 전례(典例)에 없는 포상으로 직질(職秩)을 승급받기도 하였다. 또, 수원부사 때에는 군병(軍兵)을 위열(慰悅)하기 위한 시재(試才)가 있었는데, 한번에 전원을 합격시켜 엄정하지 못하다고 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위수 [趙渭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⑧ 송도창(宋道昌)
[생원시] 효종(孝宗) 3년(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생원] 1등(一等) 1[壯元]위(1/100)
주⑨ 정석교(鄭錫僑) : 愚伏 鄭經世선생의 증손
주⑩ 배상유[ 裵尙瑜 ]
요약
조선 후기의 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탐독하고 그 취지에 따라 군왕의 도리, 정치의 규모,전제에 관한 소신을 상소했다.
본관 성산. 자 공근(公瑾). 호 만학당(晩學堂). 유염(柳淰)의 문인. 1672년(현종 13) 천거로 창릉(昌陵)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77년(숙종 3) 사직서(社稷署) 참봉이 되었다가 곧 물러나,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탐독하고, 그 취지에 따라 군왕의 도리, 정치의 규모, 전제(田制)에 관한 소신을 상소하였으나 묘당(廟堂)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가서는 심성정이기(心性情理氣)의 학설을 깊이 연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배상유 [裵尙瑜] (두산백과)
주⑪ 심대부[ 沈大孚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1639년 가도에 포진하고 있던 명나라 군사의 극심한 민폐를 막았고, 또 삼남에 흉년이 들자 백성을 구제하였다. 문경 소양사에 배향되었다.
본관 청송(靑松). 자 신숙(信叔). 호 가은(嘉隱)·범재(泛齋).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으며 인조반정 후 효행으로 관직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30년(인조 8)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163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종부시정(宗簿寺正)·성산(星山)현감을 거쳐 사간을 지냈다.
1639년 가도(椵島)에 포진하고 있던 명나라 군사의 극심한 민폐를 막았고, 또 삼남에 흉년이 들자 백성을 구제하였다. 문경 소양사(瀟陽祠)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대부 [沈大孚] (두산백과)
주⑫ 정필규(鄭必奎)
[생원시]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0위(80/100)
[음관] 진신보(搢紳譜)
[상세내용]
정필규(鄭必奎)에 대하여
1760년(영조 36)∼1831년(순조 31).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명응(明應)이고, 호는 노암(魯庵)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예천(醴泉) 용궁(龍宮: 현 용궁면)이다.
조부는 정유덕(鄭游德)이고, 부친 정직(鄭稷)과 모친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정필각(鄭必珏)이고, 동생은 정필경(鄭必瓊)이다.
김강한(金江漢)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중용』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교유한 문인들로는 김희주(金熙周)‧이종휴(李宗休)‧이야순(李野淳)‧이병원(李秉遠)‧유치명(柳致明)‧유심춘(柳尋春)‧이병운(李秉運) 등이 있다.
1789년(정조 13) 식년시 생원 3등 50위로 합격하였으며, 1814년(순조 14)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문집으로 김대진(金岱鎭)이 편집‧간행한 8권 4책의 『노암선생문집(魯庵先生文集)』이 전하는데,주목할 작품으로 학문에 관해 묻고 답한 것을 기록한 「상천사선생(上川沙先生)」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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