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수 안무의 <상상력>
그리스신화를 한국창작무용으로 직조한 수작
진달래가 피면 남산이 핀다. 햇살을 받은 분홍 물결이 축복처럼 만물을 어루만지며 스쳐 지나가면 봄은 깊어 간다. 봄의 한가운데를 조준한 사월의 열하루와 열 이튿날의 늦은 일곱 시 반, 국립극장 KB 청소년 하늘극장은 장현수(국립무용단 주역 무용수) 안무의 <상상력>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희비극이 정갈하게 배합된 <상상력>에 따스한 시선이 쏟아졌다.
남산에 그리스 신전이 설치되고, 그 신들의 오묘한 대화가 춤에 실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상상은 상상의 알을 낳고, <상상력>은 프레임을 확장한 무대를 온통 분홍색 천으로 휘감고 있었다. 내레이션(깁대업, 배우)을 깔고 미노아 문명을 잉태시킨 크레타 섬은 웅장한 스케일의 서사적 공간으로 환치되고, 신화를 품은 그리스는 비밀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었다.
<상상력>은 상상력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독해하기 힘든 방대한 그리스 신화의 축약의 묘미가 두드러진다. 춤, 음악 시적 표현으로 촘촘히 들어선 짜임새의 희랍극의 품위와 임현택(들숨무용단 대표)의 손질로 간결하게 처리된 대본 속 그리스 신들의 존재적 상징성과 이미지화는 스펙터클한 핑크 퍼레이드의 무대를 열린 공간의 상상력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상상력>은 1부: 1장-신들의 고민, 2장-신들의 고통, 3장-신들의 실패, 4장-신들의 상상력 2부:1장-신들의 희망, 2장-신들의 억지스러움, 3장-신들의 유혹, 4장-신들의 모습, 5장-신들의 사랑, 6장-신들의 파멸, 7장-신들의 실타래로 2부 11장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함의적 장(場) 에서 분주한 춤적 움직임에 가미된 극성은 무용, 연극, 음악을 동시에 즐기는 잔치가 되었다.
구조의 다양성을 활용한 1부 ‘크레타섬의 우인(牛人)’은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근간(根幹으로 한다. 왕자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반수반인(半獸半人)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미궁 속에 갇혀야했던 우인(牛人)의 절규와 자식을 미궁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왕과 왕비의 비통함, 우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수호신들의 움직임이 창의적 안무와 음악이 어우러져 담대한 신화가 구축된다.
1부의 서사적 구조에 채색적 비주얼을 보여준 2부 ‘헤라와 제우스의 실타래’에서는 제우스의 외도와 이를 보는 헤라의 모습이 묘사된다.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우화(寓話)와 위안이 그리스 신화와 접점을 찾는다. 결혼과 가정의 여신이지만 질투의 화신이기도 한 헤라(장현수)가 끊임없이 고통 받고 욕망에 이끌리는 모습이 환상적이고 매혹적으로 표현된다.
장현수(들숨무용단 비상임안무가)의 예술적 안무의 힘과 내공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녀의 상상력은 다양한 신들의 특징을 세묘(細描)하며 신들의 비밀스런 이야기 속으로 흡인될 수 있는 동작언어 중심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녀는 춤연기자로서도 가정과 결혼의 신 헤라의 안쓰러운 심정을 심리연기와 춤연기로 두드러지게 극적으로 잘 표현해내고 있다.
장현수의 움직임의 확장은 전통춤의 장기적(長技的) 특징을 현대화시켜 사위와 디딤의 조화, 호흡과 진퇴 등의 디테일, 완급 조절의 배분, 리듬감타기 같은 춤연기자들의 무대 활용과 공간 장악력은 압도적 우위의 춤 연기력과 미학적 상승을 보인다. <상상력>에서 내세우지 않아도 두드러지는 장현수의 춤은 다년간의 춤 수양에서 배양된 숙성의 성과물이다.
<상상력>에서 직조된 미장센은 동・서양 음악의 조화로운 연결과 음악을 통한 교양 함양의 장을 마련한다. 분할된 미장센 자체의 구도만으로도 <상상력>은 상부구조와 연결된다. 클래식 음악을 주조로 정가(임상숙)를 입힌 <상상력>은 분홍을 주조로 한 상상계가 리스트의 ‘발렌슈타트의 호수에서’를 시작으로 에르상의 ‘변신이야기’로 마침할 때 까지 몽환성을 유지한다.
그 사이에 스토리텔링이 있는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와 브릴리언트필하모닉이 연주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춤꾼들의 감정을 최대한 끌어 올려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상상력>은 익숙하지만 낯 설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매력을 소지하고 있다. 부문별로 광휘(光輝)가 된 무한 상상력은 가을의 미토스를 딛고 뜨거운 여름을 지향한다.
<상상력>은 한국창작무용의 새로운 돌파구의 한 축으로 기능한다. 전통 무용가들처럼 많은 창작 안무가들이 한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화두로 삼고 자신의 안무적 성향을 나타내곤 했다. 한국창작 무용의 태두는 김매자 이다. 그녀는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었다. 오방색 중심의 색감을 화려한 파스텔화로 바꾸어 버렸다. 장현수도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창의력은 새로운 문화유형을 만들어 낸다. 현대무용가 육완순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이숙재는 <한글> 시리즈, 현대무용가 박명숙은 <유랑>, 한국무용가 임학선은 <공자>, 한국무용가 김운미는 <묵간>으로 자신의 춤빛깔을 보여주었다. 부문별 작은 불협(不協)에도 불구하고 장현수의 <상상력>은 외국 소재를 우리화 시킨 창작무용의 놀라운 변신을 보여준다.
긴 줄, 소의 가면으로 상징되는 슬픔을 넘어 공처가로 전락한 제우스와 아홉 무사이(Mousai, 음악의 여신 뮤즈)들이 상상력을 배가시킨 <상상력>은 총체적으로 초중고 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연령층의 일반인들도 즐길 수 있는 우수 작품임이 판명되었다. 신작을 보는 즐거움은 신작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의 고통을 수반한다. 너무 짧은 공연 횟수가 아쉬움을 남긴다.
식자(識者)를 위한 만찬이거나 빈자(貧者)를 위한 양식이 된 춤극 <상상력>, 무술년 들어 ‘들숨무용단’과 장현수의 첫 번째 안무작은 조명이 구사하는 현란한 색의 유희처럼 기대를 뛰어넘는 예술적 상업적 기준에 부합되는 완성작이었다. 안무자와 연기자를 믿고 보는 대상 중의 하나인 장현수, 그녀의 빛나는 창의력이 발휘된 버전을 달리하는 차기작들이 기대된다.
출연: 장현수, 한 성, 이소영, 전보현, 이 마리슬, 이예닮, 김태훈, 김문희, 차다솜, 유채연, 정은희, 남기희, 백상현, 김태훈, 노동환
○장현수
현) 국립무용단
현) 들숨무용단 비상임안무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2017 국립무용단 표창(문화체육부장관)
2017 대한민국 나눔대상(보건복지부장관 표창)
2017 대한민국 무용대상 <목멱산59>(한국무용협회이사장)
2010 제1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화체육부장관)
2009 문화체육부장관 표창
2009 한국춤비평가상 연기상(한국춤비평가협회)
2004 제2회 무용예술상 무용연기상(창무예술원)
2005 제12회 무용예술상 무용연기상
○주요안무작
<장현수의 춤-여행>, <청안>, <목멱산 59>, <검은 꽃>, <사막의 붉은달>, <피노키오에게>, <암향>, <아야의 향>, <바람꽃>, <팜므파탈>, <내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수정흥무’>
장석용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제공 권혜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