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 최자인 , 연출 안지형의 공동협연작 <소녀, 그 상상의 가능성>
상상으로 풀어낸 ‘진주 귀걸이 소녀’에 대한 오마주
장르를 넘나드는 공연예술가 집단 세컨드 윈드 스테이지의 아티스트인 최자인, 안지형의 공동협연작 <소녀, 그 상상의 가능성>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모티브로 한다. 사월 팔일 세시 반, 여섯 시 반 ‘스테이지 66’에서 두 번 공연된 이 작품은 여러 분야의 예술과 어울려 섞이면서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 상상무용이다.
배경 막에 투사되어 있는 화려한 텅 빈 대형 액자, ‘왜?’와 ‘무엇’이 집중을 유도한다. 암전 속에 간(間)이 부르는 상상, 사내(황찬용)는 끌림 속으로 빠져들고, 무대를 천천히 돌아 액자에 접근한다. ‘여러 시선 속 세계’, 「내가 만든 시선에 나는 갇혔다. 저 너머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를 부른다. 넘쳐흐르는 시선의 강을 헤엄쳐 건너간다. 똑똑똑.... 거기 누구 없나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작은 점들을 엷게 칠해서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빛의 효과를 이용한 대가의 점묘법이 조화롭게 빛 속에 녹아드는 듯 묘사된 작품이다. 귀고리는 단 두 번의 하이라이트적인 붓 터치로 재현된다. 소녀의 옷깃은 반사되고 얼굴과 머리에 표현된 하이라이트와 조화를 이룬다. 베르메르의 빛과 색채 기법에서 소녀의 이미지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슬램프처럼 ‘진주귀걸이’에 대한 상상은 힘을 발휘한다. 「똑똑똑....거기 누구인가요? 틈 사이로 보이는 홀연한 사유. 빈 공간에 떠오르는 감정의 조각들. 내일 이곳에서 사라지더라도 오늘은 이곳을 돌아보아요. 그리고 내 삶에 피어나 주세요.」 그림이 주는 시각적 환상은 증폭되어 장르간의 유기적 융・복합이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변신한다.
사내는 액자를 터치한다. 터치에 따라 그려지는 이미지들, 밝혀지지 않은 소녀의 신비를 찾아가는 상상의 여정, 얼굴이 밝혀지지 않은 여인들이 스쳐지나 간다. 오묘한 감성으로 피어오르는 여인들과 사내, 잠재된 욕망과 자아의 이면, 그 속에 숨어있는 형이하학적 상상들이 오감을 자극하며 자신의 현재적 모습을 비추어보도록 대비적 공간의 장(場)을 마련한다.
자화상, 「깜깜한 어두운 밤에 홀로 있을 때 심연은 피어오른다. 흐르는 눈물 탓에 시선이 흐릿해질 뿐.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 자유롭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된다.」 남사스러운 발칙한 상상의 반란이 전개된다. 내 안에 흐르는 눈물과 여인을 향한 상상은 상상무용과 호흡을 이룬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뽑아낸 상상의 추출물은 영롱하다.
무용수 몸에 그려진 전도성잉크는 움직임에 따라 무용수 신체의 일부가 되고 영상과 상호작용하며 빛은 외면화된 상상의 빛깔이다. 육체와 통합된 카메라의 체현적 관계를 실험한다. 두 무용수는 각기 보여 지는 ‘나’와 내면의 상상 속의 ‘나’를 표현한다. 두 무용수의 몸이 접촉되면 미세한 전류가 전도성잉크에 의해 몸에 흐르게 되고 설치된 조명으로 데이터가 전송된다.
영상은 공간 속에서 자아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도구로써 다양한 ‘나’의 모습을 확장된 경험으로 이야기한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시선으로 바라본 자아적 상상스토리텔링에 초점을 맞춘 작품은 상상 속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백 포즈로 진행되는 솔로( 최해준)의 익명성과 빨간 하이힐이 강조된 중성적 이미지는 착각과 왜곡의 극치를 이룬다.
순간이 주는 자유로운 상상의 가능성, ‘환상 너머의 풍경’은 심도를 더해간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요? 당신은 내가 당신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나요? 또는 당신의 미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의 미란 무엇일까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신비적 이미지의 표상은 비밀스런 내면의 상상에 존재하는 작가의 모습을 구현한다.
엄청난 상상이 쓰나미로 빠지면 또 다른 상상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극한 뒤에 숨어있는 달콤함’, ‘새로운 활력’은 완벽한 회화적 구도 속에 발견된다. 익명성을 털고 얼굴을 가린 거추장스러운 굴레가 벗겨진다. 슬픔을 위로하는 빛의 현란한 수사가 펼쳐지고, 수직으로 달린 형광등 사이로 내면을 드러낸 춤이 끼어들고 현대적 문명을 앞세운 욕망이 전류처럼 흐른다.
귀걸이에 달린 눈물, 그 무한 잠재력에 대한 상상은 냉엄한 현실에 대한 깨우침 이었고, 진주는 상처를 통해 열린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다. 「오늘은 짓밟히더라도 내일은 빛나는 거예요.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상처받게 하나요?」 고요한 초연함이 더욱 심화된다. 회화의 재해석과 디지털 기술의 도전적 만남으로 형태와 텍스처를 표현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모든 상상력의 유희가 끝나고 사내와 상상 속의 얼굴이 마주하는 순간, 액자를 대신했던 천이 걷히면 또 다른 상상이 자리 잡고 있다. 바깥 풍경은 사실이 되고, 투명한 블루는 또 다른 회화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안지형 연출의 <소녀, 그 상상의 가능성>은 화가의 선호색인 노랑과 파랑, 맑고 투명한 진주 빛깔을 내는 빛의 효과를 변주시켜 도회적 질감을 만들어낸다.
세컨드 윈드 스테이지(Second Wind Stage)의 안지형(대표 & 예술감독, 남예종 실용무용과 교수)은 순수무용과 스트릿댄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춤 장르의 해체와 움직임에 대한 감각적 탐구로 새로움을 추구해왔다. 동시대의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문화콘텐츠 창작의 모범작을 제시한 <소녀, 그 상상의 가능성>은 예술적 가치를 고양한 흠결 없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출연: 유경진, 황찬용, 최해준, 최자인, 안지형, 사진: 옥상훈
장석용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