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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경장사꾼들이 "대한성서공회"로도 모자라, 죽어가던 "한국성경공회"를 미끼로 '바른성경'을 출판한다는 말을 듣고 한심하고 답답하고 안타까와서 몇 자 적어봅니다. '성경'과 '번역'이라는 이 낱말들과 그 관과 실제를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더욱 성경을 파괴하는데 무리지어 앞장서니 어찌 해야 합니까? 무슨 신학자니 위원이니 교단장이니 하면서 앞세워 인간놀음들을 하는데 기도하면서 성경에 대한 바른 앎과 번역에 대하여 깊은 고민과 공부와 실질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작은 글 가운데, 지극히 적은 부분을 감히 올려봅니다.
번역성경을 견주어 가려냄-"바른성경과 한글번역" 에서 옮김
[여기서 다루지 않은 역본들도 50보 백보에 지나지 않는다-개역개정역, 한국성경공회의 바른성경]
[구약과 신약에서 한 절씩 뽑아서 본보기로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1. 구약 - 룻 2:7
전통 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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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 : 그런데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바라건대 끌어모으고야말겠고
제가 모으겠습니다 그 단들에서 그 거두는이들 뒤에'
그리고 그는 들어왔고 그는 서있었습니다 그 해돋이 그때부터
또 이제까지 바로 그가 그 집에 조금 앉았답니다"
임금역 : And she said, I pray you, let me glean and gather after the reapers among the sheaves:
so she came, and hath continued even from the morning until now that she tarried a little in the house.
LXX : και ειπεν συλεξω δη και συναξω εν τοις δραγμασιν οπισθεν των θεριζοντων
και ηλθεν και εσθη απο πρωιθεν και εσπερας οθ κατεπαυσεν εν τω αγρω μικον
,
불가타 : et rogavit ut spicas colligeret remanentes sequens messorum vestigia
et de mane usque nunc stat in agro
et ne ad momentum quidem domum reversa est
표준새번역 :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곡식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더니,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저렇게 서 있읍니다.
아까 여기 밭집에서 잠깐 쉬었을 뿐입니다."
개역 :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구역 : 저의 말이 나로 거두는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하소서 하고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에 잠시 집에서 쉬었느니라
먼저, 견주기 앞서 히브리말 본문을 알아보자.
BHS, BHK 따위 이름들이 주름잡는다. 이것은 자유주의 비판학자들이 거짓 사본들과 엉터리 신학을 앞세워 멋대로 고치거나 제안했고 Apparatus Criticus[비평 장치]를 달아서 무서운 덫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20 세기 들어서면서 비롯했다
Textus Receptus 텍스트는 일명 랍비성경으로 1525 해 베니스에서 펴냈다. 특히 이것을 개혁자들이 제 나라말들로 옮겨 개혁신학을 세우는데 중요하게 썼다. 이 전통 본문 MT를 깔뱅 때 프랑스말 성경 그리고 1611 해 임금 역에 바탕으로 썼다. 지금은 영국성경공회에서 가끔 박아낸다. 첫 판은 1886 해 מאיר הלוי לעטעריס [메이르 할레비 레테리쓰]가 다듬었다. 바른 신학을 공부한 이들은 신약 본문이나 구약 본문에서 아래 여백에 쓸데없는 주를 붙이지 않은 본문을 읽었다.
지금부터 350년 앞에 고백한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만 보더라도 목사시험규칙에 히브리말, 헬라말 따위를 반드시 읽을 힘이 있어야 말씀 선포 자격을 준다고 정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보면 신학교수 조차 원어 읽을 실력이 거의 없고 히브리말은 더욱 모른다! 보수파에 속하는 목사들이 더 무시한다. 그러니 성서공회나 여러 출판사에서 펴내는 성경에 마음 없고 진위를 가릴 힘이 거의 없다. 이것을 어서 개혁해야 교회가 바로 서리라.
영역본들이나 기껏 이른바 칠십인역본(LXX = 구약만 헬라어로 옮긴 것)을 더 권위있는 양 앞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이른바 신학 논문들을 보면 주경신학이나 원문석의 따위에도 히브리말을 더욱 겉치레로 몇 글자 그려넣고 있다. 그러면서 유학이니 학위니 잿밥에만 마음들 있으니 어찌 올바로 가르치고 배움으로 개혁이 있겠는가? 그 동안 신학교 안팎에서 교수 목사 신학생 성도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원어는 특히 히브리말은 가르치거나 말씀을 똑바로 공부하려면 반드시 밑바탕 구실을 하도록 알아야만 한다.
덧붙여 말하면 딴나라에서 만든 렉시콘(사전), 콘코단스(성구사전), 문법책 나아가서 가르치는 법을 우리 말버릇과 성깔에 맞게 꼭 새로 만들어야만 한다. 물론 이제까지 신학교에서 검증한 것들을 잘 참고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은 거의 자유주의 학자들이 만들었기에 잘못 사용하면 원어 Text를 섣불리 주무르는 버릇들거나 거짓 신학사상에 물든다!!! 우리 말투와 한글에 온통 마음을 써야 원어에 관련한 책들을 똑바로 만들 수 있다.
히브리말은 쉽다. 어떤이들은 랍비 문서, 헬라문학 따위를 알아야 더 원문을 잘 아는 것으로 말하지만 어불성설! 몸에 밴 선입견이나 주관을 갖고 어찌 이러쿵저러쿵하는가? 영어 따위에 쓰는 힘과 시간을 1%만 힘써도 너끈히 자신감을 갖고 또 배우리라 확신한다! 한글과 말씀을 사랑한다면 누구보다도 누구라도 원어로 말씀과 신학을 잘 공부하리라.
◇ 이제, 우리가 역본들을 보면서 말씀을 두려워하고 개혁이 필요함을 알자.
마쏘레틱 텍스트[MT]는 젊은머슴 נער 이 보아즈에게 말하면서 루트 רות 가 한 말을 옮기고 또 그 움직임을 그린다. 크투빔 כתובים 가운데 다섯 두루마리에 속하는 말씀으로 어려운 월(문장)이 아니다! 또 히브리 말을 얼마나 간단한 말본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는지!
그런데 앞에 늘어놓은 역본들을 보면 임금역[KJV] 말고는 한결같이 엉터리 설교투로 풀어놓았다. 오히려 LXX가 순수하게 보일 정도야. 한숨나는 것은 우리말 성경에서 구역보다 개역이 더 빗나간 설교투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짚어보는 법인데, 개역성경은 온통에서 얼마나 무서운 속임수들을 숨겨놓았을까?
표준새번역은 잡탕이다. 예롬이 옮겼다던가? 이단 로마교회 책인 불가타는 정말 어이없다. 표준역은 슬쩍 비판 신학을 깔면서 라틴말 성경 말투를 멋지게 흉내낸다. 그렇다고 어찌 로망스말의 원조인 라틴 불가타 말맛을 따라잡으랴! 성서공회 아니, 우리나라가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도 두렵고 거룩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구약신학과 그 연장의 하나인 히브리말에 힘을 기울이지 못하면 신약 헬라말에 올바로 힘을 쏟을 수 있겠는가? 보수신학에서 구약이 부실하고 인기가 없다는데, 또 GBT[성경번역선교회]에서 아주 마땅한 일을 하지만, 구약과 원문 및 신학을 도외시하거나 얕보는 것 같은데 안타깝다. 비판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틈새를 알려주는 것이다. 구약 없는 신약, 히브리말과 아람말 없는 헬라말은 있을 수 없다!
우선 히브리어 "전통 본문"을 소리로 적어보자. 17개 덩어리입니다.
바토메르 알라크타 나 브아싸프티 바오마림 아하레이 하코쯔림
바타보 바타아모드 메아즈 하보케르 브아드 아타 제 쉬브타흐
하바이트 므아트
사족이지만 이른바 신학자들이 대개 원문도 한번 제대로 독파도 못하고서 영미 신학자들이나 글들에서 흉내내려고 영어앨화벹으로 음역하는 것을 보는데 그래야 국제공인논문이 되는지 모르나 한글의 닿소리 홀소리가 가장 소리대로 적기에 좋은 말이라는데 아는지 모르겠다 …
또 이른바 단순 슈와( )를 왜 '으' 로 읽느냐고 트집잡으려나? 딱하기도 하지 이것은 홀소리가 아니야! 닿소리끼리 부딪히면 소리내기 힘들기에 그냥 나오는 소리지. 굳이 소리를 매긴다면 '아' '어' '으' 섞인 소리이겠지. '에' 보다 '어' 가, '어' 보다 '으' 가 처음 공부할 때 다른 소리와 헷갈리지 않고 썩좋다. 미국아이들은 '으' 라는 홀소리 글자가 없다지! 그러하기에 우리 말투에 맞는 문법책을, 본문에 절대 복종하는 말본을 어서 만들어야 마땅하다.
1. 임금역[흠정역]과 칠십인역[LXX]을 보자.
נא (나=바라건대)를 / I 와 you 덧붙여 풀었다. 그냥 프뤠이(pray)만 해도 좋았다. LXX는 δη 로 잘 옮겼다.
움직씨 라카트(לקט)와 아싸프(אסף) 를 / 두 역본에서 머리 소리를 살려서 같은 뜻을 드러냈다. συν (쉰) 과 g(쥐)로. 하지만 움직씨 꼴들은 히브리어 말본을 못살렸다. '알라크타' 는 미완료 1인칭 뒤에 헤(ה )를 붙여 만든 것으로 뒤에 '나'와 더불어 루트의 마음, 의지를 세차게 그린다. 평행법으로 쓴 '아싸프티' 는 완료로 cohortative 랑 다른 맛을 풍긴다. 미완료나 미래꼴로 말할 때보다 훨씬 강력하다! 두 움직씨 첫 글자가 알레프(א )로 가락을 살렸지만 하나는 '인칭'을 다른 것은 '어근'을 가리킨다.
KJV을 보면 두째 움직씨를 gather 로 옮겨 뉘앙스를 완전히 죽였다. 물론 앞에 적은 'let me'가 생략되었다 해도 미치지 못한다!
LXX는 똑같이 futurum(미래)꼴로 옮겨서 너무나 형편없다!
"바오마림"(그 단들에서)에서 ב (바)전치사를 왜 임금역은 among(가운데)라고 했는지? 직역은 아니고 해석역으로 풀었다. 칠십인역에서 εν (엔)으로 그대로 잘 옮겼다. 더우기 "아하뤠이"(אחרי = 뒤에)도 after로 풀었다.
구역, 개역, 표준역을 보면 임금역처럼 '사이에서'와 '따라'로 옮겼으니, 원문을 보고 옮겼다고 누가 보겠는가?
* 지금 이 귀절 앞부분을 살피는데, 다음 네 역본들은 같은 핏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LXX나 KJV과 뿌리가 다르다! 불가타역과 비판학자들이 맞아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이 두 동아리들은 성경 번역 앞세우고 진리 말살 정책을 꾸민다. 살펴보라!
2. Vulgata역본은 매우 엉터리다.
두 움직씨를 하나로 줄였고, אחרי 를 두 분사로 그렸다. 이 귀절 뒷부분은 더욱 한심하게 찢어발긴다. 다른 말씀들을 어떻게 옮겼겠는가?
"바토메르"(그런데 그는 말했지요). 여기서 אמר (아마르)는 동작 완료꼴인데, 라틴역은 현재완료 rogavit 로 옮긴다. 뒤에 미완료 가정법과 두 현재분사를 볼 때 구색을 맞추려고 시제를 주물렀다.
"그 단들에서(בעמרים )"는 아예 'spicas 이삭들'로 푼다. 그리고 1인칭 주어로 쓴 두 움직씨를 3인칭 주어 한 동사로 바꾼다. 직접화법을 간접화법으로 바꾼다. 적은 차이인가?
"그 거두는이들 뒤에" 여기에 두 분사를 왜 덧붙여 풀었는가? '계속하여 따르면서' 레마넨테스 세끄벤스. 앞서 "알라크타 나"를 빼더니 보충하려나? 말하는 김에 vestigia(자취) 라틴말로 멋부리려 발버둥이다. '뒤에'도 pone 라 옮기면 덧날까?
* 불가타역이 얼마나 성경을 가로막는가 느꼈으리라. 임금역이 나오기까지 로마교회가 얼마나 못살게굴었는지 아십니까? 우리도 개혁자들 뒤따르려면 먼저 바른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대충 세 역본을 본문에 견주었다. 직역을 보라! 우리말로 얼마나 쉽고 뚜렷하게 옮길 수 있는가! 구역, 개역, 표역은 뿌리를 어디 두었는가? 불가타가 무색할 만큼 뒤죽박죽이다!
3 이른바 표준새번역은 어떻게 옮겼을까 파헤쳐 보자!
"바토메르"는 어디로 사라졌나? 저 뒤에 '∼고 하더니'로 처리한다. 한글 말투다운가. 좀더 들여다보자. '일꾼들' 그럴싸하지만 속임수다. "하코쯔림 הקצרים " 은 카짜르 움직씨로 만든 분사꼴 이름씨다. 코쩨르의 복수로 앞에 관사 '하 ה '를 붙였다. 직역이 "그 거두는이들" 오히려 구역성경이 바로 옮겼다!
'따라다니면서'는 고향이 어디일까? 눈 씻고 찾아도 안보이는데, 표준역은 성경이 아니고 어떤 개인이 제 수준에서 제 신학을 깔고 설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구역과 개역은 '따라'만 있어서 지나치지는 않았는데, 표준역을 누가 주도했고 누가 감수했더냐! [* 민영진,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305-313 참조]
'사이에서' 이미 손댔지만 히브리말 ' בין 베인' 이라야 맞다. 그러나 ' ב 브'이다. 차리리 굳이 옮기면 '가운데'가 좋다. "에서"와 작은 차이로 보는가? 우리는 머슴노릇하겠는가?
'떨어진 이삭을' 구역과 개역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누가 붙들겠나! '떨어진'으로 이삭을 꾸민다. 애숭이나 원어 무식꾼들이 보면 그럴싸하겠지. 어디까지 성경이고 어디부터 사람 말인가 아리숭하다가 고꾸라지겠구나! 왜 자꾸만 없는 말들을 덧붙이는가? 이것이 21세기 내다보는 최신 번역법인가? 직역과 아니 원문과 견주어 보자!
'줍도록 허락해 달라' 브아싸프티 ואספתי 를 뺀 것 같은데, 원문 두 움직씨 뉘앙스와 말하는 루트 생각이 몽창 날아가 버렸다! 간절함과 당당함, 구속 계시의 현장에서 내뿜는 풍성한 은혜를 누가 함부로 가로막는가? 다시 말하지만 번역이 아니고 말장난이다!
* 문자역, 해석역, 의역 어떤 것보다 먼저 바르게 직역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손댔는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으리라. 무조건 사람들에게 읽히기 쉽게 풀이한다면 어찌 성경인가? 비판하자면 끝도 없고 쓸데없구나! 제 갈 길로 가리라.
4. 이제 우리가 많이 본 구역과 개역을 둘러보자.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다만 개역은 무엇을 개역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구역이 개역보다 낫다! 뒷부분에서는 구역이 더 낫다 결국 한글 성경도 자꾸 빗나간다.
'그의 말이' 일본 말투이고 "그런데 그는 말했지요" 하면 간단한데.
'나로' 도 "제가"로 해야 맞지. 너무 힘없는 옮김이라고 루트가 슬퍼하겠다
'베는 자'는 틀린 번역이지. 구역은 제대로 했는데 왜 이렇게 누가 고쳤는가?
'따라', '사이에서'는 앞에서 이미 말했고 '이삭을' 이것은 풀어제친 한글 말투에 맞추려니까 "그 단들에서"가 둔갑할 밖에 없었다.
'줍게 하소서' 히브리말 נא 와 ואספתי 를 빠트렸다. 표준역에서 '허락해'는 조금 나은 옮김이다. 이렇게 멋대로 빼고 덧붙이고 틀리게 푸니 종잡지 못하겠다.
* 어떤 부분에서 개역이 나은 것 빼면 단언하지만 구역이 개역보다 낫다. 개역을 그냥 두면 안된다. 그렇다고 표준역처럼 옮겨서도 더욱 안되지만
◇ 7절 앞 덩이를 원문과 빗대어 살펴보지만 우리가 원문을 똑바로 배워 읽던가, 바르게 옮긴 한글성경을 읽던가 해야만 한다. 언제까지 그릇된 번역성경을 뒤좇아 비판만 하겠는가? 본보기로 쉬운 부분에서 이렇게 엉터리니 다른 곳은 어떨까.
◇ 루트가 말하고나서 보인 움직임을 그린 뒷부분을 보자.
1. LXX 경우
אז (아즈 = 그때), זה (제 = 바로) 두 낱말을 뺐고 עתה (아타 = 이제)를 εσπερας (헤스페라스 = 해넘이)로 바꾸었다 히브리말 ערב 에 해당하지. 잘못보았나?
'ου κατεπαυσεν ' 오역이다. "쉬브타흐" 부정사 구문으로 '그가 앉았다' 이다.
그리고 '집'을 '들판'으로 오역했다. '앉다'를 '쉬다'로 옮기다보니 '그 집'이 '그 들판'으로 바뀐다.
" הבית " 옮기기가 어려웠을까? 표준역에서 머리 굴려서 '밭집', 너무 간살스럽다! 이것을 볼 때 옮기는 이 생각이나 선입견, 신학이 어찌 들어가지 않겠나! 앞서 '이제까지'를 '해넘이까지'로 옮긴 데서도 그림을 연상하며 옮김을 본다. 제발 본문대로 옮겨야 한다!!!
* 아니, 누가 종교개혁 공인본문보다 칠십인 역본을 앞세우는가? 지금 본 것처럼 너무나 많이 본문과 다르다. 직접 다 견주어 보고 LXX를 드높이는가? 우리나라에는 견줌이 없다. 왜 딴나라 자유주의자들 말을 듣고 성경 권위, 무오를 무너뜨리는가 나가서 히브리말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 어디 있는가? 모든 신학교, 원어 선생을 개혁해야 한다!
2. 임금역은 어떤가 어느 호사가 말처럼 오직 유일 권위 성경일까?
"바타아모드 =그리고 그는 서있었다" 를 '계속해왔다' 완료로 옮겼다. 앞에 움직씨는 단지 과거로 옮겼으면서. 게다가 두 움직씨 사이에 숨표까지 들이댄다. 원문과는 다른 그림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제를 바꾸어 두째 움직씨를 종속시키려고 접속사 바브( ו )를 'so, 그래서' 로 옮겼다. '결과'보다는 '계속' 뜻으로 직역처럼 옮기면 된다.
עמד (아마드 =서있었다)를 '계속해왔다'로 의역한다. 시제와 결과 따위로 각색을 하다보니 움직씨를 전혀 다른 낱말로 바꾸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다른 역본들을 답습한다. 제 말본들이나 선입견들로 본문을 맘대로 건드린다. 누가 하나님과 그분 말씀을 문법이나 저마다 좁은 생각 속에 가두는가? 바꿔 말하면 신학에 문제가 있기에 본문을 곡해한다. 침례파에서 정통 신학에 코웃음치고 단순하게 원문을 강조함을 두렵게 여기자!
"메아즈, מאז =그때부터"를 'even from'으로 옮겼다. 강조를 살린 것은 좋은데, '아즈'를 그대로 살렸으면 더 좋겠다. 아니면 "제, זה = 바로" 를 옮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는 뒤에 부정사구문을 돋보이도록 썼다. 그러니까 '제'를 빼버렸고 대신 'that'를 italic체로 집어넣어 종속절로 만들어 뜻을 살리려 애쓴다. 앞 덩이에서도 보았지만 비칠거리면서 나름대로 알기쉽게 옮기려 힘쓴다. 하지만 원문을 그대로 살리지는 못했다. KJV이 영역 가운데 가장 나은데 신약보다 구약은 엉성하고 일관성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3. 불가타는 볼 때마다 라틴말의 한계와 타락한 사람들의 우쭐거림이 드러난다.
뒷부분은 앞 덩이보다 짜집기가 더 심하다 도통 앞뒤를 멋대로 찢어 붙인다! 이것을 정경으로 받는 로마교회를 넉넉히 짐작한다. 비판할 값어치조차 없다!
"바타보 =그리고 그는 들어왔다" 는 뺐고 de mane nunc( מהבקר עתה 이런 식으로 편집)을 앞에 놓았다. 아침과 이제 사이에 usque(우스끄베 =계속하여)로 매끄럽게도 다듬네. 그리고 אז 와 ועד 를 마지막 문장 앞에 놓았다 '그리고 아니다 그때까지' 라고. 나까지 얼얼한 것 같다.
게다가 두째 문장 끝에 'in agro =밭에'는 어디서 떨어졌나?
셋째 문장에 'ne =아니다'는 또 어디서 굴러왔는지 LXX처럼 말이야!
부정사구문(쉬브타흐 ∼ )도 마찬가지. " מעט = 조금" 뺐고 움직씨를 완료꼴에다 다른 뜻으로 의역한다 '돌아가다'. 앞질러 말하지만 표준새번역이 불가타를 뺨칠 정도이다!
* 문서설이니 양식사 학파니 편집파니 하는 여러 종자들은 사실 그 원조가 이미 Vulgata에 나타났음을 우리는 깊이 새기자! 깔뱅을 위시한 개혁자들의 성경관과 성경 번역에 관심을 갖은 것을 옛이야기로 흘리지 말자.
헬라말 사촌인 라틴말은 어떤 면에 한글과 비슷한 것들이 있다. 관사가 없다든가 꼬리 변화가 많다던가. 그런 만큼 성경을 옮길 때 한글 말투를 너무 앞세우지도 말자.
4. 표준새번역은 문서 조작에 첨단을 달린다!
이것을 제압 못하는 한국 교회와 일꾼이여! [지금은 "새번역"이라고 고쳐서 팔아먹는다]
지금도 쪽복음 형식으로 얼마나 퍼트리는지 아는가?
두 움직씨 사이에 낱말들을 늘어놓고 종속절은 영해 설교처럼 날름거린다!
'오고나서 서있었다' 가 바른 순서인데 '아침부터' 와 '지금까지' 를 떼어놓았다.
'저렇게' 는 누가 하는 말인가? 젊은머슴이 조작하나,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나? "제"를 옮겼다고 하겠지만.
'아까' 와 '여기' 이것도 맘대로 넣었다. '여기'는 זה 를 옮겼다면 위에 '저렇게'를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밭집' 이다. LXX 와 불가타에서 눈치채고 집+밭 이라는 창조를 단행했다
'쉬었다'도 풀이역이고, '뿐' 은 또 어디서 나왔나?
이미 나름대로 어떤 틀로 풀어서 성경이라는 권위를 너울까지 쓰니 누가 덤비랴!
원문을 보라 얼마나 풍성한 생각을 하도록 하고 그 때 그 곳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는가?
아니, 직역을 묵상해 보시라, 어찌 표준역이 바르다고 하겠는가? 하나님 따라 걱정이 왜 안생기겠나? 어떻게 거짓과 엉터리요 비판 신학 앞세운 번역을 용납하는가?
지금까지 살핀 네 번역 가운데 표준역이 가장 비꾸러졌다 두렵고 한심하다
'서 있읍니다' 그냥 지나가지 못하겠다. 두 낱말을 붙여서 옮겨야 עמד 에 맞는다.
한글 문장 위원들도 원문을 알고 바른 신학에 굳건히 서고 또 한글도 똑바로 공부한 성도라야 마땅하다!
5. 개역이 '와서는' 으로 옮겼는데 '는' 자는 왜 넣었나 이렇게 해야 개역인가?
'외에' LXX에서 ου (우), Vulgata에서 ne(네) 보고 흉내냈나? 표준역에서 '뿐'처럼
'계속하는 중' 이것도 원문에 없는데 usque 와 임금역 참고했는지…
그밖에 모든 것은 앞선 번역에서 살피라 너무 더럽고 어지럽구나!
6. 구역은 말차례에서 개역보다 좋고, 표준역보다 산뜻하다. 왜 거꾸로 갈까 현대 번역들은?
우리 성경들이 하나같이 원문에서 직역하지를 못했기에 여러 가지를 뒤섞어 만들었고, 지금도 의식들이 없으니 무엇이 정통이고 보수인지 오리무중이다.
하긴 신학교나 강단들을 볼 때 원문을 누가 중시합니까 꿩 잡으면 매인데
* 몇 가지 역본, 번역들을 보았다. 어떤 생각들이 드는지 주님께 여쭙자!
직역을 잘 가다듬어 어서 하나님 백성들이 읽게하고 거짓들을 물리치도록 하자!
왜 갈수록 성경 안읽고 바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성경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신학은 성경을 자꾸 멀어지게 하고 찢어발기려는지 정말 무서운 어두움이다
☆ 다시 한 번 원문을 소리내 읽어보자. 그리고 직역도 견주어 읽어보자
바토메르 알라크타 나
브아싸프티 바오마림 아하레이 하코쯔림
바타보
바타아모드 메아즈 하보케르 브아드
제 쉬브타흐 하바이트 므아트
그런데 그는 말했습니다 '제가 바라건대 끌어모으고말겠고
제가 모으겠습니다 그 단들에서 그 거두는이들 뒤에'
그리고 그는 들어왔고
그는 서있었습니다 그 해돋이 그때부터 또 이제까지
바로 그가 그 집에 조금 앉았답니다"
아!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나! 그런데 왜 그릇 번역하는가
히브리말과 한글이 모두 하나님 계시를 담도록 만드셨는데 다른 말들도.
2. 신약 - 마태복음 1장 1절
Vulgata : Liber generationis Iesu christi filii David filii Abraham
깔뱅 역 : Liber generationis Iesu christi filii David, filii Abraham.
* Le livre de la generation de Iesus Christ le Filz de David,
Filz d'Abraham. (1546 판 프랑스말 역)
* Livre de la generation de Iesus Christ fils de David,
fils d'Abraham. (1561판 설교, 주석에 쓴 프랑스성경)
임금 역 : The book of the generation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이송오역 :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관한 책이라. (흠정역 한역)
안티오크 : 아브라함의 아드님, 다비드의 아드님, 예수스 크리스트님의 세대의 책 (초역-흠정역 한역)
표준새번역 :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초역)
('족보는' 을 '나심은' 으로 주에 적었다)
한글개역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직역 : 아브라함 아들 다비드 아들 예수스 흐리스토스의 생기심 책.
원문 : βιβλος γενεσ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υιου δαβιδ, υιου αβρααμ.
본보기로 몇 가지 역본과 번역을 내세워 바른 옮김을 생각해 본다.
본문 비평은 생각하지 않았다. 바른 Text를 놓고 견주어 살펴보자!
열 가지 번역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눈길을 끌며 또 교회 역사에서 바른 성경 번역이 선 자리를 깊이 생각하려고 딴나라 성경을 늘어놓았다.
우리 모두 성경이 절대 권위 있음을 다시 붙들고 진정 바르게 옮긴 한글 성경을 손에 쥐기를 함께 빌고 이루기를 힘쓰자!
우리는 먼저 개혁 신학의 길잡이요 머리인 쟝 깔뱅이 성경 번역에 깊은 마음과 힘을 쏟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저 종교 개혁자나 칼빈주의자의 머리, 나아가서 기껏 주석이나 설교 또 신학자로서 섬긴 것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세우지 말자! 발덴시안들(프랑스 신교도들)이 억눌림을 벗어나 알프스 뫼 골짜기에서 살며 무엇보다 성경을 번역한 것을 눈여겨보라! 귀욤므 화렐이 이 무리들과 사귀면서 바른 성경과 개혁신앙을 부추겼고 바로 깔뱅에게 새로운 눈을 열게하였다. 뒷날 깔뱅이 발덴시안과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넉넉히 알 수 있다.
도이췰란트와 잉글란드, 프랑스에서 개혁의 깃발을 올리고 로만 카톨릭 이단을 말씀으로 물리치는데 바로 바른 성경번역으로 시작했음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오늘 개혁 신학이 껍데기 뿐이라는데 그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 바른 성경에 마음들이 없는가? 무엇이 개혁인가? 바른 신학과 성경관을 갖고서 어찌 엉터리들에게 쩔쩔매는가?
열 가지 번역들을 보면 공동역과 개인역으로 나눌 수 있고 널리 쓰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가를 수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꼭 성경 번역과 그 때 정권 맡은이와 맞물려서 성경이 옮겨진다! 세상에서 보기를 들면 정권을 뿌리내리고 굳히려고 처음에 말 정책을 펼치지 않는가? 마오쩌뚱, 김일성, 세종대왕 … 개인이건 집단이건 말이 미치는 힘이 엄청남을 아는이들은 여기에 마음을 썼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제 말글에 이렇게 줏대없는 겨레가 또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더우기 말을 다루는 목사들, 여러 강단들에서 가르치는이들이 우리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먼저 이 일에 개혁하자!
이른바 보수 신학자들을 보면 원어와 성경에 많은 수가 마음 안 쓰거나 잘 알지도 못한다. 밑바탕인 성경과 원어에 이러하니 어찌 바른 자람이 있겠는가? 몇 몇이 제도권 밖에서 홀로 힘쓰는이들이 있다지만 여러 약점이 나타난다. 아마도 내 좁은 눈으로 볼 때 가장 여기에 한뉘를 바친 이가 박윤선 목사님이 아닌가 한다. 다만 성경번역보다는 주석에 그것도 신약에 힘을 썼기에 그 뜻이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뿐이다.
이제 간단히 역본들을 살펴보자.
◇ 먼저 전통원문인 TR과 열 개를 서로 견주어 보자.
1. 로마교회 불가타(평민이라는 뜻)성경(라틴말)과 깔뱅이 사역한 것을 보면,
낱말은 똑같고 단지 숨표와 마침표를 붙인 것이 다르다. 그렇다면 깔뱅은 불가타를 베꼈는가? 아니다! 깔뱅이 라틴어로 옮긴 성경들을 견주어 보라! (구약에서 25권, 신약에서 24권 옮김)
불가타는 처음 마디에서 점잖을 보이지만 곧이어서 살피면 얼마나 속여대는지!
2. 깔뱅의 라틴역과 두 프랑스역을 보면,
라틴말에 이른바 관사가 따로 쓰이지 않기에 뚜렷이 다름을 찾지 못하겠다. 다만 열 다섯 해를 두고 프랑스말이 다듬어지는 것을 본다. 성경번역이 말에 미치는 힘을 한눈에 보여 준다고 하겠다.
1546 판과 1561 판에서 견주면, 리브르(책)과 휘즈(아들)가 휘스로 또 여기에 관사를 없앴고 첫 글자를 작게 적었다.
3. 개역과 표준새번역, 이송오역과 안티오크역을 묶어서 생각해 보자.
앞서 딴나라 번역은 copula(계사=기름노릇 낱말)을 쓰지 않았다.
개역은 '세계라' 에서 '라' 를 덧붙인다. 없으면 얼마나 산뜻하고 느낌이 세차게 울려올까! 표준새번역은 개역이 주는 느낌을 겉으로 품은 채 날름거린다! 곧 해석한 번역임을 단박에 안다. 물론 개역이 빠뜨린 아브라함 뒤에 '자손'을 잘 넣었지만 '-이요' 와 '-이신' 을 덧붙인 것은 이미 성경의 성깔을 비껴간다. 게다가 개역에서 쓴 코풀라는 이제 아예 따로 적는다 '이러하다' 라고 ! 표준새번역이 개역과 조금 다른가?
4. 침례파에서 앞다투는 두 번역을 보자. 모두 임금역(KJV)을 옮겼다.
이송오역이 몇 해 앞섰지. 안티오크는 이송오와 같이 있던 형제가 이끈다.
이송오역은 얼른 보면 표준새번역 같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흠정역을 해석한 번역이야. 임금역에서는 숨표가 두 번인데 이것은 한 번만 흉내냈고, '-이요'. '-인' 그리고 '-에 관한' 과 코풀라 따위를 덧붙였다. 그냥 보면 눈에 쉽게 들어오지만 넘치는 생각의 틈새를 막아버렸다. 여기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비꾸러졌다.
그런데 안티오크역은 임금 역에 아주 가까이하려고 힘쓴다. 한글과 원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러니까 '예수스' 와 '크리스트' 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예수스' 를 마르틴 루터역을 따라 '예수' 로 하던가 아니면 '크리스트' 를 '크리스토스' 로 말이야. 더우기 관사는 왜 옮기지 않는지? 아리송하다. 안티오크역이 잘됐다기보다 흠정역이 직역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5 이제 임금역[AV]을 보아야겠지.
이것은 1611 해에 옮겼다는데 1546 판 프랑스역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관사 하나만 다르고. 지나는 길에 우리는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가 한 핏줄임을 본다. 이 모두가 그륔(헬라말) 나아가서 히브루(히브리말)에 뿌리를 두었다. 나라마다 말들이 달라졌는데 성경을 바르게 드러내는 쪽보다는 뒤엉키도록 바뀌는 것 같다! 무턱대고 옛 말본과 말투, 낱말을 붙들자는 게 아니다.
원어 성경이 말글에 힘을 미쳤으나 오히려 이제는 말글로써 저마다 겨레말들로 성경을 그릇되게 옮기고 있으니 놀랍고 무섭다. 오늘 하나님이 문법에 끌려다니시고 성경은 사람이 만든 문법에 절대 권위의 자리를 물려준 양 되었으니 …. 에덴 동산에서 고꾸라진 일이 생각난다. 한 가지 꼬집을 것은 구약과 신약성경 사이에 따로 이른바 외경을 옮겨 펴냈다. 그리고 신약보다 구약은 여러 군데서 꾸준함을 잃었다.
지금까지 겉으로 견주어 살폈는데 한마디로 성경은 직역으로 그 때 맞는 입말로 누구나 볼 수 있게 옮겨야 한다. 먼저 직역을 해놓으면 나중에 말글이 발달하는데 큰 구실을 한다. 진리가 하나이듯 성경도 하나가 마땅한데 그렇다고 말글이 바뀜을 도외시하면 안되지만 이제 우리는 눈을 바르게 떠야겠다. 성경과 신학, 성경과 교회, 성경과 믿음 이런 관계를 잘 세워나가자.
다음으로 TR과 한글을 잣대로 살펴보자.
1. 개역은 '휘오스'(아들)을 뺐다.
아들을 '자손' 으로 옮겼는데 흐릿하다. '세계'(世系)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헬라말 '게네시스' 는 '기그노마이( γιγνομαι )' 라는 움직씨에서 나온 이름씨 이다. 라틴말로 '게네라티온' 도 헬라말에 뿌리를 둔다. 그냥 둔다면 '세계라' 를 드높여 외치라! 뒤에서 어떤 옮김을 하는지 짐작한다. 해석역도 섞어가면서 특히 한자말을 앞세워 한글을 죽이는 일을 볼 것이다. 끝으로 왜 '아들'을 멋대로 물리치는가? 거듭나오면 앞에는 빼는 게 우리 말투라서 그랬을까? 소위 사본을 핑계하지 않더라도 신약에서 수없이 뺐고 구약은 더 많아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붙들다니 ….
2 . 두루 걸리는 숨표 문제를 생각하자.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있다면 한 군데인가 두 군데인가? 쉽게 생각하면 너무 조그만 데 매달리지 않나? 계사와 같은 성격의 문제일까?
깔뱅역과 두 프랑스역에는 한 차례, 임금역에는 두 차례 보인다.
이송오역 한 차례, 안티오크역 두 차례, 불가타와 표준새번역은 없다!
원어 Text들을 보면 '노붐 테스타멘툼 그라이케' 26 판과 '더 그릭 뉴우 테스타멘트' 3 판에는 숨표가 없다. (둘 다 그릇된 헬라어성경)
그리고 TR은 두 군데 숨표가, 비잔틴 텍스트(옛 헬라어성경)에는 한 군데만 숨표가 있다. 여기서 임금역은 TR을, 깔뱅역과 프랑스역은 비잔틴 본문과 옛 라틴어성경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수 사본 헬라어성경 2 판에는 숨표가 둘 나온다.
마무리한다면 숨표가 있는 것이 바른 헬라어성경이다. 그런데 직역에서 숨표를 붙일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는데 우리말본과 말투가 아직 하나로 틀이 갖추지 못했기에 눈으로 보기에 성가시지 않도록 숨표를 안 적었다. 물론 표준새번역에서 뺀 것과 바탕이 다른 것을 잊지 말라! (숨표는 하나가 좋다고 믿는다. '다비드 아들' 뒤에)
3. 관사 문제도 거들떠보자.
불가타와 깔뱅역에는 안 썼다. 그러나 영어역과 불어역에는 복잡하다. 어떤 경우 해석이나 꼭 필요한 가리킴으로 적지만 이것도 이미 해석 아닌가? 물론 그 겨레 말투나 말본이 그렇다면 할 수 없겠으나 다른 나라 사람이 참고할 때 조심해야한다! 그런데 좀 더 들어가면 히브리말보다 헬라말에서 관사가 많이 쓰인다. 이것이 계시에 하나님 뜻을 담는데 쓰라고 주신 선물인데 무턱대고 직역하면 안된다. 그런데도 마태복음에는 왜 그 흔한 관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가? 마태가 무슨 뜻과 마음을 품고있는가?
구약에서 בן (벤=아들)에 관사를 붙인 것이 여덟 차례에 지나지 않는다. 마태는 구약을 전제로 새로운 계시를 적는다. 불어와 영어처럼 관사를 적으면 얼른 뚜렷이 뜻을 깨닫는 경우도 있지만 꼭 어디서나 그렇지 않음도 알자! (요즘 영어가 우쭐거리는데 이미 사탄에게 넘어간 말은 아닌지 크게 조심할 일이다)
원어로 읽어보고 직역하여 우리말로도 뜻을 새기면서 읽어보라! 길고긴 구약 때와 깜깜한 400 해 넘는 때 뒤이어서 '아브라함 아들 다비드 아들, (숨 가다듬고) 예수스 흐리스토스의 생기심 책'! 무슨 다른 군더더기를 덧붙이겠나! 이미 알려진 익히 아는 계시를 깔고 선언한다. 우리도 이것을 맛보려면 원어나 번역의 옳고 그름도 따져야 하나 성경 내용도 잘 알아야 한다.
또 '아브라함 아들' 뒤에 숨표 붙여도 틀리지 않으리! 돌다리도 두드린다면, 왜 직역에서 이른바 소유격 '-의' 를 뺐냐? 고 묻는다면 나는 그대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겠다! 우리가 말 할 때 얼마나 이 '-의' 를 쓰는가? 안 써도 말 뜻을 서로 잘 안다 일본 아이 말고.
4. 한글 역에서 υιος (휘오스)를 자손(子孫), 아들, 아드님 세 가지로 옮겼다.
라틴말 filius(휠리우스), 프랑스말 fils(휘스), 잉글리쉬 son (싼) 얼마나 단순하고 산뜻한가? '자손' 어렵고도 쓸데없이 사색하게 만든다. '아들' 얼마나 좋은가? 그리스도의 인성(사람 성품)을 알맞게 나타낸다. '아드님' 자칫 사람과 다른 인성을 느끼게 하고 거리감을 준다. 어린이들에게 읽혀보라. 자손, 아들, 아드님 가운데 어떤 게 쉬운가?
5. 하나님이신 예수스 흐리스토스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우리말은 안티오크역 빼고 '예수 그리스도'로 옮긴다.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졌다고 보았기에 표준새번역도 손 못대고 마음만 먹었다. 안티오크역도 원어 소리에 으뜸을 두지 않고 그저 임금역 따르기를 즐긴다. 멋적지만 사탄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싫어할까? 참 '사탄' 이란 음역도 '사단' 이라고 끝끝내 우기는이도 있지만. 너무 적은 것에 마음쓰는 듯하지만 하나가 열, 스물을 뒤에 깔고 덤빈다면 어쩌겠는가?
'예수' 라고 도이취와 라틴말은 부른다. 불어와 영어는 줴쥐와 쥐자스이다.
헬라말 (이오타)는 라틴어까지 지키다 언제부터인가 i 와 j 로 갈라진다. 그런데 프랑스와 잉글란드는 'j' 로 예수스 이름을 적었다.
ιησους (예수스)는 히브리말에서 나왔다. 움직씨 ישע (야샤 =건지다)에서 이름씨들인 ישע (예샤), ישוע (예슈아), מושעות (모샤오트) 따위가있다. 이를테면 이사야, 여호수아, 호세아, 엘리사 모두 '야샤'에서 만든 이름들이지. 히브리말 (요드)는 헬라말 '이오타'에 들어맞는다. 도이취와 네덜란드말이 좋다.
어떤이는 또 맞선다 '예수스' 끝에 -ς (스) 나 -ος (오스)는 떼고 옮기는 게 좋다고. 말 꼬투리 물고늘어지는 일이다. 이 말 옮기는 형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적용시켜 장난칠 때 무섭구나!
'그리스도' 를 좋은 우리말로 만들지 못한다면 바르게 소리대로 적어야! 딴나라 말들은 한결같이 'Ch-' sound 로 옮긴다. 세미틱 소리보다는 엥글로 게르만 소리로 '크'라 부른다. '흐' 를 세차게 소리내야 올바른 소리인데도. 이 말도 구약에 뿌리가 있는데 움직씨 משח (마샤흐=기름부음받다)에서 이름씨 משיח (마쉬아흐)가 나왔다.
이것을 유럽인도말에서 '메시아'라 옮겼다. 신약에서는 움직씨 말뜻을 살려서 χριειν (흐뤼에인 =기름바르다)에서 이름씨로 χριστος (흐리스토스)라고 사도들이 적었다. 우리는 차리리 구약을 따라 '마쉬아흐' 도 좋다고 본다. 다만 계시 수단으로 쓰인 헬라말을 생각하면 뒷날 안디옥 교회에서 χριστιανοι (흐뤼스티아노이=기름부음받은이들, 흐리스토스에 딸린 사람들)이라고 다른이들이 불렀는데 잉글리쉬로 '크리스챤' 인데 우리는 어떻게 부를까? '그리스도인' 이 그리스도에 따를 때 맞겠지. 이것은 헬라말이요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지 않았는가? 낱말 뜻을 살려서 '기름부음받은이' 벌써 듣는 말에서 구별과 독특함이 있고 자세를 가다듬게 되지 않는가? 어쨌거나 '흐리스토스' 로 옮겨야 한다.
6. 세계, 세대, 족보로 옮긴 헬라말은 움직씨 γιγνομαι (기그노마이)에서 나왔다.
이 가운데 족보는 잘못이다. 아래 주에서 '나심은' 을 제안하지만 마태복음 1 가름 18 마디에는 γεννησις (겐네시스)로 적었는데 움직씨 γενναω (겐나오)에서 나왔다. '세대' 가 그래도 나은데 생기다, 나타나다, 일어나다 뜻에서 나온 이름씨를 생각할 때 우리말로 '생기심' 이 어떨지.
7. 계사 문제를 보자.
표준역에서 '이러하다' 는 성경에 없는 말을 덧붙여 풀이한 말이다. 안티오크역 빼고 여러 말들로 부드럽게하려고 했는데 잘못이다. 히브리말과 헬라말 특성을 먼저 알아야 하고 본질과 성격이 바뀌지 않는 범위에서 우리말로 다듬어야 한다. 말에 가락과 꿈틀거리는 생생함이 있어야 하고 성경 말투와 적은이 마음을 실어서 옮겨야 한다. 섣불리 의역을 쉽게 생각하여 사람 위주로 옮기다 성경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만다.
짧게 번역들을 살폈고 원어에서 바른 옮김이 어떠해야 하나 말했다. 신약 놓고 본보기로 몇 가지를 견주었다. 더 깊이있게 보려면 원어에서 살펴야 하며 원어들을 볼 때 우리말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깨달으리라. 어떤이들은 신학을 없애지만 바른 번역을 하다보면 왜 바른 신학이 세워지지 않겠는가? 보통 신약 헬라 말에 잘한다는 이들이 있지만 히브리말을 잘 알아야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히브리말을 모르고 헬라어로 번역한다고 아우성들이다. 몇 자 적어보았다. 더 많이 깨닫기를 바라면서.
1. 한글 개역성경 비판
㉮ 원어성경에 견주면 원문에 없는 말들을 엄청나게 많이 넣고 뺐다! 신약보다 구약은 더 엉망이지요! 제가 옮긴 것과 견주어 보세요! 신약은 본문비평이 흘러들어왔다. 옮김의 원칙과 재료가 뒤섞였다. 구약과 빗댈 때 낱말을 서로 달리 쓴다. 다른나라 거짓 역본들을 더 받아들였다. 구약은 더 많은 데서 의역이 판을 친다. 히브리말을 알지 못했다. 중국 한자를 빌리거나 그대로 써서 바른 뜻을 가로막았다. 통일성, 계시의 성격, 복음의 견지에서 거리가 멀다.
㉯ 묶음표들, 글자크기, 책 제목, 책 차례, 가름과 마디 나눔, 여러가지표들 따위가 멋대로 나온다. 한마디로 자꾸 지저분해진다! 나쁜 첫 인상을 심는다. 바로 깨닫는데 큰 걸림돌 구실한다.
㉰ 성서공회가 아무나 뽑아서 고치는 일을 해오기에 낱말들이 슬며시 바뀐다. 자유주의신학의 놀이터로 무서운 일이다. 한자가 더욱 단단하게 자리잡는다. 이것은 우리말과 글을 가로막아 바른 믿음으로 자람에 올무이다, 몇 사람의 생각으로 집어넣다니!
㉱ 신학과 신앙고백으로 볼 때, 잉글란드와 아메리카합중국이 주도하고 중국, 일본이 큰 영향을 입혔고 개혁신학이 밀렸다. 서른 사람이 넘는 다른나라 갖가지 신학과 믿음을 갖은이들이 바탕을 이룸. 우리나라 사람도 우리말과 글에 힘쓴이들은 전혀 들어가지 못했다. 이들도 또한 여러 교파에 속했고 불신자도 있었다 !!!
㉲ 구역에서 개역으로 옮길 때, 겨레말이 많이 없어졌다. 앞서 로스역에서 구역으로 바꿀 때도 좋은 우리말이 얼마나 죽였던가? 국한문성경을 특정인을 위해 펴냄으로 교회의 통일과 발전에 아주 잘못했고 한글 문화에도 어두움을 만들었다. 여기에 자유주의신학은 한글의 토착화를 이루려 한글을 악용했다. 보수파들은 골동품처럼 개역성경의 낱말이나 말살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다니! 아직도 잘 그대로 옮길이가 거의 없을 만큼 원어와 신학, 한글에 공부한 이가 없다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여기서 알지 못함이 판치고 강단에서 그릇 해석하거나 이단들이 발붙일 틈을 준 것이다!
2. 한글 표준새번역 비판
㉮ 개역보다 못한 정도가 아니라 종이 공장에 돌려보내야 하고 이 옮김에 나선이들을 준엄하게 권징해야 옳도다! 1977해에 나온 공역보다 더 엉터리이다
㉯ 겉으로 한글을 쉽게 썼다거나, 열 해 가까이 힘썼다거나, 공회에서 펴냈다거나, 성경학자들이 그래도 옮겼다는 말도 섣불리 쓰지 말라! 우리말을 갈고 닦은 흔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우물쭈물했다.
㉰ 자유주의 신학의 올무에 보수주의 목사 몇을 끌어들여 눈가림했다. 번역실장을 누가 맘대로 세우는가? 번역자를 어떻게 뽑는가? 바른 공회라면 공개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교인들의 상태들을 말해준다. 그저 '성경'자만 들어가면 아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니! 뒤에 깔린 음모를 보아야 한다.
㉱ 연구성경, 의역성경에도 들지 못하는 사생아 같은 옮김이다! 본문에 보면 원문과는 다르거나 없는 말을 너무도 겁없이 집어넣어 장난친다. 너무 많아서 늘어놓을 마음이 없다.
㉲ 구약은 800쪽 넘게 아래에 덧붙임을 달았고 신약은 거의 다 작은 글자를 써서 성경을 무너뜨렸다. 성경이 아니고 이단 서적임. 작은 제목을 붙인 게 미끼임을 눈여겨보라! 본문 장난과 각주 장난에도 속이 안차서 멋대로 덩어리 짤라서 제목 붙임으로 해석 시도함으로 많은이들을 얽어맨다.
㉳ 온 교회 위해 바른 공회에서 객관적 권위의 성경으로 책임있게 펴낸 것이라면 바른 교단들이 받지 않고 문제를 말하는데 공회는 어찌 파는데 얼빠져있는가? 벌써 사서 읽은 이들 가운데 두 패로 갈리는구나!
* 위에 비판을 낱낱이 밝혀야 하나 나중에 필요할 경우 손댈 것이며 개인이 물으 신다면 만나거나 글로써 알려드리지요!
3. 한글 개역개정역 비판
㉮ 개정역으로 책장사-악하게 말씀을 엉터리로 바꿈! 비평, 불충, 불균형, 소제목 달았다. 개역을 개정역으로 슬쩍 대체시키려고 관주판을 비롯해 출판하지 않는다
㉯ 한글 세대 겨냥한 편집은 두손들어 기뻐한다. 그러나 너무 사람 편의 위주로 사람의 언어관, 유행이나 기호 따위의 수준을 앞세우기에 권위를 무너뜨린다
㉰ 왜 장이나 단락 앞에 주석성경이나 딴나라 그릇된 유행본 따라 소제목 붙였나?
제목을 붙인이의 신학사상과 신앙이 묻어 들어갔는데 말도 되지 않는다! 왜 말씀을 은혜의 방도로 쓰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가로막는가?
㉱ 난 아래 "주"를 덧붙였는데 개역보다 훨씬 자유주의 비판신학을 담았고 구약 경우 창세기부터 보면 앞부분에 신경쓰는 듯 하지만 뒤에 가면 너무 무성의하고 엉터리다. 자유주의 입장에서 본문비평을 통해 너무 많은데서 살금살금 낱말을 바꾼다
㉲ 12년만에 20여명이 참여해서 부분 손질을 했다는데 구약 59889 곳과 신약 12823 곳 보면 개역판의 무엇을 바르게 개정했다고 하는지 아리송하다. 공회에서 성경원문연구소를 두고 몇몇이 장난치는 비평부분을 마음대로 계속 반영한다
㉳ 구역에서 개역으로 바꿀 때는 그래도 순수한 동기가 약간은 보이는데 개정역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아시겠지만 무섭다. 바른 신학과 신학을 날려버린다. 성경의 노예로 만들거나, 성경권위를 여지없이 없앤다
㉴ Nida[나이다] 따위가 세속사상과 번역이론을 앞세워 실험장으로 성경을 찢어발긴다 구체적인 보기는 다른 기회에 필요하면 낱낱이 밝히리라
㉵ 한마디로 개정역은 구역을 개역으로 바꿀 때 성경을 짓밟은 정도가 아니다. 개역에서 개정역은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말이 안나온다! 예언의 성취를 본다!
4. 한국성경공회의 "바른성경" 비판
감수견본용 구약 269쪽 신약 79쪽 32줄 [번호 성경장절 52년 61년 수정부분 비고 ]
(누군가 1차 교정 본 것), 견본 50권에서 한권,
요즘 교회용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참고하지 못했으나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소견 [창세기만 간단하게 정밀 분석합니다, 원문과 한겨레성경으로-나머지는 훑어봄]
1 중요하고, 틀린 부분을 지나쳤다-고쳐야 할 곳을 많이 지나친다!
2 한글로 바꾸려는 시도는 좋은 데, 오히려 의역으로 흘렀다
3 어떤 낱말들을 무질서하고, 뜻없이 옮기거나 동의어를 구별하지 못했다
4 원문에 있는대로 쉬운 말로 옮기지 못했다
원문에 없는 것을 솎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쓸데없이 많이 덧붙였다
5 원문 대조는 형식치레로 하고, 개역성경에서 한글을 보고 손질했다
모두 만 군데 이상 손본 듯, 창세기에서 411 군데 고쳤다 (2차교정지)
그러나 제가 보니 168군데를 잘못 손보았고, 39군데는 괜찮다. 나머지는 하나마나.
그 부분들을 제가 직역해보니 334군데를 손대야겠다. [내가 했다면 더 많다-한겨레성경 참조]
보기 9:6 무릇 누구든지; 21:16 참아 차마; 25:13 기차는 그 다음은:
30:27 유하라 머무르라; 36:3 취하였더니 삼았더니 원문에 안나옴!
☆ 원문과 한글 두 방면에 정밀 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성서공회의 개역성경보다 못하다
☆ 한문 세대가 수정 작업에서 입김이 작용한 느낌이 든다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쪽으로 더 힘쓰면 좋겠다
☆ 부분을 뜯어고치는 데 마음쓰기보다 원문에서 처음부터 번역하기를 바란다
성경공회는 꼭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명감과 실력(원문과 한글), 성경관이 뚜렷해야 함
☆ 신학교에서 원어 뚜렷이 가르쳐야 함-한국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의 큰 과제
바른 성경관 갖은 원어 능통한 교수 있어야 함.[히, 헬 둘 다 가르칠 수 있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