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청교도와 성경
제5장 존 오웬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의사전달
1. 청교도 존 오웬
존 오웬은 청교도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성경에서 파악된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들을 드러내는 견실함, 심오함, 당당함 그리고 위엄에 있어 그와 필적한 사람이 없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규범들과 발전된 경건의 이상과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청교도 주류의 중심에 위치한다. 존 칼빈과 유사했다.
2. 의사전달
오웬은 의사전달이라는 단어를 인간에 대한 모든 신적 은혜의 수여를 망라하여 사용했다.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인식적 의사전달에 대한 오웬의 기술이다. 즉 성경과 말씀에 대한 교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들을 이끄사 자신을 이해하게 하시고 영적 실재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오웬은 그의 시대의 개혁 신학자들에 일치하며 그리고 분명히 성경과 일치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과의 직접적이 화합과 일치를 추정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이야기하실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한계 내에서 우리의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바와 일치되는 한 그 생각들은 정확하며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 지식, 우리의 하나님과의 실제적 관계에 중요한 지식을 이룬다.
그러나 오웬은 모든 주류 개혁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문제를 인식한다. 우리 안의 죄, 아담에게 물려받은 유산인 인류의 기질 가운데 있는 반하나님적 충동은 행동의 결과일뿐 아니라 순수 지성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 죄 또는 충동이 신약성경이 마음의 ‘강퍅’과 ‘완악’이라고 칭한 보편적 무반응을 낳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이성적인 교육은 무효하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여시는 성령의 조명만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일들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과 동의를 일어나게 한다. 타락한 인간 정신의 비참한 무지와 왜곡에 대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일들의 효과적인 전달이 언제나 있을 수 있기 위해, 성경의 설교자와 교사와 청중과 학생에게 역사하셔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성에 대해 오웬보다 더 예민한 의식을 갖고 있는 청교도는 없었다.
오웬의 신적 의사전달 개념은 다섯 개의 표제 아래 분석하면 편리하다. 1) 계시를 주심, 2) 성령의 영감, 3) 성경의 인증, 4) 성경 신앙의 확립, 5) 성경의 해석
3. 계시
오웬은 ‘계시’라는 말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정보를 주는 전달, 다른 방법으로는 알려질 수 없는 일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했다. 그 전달은 음성, 또는 간혹 꿈이나 환상이 동반하는 내적인 감동에 의해 수령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오웬은 이런 종류의 모든 계시들을 ‘예언’이라는 항목 하에 일괄적으로 다루고 ‘예언자’는 신적 계시들을 수시로 받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 계시를 주는 것은 ‘모든 신적 계시들의 직접적인 장본인’이신 성령의 역사였다. 계시들에 신적 기원에 대한 확증이 수반되었다는 것은 기록들을 볼 때 분명하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가해하게 보일지라도 절대적인 신봉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스스로 증거하였다. 오웬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생각, 의지 또는 신탁들의 해석자이며 타인들에 대한 선포자들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교회에 일반적으로 유익한’ 이 계시들이 기록되었고 구약성경은 현재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유사한 과정에 의해 신약성경도 생겨났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권고를 무오하게 받아 이해하고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그들이 후시대의 교육을 위하여 알고 있는 바를 기록할 수 있게 하였다.
일단 성경이 쓰여지고 예언자와 사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완성된 다음에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개인적인 계시의 필요성은 없게 되었다. 오웬은 그 이상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는 말씀과 별도로 또한 말씀을 초월하여 받을 것으로 상상하는 계시를 믿는 퀘이커교도들과 같은 자들의 ‘광신’에 반대했다. 이 모든 점에 있어 오웬은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해석의 정상적인 노선을 따른다.
‘성령의 영감’에 대해서.
그는 ‘영감’을 계시가 구두로 그리고 기록으로 주어져 받아 전달되는 성령의 고취(inbreathing)로 정의한다. 이 과정 동안에 영감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비독창적이라는 의미에 있어 수동적이라고 오웬은 말한다. 비록 심리학적 의미에 있어 그들의 정신은 능동적이지만 그들은 성령에 좇아 작용되고 있으며 또는 오웬이 말하는 대로 단순히 ‘성령에 의해 작용되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벧후1:21).
인간은 악기의 줄을 조율함으로 성경의 손가락의 감동들을 바르게 받아 성령께서 의도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인간들의 기능들을 친히 활동시키심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들을 표현하도록 사용하신다.
그러나 이 완전한 신적 주도와 통제가 기록자의 인격과 개성이 말살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께서는 인간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그들을 강압하시거나 또는 그들 자신의 본성과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움직이시지 않고 그들의 갖고 있는 재능과 자질들이 결합하여 사용되고 활동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들에게 암시하시는 단어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단어들이며 또한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낯익은 표현들을 사용하게 하셨다. 우리는 그들이 단어와 표현을 선택할 때 자신의 정신과 이해력의 능력들을 사용했다고 가정해도 좋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했다(전12:10). 그러나 인간 자신들보다 인간들의 생각과 기능들에 대해 더 잘 아시는 성령께서는 그들이 고른 단어들이 마치 음성으로 들려지는 것처럼 직접 분명하게 성경의 말씀과 같이 되도록 그들 안에서 인도하시고 조종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자들의 저작들의 궁극적인 저자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들이 알린 율법, 그들이 전한 교리들, 그들이 준 교훈들, 그들이 기록한 역사들, 그들이 발표하고 계시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들, 복음 시대에 대한 약속들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이론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들었던 바의 기억들 속에 간직되었던 것이 아니었고, 전에 그들이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었다. 그 내용들이 수용에 있어 그들이 이성적 능력들은 단지 수동적인 협력을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내용적이며 축어적이다. 즉 내용 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성경에 담겨진 교리와 그 교리가 전달되는 말도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안에서 성경으로(in it and by it) 말씀하신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의미이고 이 때문이다.
족장들에게 임한 계시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영감받은 설교들이 그 최초의 수령자들에게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믿음의 대상들이었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믿음의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대상이다. 모든 믿음은 증거에 대한 동의라는 본질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동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에서 꽃피워난 기독교 신앙은 그 근원에 있어 하나님의 증거에 입각한 복음의 진리에 대한 동의를 갖고 있다고 오웬은 말한다.
따라서 이 믿음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신성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근거하는 기초가 -즉 성경의 증거가- 하나님 자신의 자신에 대한 무오한 증거라고 인정하는 데서 솟아나는 신성한 믿음이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신성한 진리를 믿는 신성한 믿음의 근거는 성경의 권위의 원천인 성경의 ‘신적 기원’이다. ‘신적 기원’은 성경이 쓰여지게 하실 때 그 내용을 ‘말씀하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세대에게 그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록된 말씀의 진리와 권위를 믿는 신적인 믿음을 요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