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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간밤에는 이곳 선유도에도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계속 내리고 안개가 자욱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군산에서 아침 8시30분에 출항하는 여객선이 결항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하룻밤 더 묵은것이 은근히 후회되었는데 다행이 오전 10시 30분에 배가 군산을 출항하였다는 것이다.
오전 12시 우리는 여객선에 몸을 싣고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구경하며 점점 멀어져가는 선유도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선유도는 정말 신선이 놀았을 만큼 풍광이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연중 찾아드는 관광객 으로 인해 많이 상업화된 섬이었다.
새만금 방조제가 선유도 앞 산시도까지 연결되었고, 머지않아 선유도와 산시도를 연결하는 연육교가 완성되면 선유도는 말이 섬이지 육지나 다름없는 관광지로 변하리라. 그리되면 현재 선유도를 내방하는 관광객이 연 10만에서 200만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섬이라고 할수 없어 이 번 선유도 관광은 그나 나나 섬으로서의 선유도를 마지막으로 본 셈이었다.
오늘은 그의 부인이 오는 날이다. 그는 도보여행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부인 과 만나 보급도 받고 또 하루나 반나절 정도를 같이 걷는다는 것이다. 은근히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오후 1시30분 우리는 군산항에 도착했다. 화사한 얼굴의 그의 부인이 그를 반기고 나도 그의 부인이 반가웠다. 연안여객터미날 구내매점에서 간단한 면류로 그와 나는 점심을 때우고 다시 걷기 시작 했다.
오늘의 여행은 군산시내를 거쳐 금강하구 방조제를 건너는 것이었다. 구 군산시가지엔 아직도 일제시대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었다. 구 조선은행을 복원한다는 플랭카드가 선명하다. 죽산면의 하시모또 농장사무실이 클로즈업되면서 일제가 수탈해간 三白 (쌀, 소금. 면화)이 연상되는 건물 잔재가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금강하구둑이 멀리 바라보이는 공원에 이르렀다. 금강의 옛지명은 호강(湖江)이었다. 그래서 호강 아래의 이남 땅을 조선시대부터 호남(湖南)이라고 불리어졌다. 한때 호남은 충청도의 금산부터 멀리 제주도까지 호남에 귀속되어 있었던 사실이 조선시대 전라관찰사였던 이서구가 읊조린 湖南歌인 短歌에 잘 나타나 있고 , 임진왜란시 선조대왕이 호남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국난에 빠졌을 것이란 말에는 호남의 곡창지대를 왜군한테 뺏기지않아 그들의 군량미 보급을 차단할 수 있어 결과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역사적 사실을 가진 땅이다.
군산에 속한 금강하구둑에 시비공원이 있었다. 한 40여개의 시비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이상은의 무제를 카메라에 담았다.
금강하구둑에 도착하니 魚道가 있었다. 어도의 문이 열리지 않아 수천마리의 숭어떼가 민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갇혀있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그 많은 방조제로 인한 생태환경의 파괴다. 많은 간척지를 얻은 댓가로 오염된 생태환경의 복원은 요원하기만 하다.
공중화장실 문화만은 세계1등국가답게 청결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방조제 주변은 생활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금강하구둑의 어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있는 숭어떼를 위해 낚시금지 경고 팻말이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걸려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도가 어서 빨리 열려 숭어떼가 산란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갈 날이 오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오후 6시경 우리는 드디어 금강하구둑을 건넜다. 여기서부터는 충청도의 땅이다. 금강유원지에 있는 웰빙사우나에서 여장을 풀고 근처의 한식당에서 그의 부인이 사준 돼지갈비와 삼겹살에 소주를 거나하게 마셨다. 싸우나로 돌아 온 나는 그와 그의 부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구석진 곳에 잠시 들어누운다는 것이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숙취도 없이 기분이 상쾌하다. 이것도 걷기운동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간밤에 오랫만에 온 부인과 이야기를 하다 투숙객들의 소란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단다. 싸우나는 도보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숙소지만 잘 잠들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우리 세사람은 다시 장항을 향하여 걸었다. 장항시내에 들어오니 도시가 거의 빈사상태였다. 문닫은 가게가 부지기수이고 멀리 장항제련소의 굴뚝에도 연기 가 오르지 않았다. 추억의 장항선도 철도청에서 수지가 안맞아 금강하구둑에 철길을 만들어 장항은 이제 종착역이 아닌 간이역이 되었다. 장항선은 군산을 거쳐 익산으로 돌아나오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 완공된 금강하구둑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장항의 경제가 군산권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단다. 금강하구둑이 완공되기 전의 옛시절이 더 좋았다는 장항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지역간의 균형발전을 정책으로 내건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전제시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항시내에서 그의 부인이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한시간여 동안 우린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물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그의 부인과 작별하고 장항시를 벗어나니 서천면이었다. 느긋한 아침 산책을 즐기는 고라니 한 마리가 목격되었다. "아! 고라니다.' 라고 내가 외쳤다. 내 외마디소리에 놀란 고라니가 텀벙텀벙 논물을 튕기며 힐끔힐끔 나를 뒤돌아보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도 늦게나마 고라니를 보았다. 가는 길목엔 송순이 쑥쑥 자라고 있었다. 송화꽃술을 수염처럼 메단 송순은 그 송순 의 길이만큼 키가 크는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갯펄엔 온갖 물새들이 종종걸음으로 모이 사냥을 하며 그들만의 부름으로 자유를 노래하고 있었다.
오전 12시가 가까워지자 난 서천면 국도변의 음식점을 찾기 시작했다. 2차선 국도이고 한적한 거리인데 왠 보신탕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문을 기웃거렸는데 가게문이 닫혀있었다. 마침 동네주민들이 지나가길래 이 보신탕집 장사 안하느냐고 물었는데 점심 하실려면 저 집으로 가라고 말해줘서 이 木音山房을 들르게 되었다.
상호의 작명이 예사롭지 않다. 반드시 주인장이 꽤나 예술적인 소양을 갖고 있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카페풍의 레스토랑 같아 보였다. 황토흙담으로 지은 가게에 들어서니 몽골형 천막인 게르의 형태로 천정은 우주를 표상하고 있었고, 그 둥근 천정을 큰 소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주인장은 사십대 초반의 여자였다. 고혹적인 예쁜 얼굴은 아니었으나 범접할 수 없는 교양미을 갖춘 매력적인 여자였다. 가게안의 인테리어 소품도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미대출신이세요?" 라고 그녀가 나긋나긋 웃으며 그저 평범한 시골여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메뉴를 보니 이 집도 보신탕집이었다. 상호와 인테리어 소품과는 어울리지 않은 메뉴였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길손을 배려하려는 의미인진 몰라도 백반도 메뉴에 있어 백반을 주문했다.
그가 가게의 풍광에 빠져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를 따라 가게 정원에 있는 흙벽돌로 세운 신경림의 갈대 시비를 카메라에 담았다. 가게로 들어오는 길목 왼쪽에 있는 여인의 조각사유상도 일품이었다.
가게안의 굴뚝에 황토흙을 바르고 이은상의 시 사랑을 재치가 뚝뚝 묻어나오는 흰글씨로 새겨넣은 이 시비도 너무 인상적이었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번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올곧이 없느니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이은상 사랑 전문>
나는 그 여인과 자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홀로 장사하고 있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레스토랑 건축비를 물었더니 43평 건축에 사천만원이 들었다고 말했다. 건축비가 매우 싸다고 말했더니 동네 아저씨중 한분이 기술자가 계셔서 건축비를 절감할 수 있었고, 지은지 6년이 됐지만, 하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무엇하시는 분이냐고? 난 그럴듯하게 도보여행하는 무명작가라고 말했더니 무명작가의 글이 더 좋은게 아니냐며 그녀는 날 위로하였다.
난 사장님처럼 이런 전원카페를 꾸미고 시골에서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면서, 가게가 레스토랑 스타일인데 메뉴에 왜 보신탕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녀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이 곳 서천지방 사람들은 개를 생명의 음식으로 여겨 모든 애경사시 개고기를 접대하는 고장이고, 초상을 치룰때도 문상객들에게 보신탕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어 그렇다는 말이었다.
이내 백반 밥상이 차려졌다. 찬이 여덟가지 나오고 김치찌개가 나왔는데 반찬 솜씨가 정말로 일품이었다. 모두 입맛에 착착 달라붙었다. 또 간이 그만이었으며 김치찌개 육수맛도 절로 탄성이 터져나올 정도로 구수하였다. 그가 말했다. 지금까지 먹어 본 5천원 짜리 백반 중 최고라고 만원을 줘도 아깝지 않으니 나더러 계산할 때 이만원을 주라고 한다. 조금 있으니 조기구이도 해주었다. 손님들은 자기가 지불하는 돈의 값어치 이상의 상품을 만나면 이토록 감동하는 것이리라.
나는 그녀의 음식쏨씨를 극찬하였다. 특히 꼬들배기 김치맛이 그만이었다. 난 꼬들배기 김치를 다 비운 접시를 들고 그녀가 일하는 주방으로 가서 꼬들배기 김치 한 접시 더 달라고 청했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작년 가을에 담근 것이라고 한다.
음식쏨씨가 워낙 정갈하고 간이 잘맞아 우린 김치찌개와 모든 반찬을 싹싹 비웠다. 그녀가 공기밥 한공기를 더 주문하는 우리를 보고 행복한 미소를 띄우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그녀가 커피까지 갖다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살림집은 어디냐고 물었더니 살림집은 마을에 있고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음씩 솜씨가 이렇게 좋은데 장사도 잘 되겠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저희집 보신탕 맛있어요. 멀리 군산에서도 단체손님이 자주 오신다."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보신탕을 시킬건데 잘못되었다고 나는 말했다.
그가 먼저 나가고 내가 그녀에게 저 친구가 2만원을 지불하라고 하는데 받으세요 라고 말하며 지폐 두장을 꺼내 주었는데 백반에 소주까지 시킨 식대 14,000을 받고 그녀는 6천원을 나에게 거슬러 주면서 다음 여행시 이쪽 지방에 오시거든 그 때 보신탕을 한 번 드셔보라고 권유하며 웃었다.
나도 레스토랑을 운영해 봤는데 이쯤되면 그녀도 상당한 프로다. 떨어지기 싫은 발걸음으로 그녀의 가게를 나와 그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여행하니 5천원 짜리 백반을 먹어도 잘 먹지. 저녁은 더 잘 먹고 물론 돈은 더 들지만." "그려 그것은 인정해." 그의 대답을 들은 직후 난 목음산방 여주인의 부름을 받았다.
"손님! 지도를 놓고 가셨어요." 아뿔사! 그녀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도보여행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지도를 그만 놓고 오다니, 난 그녀에게 달려가 지도를 받았다. 환하게 웃으며 되돌아서려는 그녀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해서는 안될 말을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 서천댁! 혹시 홀로세요." 그녀는 기품있는 미소를 띄우고 말없이 되돌아 섰다. 이 서천댁은 우리의 도보여행이 끝날 때까지 내내 나의 즐거운 화두가 되었다.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러나 나의 뇌리엔 서천댁이 떠날 줄을 몰랐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목음산방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고 하여 간직하고 있으며 머지 않은 장래에 그녀의 집으로 보신탕을 먹으러 가겠다고 하니 그가 웃으며 좋은 일이지 하며 맞장구를 쳤다.
이 날도 내 걸음은 뒤쳐졌다. 그가 멀리 앞서가고 내가 뒤따르는 형국이었다. 내가 뒤쳐지는 사이 그는 송림사이의 잘 발달된 沙丘를 보고 왔으니 잠시 나더러 보고 오라며 시간을 내주었다. 과연 서해안 곳곳이 방조제로 인하여 사구의 모습을 볼수 없었는데 이 곳은 천연의 사구를 갖추고 있어 마음이 그리 포근할 수 없었다. 서해안 전체가 이런 모습이고 또 갯펄이 잘 보존되었더라면 정말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사구를 빠져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비인해수욕장에서 숙박을 해야한다. 길가엔 소라껍데기를 메단 쭈꾸미 그물이 야적되어 있었다. 쭈꾸미들은 이 소라 껍데기가 자신의 집인 줄 알고 그 속에 들어가 안식을 취하다 인간들한테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인간에겐 하이 코메디이고 그들에겐 죽음이다.
몽골인들은 馬乳酒를 즐겨마신다.
인간이 말의 젖을 짜내려고 하면 말은 인간을 걷어찬다. 그래서 인간들은 망아지에게 젖을 물리게하여, 말이 망아지에게 젖을 주게한 후 망아지를 엄마 젖으로부터 떼어내고 말젖을 짜낸다. 이 때 망아지를 엄마말 곁에 매어두지 않으면 말이 또 젖을 생산해내지 않으므로 망아지는 인간들한테 붙잡힌채로 엄마곁에 서서 먹고 싶은 젖도 못먹고, 눈 뜨고 엄마의 젖을 인간들로부터 약탈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망아지는 겨우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젖을 얻어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인생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
그의 뒤를 따르며 무심코 해변을 보니 상쾡이 한 마리가 백사장에 표류되어 죽어 있었다. 상쾡이는 연안에 서식하는 돌고래과의 일종인 작은 흑고래다. 내가 어렸을 적 돌아가신 아버님과 낚시를 하며 갓바위에서 수없이 그를 보고 자랐지만, 이루지 못한 그의 꿈이 서글퍼졌다.
오후 6시경 비인해수욕장에 도착하여 민박집에 여장을 푼후 붕장어 세마리를 숯불에 구워 그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식사는 해물칼국수로 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서천댁이 그립다고, 그리고 서천댁한테 가고 싶다고." "그려 그야 좋은 일이지 그건 안말릴게 빨리 가렴." 그러나 그의 말만 듣고 덜커덩 어이 그 길을 갈수 있단 말인가? 오호! 애재로다.
새벽 다섯시에 잠이 깨었다. 그간의 여행길이 꿈만 같았다. 이 도보여행길의 체험담을 담은 "동행" 이라는 글을 그가 잠든 사이에 갈겨썼다. 시라고는 할수 없는 산문 형식이다.
곤히 자고 있는 그를 남겨두고 아침 6시경 난 홀로 비인해수욕장 해변을 산책했다. 비인해수욕장은 해안제방을 건설하느라고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엄청 쌓여있었다. 모래사장이 없는 해수욕장이니 볼거리도 없고 삭막하기만 하였다.
나를 반기는 건 오직 동네 개들이었다. 컹컹 짖어댄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 쓰다듬어 주니 사람들이 풀어놓은 이 조그만 개들이 꼬리를 흔들고 나에게 안긴다. 참 개새끼들은 알수 없다. 짖을 때는 언제고 또 안길때는 언제인가?
아침산책을 한 건 민박집에서는 10시가 되어야 아침식사가 가능하다고 하여 어디 아침식사를 할수 있는 가게가 없나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가게문을 연 집이 있어 7시경 식사가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칼국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도 칼국수를 먹었는데 그래도 아침을 굶는 것보다는 칼국수라도 먹고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여 그 집에 예약을 하고 돌아와 그에게 아침을 해결하였다는 보고를 했다. 잘 했다. 정말 큰일을 했다고 그가 칭찬하였다.
그 집의 주인아주머니를 나는 처음 할머니라고 불렀는데,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녀는 새로 식당을 개업했는데 자식들한테 신세안지고, 앞으로 10년은 이 장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해야 건강을 지킨다고 내가 그녀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해물칼국수를 훌훌 마시고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오늘의 여행일정은 무창포를 거쳐 대천해수욕장까지 가야하는 길이었다. 부사방조제를 건너기 시작했다. 방조제에 올라서면 툭 트인 하늘과 바다가 상쾌하기 그지 없다. 아무런 雜念이 없다. 一望無際의 無念의 舞臺위에 홀로 서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부사방조제가 끝나니 길이 두 갈래 길이었다. 하나는 해변 백사장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고, 하나는 내륙을 돌아 무창포로 가는 길이었다. 당연히 해변을 가로질러 가는 길을 가야하는데 그 길은 군사통제지역이었다. 박격포인지 기관총인지 드륵드륵 긁어대는 소리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내륙울 돌아가면 12키로는 넘어보였고 , 군통제지역을 가로지르면 4키로가 채 안되어 보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현지주민들한테 물어보니 처음에는 안된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점심시간이니 군인들이 안지킨다고 빨리 건너면 괜찮을테니 건너가라고 한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냇물이 있다고 한다. 냇물의 수심이 깊냐고 물었더니 깊지 않고 발목 정도 차오른다고 했다.
이리하여 그와 나는 군작전지역을 건너가게 되었다. 조금 가니 경고판에 공군비행사격장이니 통제관의 지시를 따르라는 경고문이 커다랗게 써있었다. 계속 기분나쁘게 드륵드륵 총알을 긁어대는 소리가 쉬지않고 들려온다. 점심시간대이고, 또 썰물때여서 이 백사장을 건너는 요행수는 있었지만 하여튼 기분이 썩 좋지않았다.
그러나 군작전지역인 이 백사장은 沙丘가 잘 보존된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모래언덕엔 풀들이 자라고 그 뒤로 소나무가 무성 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구의 풍광을 카메라로 담으면서도 혹시 군인들한테 들키면 큰일이라 싶어 얼른 카메라를 자켓에 숨겼다.
총알을 긁어대는 드르륵 드르륵 소리는 쉼없이 들려오고, 군데 군데 초소의 유리창은 꼭 올빼미 눈처럼 나를 노려보고, 불쑥 군인들이 뛰어나와 총을 겨누고 나에게 정지명령을 내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오고, 심지어 유탄에 맞는 내 모습이 연상되어 이렇게 이 여행이 끝나면 어쩌나 하여튼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 와 나는 그와의 거리 간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발바닥이 땀이 나게 걸었다.
백사장을 반쯤 건너니 현지주민의 말대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냇물이 나타났다. 냇물의 폭은 한 2미터정도였다. 젊은 시절 같으면 넓이뛰기로 건너뛸 수도 있는 폭이었지만, 나이 들어 객기를 부리다 다치면 안되므로 우린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내를 건넜다. 수심도 현지민의 말대로 발목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나는 내를 건너자마자 양말로 발에 묻은 모래를 훌훌 털어낸 후 그 양말을 얼른 바지주머니에 쑤셔넣고, 신발끈도 매지않은채 냅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5백미터 정도 걸은 후 뒤돌아보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순간 불안하기만 했다. 혹시 이 친구가 군인들한테 검문을 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태평하기만 했다. 그는 발바닥을 말리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 냇가에 검은 바위가 있었는데 그는 나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바위에 걸터앉아 어이없게도 발바닥을 말리고 있다니 나의 상식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임마! 이 상황이 지금 발바닥을 말리고 있을 상황이냐? "
난 전화를 끊고 그가 따라오든 말든 내 갈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흘끔 뒤돌아보니 그가 다시 걸어오고 있었다. 물집이 도져 발을 디딜때마다 욱씬거리던 내 발바닥의 아픔도 잊은 채 친구야 따라 오건 말건 나는 그 위험한 군작전지역을 신속히 건너 백사장위의 조금 편해보이는 바위에 앉아 안도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야! 니 발바닥 아프다는 말도 순 사기구만." 니를 따라 잡으려했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 "야! 임마! 내 발바닥이 문제냐, 니 발바닥이 문제지. 아니 그 상황에서 발바닥을 말리고 싶을까? 난 임마 그냥 발바닥 모래만 양말로 털어낸 후 양말도 안신고 신발끈도 안잡아매고 뒤도 안돌아보고 잽싸게 걸었다. 내 발바닥 아픈것 보다 더 쩔렸단 말이야." "뭐라고 쩔렸다고." 그가 배를 움켜잡고 박장대소하였다. [ 쩔렸다.]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전라도 방언이다. 몹시 겁이 났다는 뜻이다.
그가 나에게 자기가 취한 행동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자기는 이 지역을 통과할 때 그 경고판에 통제관의 통제를 따르라고 했는데 통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혹 군인들에게 검문을 당하더라도 너희들이 통제를 하지 않아 건너가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항변하고, 되돌아가라고 해도 그렇게 못하겠다. 너희들 귀책사유도 있으니 행정심판을 청구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응수했다. "그래 잘났다. 잘났어. 그러니까 넌 장교출신이고 난 방위다." 그가 다시 껄껄 웃으며 설명한다. "신병 훈련시 철조망 통과 훈련할 때 기총사격을 퍼부어대지. 고개만 살짝 들어도 총에 맞는다고 신병들에게 조교가 겁을 주지. 그렇지만 일어서서 걸어도 총에 안맞아. 그냥 허공에 적당히 쏘아대면서 신병들을 꼼짝못하게 철조망을 박박 기게 만드는 효과를 얻는거지."
"나도 방위 3주 훈련 받을 때 철조망 통과 훈련을 받았는데 방위들한테는 총은 쏘지는 않더라. 총알값이 아까운 모양이지." 이리하여 우리는 다시 크게 웃었다. 입대를 앞둔 20대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장교로 가든 사병으로 가든 반드시 현역으로 입대할지어다!
군작전지역을 벗어나도 드르륵 드르륵 총 긁는 소리는 계속됐다. 저 자식들은 밥도 안먹고 사격 연습만 하나. 자식들 그러면서 교대해서 보초는 안서고 완전 직무유기다. 국방장관한테 투서를 보내야겠다. 그가 다시 웃는다. 화장실에 들어갈때와 나올때가 틀리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무창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내 발바닥이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찬웅아! 긴장이 풀리니 발바닥이 다시 아파오기 시작한다." 나의 이 말에 그가 요절복통 웃음을 그칠 줄 모른다. 나도 그를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행길에서 두 나그네가 이처럼 크고 유쾌하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한편의 코메디 드라마같은 백사장길을 건너고나니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우린 무창포해수욕장에서 뼈다귀해장국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맥주 한 잔을 곁을이면서....... 점심을 끝내고 우린 보령방조제를 걷다 죽도유원지에 들렀다. 죽도유원지는 풍광이 아름다운 조그마한 섬이었지만, 작년에 예기치 않은 너울성 파도 가 섬을 휩쓸어 방파제에서 낚시하던 13명이 목숨을 잃은 대형사고가 났었다. 그 당시 어린 조카를 데리고 낚시하던 삼촌과 그 어린이도 목숨을 잃어 그 유가족들이 슬퍼하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지만, 오늘도 이 섬에는 낚시꾼들이 많았다.
너울성파도는 방조제가 일으킨 人災라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서해안의 갯펄과 사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있었더라면 충분히 그 너울성 파도를 해안이 받아들여 제압할 수 있었는데도, 곳곳이 방조제로 가로막힌 해안이 그 기능을 상실당해 어쩔수 없이 발생한 人災라는 내용이었다.
죽도유원지를 구경하고 다시 보령방조제를 건너갔다. 군 작전지역의 백사장을 건널때는 내가 그를 앞섰건만,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절둑거리는 발걸음으로 천신만고 끝에 오후 6시경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슈퍼에 들러 시원한 맥주 한잔의 목넘김이 부드러웠다.
끝으로 마지막까지 이 글을 읽으신 분은 군작전지역에서의 위급상황에 대처하는 두 나그네의 극명한 성격차를 곰곰 뜯어보시기 바라며,
서천댁에 마음을 빼앗긴 中年을 넘어선 한 남자의 그 순정어린 표현의 자유도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
첫댓글 안타깝게 끝나버린 아빠의 서천댁 짝사랑! ㅋㅋ 서울댁에도 좀 신경쓰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