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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5일 아침 대천해수욕장을 등지고, 우리는 충청수영이 있는 오천항 으로 출발하였다. 일하시는 농부님의 모습이 평화롭고 한가롭게 보인다. 농사는 선사시대부터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가장 보편적인 삶의 양식이다. 피를 뽑고 계시나고 내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1950-1960년대 농촌의 모습을 선연히 각직하고 있는 나의 뇌리엔 지금의 어디에서도 옛 농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원앙소리의 그 일소는 한창 모내기 철인 이 봄녁 들판에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영화속의 아련한 옛 풍경일 뿐이고 이젠 전설이 되었다.
그 일소는 트랙터에게 자기 일자리를 물러주고 쓸쓸히 퇴역하였고, 어디를 봐도 대광주리에 술참을 담고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맛있는 술참과 막걸리 한 잔이나마 얻어먹을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요즘은 농민들도 식당에 배달을 시켜 술참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논둑길엔 여기 저기 소주병과 맥주병이 널려있었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었다.
보리피리 불며 소 잔등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이도, 초승달이 산마루에 걸릴쯤이면 모락모락 흰 연기를 올리는 초가집 처마의 굴뚝도 모두 사라졌다. 이젠 한국화의 그림속에서나 옛 농촌의 모습을 그려볼 수 밖에 없다. 지난 50년간의 격변했던 우리 현대사가 거대한 商船의 기관소리처럼 격렬하게 거친 숨을 몰아쉰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겪었던 4.19, 그리고 5.16 우리에게 밥을 먹여준 것을 담보로 한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를 거쳐, 유신개헌, 10.26. 12.12 광주항쟁, 6월항쟁,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문빈정부의 탄생, IMF 환란, 기업구조조정, 햇볕정책,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의 살아있는 자의 관점에서 볼때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내리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까지 영욕으로 굴곡진 현대사의 격랑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우리나라의 보수우익 기득권 세력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현상이 "듣보잡" 이란다 옛날부터 인터넷이나 시중에서 떠도는 말인데 내용은 이렇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우리 국민들의 정치적 성숙을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미웠겠는가? 다음 대선때 이 "듣보잡" 현상이 재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게 그들을 초조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분명 정치적 이지메를 당하셨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그 분이 生死一如라는 선문답같은 말씀을 남기셨는데 나와 같은 民草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오천항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토정 이지함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그는 고려말 3절의 한분으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목은 이색의 6대손이었다. 한산이씨 고만파 양반님들의 묘역을 카메라에 담았다. 토정 이지함선생의 묘소에서 잠시 선생을 추모하며 묵념을 드렸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앞 건물이 한전의 시설물이란다. 한전만 없다면 바라보이는 연못이며 바다며 그야말로 천하의 명당이었다. 토정 이지함선생은 이 묘자리를 잡고 앞으로 우리 집안에 정승, 판서가 6명이 배출된다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다고 한다.
서천댁에서부터 난 나중에 나 홀로라도 이런 도보여행을 한 번 해볼 마음으로 그로부터 5만분의 1지도를 넘겨받아 내가 들고 우리가 현재 가고 있는 국도의 번호와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건물들을 확인해가며 길안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가도 가도 길이 멀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계도 기업이다." 라는 '육성' 이라는 상호의 양계전문농장을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송아지만한 큰 개가 짖어댄다. 그 놈은 줄이 풀려있었다. 모골이 송연할만큼 겁이 더럭 났다. 더군다나 그가 앞서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이 놈이 컹컹 짖으며 계속 나를 따라왔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 저 개 주인 정말 매너없는 인간이다. 저러다 사람이 라도 물리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글쎄 말이다. 너 말대로 정말 매너 없는 인간이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태평스럽기만 하다. 그 개가 공격할 목표가 앞서가는 그보다 뒤쳐지는 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개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충고를 던졌다.
" 난 너처럼 과자부스러기나 얻어먹으려고 꼬리치며 살지는 않았다. 돌밭을 가는 소처럼 살았다." 그랬더니 이 놈이 슬며시 짖기를 멈추고 슬슬 꽁무니를 빼고 되돌아갔다.
개에게도 見性이 있는가? 개에게도 양심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자꾸 뒤쳐지니 그가 지도를 돌려받아 앞서갔다. 한참후에 우리가 같이 휴식을 취할 때 그가 말했다. 내가 완전히 길을 잘못 인도했다고 하며 지금까지 우리가 온 길을 지도를 확인해가며 설명하였는데 직선길을 온게 아니라 최악의 코스로 꾸불꾸불 돌아왔다고 질책했다. 머리가 좋아야 꼬리가 고생 안한다고 진즉 오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라고 그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인도하여 꼬불꼬불 온 길을 보니 아까 그 개한테 혼줄난 후 지나갔던 양계도 기업이란 '육성' 농장이 표시되어 있었다. 제기랄, 발바닥은 계속 욱씬거리고, 개한테 쫒기고 이 점잖은 친구한테 야단맞고 기분이 영 삼삼하기만 하였다.
오천항으로 들어가는 순로에 있는 천주교 순교성지 갈매못에 들렀다. 조선조말 천주교를 개척하신 성인 네분의 이름과 그분들의 순교기록을 읽었다. 그 성인 네분은 이곳 충청수영에서 참수당했고, 훗날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추존을 받으셨다.
당시 조정에 국혼이 있어 한양 도성에서 참수하면 왕가에 불길하다는 점장이의 말을 듣고, 충청수영에서 참하라는 조정의 명으로 그들은 한양에서 이곳 충청수영 까지 15일간 끌려오다싶이 걸어오셨단다. 충청수영에서는 그 죄수들의 소원대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이들을 참수했는데, 품삯이 적어 불만을 품은 망나니들의 칼이 그 성인들의 목을 단칼에 처내지 않고 두 세번 걸쳐 처냈다니 그들은 그 성인들의 저승길까지 욕보인 셈이다.
그 성인들의 순교로, 또 토속신앙을 지키고 불교를 배척하여 왕권을 강화 하려는 신라왕실의 책략으로 이차돈도 목이 베어졌다. 이리하여 우리 한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종교의 자유를 거의 완벽하게 누리는 국가가 되었다. 回伊浦 찾아드니 忠淸水營 寂寥롭다
五百年前 先祖들의 護國忠情 받드려고
默念하듯 담쟁이는 望華門을 감싸안고.
2009.5.15 저녁 6시 忠淸水營所見 골드 **주 회이포-오천항의 옛지명
충청수영 진휼청 툇마루에 짚신 한 짝이 있어 그걸 신고 여정의 노고를 풀어보았다.
그와 함께 충청수영 성곽길을 걸어보았다. 1509년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축성 하였다니 지금으로부터 꼭 만 500년전 일이다. 그러나 이 성곽길은 한 1백미터 걸어가 보니 오천항으로 들어오는 도로에서 끊겨있었다. 끊겨진 성곽을 지나 도로를 건너 충청수영을 방문하는 조정관리들이 묵었던 수영객사 건물을 찾았다. 지금의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10개가 더 넘어보이는 옛 수군절도사들의 선정비가 충청수영의 영화를 웅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의 선정비는 두 동강이 나서 시멘트로 보철해 둔 모양새가 그 절도사님한테 죄송스러울 뿐이다.
이 수영객사에서 부터 다시 성곽은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으니 정부가 나서서 충청수영을 복원하여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후손들이 받들 수 있도록 역사인식을 고취시켜 주었으면 좋으련만 ............
금강하구에서 경기도 평택까지 관활했던 조선수군대본영인 충청수영은 1895년 폐쇄되었다. 충청수영의 폐쇄와 동시에 조선의 국운도 기울었다.
충청수영 구경을 마치고 우린 오천항의 명소인 오뚜기횟집으로 갔다. 이 횟집은 보령시 인근은 물론 서울까지 잘 알려진 횟집이다. 사실 나의 제안으로 그와 나는 지난 2일 동안 회를 먹지 않았다. 오천항 이 횟집에서 제대로 된 푸짐한 회를 내가 사주겠다고 그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자연산 도미회를 1키로 시켰다. 8만원이라고 한다. 작년까진 7만원이었는데 올랐다. 사실 이 집은 본회와 함께 따라나온 반찬이 모두 회다. 그래서 1키로 시키면 셋이 먹어도 충분하다. 그런데 난 이 집을 여러번 와 봐서 둘이 1키로를 시키면 다 못먹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최소 주문단위가 1키로라니 할수 없이 1키로를 시켰지만 우린 그 모든 회를 다 먹어치웠다. 맥주 한 병과 소주 세 병을 둘이 마신 것 같은데 몹시 대취했다.
사실 난 오뚜기횟집을 지금으로부터 6년전에 처음 와서 먹어 본 후에 이 집의 단골 메니아가 되었다. 3년전에 한국를 방문한 내 네째 동서 미국인 팻 윌리암과 함께 처가집 식구들을 데리고 이 오뚜기 횟집에 와서 그를 대접했다.
그 놈도 여편네한테 꼼짝없이 잡혀있고, 정이 많고 또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보수적이며 가족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도 강하여, 문화코드가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과 통하는 놈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 놈은 늘 나한테 한국말로 " 형님! 형님!" 하면서 나를 잘 따른다.
미국에서도 일식은 최고급 비싼 요리에 속하는 모양이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내가 돈을 지불하자 그가 미안해 했다. 내가 괜찮다고 일인당 경비가 30달러 정도라고 했더니 그가 말했다. " It"s a good deal!"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오뚜기 횟집하고 절대로 합자하여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오뚜기 횟집에서 그와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나는 필름이 끊겨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숙취는 없었는데, 어제 저녁 어떻게 계산을 치루고 또 오뚜기횟집에서 운영하는 2층 민박용 방에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5월 16일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다. 그가 일어나서 너 어제 저녁 몹시 취해 횡설수설하였다고 한다. 난 아무런 기억이 없지만 죄지은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불리할 때는 묵언이 최고의 처세술이다. 일종의 묵비권인 셈이다. 그러나 아침은 먹어야 한다. 그와 함께 난 어제 저녁 충청수영의 망화문에 들어설 때 아침식사가 가능한 식당을 봐 두었다. 그 집은 충청수영식당이었는데 일전에 공중파 방송을 탄 집이었다. 세모국이었다.
세모국은 바지락을 듬뿍 넣고 매생이는 아니지만 톳과 비슷한 해초류를 끓여낸 국이였다. 매생이보다는 질기고, 톳보다는 씹히는 질감이 부드럽고 연했다. 그는 처음 들어본 세모국에, 더군다나 주인 아주머니가 처음 드신다면 드실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는 말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세모국을 첫 숫가락 떠먹고 이윽고 안심한 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맛있고 시원하고 먹을만 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난 이 집에서 이번 여행의 백미인 충청수영의 모든 역사를 볼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 충청수영식당의 벽면엔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충청수영에 관한 모든 신문기사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주인 사장님이 이것 보세유 오천항의 오자는 자라오字예유 라는 설명을 곁들이시면서 큼직하게 자라오자를 한문으로 써보이신다. 나도 그 분을 따라 자라오( 鰲)자를 써보았다.
충청수영은 영낙없는 자라 형국의 모양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 자라 모양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충청수영 성곽 외곽의 길이 총 1,650미터의 높은 성벽을 쌓고 서해안을 방비하였으니 충청수영은 천혜의 요새임이 틀림없었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지키는 무장한 조선 수군들, 아니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의 할아버님을 뵙고 싶다. 그리고 그 분들한테 큰 절을 넙죽 올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옛 충청수영의 자라 모가지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천항 앞바다를 매립하여 선착장과 주차장을 만든 결과다. 선조들의 문화유산 을 지키지 못하는 민족에게 앞날의 서광이 비쳐질까? 회의가 일었다........
충청수영식당의 벽면엔 이 충청수영지도를 비롯하여 100년전의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소개한 외국선교사들의 기고문과, 겸재 정선이 그린 충청수영도가 실린 신문기사들이 표구되어 붙어 있었다. 모두 사진을 찍었으나 이 충청수영지도만 제대로 나오고 나머지는 너무 흐려 여기에 올리지 못한 점이 아쉽다.
보령시에서는 해마다 충청수영축제를 연다. 보령고등학생들을 동원하여 조선수군 제복을 입히고 망화문을 경비하고, 죄인들을 재판하여 형틀에 묶어 곤장을 때리고 하는 흥미본위의 축제인 것 같아 다시 씁쓸한 기분이 든다. 수군절도사 부임행사 같은게 어떨런지 보령시는 좀 축제의 영역을 넓히면 좋으련만. 충청수영 축제보다 더 시급한 것은 가능한 현재 남아있는 수영이나마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길이 최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모국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오뚜기횟집 2층 민박용 방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으나 도무지 비가 멈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처량하게 비를 맞고 걷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初老의 멀쩡한 사내 두 놈이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기도 그렇다.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무료하고 심심하여 내가 그에게 농을 걸었다. " 이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이 부안에 가면 부안댁이 서천에 가면 서천댁이 오천에 오면 오천댁이 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녀들한테 따순밥 한끼라도 얻어먹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가 핀잔을 주었다. 니 그럴 힘이라도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답했다. 아니 그럴 힘은 없고 입으로 떠들 힘은 아직 남아있다고 했더니 비로소 그가 웃는다.
한시간여 방에 처박혀 있으니 무료하기만 하였다. 오전 10시 45분경 우리는 비를 맞고라도 출발하기로 하였다. 오뚜기횟집 주인장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우의를 입고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섰다.
한시간 반여 걸으니 천북이다. 천북은 유명한 굴 산지다. 점심때도 되고 하여 천북면의 어느 허름한 식당에 들렀다. 메뉴에 민물새우탕이 있어 우린 그걸 주문했다. 그 여주인에게 우린 목포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내가 말했더니 그녀가 정말이냐며 매우 놀란 눈치다. 그러니 이런 도보여행가한테 소주 한 병 서비스하라고 했더니 그녀가 그런 것 하나 못하겠냐고 참이슬 한 병을 갖다 주었다.
민물새우탕을 먹어보니 고추장이 텁텁하였는지 국물맛이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에게 맛있다고 말했더니 그도 맛있다고 달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천북을 떠나 우린 오늘의 여행 목적지인 남당포구를 향해 출발하였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우의나 우산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우린 흠뻑 젖었다. 무려 6시간 넘게 행군하여 오후 5시 반경 남당포구에 도착하였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나니 아침부터 이렇게 비를 맞고 하루 종일 걸었다는 사실이 새롭기만 하다. 남당포구는 홍성인근에 있는 포구로서 왕새우와 새조개 축제로 유명한 조그마한 포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난 이 포구에서도 제비를 보았다. 제비는 선유도 보다 그 개체수가 많아 보였다.
저녁에 인근 식당에 들렀는데 그가 간단히 식사로 하자고 하였으나 식사메뉴는 해물칼국수 뿐이었다. 한참 고민하다 난 새조개 샤브샤브 메뉴를 주문했다. 이 집 딸로 보이는 아가씨의 고분고분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단연 돋보였다. 새조개는 10초내에 샤브샤브 육수에 잠간 익혀 먹는 것이 최상의 육질맛을 느낄 수 있다고 이 집 딸내미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여행을 하다보니 일인당 하루 오만원의 경비가 소요되었다. 숙박비는 평균 25,000에서 30, 000 범위내였다. 아침과 점심 식대도 5-6천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녁이 문제였다. 둘이 여행하다 보니 어찌 소주 한 잔 안걸칠 수 있겠는가? 둘이 여행함으로서 남는 숙박비 잉여예산한도을 난 저녁마다 항상 초과 집행하었다.
술을 마시면 난 별로 식사를 안하는데 그는 꼭 식사를 한다. 안주를 잘 먹고 식사도 잘 해야 술이 덜 취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였다. 그를 위해 식사를 주문하려는데 칼국수만은 먹기 싫었다.
내가 이 집 딸내미에게 즉석 제안을 했다. 묵은 김치를 잘게 썰어서 라면 사리 하나와 같이 갖다 달라고. 그리고 상위의 다 먹지 못한 굴과 아구등 생선류를 샤브샤브 육수에 부어넣었다. 이리 하여 잘게 썬 묵은 김치를 넣고 즉석 짬뽕해물라면을 끓였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이 날 밤은 달고 포근한 숙면을 취했다.
5월 17일 아침 일찍 잠이 깨었다. 오늘은 그와 이 도보여행길을 작별하는 날이다. 그와 함께 한 지난 10여일이 어느덧 꿈결같이 지나가 버렸다. 마음은 강화도까지 그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내 개인사정상 나의 도보여행은 이 남당포구에서 피날레를 마쳐야 했다.
또다시 바지락칼국수로 아침을 때우고 난 오전 8시40분 홍성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가 버스에 오르는 나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었다. 버스는 시속 50키로 정도로 시골길을 달렸다. 우리의 도보여행 속도로는 하루 반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홍성역앞에서 하차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멀리 보이는 홍성역은 전통 한옥 건축인 맞배지붕 양식이었다... 우리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역에 도착하여 서울행 티켓을 물었더니 지금 기차가 역에 도착하고 있으니 빨리 뛰어 가시란다.
티켓을 끊고 열심히 달려 기차에 오르자마자 기차가 출발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에게 남당에서 홍성까지 버스로 한 시간 걸렸고, 티켓을 끊어 기차에 오르자마자 기차가 출발했다고, 정말 운이 너무 좋았다고 전화를 했다. 그가 말했다. "정말 축하한다. 잘 가거라."
기차는 장항선 새마을호였다. 장항역이 간이역으로 전락되고 장항선은 군산을 거쳐 익산이 출발깃점이 되는 셈이다. 장항의 경제가 금강하구둑의 건설로 인하여 군산권에 예속되었다는 어느 장항시민의 한숨어린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오랫만에 타본 새마을호 열차는 KTX보다 좌석도 더 안락하고 풍미도 있었다. 식당칸에 들러 커피 한잔을 주문해 마시면서 물끄러미 차창 너머의 푸른 5월을 바라보았다.
어제 내린 단비로 차창에 비친 푸른 논에는 물이 넘쳤다. 농민들은 한시름 걱정을 덜었다. 우린 비를 맞고 걸었지만 그동안 대지는 넘 목말라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기차는 두시간도 채 되지않아 영등포역에 도착하였다. 난 그간 문명의 고마움을 넘 모르고 살았다. 그가 도보로 서울까지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2주일 이상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단 2시간대에 서울에 오다니 우린 얼마나 초스피드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영등포역사를 빠져 나오는데 인파로 인해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비로소 서울이라는 이 도시의 아수라장이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 10일간 느리게 살았던 도보여행길이 다시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푸른 들판과 풋풋한 새벽 공기와 그 수많았던 해안선의 길이 정말 인성을 살리는 참다운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서울 도착" 그에게서 또 즉시 답신이 왔다. "벌써? 그동안 고생했다. 푹 쉬거라." 전원으로 돌아가야겠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아닐지라도 시골에서 느린 삶을 사는게 나의 꿈인데 그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 아빠다!" 라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이래서 가족이라는 것은 소중하나 보다. 식탁위엔 나의 귀향을 축하하는 조촐한 케이크 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집사람이 당신 참 대단하시다고 말했다. 발에 물집이 생겨 절둑거리며 걷는다는 말을 듣고 2-3일 걷다가 포기하고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대단하다는 것이다.
케이크를 자르면서 난 걸을만 했고 내년에 나 홀로 새로운 코스를 찾아 한 번 도전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시란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난 이 번 여행길의 백미인 부사방조제를 건넌뒤 기총사격을 퍼붓는 군작전지역을 통과할 때의 에피소드를 털어놓게 되었다.
벗은 양말로 발바닥의 모래를 털어내는 리얼한 연기까지 해보이면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집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도 해줄까 말까 라고 말했더니 식구들이 나의 턱을 바라보며 이야기해 달라고 조른다. 나는 망설임없이 서천댁 이야기를 꺼냈다. 딸 세년들의 눈빛이 요상하다.
쉰이 넘은 첫째 딸년이 말했다. 서천댁 이쁘냐는 거였다. 아니 그렇게 이쁜 얼굴은 아닌데 뭐랄까, 아무나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교양미가 풍기는 기품있는 얼굴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찬의 간이 당신보다 더 잘 맞는다고 말했다.
안해도 무방한 나의 생뚱맞는 서천댁이야기를 들은 세 딸년들과의 攻防이 시작되었다.
첫째 딸년이 말했다. " 이 양반이 완전히 서천댁한테 마음을 뺐겼구만. 당장 서천댁한테 갑시다. 가서 보고 서천댁이 쓸만하면 서천댁한테 당신 몸만 보내줄테니, 단. 절대 반품은 안된다는 조건으로. " 내가 말했다. "그러다 몇일 못살고 서천댁한테 쫒겨나면, 당신만 이익이고 난 개털이잖아."
첫째 딸년은 나의 이 말에 " 그렇지!" 하며 유쾌한 듯 크게 웃었지만, 둘쩨 세쩨 딸년들은 말이 많았다. " 아니 이 나이에 말도 못해, 아빠가 그냥 말로만 그런다는 것 니네들이 더 잘 알잖아?" 첫째 딸년이 다시 말했다.
" 이 양반 서천댁 이야기하면서 저리 흐뭇해하고, 행복해 하는 표정 참 어이가 없네. 니네 아빠 저 애기같이 좋아하는 모습 좀 봐라. 귀엽지 않니? 아이고! 이 양반 언제나 철이 들까? " 중재를 잘 한 첫째 딸년 덕분으로 서천댁 해프닝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세 딸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녀들의 성화에 못이겨 난 지난 10여일간의 도보여행을 하는 동안 깍지 않았던, 구렛나루 수염이 아니어서 간신수염같이 볼품없었던 내 수염을 밀어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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