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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르체스코성 탐방기/밀라노
이 세상엔 참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인연이 있나보다.
2008년 11월경 난 목포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뵈옵고 KTX을 타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학구적인 교양미를 갖춘 수수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송정리역에서 올라 내 옆좌석에 착석하였다. 참으로 앳되 보인 얼굴이었다.
이럴땐 처신이 불편하다. 한참 나이 차이가 나는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단 말인가?
기차는 계룡역(옛역명칭-두계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내 나이 20대 초반 시절,
아버님과 같이 이 산 좋고 물 맑은 두계역을 새마을호를 타고 지날 때 부자지간에
나눈 대화가 아스라한 그리움인양 나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 산문같은 시상이 갑자기 떠올랐다.
옆좌석에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니.
놀랍게도 그녀는 한식 프랜차이즈 관련 책자를
읽고 있었다. 지난 10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집사람과 같이 생활방편의 일환으로
요식업에 뛰어든 나로선 참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그녀와 나는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 앳되 보이는 나이에
이학박사 학위를 지닌 전남도립대 호텔조리학과 김수인 교수였다
우린 서로 명함을 건네 받고 프란차이즈 업계 현황과 식당영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수인 교수는 내년 3월 남도음식 외식사업 CEO 과정 강의가 있으니 나더러
꼭 그 과정을 이수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난 김수인 교수를 잊지 않고 있다가 2009. 3월 이 강의를 신청하게 되었고, 놀랍게도
이 강의일정 중 ICIF 이탈리아 요리학교 강습및 미각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행경비의 대부분을 정부에서 보조해 주어서, 난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거의 공짜로 가게 되는 행운을 갖게되었다.
참 인연이란 이리 묘하고도 깊은 것이다.
2009.6.20일 오후 2시경 우린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하였다.
우리 원우생들과 전남도립대 교수님들과 전남 담양에서
향원당과 생태병원, 전통발효식품 다선원을
전남도립대와 산학연계로 운영하시며
지역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게시는 김수인 교수 부친이신
김석주 이사장님과 사모님을 포함 42명의 대가족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한 3시간 후에 창측에 앉은 원우가
바깥을 한 번 보라 하여
밖을 보니 중국인지 몽골인지 몰라도
거대한 사행천(蛇行川)이 기어가고 있었다.
모든 생명에게 젖줄을 안기는 그 사행천이 도도하게
뭍 생명을 끌어 안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자연의 신비로움을 안겨주었다.
루프트한자 여객기는 11시간 30분을 비행한 후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착륙하였는데 현지시간으로 오후 6시 30분이었다.
한국과 유럽의 시차는 이 곳 유럽이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지금 유럽은 섬머타임제를 실시하고 있으니 7시간 늦는 셈이다.
한국시간으론 6월 21일 새벽 1시반인 셈이었다.
2시간 20분을 기다려 [패션과 비지니스의 중심지] 밀라노 말펜샤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바꿔 탔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여 난 프랑크푸르트 공항 바에서
독일 생맥주 500씨씨를 여수에서 자산어보 횟집을 운영하시는 김사장과 함께 마셨는데
놀랍게도
생맥주 한 잔 값이 4유로 40유로센트였다.
우리 돈으로 약 9천원인 셈이다.
이 곳 물가는 가히 살인적인 물가라는 걸 여행 내내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독일 생맥주의 맛은 일품이었다.
목넘김이 부드러웠고 호프보리의 곡향이 입안에 가득 넘실거렸다.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오후 10시경 도착하여, 1시간여를 버스로 달려
시 변두리의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하였는데
도무지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현지 시간으로 새벽 3시반이었다.
잠이 들다 말다 아침이 밝아 첫 아침식사를 가득 기대를 품고 호텔에서
하게되었는데
이탈리아의 호텔 조식은 참으로 검소한 식단이었다.
이탈리아의 아침식사는 간단한 빵조각 몇개와 커피와 밀크,
그리고 여러 종류의 쥬스가 전부였다.
이 곳은 낮이 길다. 그래서 아침은 이렇게 간단히 하고 보통 이탈리아 사람들은
간간히 간식을 겸해
하루 4-5차례 식사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밀라노 도심에 있는 스포르체스코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엔 만경평야와 같은
너른 들녁이 곳곳에 펼처져 있었다.
농작물도 벼와 옥수수와 밀농사가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탈리아에서도 벼농사를 한다니.
벼농사는 남방계 인류의 생활양식이라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순간
고창의 고인돌 문명을 가진 우리의 선조들과
이 곳 이탈리아계의 먼 인류의 조상은
한 족속이 아니었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스포르체스코성에 도착하였다.
스포르체스코성(Castello Sforzesco)
1368년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처음 성을 쌓았고, 1466년 밀라노의 영주였던 스포르체스코 스포르짜가 브라만테와 다빈치 등을 동원하여 완성을 한 성이다. 실용적이고 과학적으로 지어진 성으로, 성 주위에 함정을 파서 외적의 침입을 막은 전통적인 성으로, 성 모통이와 협간에 본성을 지은 4변형의 성이다. 밀라노에는 강이 없어 서쪽 비제바노에서 운하를 끌어들여 성의 해자를 채웠다. 다빈치는 성의 모서리 해자에 스쿠르를 만들어 해자의 고인물이 순환하도록 하여 물이 썩는 것을 방지하고 전시에는 적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설계하였다. 1800년대 후반 나폴레옹 침략 당시 지금의 성 외곽을 두르고 있던 외성벽을 무너뜨리고 건물들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또한, 성의 상단부위를 외부로 돌출시킴으로서 적병이 성에 오르는 것을 방지하였다. 성에 나있는 구멍들은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나무를 구멍에 끼워넣고 널빤지를 올려놓고 올라가서 벽돌을 쌓아올린 흔적이고 큰구멍은 전화기가 없던 시절에 비둘기로 서신을 주고 받던 것이다. 이 구멍들은 지금 성의 땀구멍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밀라노의 겨울은 습도가 높고 기온이 떨어져 얼게되면 건물의 틈속에 얼음이 생겨 팽창하게 되고 봄에 다시 녹게되면 건물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면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도 붕괴과 된다. 이 현상을 방지해준 것이 바로 이 구멍들의 역할로 과학적인 설계덕에 아직까지 당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큰 정원이 있는데, 병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왼쪽에 문이 있고 그 위에 용마크와 십자가 문양이 있는데, 용마크는 비스콘티 가문을, 십자가 문양은 스포르짜 가문을 상징한다. 스포르짜 마크는 지금 이탈리아의 차 ‘알파로메오’의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의 내부에는 현재 5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전시된 유물들은 주로 롬바르디아 편원에서 출토된 고미술품들이다. 유명 작품으로는 미켈란젤로가 사망하기 3일전까지 마지막 숨결을 쏟아 놓았던 ‘피에타 론다니니’가 있다.(이상 인터넷 참조)
스포르체스코성의 후원을 살펴보았다. 옛날 이 성을 개축할 당시 파놓았던
해자의 흔적이 이처럼 남아 있었다.
당시 해자를 만든 것은 대포로 성을 공격하면 꼼짝없이 성이
함락되는 것을
대비해 성 주위에 해자를 만들고 쉽게 성이 함락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전술적인 대비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히도 흘러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성채의 해자는 이처럼
지하 잔디밭으로 변해 있었고,
이 잔디밭엔 까마귀들이 노닐고
고양이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스포르체스코 성벽에 무수히 뚫려 있는 건물의 땀구멍들, 가이드는
이 구멍을 전시에 화살을 쏘는 사대로 활용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건축설계술은 감탄사 바로 그 자체다.
이 땀구멍이 천년 세월이 흘러도 건물을 과학적으로
보존시키고 전시엔 적병을 물리치는 화살을
쏘는 곳으로 이용했다니 과연 그렇다면 이 성을 공격해야 했던
병사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싸우는 상대 병사들을 보지 못하고 어떻게 애꿎은 성벽에 화살을
쏘아댄단 말인가?
성채의 후원에서 난 이 스포르체스코성은 성채가
아니라 바로 밀라노라는 도시국가의
표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스콘티 가문의 옛성채가 다 부서지지 않고
곳곳에 이처럼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스포르체스코 스폴리짜는 비스콘티 가문의 장군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비스콘티 가문의 공화제하에서 밀라노의 영주가 되었다.
아마 양가가 합의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처럼 비스콘티 가문이 축성한 성벽의 잔해도 남겨두고
밀라노란 도시국가의 문양(용문양-비스콘티 가문, 붉은 십자가 문양-스폴리짜 가문)을
서로 사이좋게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처럼 왕조가 바뀌면 전 왕조의 성(姓)까지 멸하는 그 잔인성에
비하면
그는 얼마나 관대한 영도자였는가?
성채의 후면을 다 구경하고 오른쪽 성벽을 따라 가서 성의 정문으로 나오는 길에서
난 이 설명문을 접하고
스포르체스코성의 옛모습에 감탄하였다.
견고한 성채였을 뿐 아니라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의 폭과 둘레도
엄청난 규모였다.
다시 한 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니 그의 천재성에
삼가 머리를 읊조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성벽에 모여있는 500년 전의 밀라노라는 도시국가
시민들의 모습이 지금과 조금도 다를게 없다.
성의 정문에 있는 바스콘티 가문의 문양인 용과 스폴리짜 가문의 문양인
붉은 십자가가 함께 모셔져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양가는 서로 혼인등을 통한 연합정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포르체스코 성만을 제대로 구경하려고 해도 하루는 족히 걸린다는 것이다.
성 전체가 거대한 옛 밀라노라는 도시국가의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우린 여행 일정상 박물관을 구경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임종하기 3일전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미완성 작품인 피에타 론다니니의 포스타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작품은 뒷면의 모습이란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선채로
껴안고 있다.
스포르체스코 스폴리짜 영주의 대리석상이 성의 중앙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분에게 삼가 묵념을 올리고 성의 구경을 마쳤다.
성앞에 있는 분수대에 앉아 있었는데 밀라노의 햇빛이 따사롭고 밝아
마음이 마냥 포근해졌다.
우린 스포르체스코성의 구경을 마치고 세계 3대 극장인 라 스칼라좌와
두오모 성당을 보기위해 도보로 시내를 걸어갔다.
밀라노의 전차와 작은 소형차가 서로 묘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끝>
작성:2009.7.2 골드리버
다음이야기 제 2화-세계3대 극장인 라 스칼라좌와
쇼핑아케이드인
갤러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유리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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