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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正祖는 평생동안 어진(御眞)을 세 번 그렸는데 모두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위 그림은 왕실 족보에 싣기 위하여 어진을 보고 모사(模寫)한 그림이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나머지 영정은 전부 후대에 상상으로 그려진 것으로 실제와 차이가 많다.
정조, 8일간의 화성 행차
1795년 正祖의 화성 행차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장엄하게 치러진 행사이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회갑을 경축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방문하기 위하여 8일간의 "을묘원행(乙卯園行)"이 시작되는 것이다.
을묘원행 乙卯園行
1795년 을묘년 윤2월 9일 묘시(卯時.오전 5~7시), 정조는 먼저 자전(慈殿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 후 지붕없는 가마를 타고 돈화문까지 나와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 날 아침 正祖가 받은 조수라(朝水羅라 ..아침밥)는 팥물로 지은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소고기 돼지갈비 숭어 등으로 된 구이 한 그릇, 장 세 그릇 등이었다.
어가(御駕)행렬은 돈화문을 출발하여 단성사 앞 ~ 종로 2가 ~ 보신각 앞길 ~ 명동 ~ 남대문 길을 거쳤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들어있는 반차도(班次圖 .. 의식에서 늘어서는 차례를 담은 그림)에 의하면 정조의 어가를 따라간 인원은 우의정 체제공을 비롯하여 1,779명이 동원된 말(馬)은 779필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리의궤(整理儀軌)에 기록된 배종자(陪從者)의 명단을 보면 실제 동원된 인원은 그보다 훨씬 많은 6천여명으로 나타났다.
원행을묘정리의궤 園行乙卯整理儀軌
이 책은 말 그대로 "을묘년(1795)에 현륭원(顯隆園 ..아버지 사도세자의 陵)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한 의궤"이다. 정조는 1794년 12월에 이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라는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정리의궤"란 정리소의 업무를 정리한 의궤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이다. 조선시대 의궤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쓰고 그림을 그린 필사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正祖는 "정리의궤"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활자로 인쇄할 것을 결정하였고, 그 인쇄를 위해 특별히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1795년에 만들어진 이 활자는 "정리자(整理字)"라고 한다. 정리자는 이러한 연유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 후 정조와 관련이 깊은 서적을 인쇄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1814년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가 그 경우이다.
이 책은 권수(卷數) 1권, 본문 5권, 부록 4권 등 총 10권8책으로 구성되었다. 권수의 내용은 주로 도식(圖式) 즉 그림이다. 여기에는 화성행궁의 전경, 봉수당의 잔치 등 화성에서의 주요 행사 장면, 행사에 사용된 가마의 모양과 세부 설계도, 그리고 행렬 전체의 모습을 그린 반차도가 나온다. 이 그림들은 이 책의 백미가 되는 부분으로 김홍도를 비롯한 궁중의 화원들이 그린 것을 목판으로 새겨서 인쇄한 것이다.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행사에 사용된 글, 의식절차, 행사와 관련한 관리 및 관청의 보고서, 잔치 음식의 내용과 조달 상황, 국왕과 혜경궁이 타고 간 가마의 재료와 비용, 배다리(舟橋) 설치, 행사에 참여한 내빈(內賓 ..여자 손님)과 외빈(外賓 ..남자 손님) 및 군인의 명단 등이 수록되어있다.
특히 경비의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정리한 재용(財用)에서는 모든 비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물가 동향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준다.
행차의 수입과 비용
행차의 총경비는 10만3천61냥이었다.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수입으로 충당하였다. 어머니가 타고 갈 가마를 만드는 데 2,785냥을 들였고, 왕 자신은 말을 타고 감으로써 지출을 줄였다. 비용을 기록하는 것 외에도 매일 제공된 음식의 종류와 그릇 수, 음식재료와 종류까지 표시되어 있다
행차의 코스
정조는 왜 화성 행차를 감행하였는가?
28살의 푸르른 나이에 노론 벽파와의 정치적 갈등 속에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죽어간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는 11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바로 正祖이다.
정조는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恨을 33년만에 풀어주게 된다. 칼과 피로써가 아닌, 장엄한 문화의 불꽃에 의한 8일 간의 해원(解寃)으로, 아버지는 뒤주에 갇힌 8일 간의 암흑 속에서 죽어갔지만, 아들은 8일 간의 화려한 화성행(華城行)과 그 것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로 아버지의 혼백을 위로한 것이다.
아울러 罪人 아닌 죄인으로 숨죽여 줄었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恨많은 세월을 달래주었다. 정조의 8일 간의 화성행차는 정조의 뜨거운 恨과 뜨거운 숨결을 담아 낸 행차이었다. 그러나 이 행차는 애틋한 효심을 넘어서는 다른 뜻이 숨어 있었다. 이 행차는 표면상으로는 어머니 회갑연을 위한 나들이이었으나, 실제는 정조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하나로 묶으려는 거대한 정치드라마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버지를 그토록 비통한 죽음으로 몰아간 어둠 속의 음험한 전존 세력을 향한 시위이었다. 군왕의 절대적인 힘과 왕조 중흥의 자신감을 만방에 과시한 문화적 친위 쿠데타이었던 것이다.
즉 正祖는 자신이 구상한 개혁정치를 위한 새로운 정치 공간으로서의 화성의 의미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남쪽의 호위 도시이자 자급자족하는 직할통치지역이기도 한 화성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는 모두 13회에 걸쳐 참배를 하였다.
정조의 화성(華城) 프로젝트
正祖의 즉위
정조는 舊 정치세력이 포진해 있는 상황 속에서 즉위했다. 자신의 안위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열악한 여건이었다. 그는 3~4회의 암살 기도를 겨우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런 환경을 헤쳐나가기 위해 전담 호위부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 상황은 여의치 않아서 그가 즉위한지 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장용위(壯勇衛)라는 이름의 소규모 호위부대를 창설할 수 있었고, 다시 6년이 지난 후에야 장용영(壯勇營)이라는 그럴듯한 친위부대를 갖게 될 수 있었다. 그만큼 반대세력의 저항은 집요하고 강력하였던 것이다. 정조는그들의 저항과 반대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되, 자신의 계획을 철저하게 실천해 나간다. 그의 생각은
"小人과는 이루어진 성과를 함께 즐길 수는 있어도 시작을 함께 할 수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을 문무의 버팀목으로 삼아 권력 기반을 안정시킨 뒤, 아버지 사도세자의 천장(遷葬 .. 능의 이장)을 추진하였다. 배봉산(현재 전농동 시립대학 뒷산) 후미진 곳에 초라하게 묻혀있는 아버지, 비명횡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정조의 가슴 한편을 짓누르고 있었다.
화성프로젝트의 가동
화성(華城)과 그 안에 있는 행궁(行宮)
정조는 우선 수원고을이 있던 華山 아래 사도세자의 새로운 능묘 자리를 정하고(1789년.즉위 13년), 화산자락에 살고있던 백성들을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킨 뒤 신도시로 개발하였다. 화성(華城)의 축조(築造)공사는 신도시 건설의 마지막 단계이었다.
정조에게 화성은 아버지를 위한 도시이었으며, 未來의 자신을 위한 도시이기도 했다.정조는 언젠가 왕위에서 물러나 화성에 머무르면서 복권된 아버지를 옆에서 지키게 될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 시점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왔던 그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천도(遷都) 혹은 양경(兩京) ?
지속적이고도 강력했던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그의 오랜 숙원사업을 착수할 수 있었고, 곧 마무리되었다. 혹자는 正祖가 수도를 한양에서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遷都는 아니었던 것 같다.
구 정치세력을 밀어내고 왕권의 확립을 기한다는 정치적 배경 이외에, 화성 신도시는 그저 아버지를 위한, 그리고 미래의 자신을 위한 새로운 도시일 뿐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양경(兩京)제도는 의논이 있었고, 광해군과 영조시절에도 천도 또는 양경의 계획이 있었다.
정조의 이러한 의도는 화성 행궁의 낙남헌(洛南軒)이란 명칭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낙남헌은 漢나라 高조가 낙양에서 주연을 베풀었던 뜻을 땨온 것인데, 한나라 낙양은 兩京의 하나로 인정받았던 곳이었다. 정조는 이 낙남(洛南)의 두 글자에서 兩京의 상징을 취하여 수원 화성을 장식하려 했던 것이다.
좌절된 정조의 꿈
정조는 그가 꿈꾸었던 그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질병이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지금까지도 毒殺說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그만큼 정조의 개혁정치에 반발하는 세력이 잔존하고 있었고, 그의 죽음으로 혜택을 받는 수혜자가 분명하였던 정치상황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왕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후는 세도정치의 시기이었다. 어린 왕을 둘러싼 반대세력들은 정조가 이루어 놓은 성과들을 하나하나 부정해 가기 시작하였다. 정조 개혁의 산실이었던 奎章閣은 그저 도서를 보관하는 장소로 그 의미가 현격하게 위축되었고, 순서에 의하여 壯勇營도 정조의 사후 1년도 안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화성능행도 華城陵行圖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은 정조가 1795년 생부(生父) 사도세자와 生母 혜경궁홍씨(蕙慶宮洪씨)의 동년 회갑을 맞이하여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 .. 화성,융건능)이 있는 화성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행차한뒤 성대한 잔치를 열면서 거행하였던 일련의 행사들을 8폭에 담은 기록화이다.
조선시대 행사 기록화 중에서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작품으로써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원대한 정치적 꿈이 담겨 있으며, 아울러 정조시절의 난만한 회화 및 예술의 발달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걸작이다. 그림의 크기는 163.7cm x 53.2cm이다.
이 그림은 행사가 끝난 뒤 행사를 주관했던 정리소(整理所)에서 1796년에 완성하였으며, 이인문, 김득신, 최득현 등 많은 화원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행사가 끝난 뒤 정조가 정리소에 명하여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도설작업은 윤2월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김홍도가 전관자(專管者)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아래 제작되었다. 따라서 儀軌의 圖說을 병풍에 맞게 변형시키고 확대하여 묘사한 정리소 발의의 이 계병은 김홍도가 관여했거나 그의 화풍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그림은 김홍도 등의 집단제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園行 준비
행사는 원행 한 달 전인 1795년 2월10일에 화성부에서 무과 초시(初試)를 시행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방에서 향시를 치름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 13일에는 노량진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24일에 끝났다. 다리 설치에 열흘이 걸린 것이다.
21일에는 혜경궁의 회갑연과 노인을 위한 양로연의 예행 연습이 있었고, 25일에는 왕이 궁을 떠나는 행차 연습이 실시되었으며, 궁궐의 후원에서는 61세의 혜경궁이 가마를 타고 먼 길을 가는 예행 연습이 시작되었다. 이 때에 정조는 후원의 옥류천까지 동행하면서 혜경궁의 몸이 편안한지 여부를 살피는 정성을 보였다.
또 29일에는 창경궁 서총대에서 활쏘기가 있었고, 다음 달 윤2월 4일에는 노량진에서 배다리(舟橋)를 건너는 예행연습이 거행되었다.
園行 출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정조는 드디어 윤2월 9일 을묘년의 원행 행차길에 오른다. 정조는 이 행차에 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와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는 서울에 남겨놓고, 혜경궁과 두 딸 즉 정조의 여동생인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瑄郡主)를 동행시킨다. 이렇게 이 원행 길은 왕실 가족 가운데 사도세자의 직계 혈연만이 참여하게 된다.
행렬은 11시쯤 한강 배다리를 건너 노량진의 용양봉저정(龍양鳳저亭...)에 머물며 점심과 휴식을 취하였다. 이 날은 시흥行宮(지금의 시흥 5동사무소 근처)에서 묵었다.
龍이 뛰어 놀고, 鳳이 높이 날아오르는 정자
다음 날 윤2월10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시흥을 떠난 행렬이 오후가 되어서야 화성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 왕은 황금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화성 성문에 들어섰고, 뒤이어 상궁과 나인들이 쌍쌍이 서 있는 가운데 혜경궁이 가마를 타고 행궁에 닿았다. 혜경궁은 장락당(長樂堂)에, 정조는 유여택(維與宅)에 머물렀다.
저녁에는 행궁에서 준비한 수라가 나왔는데, 혜경궁에는 검은 칠을 한 상 위에 밥과 국, 반찬이 12개의 은그릇에 담기고 그 옆에 따로 탕 하나와 각삭 적(炙 ..대꼬챙이에 꿰어서 불에 구운 어육)과 저냐(얇게 저민 불고기 또는 생선에 밀가루를 묻혀 부친 전의 일종)가 올랐다. 왕은 일곱가지 유기그릇에 담긴 음식을 들었다. 기록에는 수라의 내용이 일일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화성성묘전배도 華城聖廟展拜圖 .. 1795년 2월11일, 오전
첫번째 행사
윤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하였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선왕묘(文宣王廟)는 화성 남쪽 3里쯤의 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산자락으로 빙둘러 배치하고, 그 안에 작게 묘당과 행사 장면을 묘사한 색다른 구도이다.
가장 뒤쪽의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侍座)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의 오른쪽에 正祖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刪扇) 시위(侍衛)들이 서 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東西로 나뉘어 시좌하였다.
그리고 작은 차일이 쳐진 중앙의 명륜당(明倫堂)과 외신문(外神門) 주변에는 시위들이 겹겹이 서서 호위한 채 더욱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반면에 성묘 밖의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부민(府民)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낙남헌방방도 洛南軒放榜圖 .. 1795년 2월11일, 오후
두번째 행사
윤2월 11일, 화성(華城)에서 문무 양과에 걸친 과거시험을 본 뒤 行宮의 낙남헌(洛南軒)에서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10일 저녁 화성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유숙하고, 정조는 가장 학문을 좋아한 제왕답게 공자(孔子)를 모신 성묘(聖廟)에 배알하고 별시(別試)를 보는 것으로 화성에서의 첫 행사를 시작하였다.
정조는 먼저 과거를 시작하도록 하교한 다음 시험을 실시하는 사이에 성묘를 배알하고 다시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에서 합격자을 발표하는 행사에 親臨하였다.
낙남헌을 시위가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正祖가 御座에 앉아있고, 그 앞에는 방방관(放榜官)과 대치사관(代致詞官) 등의 입시 관원들이 배석하였다. 섬돌 바로 밑에는 탁자 위에 합격증서인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 술과 안주가 놓여있고, 그 앞에는 文科 5명과 武科 56명의 합격자들이 머리에 어사화를 꽂은 채 늘어 서 있다.
원래 왕은 그리지 않았다. 용상과 말을 그려넣었을뿐
합격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것은 혹시 다른 회방(回榜)과 잡과(雜科) 합격자들까지 모두 이 장면에 종합하여 그렸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화면 구성상 실제보다 많은 이원을 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합격자 양 옆으로는 東西로 나뉘어 文武班 朝臣들이 엄숙히 시립하였는데, 화면 아래 길 밖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시험에 동행하였던 복건 차림이 門下들과 그 가족, 구경나 온 부민들이 매우 자유롭게 늘어서 있다,
혹자는 합격으 기쁨을 축하하고, 혹자는 낙방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 하는 등 풍속화가 난만하게 발달하던 시대답게 다양한 표정의 연출이 재미있다.
서장대성조도 西將臺성조도 .. 1975년 2월12일
세번째 행사
윤2월 12일 밤, 正祖가 화성의 서장대(西將臺)에서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윤2월12일의 날이 밝자 왕은어머니를 모시고 현륭원으로 향하였다. 어가가 현륭원에 도착하자 혜경궁은 가마에서 내려 작은 가마로 갈아타고 무덤에 나아가 곁에 준비한 휘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통함을 절제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 소리가 휘장 밖까지 들렸다.
정조가 혜경궁의 울음소리를 듣고 " 출궁할 때에는 자궁(慈宮)께서 너그러히 억제하겠다는 하교의 말씀이 계셨다. 여기에 도착하니 비창(悲愴)한 감회가 저절로 마음 속에서 솟아나 내 자신이 이미 억제할 수 없으니 더구나 慈宮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는가"하며 친히 차를 받들어 권해 올렸다.
저녁에는 왕이 서장대에 올라 야간 군사훈련인 야조식(夜操式)을 관람하였다. 야조식은 서장대에서 대포를 쏘는 것을 시작으로 큰 나팔이 울렸다. 동시에 청룡기가 휘날리면 東門에서 대포를 쏘고 나팔이 울렸으며, 주작기가 휘날리면 南門, 백호기가 나오면 西門, 현무기가 나오면 北門이 각각 응포하여 일사불란한 군사조련을 보여 주었다.
동서로 길게 뻗어 규형(圭形)을 이룬 총 4,600보 길이의 장대한 화성 전경을 세장한 병풍화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아래 위로 길게 설정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중앙의 行宮과 주변의 民家 및 市街를 배치하고, 사방의 성곽에 수많은 군사들을 묘사하여 실로 장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가장 위쪽에 차일을 치고 호위군에 둘러싸인 거대한 누대(樓臺)는 팔달산(八達山) 최정상에 자리잡은 서장대(西將臺)로서 정조가 행차한 이 그림의 주제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하여 강조하였다.
화면 제일 아래에 위치한 문은 東門인 창룡문(蒼龍門)이고, 중앙의 좌우변의 대문은 오른쪽이 北門인 장안문(長安門), 왼쪽이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이다. 지금 이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훈련 장면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관인 횃불 밝히기의 연거(演炬) 장면과 五色燈을 다는 현등(懸燈)장면이다.
본래는 횃불을 밝힌 다음(演炬), 횃불을 끄고, 다시 깃발을 내린 뒤에(落旗) 등을 다는 것이지만(懸燈), 이를 한꺼번에 묘사하여 더욱 성대한 화면을 연출하였다. 전체 장면은 기본적으로 의궤의 도설과 거의 흡사한데, 특히 세장한 병풍의 화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평행 사선시점으로 잡은 장면 설정과 공간 파악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봉수당진찬도 奉壽堂進饌圖 .. 1795년 2월13일
네번째 행사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8일간의 화성행차의 주 목적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벌어지는 날이다.
혜경궁이 예복을 갖추어 입고 봉수당에 나아갔고, 정조가 친히 술을 받들어 올렸다. 이어서 문무 신하들과 종친의 헌작(獻爵)이 이어졌으며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이 나왔다. 회갑연잔치에는 종친이나 대신은 물론 왕실의 일가까지 모두 모여 봉수당 앞의 너른 마당에 좌정하였고,
가운데 마당에서는 색색으로 치장한 기생과 무녀(舞女)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며 잔치의 興을 돋우었다. 이 그림은 이 날의 광경이 건물에 휘장이 쳐지고, 넓은 마당 한 가운데 무녀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풍류가 끝나자 정조는 친히 어머니의 복록장수(福祿長壽)를 비는 일곱 자의 詩를 지었으며 참석한 文臣들에게도 차운(借韻)해서 詩를 짓도록 하여 왕실의 안녕과 혜경궁의 장수를 기리는 詩들이 이어졌다.
이 잔치에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 참석한 이희평(李羲平)의 화성일기(華城日記)에 기록하기를, 잔치는 날이 저물 때 까지 계속되었고 해가 저문 뒤에는 행궁 건물 사방에 홍사촉롱(紅絲燭籠)을 걸고, 좌정한 사람들마다 놋쇠로 만든 촛대를 나누어 들어 마치 대낮같은 휘황함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화성일기"는 혜경궁 홍씨의 먼 외척이 되는 이희평이 을묘년 행차에 참석한 후 하루하루의 일정을 한글로 기록한 기행문이다. 담백하고 간결한 필치로써 토속, 자연, 인물 ,사건 등을 사실성있게 묘사한 점에서 문학적 가치도 크다고 한다.
낙남헌양노연도 洛南軒養老宴圖 .. 1795년 2월14일, 오전
다섯번째 행사
윤2월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陵行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老人 총 384명에게 양로잔치를 베푸는 장면이다.
軍兵과 시위의장(侍衛儀仗)이 낙남헌 주변의 사방을 둘러 싼 가운데, 차일을 친 낙남헌의 어좌에 정조가 앉아있고, 그 앞 마루에 융복(戎服)차림의 노대신과 입시관원(入侍官員)들이 앉았다.
섬돌 앞 뜰에는 서인(庶人)들이 도포차림으로 줄지어 앉아있고, 담장 사이에는 곱게 차린 무희와 붉은 옷을 입은 악사(樂士)가 늘어서 있다. 그리고 시위 군병 밖의 길 가에는 수원 부민(府民)들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다.
일제에 의하여 行宮의 전체가 파괴되었으나 낙남헌과
득중정만은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화면은 지금 낙남헌의 섬돌 위에 악사들이 시립한 가운데, 정조가 노란 수선(黃細巾)을 내려 노인들의 지팡이 끝에 묶게 한 다음 비단 1단(段)씩을 하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하여 마당에 앉은 노인들은 모두 지팡이에 노란 수건을 매고 있으며, 그 앞에 집사들이 비단을 받쳐든 채 나누어 주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신풍루사미도 新豊樓賜米圖
낙남헌에서 養老宴을 베풀기 전에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앞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사미의식(賜米儀式)이 먼저 치루어졌다.
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 1795년 2월14일
여섯번째 행사
윤2월 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埋火砲)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화면 뒤편의 왼쪽에 용마루가 보이고 큰 차일이 쳐지며 노란 용기(龍旗)가 보이는 곳이 낙남헌인데 지금 그 안의 오봉병(五奉騈) 앞에 정조가 앉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그 뒤 오른쪽으로 이어져 길게 뻗은 일자집이 득중정(得中亭)이며, 그 계단 앞 어사대(御射臺)에는 지금 혜경궁이 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시 행차하여 가마을 열어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화면 중앙 아래의 행궁 밖에서는 지금 매화포(埋火砲)가 폭발하여 신기전이 하늘로 치솟으며 화려한 불꽃놀이의 장관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굉음을 울리며 밤하늘을 수놓은 신기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많은 부민들이 운집해 있다.
그리고 화면 아래 왼쪽에는 장안문(長安門)이 2층 팔작지붕의 위용을 과시하며 자리잡아 다소 위쪽으로 쏠린 화면의 무게를 적절히 조정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적 장소성을 알려 주고 있다.
일제에 의하여 행궁은 모두 파괴되었으나 득중정과 낙남헌은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현판의 글씨는 정조의 글씨이고, 득중정 앞에는
정조가 활을 쏘았다는 어사대(御謝臺)가 남아있다.
득중정 득중정
득중정은 예기(禮記) 권46 "사의(射義)"에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선비들이 활쏘기를 하는 주목적은 덕행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곡(正鵠)을 맞춘 사람은 이미 마음 속에 덕이 함양되어 있어서 모든 행동이 도리에 맞는 것으로 여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文武兼備의 국왕이 되고자 하였던 正祖의 심회를 스스로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1790년에 정조가 친림하여 편액을 쓴 후 광주와 과천 등 인근에 거처하는 유생과 무사를 대상으로 별시를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175명을 선발한 바 있으며, 1792년 원행 시에도 정조는 수원의 유생들과 무사들을 시험보아 선발하였다.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 1975년 2월16일
윤2월 15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화성을 떠나는 날이다. 아침에 화성을 떠나 시흥으로 향하였다. 왕은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앞서 나가고,혜경궁을 모신 가마가 따랐다. 장안문 밖에까지 백성들이 모여서 서울로 향하는 행렬을 전송하였다. 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에 가서 점심을 들고 시흥행궁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이었다. 이 날은 시흥행궁에 묵었다.
시흥행궁에서 하루믈 묵었던 일행은 16일 날이 밝자 일찍 시흥행궁을 출발하였다. 문성동 앞길에서 현령이 백성들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는 말을 세우고 이들의 고충을 들었다. 한 백성이 잘 살고 있다고 하자, 정조는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하며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상언(上言), 격쟁(擊錚)
정조는 재위 24년간 66회의 행행(幸行 ..궁 밖 나들이)하면서 모두 3,355건의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처리하였다. 상언.격쟁이란 상소와는 다르게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징을 치면서 왕 앞에 나아가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이 그림은 정조의 일행이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을 묘사하였다. 처음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함께 능행하면서 무려 6,000여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가장 성대하였던 행렬의 장관을 과시한 장면이다.
이러한 행렬장면을 더욱 상징적이고 뜻깊은 화성으로의 행차 모습으로 설정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이 행렬장면을 공자성묘(孔子聖廟)에 대한 배알이나 혜경궁의 회갑연보다 앞에 배치하기가 저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흥행궁에 막 도착한 정조 일행
기수대 앞의 길이 급격히 꺾인 부분에는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거대한 용기(龍旗)가 펄럭이고, 그 앞에 지금은 비어있는 정조의 정가교(正駕轎)가 위치하고 있다.
시흥 행궁의 삼엄한 경비가 오늘밤 정조와 혜경궁이 이곳에서 유숙할 것임을 말해준다. 길 양 옆에서 구경하는 수많은 백성들의 다양하고 풍부하며 재미있는 모습들은 이 그림을 조선시대 최고의 풍속화로 더 없이 정이 가는 귀중한 장면들이다. 이 능행에서 정조가 그토록 신경을 썼던 민의(民意)까지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우의(寓意)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하여튼 8폭의 그림 중에서 이 그림은 회화성과 풍속성이 가장 뛰어난 명작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기록화 중에서도 무비(無比)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그림은 주변의 지형을 교묘히 이용하여 수 천명의 긴 행렬을 한 없는 지그재그로 배치함으로써 세장한 병풍화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무수한 지형의 변화에 이 행렬을 정확히 일치시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화면 전체에 매우 엄격하고 치밀한 단축법을 적용하여 이 그림에 실로 놀라운 현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심지어 혜경궁이 타고있는 가마 뒤의 길이 꺾여 돌아가는 길밖의 행렬은 열이 벌어지고, 길 안쪽의 행렬은 열이 촘촘하여 행렬이 정확한 마름모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정조시절의 기록화가 투시법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시각적 사실성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이다.
혜경궁에게 미음을 바치는 정조
위의 그림은 부분을 확대한 것으로 시흥행궁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안양교 앞길에서 행렬을 잠시 멈춘 다음 정조가 직접 혜경궁에게 미음(米飮)과 다반(茶盤)을 올리는 매우 효성스러운 장면을 담은 것이다.
이 화면 왼쪽 하단에 큰바위가 있는 곳에서 미음을 들기 위해 푸른 휘장으로 가린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 정조의 좌마(座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의 길가 빈터에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가 보이는데, 이 수레는 본래의 정상적인 행렬이라면 이보다 훨씬 앞의 기수대(旗手隊) 바로 뒤에 위치해야 하는것이다.
노량주교도섭도 노량주교도섭도 .. 1975년 2월 16일
윤2월 16일, 노량진의 주교(舟橋..배다리)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정조와 혜경궁의 행렬 장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그림이다.
이 배다리를 만들기 위하여 正祖는 우선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고, 준천사(濬川司)에 배속시켰다. 주교의 가설에는 경강선(京江船 ..한강에 출입하는 배) 80척이 동원되었는데, 동원되는 선박의 경강선주(京江船主)를 모두 주교안(舟橋案)에 등재하고, 대오(隊伍)를 편성한 다음 첩문(帖文)을 주어 세곡(歲穀 ..나라에 바치는 쌀) 운송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나라에서는 세곡운송을 구실로 船主들을 주교의 가설에 참여시켰고, 선주들은 이를 기회로 세곡운송의 利權을 독점코져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주교가설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다만 이 일에 참여하는 경강선주들이 스스로 특권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지방에 나아가서 舟橋船임을 내세워 위세를 과시하면서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다.
멀리 남쪽의 노량진의 용양봉저정을 뒤로 하고, 혜경궁의 화려한 가마가 지금 한강을 가로지른 거대한 주교의 한 가운데 홍살문을 막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시위(侍衛)군사에 겹겹이 둘러싸인 정조의 좌마(座馬)가 뒤따르는데, 조선시대의 기록화가 대개 그러하듯이 정조는 감히 묘사히지 못하고 말(馬)만을 묘사하는 상징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36척의 교배선(橋排船)과 240쌍의 난간, 3개의 홍살문, 그리고 수많은 상풍기(相風旗)와 군기(軍旗)가 펄럭이는 거대하고 화려한주교가 긴 병풍의 화면을 실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전개되어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이 주교는 기왕의 부교(浮橋)에 위험성과 번거로움이 많았기 때문에 1789년 정조가 직접 새로이 고안하여 설치가 시작된 것이다. 정조는 이를 위하여 주교사를 따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주교는 정조의 혜안과 지혜 그리고 애민(愛民)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교의 앞뒤로 끊이 없는 수행행렬은 장대한 주교를 더욱 강조해 준다. 그리고 주변에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풍속화의 성격을 부여해 주고 있다. 아울러 주교의 인물과 주변의 경치가 분리되지 않고 적절히 연결되며 조화되도록 만드는 놀라운 조형적 작용도 발휘하고 있다.
출처: 우리문화탐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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