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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지난 밤 묵은 알바트로스 호텔의 시외 외곽길을 1시간여 산보하였다. 새벽 공기가 무척 삽상하였고, 피렌체 시외라고 해도 일반주택들은 고풍스러 웠다. 산보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어느때처럼 간단한 빵으로 식사를 하였다. 아침에 먹는 빵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딱딱한 식빵인데 무색, 무미, 무취의 그 식빵이 이젠 밥처럼 입에 맞았다.
식사를 끝내고 우린 버스에 올라 피렌체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인다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도착하여 그가 조각한 다비드상을 바라보았다. 비록 복제품이라고 하지만, 그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의 영감을 그대로 전수받아, 그의 영혼을 대신하여 저 멀리 피렌체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피렌체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서보니 나는 갑자기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는 이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그만 벗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이라는 이 단어마저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5세기 이전의 중세기의 과객으로 서있다는, 아니 내가 마치 중세인이라도 된듯한 착각이 밀려왔다. 저 멀리 두오모와 그 유명한 베키오 다리가 선명하게 내 시야에 들어 왔다. 모든 관광객들이 탄성을 지르며 저마다 사진을 찍느라 부산하기만 하다.
시가지가 바로 중세기의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 그 화려한 르네쌍스 시대가 활짝 개화하였으니....
오! 피렌체여! 피렌체여!
네 앞에 서니 나는 이미 中世人이 된 듯,
아르노강 남쪽 언덕을 따라 네 가슴을 헤집고 들어가 群芳의 花園에 머물며 노닐고 싶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베키오 다리에서 한 번 '풍덩' 빠져봤으면....
-피렌체 所見 골드리버
★★피렌체의 역사 개요
피렌체는 기원 전 59년 쥴리어스 시저 때에 로마인들이 "플로렌티아"라는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시가 중심의 모양은 사방 500미터의 면적에 그물식 도로 망을 가진 로마군영지 구조였다.
"피렌체" 라는 이름은 플로라, 즉 꽃을 의미하는 라틴어 "플로렌티아" 에서 나왔다. 전설에 의하면 비옥하고 화초가 만발한 강변에 자리잡은 주민들이 번성하기를 기원 하는 의미에서 이름지었다 한다.
피렌체의 원주민들은 기원전 9세기에 자리잡은 에트투리아인들이었다. 476년 만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고, 7-8세기에는 롬바르디 왕국에, 9세기에는 마지막으로 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다. 현재의 피렌체는 15세기 초 정치, 경제권을 장악한 메디치 가문에 의해 루네쌍스 의 찬란한 중세문화의 꽃을 피웠고,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2명이나 배출한 명문가 였으나 대가 끊긴 매디치가의 마지막 종부가 피렌체를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기증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피렌체를 외국인들이 잘 볼수 있도록 해달라." 탁월한 선경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상 피렌체 두오모 앞 노점에서 산 한글판 피렌체의 역사, 예술 민속 책자에서 발췌) '
감상에 젖어있을 수 만은 없었다. 증명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두어야 한다. 여수에서 자산어보 횟집을 운영하시는 김경수 사장과 마치 연인처럼 손을 맞잡고 폼을 있는대로 다 내보였다.
이태리 여행 일주일간 나의 룸메이트였던 람바다 회무침식당을 운영하시는 원우회 회장이신 황봉춘 사장하고도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폼을 잡았다. <이태리 전통의상 축구경기장 모습>
버스를 타고 피렌체 시내를 들어왔다. 가이드가 주의를 준다. 소매치기 짚시와 까까를 조심하라고. 이태리의 짚시는 익히 알고 쭉 조심을 해왔지만, 까까는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어휘였다. 아니 무슨 과자를 조심하란 말인가?
까까는 이태리 말로 개똥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재미있는 말은 얘들을 오줌을 뉘일 때 쓰는 말이 삐삐란다. 미국은 피피인데 재밌긴 재미있는 말이다.
피렌체 시내 길바닥엔 과연 여기 저기 개똥이 널려있었다. 더군다나 난 샌달을 신고 있었으므로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아예 길바닥을 내려다 보고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개똥이 발견되면 원우들이 " 아! 까까다 까까." 라고 소리치고 웃으며 서로 주의를 준다. 갑자기 살아있는 생명체로 더군다나 인간으로 태어나 이렇게 노닌다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리 전통의상 축구 경기의 한 장면-피렌체 듀오모의 노점에서 산 한글판 피렌체 역사, 예술, 민속/모든 걸작품 에서 발췌>
이태리 전통의상 축구경기장에 들렀다. 이태리 전통의상을 입고 손과 발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고, 매년 축제처럼 열린다는 이 축구경기는 축구가 아니라 축구 형식을 빌린 일종의 격투기란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축구장도 일반 축구장의 2/3정도 밖에 안되는 이 구장에서 서로 치고 받고 하여 부상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지만, 이태리 사람들은 이 이태리 전통의상 축구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항시 경기장 밖엔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부상자들을 수시로 실어나른다니..... 참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관중의 입장에선 대단한 볼거리임이 틀림없고 몹시 재미있고 흥분되는 경기가 분명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단테의 생가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실제 생가는 이곳이 아니고 이 건물 왼편에 있는 조그만 건물의 지하 셋방이었는데, 그 건물이 멸실되어 이 건물을 시당국이 매입하여 단테의 생가로 활용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아마 중세기의 연인들이 이 테라스위의 창가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테는 당시 피렌체에서 정쟁에 휘말려 추방당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단테는 126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1321년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 지방 라벤나주의 주도인 라벤나에서 죽었다. 피렌체시는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단테의 무덤을 고향으로 돌려달라고 라벤나시에 호소했지만 라벤나시는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단테의 무덤을 돌려달라는 이 사건 이후로 라벤나 시당국은 단테의 무덤을 더욱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피렌체 시민들은 단테에 대하여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가이드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注-레벤나/아드리아 해 근처에 있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고, 그후(6~8세기) 동(東)고트족의 이탈리아 왕국과 비잔틴 제국령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단테의 생가 앞 보도불록에 조각된 단테의 흉상, 가이드가 그 비싼 물을 부어 단테의 흉상이 선명히 보이도록 도와주었다.>
난 단테의 신곡을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나의 DNA는 불교 쪽에 가깝지만, 이는 핑계일 뿐이고, 솔직히 말하면 게을 렀기 때문이다. 서사시 한 편이 10,000행이 넘고 또 중세 그리스도교의 율법을 노래했고, 몹시 어려울거란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단테의 신곡을 들처보니 읽을만 하다, 시간이 나는대로 단테의 신곡을 정독하리라 마음먹었다. 나처럼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으신 독자들을 위하여 인터넷에서 검색한 단테의 생애를 아래에 싣는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단테 /Museo Casa Di Dante
1265 이탈리아 피렌체~1321 이탈리아 라벤나.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西)유럽 문학의 거장.
후에 〈신곡 La divina commedia〉으로 제목이 바뀐 기념비적인 서사시
〈희극 La commedia〉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위대한 중세문학작품은 인
간의 속세 및 영원한 운명을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면 지옥·연옥·천국을 여행
하는 형식을 취한 우화(寓話)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박학다식함, 당대 사회문제의 예리하고 포괄적인 분석,
언어와 시상(詩想)의 창의성 등은 놀라울 정도이다.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를
시어(詩語)로 선택함으로써 단테는 문학발달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조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시가(詩歌) 문화에 표현능력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가 수 백년 동안 서유럽에서 문학어로 쓰이게 되는 데 기여했다.
시 이외에도 중요한 이론적 저술들을 썼는데 그 범위는 수사론에서부터 도덕·철학 및
정치사상에까지 이른다.
고전전통에 매우 정통한 사람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보에시우스의 작품들을 인용했으나 비전문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당대 최신의
스콜라철학과 신학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박학다식함과 당대의 뜨거운 정치논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건들로 인해 중세정치
철학의 주요 논문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 De monarchia〉을 썼다.
단테의 교회앞에서 이 위대한 시성(詩聖)에게 삼가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하는 것으로 단테와의 작별을 고했다.<끝>
2009.7.9 작성
다음 이야기/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무대인 피렌체의 두오모(2009.6.23) 이태리 여행기 제 8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