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재구성된 단순한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다면 이 말들은 기괴한 말이 되었겠지만, 진짜 예수에게서 나왔으므로 찬란한 말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아들의 낮아지심은 얼마나 놀라운가! 사람들을 위한 얼마나 비교할 수 없는 모범인가! 바울은 성육신한 구주의 모범에 얼마든지 호소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마음을 너희도 품으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진짜 예수를 모방하면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모범이 완전한 모범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가 사람에게 제공한 것이 정당화되는 맥락에서만 그러하다. 그가 제공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침이 아니라 구원이다. 그는 자신을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을 거부했으나, 그리스도인은 받아들인다.
만약 예수가 자유주의 역사들이 가정하는 그런 인물이라면, 그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를 향한 우리의 태도는 선생에 대한 학생의 태도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그런 인물이라면, 우리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안전하게 그에게 의탁할 수 있다. 우리 주님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 사이의 차이는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를 인간성의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간주하지만, 기독교는 그를 초자연적인 인물로 간주한다.
예수가 초자연적인 인물이라는 개념은 신약성경 전체를 관통한다.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당연히 그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바울은 예수를 일반적인 인류에게서 분리해 하나님 편에 위치시켰다. 갈라디아서 1:1의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서신들의 다른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말의 전형이다.
바울이 통상 예수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신성을 가리키는 단어다. 바울 당시에 사용하던 구약성경 헬라어 번역본에서 그 단어는 히브리 본문의 “야웨”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확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의미있는 것은, 바울이 어디서나 예수를 향하여 종교적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종교적 믿음의 대상인 인물은 분명 단순한 사람이 아닌 초자연적인 인물이며, 실제로 그 인물은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놀라운 일이 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바울이 예수에 대해 가졌던 견해가 예수의 가장 친근한 친구들이 예수에 대해 이미 가졌던 견해였다는 사실이다. 서신들은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해서 바울과 원래 사도들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가 있었음을 분명히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견해에서 정말로 인상적인 사실은 그가 예수의 초자연성에 대해 전혀 변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곳에 전제되어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바울은 모든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예수와 함께 걷고 말했으며, 비교적 제한적인 지상 생활 동안에 그를 보았던 사람들은, 그를 모든 존재의 보좌에 앉은 초자연적인 인물로 간주한 바울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했다.
바울 서신이 전제하고 있는 예수와 정확하게 동일한 예수에 대한 기록이 복음서의 상세한 서술 곳에 등장한다. 복음서는 바울과 똑같이 예수를 초자연적인 인물로 제시하며, 이 의견 일치는 한두 개의 복음서가 아니라 네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다. 예수를 신성한 인물로 그리는 요한복음과 예수를 인간으로 그리는 마가복음을 대비하던 시대는 – 만약 그런 시대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가장 짧으며, 현대 성경 비평에서 가장 초기 복음서로 간주되는 마가복음은 예수가 행한 초인간적인 일들을 특별히 현저하게 부각시킨다. 네 복음서 전부에서 예수는 자연을 지배하는 주권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나타난다. 전체 신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네 복음서에서 예수는 분명히 초자연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면 ‘초자연적인 인물’이란 무슨 뜻인가?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초자연적”이라는 개념은 “기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적이란 외부 세계로 드러나는 초자연성이다. 오직 한 가지 정의만이 정확하다. 초자연적 사건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매개에 의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 둘째, 자연의 실제 질서의 존재다.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질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없다. 또한 자연 질서가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건과 자연을 초월하는 사건이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초자연적 일을 믿는 신자는 발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 단, 그는 자연적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에서는 하나님의 수단들을 사용하지만, 초자연적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에서는 수단들을 사용하지 않고 그의 창조적 능력을 그대로 발휘한다고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차이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과 하나님의 창조의 일 사이의 차이다. 기적은 세상을 존재케 한 신비한 행동과 동일한 창조의 일이다.
초자연성에 대한 개념은 절대적으로 유신론적 신관에 의존한다. 유신론은 먼저 이신론과 구별되고, 다음으로 범신론과 구별된다. 이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기계처럼 작동하도록 하여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혼자 돌아가도록 했다. 초자연적인 일은 발생할 수 없다. 성경의 기적들은 이 세상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을 전제한다. 성경의 기적들은 자연의 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어떤 신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섭리를 통해 “만물과 만물의 모든 움직임을 유지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들이다.
범신론은 자연 전체와 하나님을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범신론에서는 외부로부터 자연의 과정에 무엇이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기적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과학의 근거가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 과학은 사건이 늘 일정한 순서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이전 조건들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규정된 어떤 사건이 개입하게 되면, 과학이 기초로 삼고 있는 자연의 규칙성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기적은 임의성과 설명불가능성이라는 요소를 세계의 과정 속으로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반대는 기적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개념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개념에 의하면, 기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능력에 의해 발생한다. 기적은 임의적이고 기상천외한 독재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규칙성의 원인이 되는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성품이 알려진 신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자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이성에 거슬러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의 개입은 자신이 만든 세상에 무질서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적 개념에 의하면 기적에는 임의 성이 없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질서의 근원인 분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기적은 임의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굳건하게 고정된 것, 곧 하나님의 성품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기적의 가능성은 “유신론”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천지의 창주주요 통치자인 인격적 하나님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면, 그런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대하여 세상의 것이든 천상의 것이든 어떤 제한도 가해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세상을 창조했음을 인정한다면, 그가 창조의 일을 다시 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기적이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지금은 도리어 믿음에 방해가 된다고들 말한다. 과거에는 예수가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으나, 이제는 다른 근거로 예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기적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평범할수록 그것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평범한 이야기는 별로 가치가 없다. 기적이 없는 신약성경은 훨씬 믿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다면 믿을 가치가 없는 점이다.
만약 예수가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그에게서 얻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상일 뿐이다. 죄에 빠진 세상에게는 훨씬 더 큰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이기는 선인데, 세상에 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이기는 선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의 도입을 필요로 하며, 그 창조적 능력이 기적에 의해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기적이 없다면 신약성경은 더 믿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우리 앞에 실제로 주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기적이 없다면 우리에게 선생이 있게 되지만, 기적이 있으면 우리에게 구주가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