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군산은 병력을 충원확보하기 위한 수용연대?가 군산역에서 전북여객으로 돌아 수리조합 세무서를 지나 오른 쪽으로 들면 군산 구시장으로 통하고 왼 쪽에 들어가는 중앙국민학교에 있었습니다.매일 열차를 통해 전국 각지로 부터 소집되어 온 장병들이 집결하는 곳이 되어 있었고 항만과 비행장이 있어 군수물자,원조물자등이 들어 오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지금처럼 하역장비가 발달하지 못해 모두를 인력을 통해 하역해야 했음으로 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그 때 피란 내려 와 있던 많은 피란민들의 일자리가 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조촌동에 있던 일본 군수물자공장(뒤에 조촌국민학교가 들어 섬)에피란민수용소가 들어섰고 해망동에서 미면 불이농촌으로 이르는 산언덕 등에 피란민촌이 형성되어 당시의 군산시민보다 많은 숫자가 유입되었다고 들었습니다.구시장 앞골목엔 미군부대에서 새어나온 물품만을 취급하는 양키시장이 형성되어 한동안 감도가 골목이라던 곳이 양키시장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언제나 군인들이 있는 곳엔 여자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당시 부두와 비행장으로 통하던 영화동에 형성되어 있던 이 홍등가에는 미군과 외항선원들의 잠시 동안의 위안처가 되었으며 이 곳을 통해 외국 문물을 접하게 되어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옛 조선은행에서 세관으로 통하는 길에는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운수회사가 있었고 물자하역을 하청 맡는 하역회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세월이 지나 법적시효?도 지난 일이 되어 말 할수 있지민 이 때 신병수용소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도록 해주면 쌀 열가마,
하역회사에서의 계수원(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몇개 옮겨오는지 확인하는 일)자리를 얻는데 쌀 3가마 식으로 흥정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알려진 비밀이기도 했습니다.사람이 사는 곳엔 이런 비리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쨋거나 영화동에 가면 신문물을 접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한국에선 맥주가 생산되지 못하던 때 미군부대나 외항선에서 흘러 나온 맥주를 마실 수 있었으며 이국적 양장사업도 잘 돼 많은 양장점이 들어섰습니다.
피란 와서 개업한 냉면집 압강옥은 별미로 소문나 미식가들이 많은 전라도 입맛을 끌어들여 단시간내에 번창했다는 소문도 자자했습니다
첫댓글 중앙초등학교가 군인 집합소??란 이야기를 들었고 역사의 발자취가 그 때 살지는 않았지만 꼬리는 밟은 것 같아 글의 내용들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런 흔적을 꼭 책으로가 아니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삼촌 군인이었을 때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와 감동이 있습니다. 더 많이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그 당시 수용연대가 있던 중앙국민학교와 군산세무서 사이에 있던 길가게 일본적산가옥(일본사람이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그 집에 수용연대에 근무하는 N 소령이 살았는데 그 사람이 입대합격,불합격 판정관으로 그 집을 다녀 나오기만 하면 불합격되어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지금이나 그 때나 그런 그늘은 있어 온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