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동 군산극장 앞에는 "고향다방""청춘옥"과 희소관(남도극장)쪽으로 내려 가면서 "비둘기다방" 그 건너 앞에"풍년제과"등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많은 다방과 식당 제과점들이 있었습니다.그 중에서도 "고향다방"에는 일본유학파들이 많이 모인다고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이상기라는 분이었습니다.인물도 뚜렷하게 콧수염을 기르고 중절모자(나까오리)를 쓰고 다녔으며 당시에는 실내장식(인테리어)에 일가견을 가지고 전쟁중에 부숴진 집이며 다방을 개업하는 실내장식등을 맡아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역전에 있는 대동여관주인 태홍선씨의 처남으로 태씨도 연희전문 출신으로 관직에 있다 물러나 생업으로 여관업과 군산과 대전을 잇는 동아여객버스 영업소를 운영한 것으로 압니다.그 때 만월고무공장으로 통하는 아세아병원과 길 하나 사이에 신성다방이라는 이름의 다방을 새로 지었는데 그 구조나 외양이 별다르다고 이리,전주등 다방업자와 새로 다방업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모여 든다는 소문이었습니다."고향다방"쪽에서 바라 보면 산동네가 보였는데 언제부턴가 화류여인들이 하나 둘 모여 들어 군산심장부를 흐려 놓아 뜻있는 이들을 부심케 하기도 했습니다.그리로 통하는 작은 골목에 기요꼬(일본명 菁子)네란 대포집이 있었습니다.이 집은 "비둘기다방"에 모였던토요동인회와 관련된 분들이 들락거리며 즐기던 곳입니다.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합판으로 된 벽에 마음껏 낙서를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얼큰해지면 익히기 시작한 샹송을 부르기도 하고 여고에 근무하던 바리톤 최동규선생은 누구의 권면도 없이 이태리 민요등으로 흥을 돋웠고 시인들은 시를 읊조리기도 했습니다.그 때 넌센스 한 토막.이용악은 당시에 적성을 지닌 시인이라고 금기시 됐고 문학에서는 금서가 되어 있었는데 그의 대표적인 시 "전라도 가시내"를 목소리를 합하고 둗구어 낭송하면 뒤따라 왔거나 먼저 와 있던 사찰계 형사나 보안대원들도 좋아라고 박수를 쳐대어 우리는 통쾌하다 박장대소 했었습니다. 그 술값은 비둘기 다방 이덕 선생이 부담하거나 한전군산지점장으로 와 있던 김병석씨가 미리 기요꼬에게 맡겨 두었던 것에서 까나갔고 또 모자라면 나중에 갚아 주기도 해서 낭만을 만끽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첫댓글 정말 의미있는 추억의 한 토막이 아니라 일부 중 전부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디나 맑은 물이다가 흐려지는 일은 있기 마련입니다.당시 K다방에는 이른바 사이비 기자들이 모인다는 소문으로 이상하게 보이면 "그 사람 K 다방 다닌다며"하는 식으로 비아냥 거렸습니다.부두노동자 일자리 알선,수용연대 입대불합격등과 화류계 알선책들이 모여 있어 뜻있는 사람들의 백안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당시 주간지의 횡포가 그리도 심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