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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설
최근 한국학계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소위 "중장기병"이 고구려의 군사력의 중요한 구성요소였으며, 나아가 고구려의 대외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한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주목할만한 견해가 틀림없으나 아직은 검증되어야 할 점이 많은 주장으로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특히 고구려의 소위 "중장기병"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나아가 고대 세계 각국의 중장기병과의 비교사적 검토를 해보겠다.
2.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간단한 소개
1950~1970년대까지 고구려의 무기체계와 전술에 대한 연구는 북한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전주농과 박진욱 등을 들 수 있다. 전주농은 1950년대 후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토대로 고구려 시대의 무기와 무장을 최초로 연구(특히 "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고분벽화 자료를 주로 하여" 1/2, 문화유산 1958-5/1959-1) 했으며, 박진석은 1960년대 이후 발굴된 고구려 무기 유물을 토대로 삼국시대 무기에 관한 논문을 저술한 바 있다. (특히 "3국 무기의 특성과 그것을 통하여 본 병종 및 전투형식", 고고민속론문집2, 1970) 이들의 논문은 90년대 이후 남한 학계의 고구려 군사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 고대 무기체계 연구의 선구자는 김기웅씨라고 할 수 있다. 김기웅씨는 "삼국시대의 무기 소고", "삼국시대의 마구 소고", , "무기와 화약", "무기와 마구(고구려편)" 등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학계에서 고구려 시대의 무기나 병종구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3년 김성태의 일련의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김성태는 1993년 부터 1995년까지 문화재 26,27,28호에 게재한 "고구려의 무기 1/2/3"를 통해 고구려의 개별 무기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1996년에 이인철은 군사 제33호(국방군사연구소 발행)에 게재한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이란 주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인철은 이 논문을 통해 중장기병이 4~5세기 이래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을 뒷받침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KBS 역사 스페셜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고구려 및 부여사를 전공하고 있는 여호규씨는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이 된 후 부터는 고구려 군사사와 고구려 성곽에 관련된 논문을 주로 저술하고 있는데 특히 1999년 한국군사사연구2집(국방군사연구소 발행)에 발표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을 통해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한 바 있다.
3. 중장기병의 정의
이인철씨는 그의 논문에서 왜 "중장기병(重裝騎兵)"이란 용어를 사용하는지, "중장기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정의 없이 관행적으로 "중장기병"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논문 내용 중에 "갑주와 개마로 무장한 중장기병"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중장기병" 이란 용어를 사람 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주로 무장한 기병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중장기병"이란 용어는 일본 학계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여호규씨는 "개마무사", "중장기병"이란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여호규씨는 기병을 갑주와 구장개(말갑옷을 의미)로 모두 무장한 것을 "중장기병", 무사만 갑주로 무장한 "갑주기병", 무사와 말이 무장하지 않은 "경장기병"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개마(鎧馬)"란 갑옷을 입힌 말(馬)이란 의미이며, 중국에서 대략 서진(西晉)~남북조 시대 부터 사용한 용어이다. 고구려에서도 중장기병을 "개마"라고 호칭했던 것 같다. 고구려 "개마총(鎧馬塚)"의 벽화에 "塚主着鎧馬之像"이란 명문이 적혀 있는데, '무덤 주인이 개마를 타고 있는 모습'이란 의미이다.
이들 학자들이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용어는 중기병과 혼동을 줄 수 있는 용어이므로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겠다. 가장 기본적인 기병의 분류법은 중기병(Heavy Cavalry)과 경기병(Light Cavalry)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때 중기병과 경기병의 분류는 갑옷의 무장여부나 보유 무기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갑옷의 유무, 주무기가 창인지 활인지, 정면돌격시의 충격력 위주로 운용하는지 아니면 기동력을 중시한 경쾌한 운용을 중시하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구분하는 것이다. 당연히 특정 기병이 경기병인지 아니면 중기병인지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인철이나 여호규씨가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용어는 이런 분류법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말에도 갑옷을 입혔는지 여부에 초점을 두고 구분한 개념인 것 같다. 이런 개념이라면 서구권에서는 Extra-Heavy Cavalry나 Cataphracts, Armoured Horse와 비교할 수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Extra-Heavy Cavalry나 Cataphracts는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기병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은 모두 중기병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중기병이란 개념은 사람이 갑옷을 입었는지 여부 못지않게 운용법에도 초점을 둔 개념이고, 중장기병은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는 점에 초점을 둔 개념이라서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이 글에서도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용어도 단순히 "말에도 갑옷을 입힌 기병"의 의미로 사용하겠다.
4. 고대 유럽과 서남아시아 지역의 Cataphracts
고대 페르시아계 국가의 Cataphractii
다른 많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기병의 역사도 아직은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중장기병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장기병의 뿌리를 탐색하게 위해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은 고대 그리스의 Cataphrcatii이다.
영어에서 중장기병을 의미하는 'Cataphracts'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Cataphractii'에서 유래한 것이다. Cataphractii는 Covered over 즉, 완전히 감싼 것이란 의미이다. Cataphracts라는 말이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중장기병의 기원이 그리스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기병은 알렉산더 시절의 마케도니아 중기병(Companion)을 제외하면 그렇게 강력한 편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대표적 병종은 중무장 엘리트 보병 Hoplite였다.) 그리스인들은 사람 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적(주로 스키타이-이란계 종족들)의 기병들을 Cataphrcatii라고 불렀다.
Cataphrcatii를 보유한 국가나 종족들은 아르메니아(Armenia), 파르티아(Parthia), 페르시아, 사르마티아(Sarmatia) 등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 부터 이러한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추정에 불과한 것이고, 그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중장기병은 특히 기원후 3세기 시점부터는 파르티아(고대 이란계 종족의 국가)나 사산조 페르시아제국(고대 이란계 국가) 등에서 엘리트 병종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중장기병은 약 4m 정도의 창(Lance)과 활, 칼 등을 장비했다.
마갑 + 사람 갑옷을 한꺼번에 갖추는 것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Cataphrcatii는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엘리트 병종이었다. 고대 그리스 중장보병 Hoplite의 갑옷 한벌을 사는데 드는 비용은 요즘으로 치면 자가용 1대 가격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John Warry 저, Warfare in the Classic World p34참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Cataphrcatii는 Hoplite에 비해 최소한 2~4배의 갑옷 재료가 필요하다. 결국 거칠게 비교하자면 Cataphrcatii 기병의 장비 일체를 구입하는데는 자동차 2~4대 가격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대단히 거친 비교이긴 하지만, Cataphrcatii 장비를 보유하는데 경제적 부담이 만만하지 않다는 정도로만 이해를 해두자. 동양에서도 선비단부가 후조의 석륵에게 화친을 요청하면서 금은과 함께 개마(鎧馬; 말갑옷을 의미)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금은과 나란히 보낼만큼 말갑옷이 비싸고 가치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Cataphrcatii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지 않아 정확한 갑옷의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제 발굴사례가 있다. 유프라테스 언덕(Euphrates) 에 있는 한 고대 그리스 유적에서 이 시기의 말갑옷(馬甲)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은 기원전 4세기 무렵 건설되고, 기원후 256년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파괴된 곳이다. 따라서, 마갑(馬甲)의 하한선은 대략 기원후 3세기 정도로 볼 수 있고, 그 이전으로 소급시킬 여지도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마갑(馬甲)은 전형적인 찰갑 형태의 갑옷이며, 안면부, 목,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통 갑옷은 말 전체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안장의 앞부분 절반만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고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중장기병의 뿌리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가 되면 중장기병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중장기병이나 말갑옷이 소급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말갑옷은 아니지만 말갑옷의 뿌리로 생각되는 형태는 그 이전에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들어 기원전 7~6세기의 앗시리아(Assyria) 기병들의 말에는 천이 씌워진 경우가 있다. 이 무렵 앗시리아 기병의 말에는 안장(Saddle)이 없었기 때문에, 이 천은 안장 역할도 부분적으로 하고 장식효과와 부분적인 방호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갑옷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은 기원전 5~4세기 무렵 페르시아 제국에서 출현했다. 기원전 401년 페르시아 제국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벌어졌다. 이때 그리스 중보병 1만3천명이 용병으로 내전에 참전했다가 페르시아 기병과 전투를 벌인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사에서 '일만 용사의 탈출'로 알려진 사건) 이 사건을 언급한 고대 아테네 역사가 크세노폰 (Xenophon)에 따르면 이때 Cyrus the Youonger's (우리말로 키루스2세, 혹은 사이러스2세로 알려진 인물) 근위기병들의 경우 사람 뿐만 아니라 말에도 보호장비가 있었다고 한다. 즉, 말 머리에는 청동제 금속판이 씌워져 있고, 말 가슴에도 청동제 Apron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기원전 5~4세기 무렵의 페르시아 중장기병은 창으로 무장하고 정면돌격하여 충격효과를 노리는 전형적인 중기병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기병이었다. 이들은 그리스식 단검과 제블린(Jevelins, 여기서는 자루가 짧은 던지는 창을 의미)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간에, 기원전 401년의 페르시아 기병 중에는 중장기병의 뿌리로 볼만한 기병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하에 기원전 3~2세기, 보다 확실하게는 기원후 3세기가 되면 전형적인 중장기병이 출현한 것이다.
한편, 유럽 국가들 중에서 최초로 중장기병을 보유한 국가는 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중장기병은 로마인들이 주축이된 병종은 아니었고, 사르마티아(Sarmatia)인 식민지 병사 혹은 용병들이 주축이 되었다. 사르마티아인들도 스키타이-이란-페르시아계열의 종족이다. 최초로 사르마티아 기병이 로마군에 포함된 시기는 기원 65년 무렵이다. 이후 몇차례의 변화과정을 겪다가 최종적으로는 기원 365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중장기병 부대가 재건된 바 있다. 로마군의 중장기병도 페르시아제국의 중장기병과 마찬가지로 전체 기병 중에 일부만을 차지 했을뿐 핵심적인 병종은 아니었다. 그림 속의 중장기병은 3~4세기대의 로마제국의 중장기병 (Clibanari)이다. 로마제국에는 Clibanari보다 더 중무장한 Kilibanophoroi라는 중장기병도 존재했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중장기병 Cilbanari와 Kilibanophoroi는 뒷날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중장기병인 Klibanophpros로 계승되어 10세기까지 명맥이 이어진다. 14~15세기의 고딕 중장기병을 비롯한 유럽의 중장기병은 판갑(Plate Armour)계열의 갑옷을 쓰기 때문에 찰갑 (Scale Armour)계열의 갑옷을 쓰는 페르시아 계열의 로마 중장기병과는 뿌리가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hackjaponaise.cosm.co.jp/archives/websites/etica13/g-3-8-1.htm
첫댓글 오오~!!! 이런 자료를!!! 감사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