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장 황금률
“그러므로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 12)
- 이 진술은 비판에 대한 전체 문제를 요약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문제와 그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관련된 주님의 마지막 말씀에 접하게 된다. ‘황금률’이라는 말은 얼마나 비상하고 괄목할만한 진술인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하는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있다면 너희가 이렇게 행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 물어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행위에서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에서 전체 생활과 관련해서 자세히 풀어보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이것을 아시고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문제에 관한 규칙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 자신을 항상 그들의 위치에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렇게만 하면 잘못될 수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주님에 의하면 이 문제는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윤리나 도덕이나 인간관계의 제 문제를 다룬 모든 교과서들을 축소시키면 결국 이렇게 낙착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상가들도 20세기의 문제는 결국 제반 관계의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 문제는 돈이 아니고, 문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의 문제이다. 궁극적으로 삶의 모든 갈등과 소통과 불행은 이것 때문이다. 자아에서 출발한 다음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며 이와 같이 접근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여전히 율법의 선생이요 백성들의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중에 두고 계셨음이 틀림없다. 그들의 문제는 율법을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의 집합쯤으로 생각하며, 항상 그 정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은 율법을 부정적인 것으로, 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과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주신 율법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영적 의도, 율법의 영적 의미를 보는 일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특히 율법을 주신 목적과 목표를 보는 일에 실패했다. 율법의 목적과 정신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이다.
여러분은 이웃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를 사랑해야 하며, 그를 도와주기를 소원해야 하며, 그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로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자세한 규약들은 중심 원칙에 대한 실례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의 정신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정신에 따라 살도록 명령하신 삶을 항상 잊고 있다. 사람들은 이 황금률을 듣고 놀랍고 신기하다고 찬양하며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비극은 찬양하고 나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찬양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이 산상 설교를 설교하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논평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천하게 하기 위함이다.
- 사람들은 어째서 이 황금률을 지키지 않는가? 어째서 분쟁과 다툼과 불행이 있는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황금률이 거의 이천 여년간 인류를 대면해 왔고, 특히 지난 이백 여년간 우리는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해 법과 교육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황금률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
사람은 악하므로 황금률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복음은 항상 이것에서 출발한다. 사람은 율법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워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근본 원인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표현이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격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인은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하나님의 원수이다. 자연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이다. 이 때문에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천성적으로 황금률을 행하지 않으며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곧 ‘자아’로 귀착시킬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행하지도 않으며 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아를 너무 잘못되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마저도 이것이 남아 있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자주적인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그분을 싫어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것은 다음으로 자아만족, 자기방어, 자기관심으로 이끌어 간다. 자아가 계속 선두에 있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경제, 국가, 국제적인 문제이든,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분석해 볼만큼 우리가 정직하다면 그것이 모두 이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애국심에는 항상 이기적인 요소가 있어, 모두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전쟁이 있다. 군비축소와 기타 모든 문제에 관한 회담이나 제안은 사람의 마음속에 죄가 있는 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 어떻게 하면 황금률의 실천이 가능한가?
복음의 대답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해 준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까지는 이 세상의 여러 관계가 바로 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까지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과 이웃을 보기까지는 자신과 이웃을 바로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다툼과 문제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계만방은 다만 메뚜기떼 같고, 천칭의 작은 먼지와 같음을 알고 우리는 인간의 모든 자랑과 영광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권리가 조금도 없음을 확실히 본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을 알게 된 모든 참된 성도의 체험이다. 여러분이 자신들을 무가치한 물건들로 본 일이 없다면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 나는 의심스럽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이 아무것에도 소용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처럼 죄와 사탄의 희생물로 ‘이 세상 신’에게 속은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지옥으로 향하는 동료 인간들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해 전혀 새로운 견해를 가진다.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함께 그리스도께 달려가 그의 놀라운 은혜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의 은혜를 함께 즐기며 나누어 가지고 싶어한다. 이 방법만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기 시작하는 때는, 우리가 자아의 속박에서 해방 받음으로 해서 이웃을 우리들처럼 사랑하고 있는 때인 것이다.
-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취급하신다. 주님은 결국 “내가 너희를 본 것같이 너희도 그들을 보고, 너희에게 내 생명을 주기 위해 너희를 위해 하늘에서 나를 땅으로 오게 한 것에 비추어서 그들을 바라 보아라”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그들을 그와 같이 바라보라. 이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은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님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 지점에서 자아로부터, 자아의 무서운 황포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바울과 함께 “그러므로 우리가 이후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이렇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세상의 제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한 선교사와 전권대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