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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들과 같이 성 베드로 성당 광장을 찾아 걸어가면서도, 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구도 속의 천국과 연옥, 그리고 지옥의 세계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일었다.
육신이 멸해도 과연 영혼이 있다는 것인가? 이미 죽은 육신이 무슨 영혼이 있다는 것인가? 깊은 잠만 들어도 세상 모르는 것이 이치인데... 그런데 왜 모든 종교는 사후세계의 영혼이 실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영혼이 이승에서 지은 선악과 죄업의 결과에 따라 심판을 받아 어떤 영혼은 천국의 삶을 살고, 또 어떤 영혼은 연옥에서 정상참작을 받아 겨우 천국으로 구원받고, 또 어떤 영혼은 천국의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가 악령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며, 그토록 실의와 절망과 공포의 안색으로 고통스러워 하는가? 그 화두가 영 풀리지 않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삶 자체가 땀을 흘리고 죽도록 일해, 자수성가하여 일가를 이루기도 그리 어렵거늘 왜 또 죽어서까지 영혼마저 시달려야 하는지 기독교나 불교에 귀의하지 않는 사탄인 내가 어이 알수 있으리. 괴테가 그랬던가? 부자지간으로 태어난 삶 그 자체가 이미 원죄라고 하였거늘....
그냥 동양적인 규범을 지키면서 바로 이 지상이 천국이니 부모형제 우호하고, 이웃사촌 사랑하고, 선후배들이나 동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인간은 결코 신과 같은 절대자가 될수 없으므로 남이 울면 그 슬픔에 같이 울고, 남이 웃으면 그 기쁨을 따라 웃고, 그리 살면 되는 것이지 이 나이에 내가 어느 종교에 귀의한다 한들 무슨 구원을 받겠는가?
차라리 술이 맛있게 익으면 뜻이 맞는 좋은 친구를 불러 이른 봄이면 은근히 떠오르는 매화의 암향(暗香)에 취하고, 가을이면 상강(霜降) 하늘에 내던지는 국화의 향기를 흠모하며 또 취하고, 밤새 두주를 불사하며 달구경이나 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백이처럼 그런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면, 예수님이나 성 베드로도 부럽지 않으리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에 도착하였다. 광장의 규모가 대단하긴 했는데 30만 인파가 운집할 수 있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였다.
가이드는 교황 선출을 알리는 날이나 크리스마스등 기독교의 축일에는 광장은 물론, 광장 입구 주변의 도로까지 순례객들로 대성황을 이루고 그럴 때엔 30만 인파가 넘는다는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기원 후 64년 네로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 박해가 있었는데, 이 때 베드로 성인도 이 바티칸 지역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시게 되어 이 곳에 베드로 성인을 추모하기 위해,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식이 가능한 건축물을 처음으로 세울 수 있었다 한다. 그 뒤 324년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가이로의 기념비를 포함하는 베드로 성인의 무덤을 주측으로 대성당이 완공되었고,
현 성당의 모습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새로 짓기 시작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본 성당의 전면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열두 제자들의 조각상을 모시고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은 흰 대리석 기둥으로 받쳐진 좌우 타원형의 건물에 둘러싸여진 원형의 광장이었다. 그 대리석 기둥이 마치 참빗 속의 대살처럼 느껴졌다. 반달 같기도 하고 머리 빗는 참빗같기도 한 이 광장의 타원형 건물은 모든 방문객들을 포용하는 듯 열린 가슴을 내보이고 있는 형상이었다.
건물 위에는 카톨릭 교회 140인의 성인 조각상이 모두 광장의 방문객들을 굽어보고 계신 듯 했다. 내가 우리나라의 김대건 신부님도 이 140인의 성인상 중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없단다. 초기 카톨릭 교회의 성인들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대성당과 연결된 이 건물 오른 쪽 2층 두번 째 방문의 창을 열고 새로 선출되신 교황께서 광장에 모인 카톨릭 순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축복의 메세지를 전하신다고 한다. 물론 이 때 교황이 새로 선출되었다는 뜻으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워오른다고 한다.
우린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 본당에 들어가기 위해 상당 시간을 광장입구에서 기다려야 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은 전 세계의 인종들의 집합장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 광장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국적불명의 중년 부부가 나에게 우리 한국인 일행들과 함께 그들 부부의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다하여 우리일행이 그들 부부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나도 그들 부부에게 같이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말해 우리 원우가 이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눈치없게도 사내놈이 따라 붙었다. 난 그에게 "오! 노! " 라고 말했다. 그는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이 부인이 자기 남편이 머리를 긁으며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파안대소하였다. 난 한국인으로 치면 부잣집 맏며느리감인 이 포동포동한 여인의 어깨를 꼬옥 감싸주었다
아프리카 관광객인 듯한 이들에게 내가 다가가 디카로 사진을 찍는 연기를 해보이자 그들이 Good 이라고 말해 이 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내가 아프리카 관광객들과 기념사진을 찍자 용기를 얻은 우리 원우들이 내 주위에 모여들었다.
드디어 한참 줄을 서서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베드로 성당 본당에 들어갔다. 가이드가 성당 내부에도 소매치기 짚시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일러주었다.
성당은 과연 화려하고 웅장할 뿐 아니라 밀라노의 두오모나 피렌체의 두오모와는 또 다른 고매한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디카로 찍은 본당의 흐린 사진으로는 베드로 성당의 본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없어 한글판 바티칸 책자에 수록된 사진을 대신 게제한다.
미켈란젤로 작 바티칸 성당의 쿠올라(둥근 지붕)
이태리의 유명 조각품이나 건축물, 그리고 미술품까지 르네쌍스 이후의 대작들은 거의 90% 이상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이 둥근 지붕 쿠알라도 미켈란젤로가 1547년부터 계속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를 하였다고 한다. 1564년 89세로 긴 그의 일생을 마칠 당시, 쿠올라는 고상부까지 즉, 매우 뛰어나온 한 상의 기둥과 막힌 유리창이 번갈아 있는 둥근 곡선이 시작되기 바로 밑부분까지 완성되었단다. (이 글은 한글판 바티칸 책자에서 옮겨온 것임)
쿠올라의 내부
쿠올라의 높이는 십자가까지 136.5m 이며 내부의 직경은 42.56m 이다 지붕의 높이와 폭이 이 정도이니, 이 성당의 규모가 얼마나 클지 짐작해 보시기 바란다.
본당에 들어서자 마자 첫 번째 소성당 출입구 오른편에 두꺼운 크리스탈로 보호받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나타났다.
이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가 1499년 그의 나이 겨우 24 살이었을 때 만든 수작이다. 젊고 온화하신 얼굴의 성모마리아, 돌아가셔서 힘없이 버려진 그리스도의 몸을 품에 안고 운명앞에 거의 순종하는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으로 또한 정신적인 놀라운 힘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옷과 베일의 천 주름, 바로 이 점이 아직 1499년도 양식의 섬세한 얼굴신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유일하게 띠 위에 서명한 작품이다. (이 글은 한글판 바티칸 책자에서 옮겨온 것임)
피에타상의 성모 마리아 얼굴이다. 운명에 순종하시려는 듯 아예 체념하신 듯 눈을 감고 계셨다.
이어서 중앙 주랑에 있는 베드로 성인의 강복하는 청동 조각상을 둘러 보았다. 주지 할 만한 것은 그 많은 순례객들의 입맞춤으로 다 달아버린 베드로 성인의 발 부분을 볼수 있다는 점이다. 신자들의 성인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이토록 청동 쇳조각을 녹이다니, 오 주여! 베드로 성인의 발에 입맞춤한 모든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아멘!
사람이 죽으면 그의 가족들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은 그의 무덤까지 그를 따라간다. 그의 무덤속까지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봉분을 만들고 사람들이 흩어지면 그의 처소엔 적요만 맴돈다. 달은 청청하고 산은 적적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승에서 많은 사랑을 베풀고 공덕을 쌓았던 망자는 그 사랑과 공덕이 고인을 끝까지 따라간다 하니 바로 부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 베드로의 모습에서 난 이 만고의 진리를 체감할 수 있었다. 늙어갈수록 좀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과연 그런 삶을 살수 있을런지.....
그러나 우린 시간관계상 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참배하지는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베드로여! 내 너위에 신전을 세우리다."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 베드로 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예언은 이미 이루어지셨도다. 그리고 베드로의 뜻이 반석(盤石)이라니 .....
나중에 혹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배낭 여행에 도전해 이태리 모든 유적들의 내장속에 들어가 그들의 몸 구석구석을 관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한 신혼부부가 그들의 사랑을 이 성당에서 새로이 서로 다짐하고 있는 듯 하였다.
비교도인 나도 성수를 찍어 얼굴에 발라보았다. 수많은 관광객을 따라 그냥 의식을 스스로 행하는 성자처럼...
성당 구경을 끝마치고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전남도립대와 산학연계로 향원당을 운영하고 계시는 공수(孔壽)의 나이를 넘으신 김석주 이사장님이 나에게 담배 한개피를 청하셨다.
김이사장님은 담배를 완전히 끊으신 분이셨는데 그의 딸인 김수인 교수가 의아해하며 나도 하나 달라고 말하며 그래도 자애로운 웃음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국교수님의 딸 도현이도 의외라는 듯 김이사장님이 담배를 피우시고 계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장에서 아직 다 성당 관람을 마치지 못한 원우들을 기다리며 인도인인 듯 한 이 여인의 옆에서 원우들과 함께 이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반응이 영 냉담하기만 하였다.
< 오벨리스크 >
성 베드로 광장에 높이 솟은 이 뾰족한 돌기둥, 이를 오벨리스크라고 하며 옛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당시 이집트에 있는 15개의 오벨리스크중 12개를 전리품으로 로마로 가져왔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이 오벨리스크 하단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었고 그 음각된 부분에는 붉은 물감이 혈흔처럼 남아 있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대체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캔 붉은 화강암 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었다. 피라미드형 꼭대기보다 정4각형 또는 직4각형의 밑바닥을 더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가끔 꼭대기는 호박금이라고 불리는 금·은의 합금으로 씌우기도 했다.
몸체의 사면에는 주로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나 왕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을 담은 상형문자로 장식되었다. 일찍이 제4왕조(BC 2613경~2494) 때부터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 세워진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 때 세워진 여러 태양신전들의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3.3m에 불과해 비교적 나지막한 편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는 세소트리스 1세(BC 1971~1928)가 재위하는 동안 세워진 것으로, 한때 태양신 레(Re)의 사원이 있었던 카이로 교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다. 투트모세 1세(BC 1525경~1512)가 카르나크에 세운 1쌍의 오벨리스크는 높이 24m이고, 정4각형으로 된 밑바닥 길이는 1.8m이며 무게는 143t에 이른다. (이 글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항 것임)
오벨리스크여! 오벨리스크여!
너는 고향을 등진 노예의 신분으로 로마땅으로 끌려와,
꿈에도 못잊을 그리운 고향 산천을, 목을 빼고 바라보는 기린이 되었구나.
태양신 신전의 사원에서 노닐던 옛고향 꿈에도 못잊어, 2천년의 유장(悠長)한 세월이 흘렀어도 네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모국어가 통곡을 하는구나.
원치 않는십자가의 관을 쓴 애처로운 눈망울의 기린이여!
기다리고 기다려라. 그렁그렁한 감격의 눈물을 훔치며, 환희(歡喜)의 찬가를 목청이 터지도록 모국어로 노래할, 그 날의 너를 찬양할지니....
오벨리스크여! 오벨리스크여!
오벨리스크 所見-골드리버
주마간산격으로 우린 성 베드로 성당과 그 광장을 섭렵하고 스페인 광장 근방에 있는 이태리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버스에 올랐다.
베드로 성당은 로마 건국의 신화 로물레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늑대가 젖을 주워 키웠다는 티베르 강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베르강은 폭이 50미터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좁은 강이었지만, 로마의 한 젊은이가 1인승 카누를 그 화창한 햇빛아래 즐기고 있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티베르강과 그 구릉지대에 서식하던 늑대들은,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 문명의 총본산인 로마 교황청과 성 베드로 성당에게 그들의 서식지를 넘겨주고 사라지고 없었다. 티베르 강변을 바라보는 바티칸 시국은 절대의 종교 권력을 향유한 도시국가겸, 세계 카톨릭 순례객들의 성지로 변해있었다. 어느 잡신도 범접할 수 없는 위풍당당한 유일신전의 모습이었다. <끝>
2009.7.22 작성 골드리버
다음 이야기/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콜로세움(2009.6.24)-이태리 여행기 제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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