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실학훼밀리 역사기행(2-추사기념관)
10. 7.
큰고 작은 조형물
큰 조형물은 원통형 기둥에 우물정자(井)로 쌓아 첨성대 같은 느낌이 풍기는데, 추사체로 상단에는 한글로 하단에는 한자를 다양하게 음, 양각하였으며, 안쪽 작은 조형물은 추사의 인보(秋史 印寶) 200과중 대표작 12과를 음, 양각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전면에는 사야(史野)문자를 돌출시켜 인보(印寶)와 문자의 조화를 주었다,
미 개봉된 추사상
기념관 벽면에도 세한도가 새겨져 있다.
입구 안내석 뒤의 추사 선생 인보(印譜)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추사의 학문 (秋史의 學文)
추사는 박세가에게 처음 학문을 배웠다.
24세에 이르러 당시 청나라의 경학, 고증학이라 하여 옹방장, 완원등에 의해 고도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추사는 이러한 청나라 고증학을 관심을 갖고 북경에서 옹방장, 완원등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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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의 시(詩)
권돈인(權敦仁)의 시(詩)
신취미태사잠유시첩(申翠微太史暫遊詩帖)
이 시는 취미 신재익(申在翼)의 전뱔연에서 권돈인, 김유근 등이 지은 전별시를 추사가 적은 시첩이다. 그 중 권돈인이 지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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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무진 (谿山無盡)
계곡과 산은 끝이 없구나 라는 뜻으로 계산 김수근 (金洙根)에게 써 준 글이다.
서언교필결후 (書圓嶠筆訣後)
추사가 원교 이광사 (書圓李匡師)가 쓴 원교필결 (圓嶠筆訣)을 비판하면서 지은 글이다.
원교의 서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고사소요(高士逍遙)
추사의 문인화 중 인물이 그려진 유일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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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안목(人天眼目)
<난맹첩(蘭盟帖)>
추사의 <난맹첩>에 실린 난이다.
인천안목 길상여의(人天眼目 吉祥如意)
사람과 하늘이 살펴주어, 뜻과 같이 잘 되어지다.
염화취실(염華就實)
<난맹첩(蘭盟帖)>
추사의 <난맹첩> 상권 아홉째 폭에 실린 난으로 꽃을 거두고 열매를 맺은 난을 그린 것이다.
임한경명(臨漢鏡銘)
추사가 한나라 시기 동경(銅鏡)에 새겨진 글씨를 연습한 글이다.
한나라 예서를 독자적인 필치로 재해석하고 있다.
지란병분(芝蘭竝芬)
지초(芝草)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한다는 뜻으로, 조회룡 이하응(李昰應), 권돈인(權敦仁)의 제발이 적혀있다.
증청람란(贈晴嵐蘭)
추사가 청람(晴嵐) 김시인(金蓍仁)의 연행 길에 선물로 그려준 난이다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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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추사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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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반은 神이 되어 있는 것을 보네
이 神의 이름을 세한도라고 함은
쓰러져 있는 내 생의 반을
일으켜 흰 눈 속에 세워두니
이제서야 푸른 솔빛을 두르고
부끄러움 없이 대할 수 있는
이 하늘의 뜻을 깨달음의
절창 한 소절을 홀로 소리없이
만고의 흰 눈 속에 묻혀 불러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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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풍대아능용물(春風大雅能容物)
추수문장불염진(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해도 가족끼리 모여서 소박한 음식으로 즐기는 재미에 비할 수 없다.
무량수각 현판(无量壽閣現版)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예산 화암사 무량수각의 현판으로 쓴 것이다.
且呼明月成三友(차호명월성삼우)
好共梅花住一山(호공매화주일산)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청풍, 명월, 작자)를 이루고
즐겁게 매화와 함께 한 산에 머물다.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 리가 들어 있고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
침계(梣溪)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에게 써 준 당호이다.
한나라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맞는 글자가 없어 북조(北朝)의 금석문의 필의를 따라 해서와 예서를 섞어 썻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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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혁(冊曆)
수정염주(水晶念珠)
<!--[if !supportEmptyParas]--><!--[endif]--> 보물 54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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