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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기병의 전제조건
약간 논점을 바꿔 페르시아에서 중장기병이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자.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세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말갑옷을 버틸만한 우수한 종자의 말이 필요하다. 오늘날 경마경기의 기수들은 하나같이 50kg 안밖의 체중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마용 경주마들은 말 중에서도 가장 혈통이 좋은 말들만 고른 것인데도 10~20kg 정도의 기수 체중에 따라 말의 속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착용하는 갑옷은 10~30kg 이상 나가는 것이 보통이고, 말갑옷은 20~50kg 정도가 된다고 한다. 결국 중장기병용 말의 경우 사람 2명을 태우고 전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아시아 지역은 고대 명마의 산출지였고, 이들의 혈통은 현대 명마의 대표종인 아라비아말로 연결된다. 페르시아제국은 전성기에 소아시아를 그 영토로 하고 있었으므로 좋은 말이라는 조건은 기본적으로 충족이 된 셈이다.
둘째, 기본적으로 기병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어야 한다. 중장기병은 고대 세계에선 극도로 비싼 무기체계였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말에 갑옷을 씌운 것은 그 만큼 기병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고대 기마민족은 스키타이족이었다. 오늘날 서구학계의 통설은 스키타이족을 이란계 종족으로 간주하고 있다. 페르시아는 다름아닌 이란의 옛이름이며 대표적인 고대 이란계 국가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스키타이족 같은 이들 친척뻘되는 기마민족들과 많은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기병을 중시하는 전통이 만들어져다. 이는 마치 전국시대 조趙나라가 흉노족에 시달리다가 기마전투를 중시하게 된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경기병 전통이 강한 페르시아에서 중장기병이 출현한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만큼 기병을 중시하고, 기병전통이 뿌리 깊은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처럼 중보병을 중시하는 국가였다면 중장기병이 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째, 말갑옷을 만들만한 기술과 경제력이다. 철제 찰갑(Scale Armour, Lamellar Armour)은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말갑옷으로 쓰기 위해선 고대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발전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비용문제는 누차 강조했으므로 말할 것도 없다. 중장기병을 실전적 병종으로 운용할 정도로 일정규모 이상 보유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수적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고대 세계에서 중장기병은 극도로 비싼 고급 무기체계였다. 이를 뒷바침하기 위해서는 중장기병 구성원이 고급 귀족출신이어서 스스로 자신의 장비를 조달할 수 있거나, 아니면 상당히 부강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페르시아제국은 세계 문명의 근원인 고대 서남아시아 문명의 정통 계승자였으며, 부강한 제국이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이런 요건이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첫번째, 삼국시대 사용한 말은 최소한 두 종류 이상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주몽이 탔다고 알려진 유명한 과하마(몽고말의 일종으로 생각됨)이고, 또하나는 서역계의 호마(胡馬)이다. 호마(胡馬)의 경우 중장기병용으로 아무런 무리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과하마를 비롯한 몽고말의 경우 상당한 지구력과 힘이 있기 때문에 말갑옷의 무게 자체는 충분히 견뎌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키가 작기 때문에 정면돌격시의 충격효과 위주로 운용하는 중장기병용 말로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키가 작은 말은 근접전 시에 보병이 대항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과하마가 중장기병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필자의 막연한 추정에 불과함)
두번째, 고구려의 경우 주몽의 건국신화에서부터 말과 관련된 전승이 풍부하게 전승된다. 고구려의 경우 대단히 이른 시기부터 기병을 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만큼 기병도 중시했던 것 같다.
세번째, 고구려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할 기술력과 경제력이 있었는가? 우선 기술적 측면에 볼때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말기에 이미 찰갑이 사용되었으므로 적어도 3세기 대의 고구려에서 찰갑을 제조할만한 능력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경제력 문제는 쉽게 판단하기 쉽지 않다. 4세기말~5세기 이후의 고구려라면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충분히 대규모의 중장기병을 뒷받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안산 철산으로 대표되는 만주의 철산지는 고구려의 철제 무장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했을 것이다. 하지만 3세의 경우는 어떨까? 이는 고구려의 성장 과정을 평가하는 사학적 논점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서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고구려 중장기병도 귀족적 성격의 군대라고 가정한다면 3세기대에 대량의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도 고구려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사학적 논점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쉽게 단정지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구려는 어떤 필요성에 의해 중장기병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는 4세기 이후 북중국에서 중장기병이 유행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성급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앞에서 이인철씨가 인용한 일본학자의 주장, 후한~삼국시대에 걸친 쇠뇌의 발달이 중장기병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이러한 사학적 가설을 검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쉽지만 이러한 역사적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그런 식의 해석도 존재한다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장기병은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병종이다.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기병에서 대표되듯이 경기병(특히 궁기병) 전통이 뿌리 깊은 국가이다. 그러한, 경기병 전통이 뿌리 깊은 국가에서 중기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 중장기병이 출현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는 고구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의문이다. 고구려는 어느 국가보다도 활쏘기를 중시하는 나라이며, 명궁으로 이름이 높은 나라가 아닌가?
일반적으로 서구의 군사사가들은 흔히 유럽은 중기병의 전통이 강하고, 아시아 국가들은 경기병의 전통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페르시아나 중국 등에서 중기병으로 분류할만한 기병부대가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중앙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유목민족의 경우에도 갑옷으로 무장한 궁기병(Heavy Horse Archer)가 지속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단순히 아시아권 국가의 기병을 경기병이란 범주로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아시아=경기병, 유럽=중기병식의 상투적인 이해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필자도 오랜기간 아시아 기병=경기병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굳이 중기병과 경기병의 이분법 시각으로 볼 필요가 없이 오히려 아시아권 국가들에서는 궁기병 (弓騎兵;Horse Archer)이 항상 기병부대 중에 상당 비율을 차지한데 반해 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궁기병이 빈약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중장기병의 경우 기병을 중시한 정주국가(定住國家)에선 간간히 사용된 병종이었던데 반해 순수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중기병은 보유해도 중장기병을 보유한 경우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나 중국 같은 아시아권 정주국가들이 활을 기반으로한 경기병적 운용방식 (기습, 교란, 정찰, Hit and Run)에 익숙했지만 보병이나 중기병 기타 병종을 총집결하여 정면대결을 펼치는데도 익숙한 국가였다. 이에 반해 순수 유목민족의 경우 정주국가에 비해 항상 숫적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Hit and Run 식의 전투를 선호 할 수 밖에 없었다. Hit and Run 형태의 전투에서 말갑옷은 그렇게 적합한 장비는 아니다. 또한, 한명의 기병이 여러 말을 보유한다고해도 중장기병용 말갑옷은 기병 특유의 장거리 기동에는 결코 적합한 장비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순수한 유목민족의 경우 드물게 중장기병을 보유하기도 했지만 중장기병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인 병종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중장기병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귀족이나 지휘관급의 인물의 경우 중장기병 장비를 갖춘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여러 기록들을 감안하여 보면 유목민족이라하더라도 인접 정주민족들의 국가를 정복한 경우거나, 단순한 부족집단 수준이 아니라 강력한 유목제국을 건설했을 경우에는 어김없이 중장기병도 출현했던 것 같다.
활을 보유한 궁기병을 중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가 중장기병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 보면 그렇게 특이한 점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시아- 궁기병 중시 / 유럽- 궁기병 전통 빈약,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중장기병 보유 / 순수한 유목민족-중장기병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일 것 같다. 어느 국가 못지않게 활쏘기를 중시하고, 기마상태에서의 활쏘기에 능했던 고구려에서 중장기병을 보유한 것은 고구려가 순수한 유목민족국가가 아니라 기병을 중시한 정주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투르크 중장 기병 갑옷> 그림 속의 투르크 중장기병 갑옷은 각종 자료를 기초로한 상상 복원도이다. 금속제 갑옷 처럼 그려놓았지만 도판에는 가죽제 찰갑 (Leather Lamella Armour)을 그린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때 주로 참고한 자료는 몽골 Situ Char-Chad 지역에 위치한 6~7세기 무렵의 암각화인데, 암각화 원화는 아주 간단한 그림이다. 따라서, 이 복원도는 말그대로 상상 복원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래 그림은 Char-Chad 암각화의 일부이다.
<몽골 중장기병 갑옷> 그림 속의 몽골 중장기병은 원나라에 살던 유럽인 카르피니의 언급을 참조하여 그린 상상화이다. 위에도 나오는 9세기 경의 티벳 중장기병의 장비를 많이 참조하여 그린 그림이다. 갑옷과 말갑옷은 철제가 아니라 가죽제 찰갑 (札甲: Leather Lamellar Armour)의 일종이다. 이 가죽제 찰갑 Lamellar 갑옷은 몽골의 고유장비가 아니고 중국,일본, 티벳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 흔히 사용한 갑옷이다. 이그림도 굳이 몽골의 중장기병 그림이라고 생각할 필요없이 중세의 표준형 아시아 중장기병 갑옷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명재상이었던 유성룡 집안에서 전혀 내려오는 갑옷도 이 가죽제 찰갑의 일종으로 생각되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된 갑옷이라고 할 수 있다.
9. 실전에서의 중장기병의 운용
중장기병은 무적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인철씨도 중장기병의 한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실제 전투에서 중장기병은 적이 쏘는 화살에 과감하게 대응하면서 적진을 향해 돌진할 수 있으나 경무장의 기병에 비해 질주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퇴각할 시기에 적의 경무장 기병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또, 전투에서 기병이 보병에 비하여 반드시 유리한 것도 아니다. (중략) 중무장한 고구려의 기병이 적의 보병 대열을 향하여 돌진함으로써 적의 전열을 흩뜨리면서 적에 대해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기병은 주로 정찰을 위한 목적이나 상대적으로 취약한 적군의 측면 또는 후면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 정찰이나 적군의 측면이나 후면 공격은 기동력이 빠른 경무장 기병이 훨씬 유효하다. 기병 공격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보병의 근접지원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인철씨의 설명은 중장기병과 중기병의 개념을 구별없이 설명한 내용인듯 하나 중장기병의 한계를 비교적 잘 설명한 것 같다.
사실 중장기병이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실질적인 효과는 말에게도 방호력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 말 위에 탄 기병이 아무리 갑옷으로 중무장했다해도 말이 노출되어 있다면 화살 몇 발에 기병의 말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전투 직전까지는 기병의 효과를 살릴 수 있지만 전투 순간에는 커다란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 기병이다. 중장기병은 그러한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 주는 효과를 거둔다. 하지만, 얻는 것 만큼 잃는 것도 많다. 페르시아 중장기병들도 그 무거운 무게 때문에 돌격시에도 빠른 속도로 돌입하지 못하고 Trot (속보 정도의 속도를 의미하는 승마용어)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기병은 경기병에 비해 속도를 덜 중시하지만 정면돌격을 통한 충격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속도는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중장기병은 기병의 중요한 이점인 속도를 상당 부분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중장기병은 장거리 기동에 많은 제한이 따른다.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몽골족들이 기본적으로 경무장 궁기병이었음에도 장거리 원정시에는 여러 필의 말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말의 지구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 당시 한국군 기마대대는 말발굽 손질없이 2주 정도 연속적으로 작전한 결과 대부분의 말들이 군마(軍馬)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중장기병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중장기병은 많은 한계가 있다. 실제 전사를 보아도 바투와 수보타이가 인솔하는 몽골군에는 상당수의 중장기병이나 중기병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경무장 궁기병이 다수였다. 이러한 몽골군과 유럽의 중기병, 중장기병들이 대결했을 때 몽골군이 압승을 거둔 바 있다. 또한, 그리스의 중보병들도 주변의 중장기병을 상대하는데 그렇게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 Tagmata (근위대)가 자랑하던 정예 중장기병 (Kilibanophoroi)도 투르크계의 셀주크 경기병과의 전투에서 완패를 당한 바 있다.
중장기병은 일반적인 중기병(사람만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이나 경기병, 보병 등과 결합했을 때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중장기병 자체만으로는 중보병이나 중기병, 경기병에 비해 전투효율이 떨어지는 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 일정 기간 중장기병이 핵심병종이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는 중장기병 vs 중장기병 형태의 전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만약 당시에 경무장 궁기병을 수준급으로 운용하는 국가가 유럽에 있었다면 순식간에 중장기병의 왕자적 지위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몽골군의 승리는 그 점을 더욱 잘 보여준다. 페르시아의 중장기병도 항상 경기병과 함께 운용되었지, 중장기병 자체가 핵심병종으로 운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활을 기반으로한 경기병 못지 않게 창을 기반으로한 중기병의 장점도 많다. 그러나, 속도를 중시하는 일반적인 중기병이냐, 아니면 말의 방호력을 더 중시한 중장기병이냐는 관점에서 볼때 중장기병이 중기병에 비하여 항상 우월하다는 증거는 마찬가지로 없다. 이런 모든 요소를 감안하고도 비용이 많이드는 중장기병을 선택하는 것은, 중장기병이 가지는 기본적인 가치(방호력 +충격력) 못지않게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효과, 특별한 귀족적 무사계층의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기병에 대항해서 전투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군대라면 중장기병 + 경기병의 조합은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 한정 시켜서 보았을 때 중장기병의 장단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한반도의 지형에서 중장기병이 가지는 약점 중에 하나는 지형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도로 사정은 악명이 자자한 편이다. 산이 많고, 좁고 험준한 지형, 더구나 변변한 다리 조차 없는 수많은 중소하천을 가진 한국의 지형에서 중장기병은 별로 적합하지 않는 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좁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 비틀거리면서 다리도 없는 개천을 건너가는 중장기병을 상상해 보라. 설사 전투전 갑옷을 말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수송한다해도 전반적인 부대기동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경우 평원이 많은 만주에도 영토가 많았으나 산악지역이 많은 대신라전이나 대백제전, 혹은 광개토왕대의 가야원정 같은 전투에서 중장기병이 가지는 효과는 의외로 제한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거리 전투가 아닌 어느 정도 정적인 성곽전투라면 중장기병이 효과를 거둘만한 부분이 있다. 각자 성곽에 거점을 둔 군대가 가까운 거리 내에서 제한적인 교전을 실시한다면 중장기병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다. 수성守城전투시에 성문 주변에서의 제한적인 추격전이나 교전이라면 중장기병의 이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문 주변에서의 공성攻城전투도 속도보다는 방호력이 요구되는 경우이다. 한국은 과거부터 성곽전을 매우 중시하여 왔고, 고구려 또한 축성술에서 수준급의 기술을 가진 국가이므로 이러한 성곽전에서 중장기병은 나름대로의 역할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들판에서 벌어지는 형태의 전투일 경우 중장기병과 일반적인 중기병, 경기병, 중보병, 보병을 정교하게 조합한다면 나름대로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장창을 보유한 숙련된 중보병이나 Hit and Run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궁기병이 존재하지 않는 군대라면 중장기병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동예에서 장창을 능숙하게 운용했다는 중국측의 기록을 보거나, 신라의 쇠뇌와 장창당(장창을 보유한 부대로 추정,직접적으로 고구려 중장기병에 대항해서 창설한 부대는 아님), 백제와 가야 신라의 중보병용 갑옷(短甲), 백제의 구겸(갈고리창), 신라나 가야의 가지극(가치창) 등을 보면 고대 한반도 상의 제국가들은 기병을 상대하는데 상당한 능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대기병 방어책은 고구려의 중장기병과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하게 발달했을 것이므로 그러한 상호작용의 미묘한 균형이 무너지는 시점에서는 전투의 승패를 넘어서서 국력의 성쇄와도 연결되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대의 폭팔적인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이러한 미묘한 상호작용의 균형이 무너진 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개연성만 인정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곧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빠르면 3세기 중엽, 늦어도 4세기 중엽이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4세기말 이후 고구려 대외정복의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주장은 가설일뿐 검증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누가 알겠는가? 실제로 고구려에서 중장기병은 왕의 근위대나 일부 귀족적 무사집단, 단위부대 지휘관의 전유물이었을 뿐이었는지...
비잔틴제국 Kilibanophoroi 전투대형
일반적인 중기병과 경기병의 전투대형에 대한 기록은 세계 각국 역사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순수한 중장기병의 전투대형에 대한 기록은 흔하지 않다. 중장기병은 대부분의 경우 실전적인 병종이라기 보단 귀족이나 군 지휘관급이 위용을 과시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로는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Kilibanophoroi의 전투대형에 관한 기록이 거의 유일한 기록인 것 같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잔틴제국의 Klibanophoros는 중장기병의 일종이다. 중장기병용 장비의 가격이 극도로 비싸기 때문에 이들 Klibanophoros는 제국 근위대인 Tagmata에만 편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Klibanophoros의 전투대형은 Weage(쐐기형) 형태이다. 쐐기형 진형은 알렉산더 제국의 중기병 Companion 등 중기병 계열에서 전투대형으로 흔히 사용하는 형태이다. 첫째줄에는 20명이 서고, 열마다 4명씩 추가하여, 둘째줄에는 24명, 세째줄에는 30명...식으로 증가하여 열두번째 줄에서는 64명이 서게 된다. 또한 네번째나 다섯번째 병사는 창이 아닌 활을 소지한다. 이들 궁병들은 전투대형에 섞여 있다가 돌격 시에 후방으로 약간 빠져나와 쐐기의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실시한다. 실제 전투대형에서 이 표준대형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고 10열 384명으로 구성된 대형도 사용하였다. 근위대인 Tagmata 내에는 2~3개의 Klibanophoros 부대가 존재하여 총 병력은 1000~1500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 진형
요나라의 중장기병 배치형태
금나라의 중장기병 배치형태
아시아권 국가의 경우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 관련 진형 자료가 남아있다. 요나라에서는 제1선에 갑옷을 입지않은 경장기병이, 제2선에는 사람만 갑옷을 입은 갑주기병이, 제3선에는 중장기병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다. (원문의 표현은 제2선에 Armoured Cavalry, 제3선에 Man on Armoured Horse)
금나라에서는 좌우익의 날개에 중장기병을 배치하였다. 금군은 이들 중장기병을 이용해 양익포위전술을 주로 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들은 이들이 진정한 중장기병인지 아니면, 단순히 갑주기병(사람만 갑옷을 입은 기병)에 불과한 것인지 추가적으로 다른 자료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요나라와 금나라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한 것이 확실하다면 아시아권, 특히 중국 문화권의 중장기병 운용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추정 복원한 고구려 중장기병의 전투대형
그렇다면 고구려 중장기병의 전투대형은 어떤 형태였을까? 아쉽게도 어떠한 직간접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중장기병은 커녕 일반 기병이나 보병의 전투대형 중에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고구려 뿐만 아니고 조선시대 이전의 어떠한 전투대형 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경우 몇권의 진법 서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지만, 그 이전이라면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KBS 역사 스페셜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에서 제시한 고구려 전투대형은 무슨 근거로 나온 것일까? 한마디로 그 전투대형은 추정은 커녕 상상에 가까운 전투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제1단계 전투전 포진 상태
제2단계 보병궁수의 화살 공격
제3단계 중장기병 우익이 적 측면을 강타
제4단계 경무장 창기병 좌익의 측면 우회기동
5단계 경무장 창기병이 적의 배후를 차단
6단계 총공격
이 전투대형은 고구려 벽화고분 (안악3호분, 약수리 고분 등)의 행렬도를 기초로 병종을 결정한 후, 병종별 특성을 고려하여 만든 추정 복원도이다. 하지만, 의장병력이 분명한 행렬도가 실제 병종구성을 대변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기병과 보병이 앞뒤로 포진하는 형태의 진형도 상당히 "독특"해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병과 보병을 좌우, 혹은 중앙과 양익형태로 포진하든가, 아니면 보병의 후면에 기병이 포진하는 형태는 몰라도 병종별로 중장기병 1열, 경장 창기병 2열, 보병 창수 3열, 보병 환도수 4열, 보병 부월수 5열, 보병 궁전수 6열로 포진하는 형태라면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포진은 아니다. 이런 "이상한 진형"이 직접적인 근거가 있는 진형이라면 좀더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스페셜의 진형은 단순한 상상 복원도에 불과하며, 그것도 상당히 의심스러운 복원도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애당초 중장기병 일부가 적의 배후나 측면 공격을 위해 운용된다면 처음부터 진형의 양익에 배치하는게 당연한데, 굳이 제1,2선에 배치하여 적에게 측면을 노출하면서 기동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위의 상상도가 전장 상황에 따른 우발적인 상황이라면 몰라도 애당초 측면공격을 위한 부대를 처음부터 정면 제1,2선에 배치한다고 설정하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고구려에 중장기병의 존재를 인정하고, 실제 전투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병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해도 고구려군에 궁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수렵도를 제외하고 궁기병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도 고구려가 궁기병을 포기했다고까지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구려에서는 대대적인 기마사냥대회를 통해 장수를 선발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인재 선발 시스템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궁기병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조차 어렵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그림에서 궁기병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행렬도에 등장하는 고구려군은 의장병적이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실제 병종구성과는 전혀 다른 것은 아닐까?
출처: http://hackjaponaise.cosm.co.jp/archives/websites/etica13/g-3-8-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