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13일) 해남에 있는 김남주 시인 생가에서 선생님 글씨 지원을 통해 제작된 현판식이 있었다.
지난 10월 집안 시제에 맞추어 해남을 내려갔다가 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 모두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다. 아버지는 시인의 중학교 동창이셨는데 서로의 집이 언덕을 하나 넘으면 될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던지라 두분이 자주 통학을 같이 하시곤 했다고 하셨다.
생가를 방문한후 아버지께서 '김남주 시인의 생가인데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가 없는것이 아쉽다.'는 제안을 하셨고 마침 이번학기 선생님의 수업을 청강하고 있던 나는 시간을 내서 선생님께 간단히 해남을 내려갔다 시인 생가를 방문하게 됐다는 말씀을 전했고 기념 사업회쪽에 혹시 글씨가 필요하시다면 지원을 해주시겠다는 선생님의 흔쾌한 수락을 입수하게 된다.
그후 현재 김남주 시인 기념사업회 회장이신 김경윤 선생님(해남중학교 국어교사, 시인)과 연락을 진행하고 시인 흉상의 석판글씨, 생가의 현판글씨, 생가 내부의 표구글씨등 무엇이 좋을지에 대해 수차례 메일을 교환한후 현재 기념사업회 자체적으로 시인 생가를 게스트 하우스로 리모델링하여 오픈하려는 계획에 맞추어 생가에 어울리는 현판 글씨를 요청 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 하였다.
김경윤 시인은 이전 해직교사를 경험하시기도한 김남주 시인의 고향, 학교 후배로서 신영복 선생님의 책과 글에 대한 충실한 독자이시기도 하였다. 현판 글씨로 진행하기로 합의한후 협회측을 통해 부탁 되었던 글씨는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와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이었으며 이중 선생님 판단에 의거하여 하나의 글씨를 지원 받기로 하였다.
선생님은 두 글씨중 필요한 것을 기념 사업회 자체적으로 선택하기를 바라시며 두개의 글씨를 모두 현판용으로 써주셨고 마침 회사일로 중국에 출장중이던 나를 대신하여 집사람이 대신 선생님으로부터 글씨를 받아 기념 사업회 쪽으로 전달하게 되었다.
조금은 당연하게도(?) 기념 사업회에서는 두개의 글씨를 모두 작품화 할것을 원하였고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는 현판으로,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은 표구용 글씨로 제작하여 숙소 안쪽에 비치 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결과적으로 두개의 글씨가 모두 시인 생가에 다른 형태로 지원되게 된것을 기뻐하며 그 결과를 선생님께 알려 드렸다. 그러나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써준 글씨는 표구용 글씨가 아닙니다. 만일 원하신다면 다시 표구용으로 써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회답을 받게 된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결과가 되었으나 선생님께서 표구용으로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을 다시 써주신다면 그것처럼 감사한 일이 또 없는것이었던지라 김경윤 선생과 수차례 메일 교환을 통해 표구용 글씨 제작의 당위를 여러번의 검증으로 다시 확인한후 선생님께 조금더 장문의 메일을 쓰게 되었다. 순수히 표구용 글씨 요청을 다시 하게 된데대한 죄송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새로 작업하신후 보내주신 표구용 글씨는 내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바로 김남주 시인의 시 '함께가자 우리 이길을'의 시 전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래 계획에 없던 표구용 글씨 요청이 그 중요성에 있어 앞의 현판용 글씨를 넘어설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학기 청강하였던 선생님 강의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삽입된 '서도의 관계론' 글에 대한 선생님 설명에서, '나와같이 글씨를 많이 쓰는 사람들의 머리에는 모든 글자에 대해서 주위 글씨와 관계된 다양한 형태의 글씨 데이타베이스가 존재한다.'는 말씀을 하신적이 있으시다. 즉, 4자의 글씨가 쓰여진다면 마지막 4번째 자는 주위 글씨와 여백의 공간등이 감안되어 4 X 3 X 2= 24, 최소한 24개 이상의 경우에 대해 해당글자 데이타베이스중 하나의 글씨가 선생님의 손을 통해 순간적으로 '그려진다'는 얘기다. 4자의 글씨가 이럴진데 하물며 빽빽하게 쓰여지는 긴 시 전문에 투여되는 공력은 내가 상상하기 힘든 어떤 고난도의 작업인 것이었다.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선생님의 힘든 작업 결과와 더불어 이 표구용 글씨는 기존 현판 글씨처럼 단순한 과정으로 기념사업회에 전달되면 안된다는 무언의 당위심이 발동 되었다.
바로 기념사업회와 연락을 취했다. 현판식 일정중에 이 표구용 글씨를 선생님, 혹은 대리인을 통해 기념사업회 회장님께 정식으로 전달하는 '전달식'을 포함하자는 내용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기념사업회의 흔쾌한 동의를 입수한다.
그리고 2007년 김남주 시인 생가를 기존 초가집에서 현재의 신축 가옥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진행한 생가 재건식때 재건식 초대손님으로 참가해 감동적인 연설을 했던 당시 해남, 진도 국회의원 '채일병' 전 의원에게 아버지를 통해 연락을 취한후 이 현판식에 참가하실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한다. 채일병 전 의원은 아버지의 죽마고우이시고 마찬가지로 김남주 시인의 중학교 동창이시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흔쾌한 현판식 참가 의사를 입수했다.
기념사업회 쪽에서도 미황사 주지스님이신 금강스님, 전직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현재 해남에서 6년째 시인으로 활동하고 계신 윤재걸 선생등께 연락을 드렸고 채일병 의원은 현재 나주에 거주하고 계신 김남주 시인의 평생의 벗이자 동지인 이강 선생과 함께 참가하기로 하였다.
현판식 당일 새벽 버스로 아버지와 함께 광주에 도착한후 광주에서 채일병 의원을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바로 이강 선생을 차에 모시고 해남으로 출발 하였다. 아버지와 채일병의원, 이강선생 모두 중학교 동창이시고 특히 이강 선생은 아버지와 수십년만에 처음 얼굴을 보셨음에도 서로 전혀 스스럼이 없으셨다. 개인적으로 그느낌, 정말 좋았다.
채일병 의원의 차를 내가 운전했고 세분은 차안에서 편안히 지나간 추억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주제는 역시 '김남주 시인'이었다. 한참을 차로 달리다 채일병 의원이 정식으로 이강 선생에게 김남주 시인과의 동고동락의 삶을 물으셨고 약 한시간 반의 시간동안 김남주 시인과 이강선생 두분의 우정과 역경의 과정을 운전하는 내내 정말 생생하게 듣게된다. 이강 선생의 마치 준비된듯한 구술이었다.
운전을 하며 계속 생각했다. 선생님은 이전 '자기'를 정확히 인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모, 더 나아가서는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의 역사까지 의식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하신적이 있으시다. 난 97년의 유학생 시절 단순히 선생님의 책과 글이 좋아서 이 더불어숲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었지만 나를 이루고 있는 여러 성향이 더불어숲의 어떤 '적극적인 진보'의 느낌과 얼마나 부합되는 지에 대해 항상 솔직하려고 노력했다. 즉 '이해되지 않는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고 '불필요하게 더불어숲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놀이를 하거나 가식적이지 말자'는 생각등이 그것이었다. 한데 선생님의 글을 통해 맞딱뜨린 이번 현판식의 경험은 선생님의 말씀처럼 나의 '자기 역사'와 연결된 어떤 당위의 인력(引力)이 작용한 것이라는걸 부정할수 없었다.
해남에 도착하고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후 현판식이 시작되었다. 지역 언론에서도 취재를 나왔고 당일 귀한 시간을 내서 참가하신 금강스님과 윤재걸 선생등 많은 분들이 선생님 글씨 지원에 감사 인사를 전해주셨다.
땅끝 해남까지의 여정은 멀다. 선생님께서 이 일정을 함께 해주셨으면 했던 바램과 상반되게 그 먼 여정을 하시기 힘드시다는 선생님의 육체적 부담은 나의 걱정이었고 그 걱정이 향후 지속될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또한 더욱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기쁜 날이었다. 현판식 끝난후 여러 지인분들과 방에 모여 홍어와 인절미 떡을 먹으며 수많은 얘기를 나눴고, 현판식 진행에 수고를 해주신 김경윤 시인을 포함한 기념사업회 분들 10여분과는과는 장소를 옮겨 저녁 식사와 반주를 하며 더욱 깊은 교감도 나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일 현판식에 참가해 주신 모든 분들이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 지원에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상황 또한 나에게는 유치하지만 우쭐했던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발령 상황에 따라 태어나서 일년도 채 되지 않아 그곳을 떠났던 '고향'과의 연결 고리를 불혹의 나이가 되어, 그것도 선생님의 글씨와 함께 찾게 된것에 참으로 큰 행복을 느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해 마치 스스로 보상(?)을 받은듯도 했고, 앞으로 '개념속의 고향'을 행복하게 '현실 속에서 인지'할수 있게 되었다는데 대한 기쁨등 매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강 선생을 나주 자택에 내려드리고 내리는 눈을 헤치며 광주로 차를 몰았다.
채일병 전 의원이 말했다.
'중앙에서 관료로 있을때보다 광주에 내려와 보니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다. 남도가 서울보다 항상 5도정도 더 따듯해서 그런가 보다. 눈걱정 하지 마라. 금방 녹는다....'
아버지와 난 새벽 버스로 안산으로 돌아왔다. 안산역에 도착해보니 일요일 새벽 3시. 고향은 무박으로도 여행이 가능할 정도로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첫댓글 바쁜 동영이 고생했네. 아버지와 아주 뜻깊은 시간이였겠다..
우리도 아빠, 엄마로 불리게 되니,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해 더 감사하게 되고, 절실해지게 되는거 같다. 효도하고 살자~ ㅎ
며칠 있다보자~
해남 김남주 시인 생가에 지난 8일에 갔었는데...다음엔 가서 하루 묵어야겠습니다. 멋진 인연과 수고...동영씨 가족과 우이선생님 모두 최고입니다~!!!!
윤경아, 너가 말한데로 이번 경험은 아버지와 나에게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다. 토요일날 보자.^^
윤미연 선배님, 게스트하우스가 정식 오픈 되었더군요. 아래 URL로 들어가시면 시인생가 게스트 하우스 사용 예약이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kimnamjuhouse
어제 모두모임에서 선생님께 부담을 드린 것 같다고 괴로워하던 동영씨 모습이 잊혀지지 않네. 하지만 선생님도 기뻐하실만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네. 아무것도 아닌 나지만 그렇게 생각해. 수고했네... 봄에 일부러 김남주 생가 한 번 찾아가야지...
중찬 선배님, 저도 다음번 시제때는 김영랑 시인 생가를 꼭 들려보려 합니다. 남도가 좋은게 참 많군요...
안녕하세요, 해남 김남주 시인 생가 카페를 꾸리게 된 민 경이라고 합니다. 현판식 관련해서 사연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링크시키고 싶어요. 괜찮으실지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단지 사실 관계에 대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만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