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초이지 싶습니다.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상암교회내에서 5일간 목회자들을 위한 '강해설교'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강사는 대구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인 이용* 목사님과 총신대 구약학 교수인 김창* 목사님으로서 한분은 자신의 저술서를 위주로, 또 한분은 자신의 번역본을 중심교재 삼아 말씀을 전했습니다.
청강자는 약 40명, 하루 8시간씩 강행군을 했음에도 강사도 청자도 모두 뜨거웠던 날들이었습니다. 그중 인상적인것은 세미나의 목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수 있나'란 주제임에도 '누구를 위해서 설교를 해야 하나'로 촟점이 모아졌었습니다. 즉, 설교를 잘 할려면 설교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게 먼저란 이야기죠. 강사들은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즐겨하시는 설교본문이 구약이냐 신약이냐, 역사서냐 시가서냐, 복음서냐 서신서냐 등등...
시편을 본문삼아 설교하시는 분들 있냐고도 물었습니다, 또 진담반 농담반으로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현장의 목회자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왜냐구요...대부분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구약보다는 신약을, 그중에서도 즐겨 복음서를 강해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강의를 듣고부터는 구약을 본문으로한 설교도 많이해주십사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설교를 어찌하면 잘하나,
설교를 어찌해야 교인들이 깜빡하고 성도들이 차고넘쳐 교인들이 비가오고 천둥이치는 날에도 성전밖에서 줄을설까. 이런상황은 설교자 입장에선 오매불망하는 꿈이요, 예배10분전 입장하시고, 앞에서 부터 앉아주세요, 걍 오시기만 해도 황송합니다. 그럼에도 말을 듣지않고 오지도 않으니 이런 멘트는 속터지는 장면이 아닐수 없을겁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설교를 멋있게, 재밌게 해야 설교능력이 있고 그래야 교회가 부흥한다는 인식이 깊어진것 같습니다. 해서, 교회부흥에는 뭐니뭐니해도 목회자의 설교가 짱이다 이리되고 목회자들은 설교쨩이 되기위해 설교 크리닉이다 뭐다 하면서 근사한 설교에 목을매니 아나운서 출신들이 운영하는 설교 크리닉센터엔 수강료가 비쌈에도 연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설교가 성도들을 뿅가게 하고 줄을서게 하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걸까요. 평신도 입장에서 아주 쉽게 말하면, 설교자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24절[우리말성경]- 이 말씀대로 말씀을 전할때라 믿습니다.
성경적으로는 어떨까요. 어떻게해서 스데반 집사는 죽음을 불사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님곁을 왔다리 갔다리 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품안을 즐겨 찿아 애기같던 요한은, 극과극을 달음질한 바울은, 순교한 모든 사도들은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은 어찌 말씀을 전했을까요. 그들도 기똥찬 설교를위해 돈 주머니를 들고 설교 크리닉센터를 들락날락 했을까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하나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보고듣고 겪은것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그대로를 증거했습니다. 증거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지는 은혜가 있었으며 그들의 증거가 오늘도 살아 역사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은 모두 세상적으로 볼때 아주 비참하게 외롭게 슬프게 죽었습니다.
모세의 고별사, 여호수아의 고별사, 스데반의 설교, 베드로의 설교, 바울의 설교와 고별사들을 읽어보면 우습기보다는 가슴이 뛰고 설레며 눈물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더우기 예수를 믿어 얻어진 가난과 핍박에 대한 그들의 인간적인 회환과 고민,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외로움은 읽은후에도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고 울음을 삼키게하지 깔깔웃게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세미나 마지막 날, 어느 목회자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질문했습니다. '배운대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교인들이 싫어하고 인기없는 목사가 된다' 했습니다. 이에 강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당신은 누구를위해 설교를 하느냐, 아직도 교인들의 입맛에 맞춰 말씀을 선포하고, 지금도 하나님을 팔아 호의호식 하냐고 비수로 가슴을 찔렀습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후 강사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말씀을 전할때 천사와 같이 빛나듯 당신의 설교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증거할때 빛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들려주길 원하시는 말씀을 전하는게 목사의 사명이지 교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하는게 아니란 이야기죠.
성경속의 위대한 인물들, 그들의 고별사 하나하나가 수천년전의 이야기들임에도 지금도 곁에서 때로는 부르짖고, 때로는 속삭이듯 골수를 쪼개고 가슴을 침니다. 그중의 하나가 사도행전20장에 있는 장면으로서 바울이 장로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고 당부하는 눈물겨운 모습입니다.
이 아침 바울의 가슴이되어 소리내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서,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장로들이 오니,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잘 아십니다. 나는 겸손과 많은 눈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또, 유대 사람의 음모로 내게 덮친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
나는 유대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똑같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우리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보십시요,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성읍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에게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여러분 모두가 내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증언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잘 살피십시요. 또 여러분은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요.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서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년동안 밤낮 쉬지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요.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는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것이 받는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을 마치고, 무릎을 끓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사도행전 20장17~38절[표준새번역]
이러한 설교를 듣고도 통곡하지않을 가슴이 있을까요, 이렇한 설교가 풍성함에도 부흥치 못할 교회가 있을까요. 이러한 설교자와 성도가 바글바글하는 교회에서 갈등이, 갈라짐이 있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근세의 유명한 설교자 촬스 스펄전의 말은 아직도 생명이 있다 믿습니다."진리는 귀에 거슬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은 가슴을 찌른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참지 못하고 경청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훌륭한 성도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자가 필요하지 않다. 대신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사람이 필요하다" (2009.8.7)
박 영구
첫댓글 절절이 가슴을 치는 말씀만 골라 하시는 군요. 그러나 간단하게 할 말만들도 아닌가 싶습니다. 회개 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지 좀 가르쳐 주시구려
잘 지내시죠...^^ 제가 알면 폼나게 '늘빛'을하지 서래옥을 하겠습니까...ㅋ
회개한 자는 가슴에 훈장을 달고 머리에 뿔이 달렸는지요...구별법을 알려주시면 어설픈 답이나마 내 놓을카드가 있지 싶습니다...^^
부부간에도 유별이 필요하겠거늘 목회자와 평신도가 어찌 유별이 없겠나요. 그러나 서로 섬기려 한다면 아름다운 유별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해 봅니다.
부부간이라...음과 양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란 전제하에 구별이 있음을 인정하신걸루 해석해두 되는지요...동전의 양면이 결국은 동전으로서는 하나, 하나님 형상을 닮은 모습의 차이가 아니라 역활의 구분을 말하는거죠
헌데, 계급의 차이로, 신분의 귀천으로 희자됨을 경계하는겁니다...말하고 싶은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 모두, 각자의 삶이 가치가있고 소중하며 아름답다는 것이지 직분에따라 우열이 있고 귀천이 있지 않다는거죠.
다 대답을 하셨으니 할 말이 없군요. 섬김이 담겨 있는 삶이 조금이라도 해답이 될 듯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누가 구별하겠어요. 회개의 문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보고 자녀들에 설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책망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촉구도 해야 겠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의 메세지도 담아야 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바로 위로자의 삶을 사는 것이 겠지요
역시 치열한 사역현장을 누비신 하나님의 장군다우십니다...설교자가 위로자의 삶을 산다...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이라 믿습니다...감사합니다...^^
구약의 설교가 아니라 선지자의 설교를 했느냐는 교수님의 질문인듯 합니다. 어떤이는 구약은 땅에서 누리는 복을 기록한 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네...복합적인 면이 있다 봅니다...구약학 교수인 그는 현장사역자들이 모세오경을 비롯한 예언서 설교보단 복음서나 서신서를 즐겨 설교한다는 통계를 디리 밀드군요...ㅋ
근데, 사실 그렇지 않은가요...구약을 뜨겁게 설교하는 경우보단 복음이 힘차고 역동적인게 사실이잖아요...저도 구약보단 복음서가 능력이 있다고 보는데요...ㅎ
'속죄'는 atonement 라는 하더군요. 작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 합류하는거...'나'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는거...
말은 그렇습니다만,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는 거죠...물리적으로 어찌해야 환상에서 깨지고 그분과 합류 할수 있냐는거죠...요걸 알기쉽게 꼭집어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중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3-4 [표준새번역]
갈라디아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장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