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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해주(海州, 남경), 고려의 해주(海州)
『신당서』 북적열전에 따르면, 대진국(발해) 남경(南京)은 남해부(南海府)라고 불렀는데, 옥주(沃州)·청주(睛州)·초주(椒州) 등 3개 주(州)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또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해주(海州)에 고구려(高句麗) 사비성(沙卑城)이 있었으며 발해(渤海) 때에는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를 두었었는데, 옥주(沃州)·청주(晴州)·초주(椒州) 등 3개 주(州)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초주(椒州) 암연현(巖淵縣)에 옛 평양성(平壤城)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요주(耀州)는 본래 발해의 초주(椒州)였는데, 동북쪽으로 2백리 가면 해주(海州)에 이르며, 초주(椒州) 암연현(巖淵縣)에서 동북쪽으로 1백 20리를 가면 해주(海州)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빈주(嬪州)는 본래 발해의 청주(晴州)였는데, 동남쪽으로 1백20리를 가면 해주(海州)에 이른다.
즉, 초주(椒州)·해주(海州)·청주(晴州) 등의 상호 위치 관계를 그려보면, [그림 1]과 같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 『요사』지리지(해주)
즉, 『신당서』와 『요사』에 옥주(沃州)·청주(睛州)·초주(椒州) 등 3개 주(州)와 대진국(발해)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발해 남경 남해부(南海府)를 해주(海州)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해주(海州)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발해 신라 남북국시대에 주요 지명들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해주(海州)는 대진국(발해) 시기에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였는데,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경운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림 2] 발해 신라 남북국시대에 주요 지명들의 추정지역
그런데 국사교과서에 따르면, 대진국(발해) 주요 지명들의 위치를 [그림 3]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그림 3]국사교과서 대진국(발해) 등의 주요 지명의 위치
즉, 우리나라 역사 주류학계의 의견에 따라 국사 교과서가 쓰여졌는데, 조선초에 뜯어고쳐진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과서에 써진대로 알고 살아도 누가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수의 의견 쪽에 서서 올바른 상식을 갖은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으니 갈등도 없고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앞날을 근심하고 미래 비전을 바르게 세워야 할 지도자 레벨에 있는 사람들은 나라와 민족을 지켜야 할 사명감과 통찰력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올바르지 않다면, 올바른 역사를 찾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이 참에 교과서에 써진 역사에 익숙해서 위 본 연구원의 의견이 황당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묻고 가야겠다.
교과서에 써있는대로 고려의 서경(西京)이 현재의 평안도 평양(平壤)에 있었고 고려 왕경(王京)이 황해도 개성(開城)에 있었다면, 왜 고려 서경(西京)이 북경이 아니고 서경인가?
즉, 평안도 평양(平壤)이 황해도 개성(開城)의 북쪽에 있으니 서경이 아니라 북경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 정도로 문제의식을 남기고, 그간 본 연구원이 연구한 고대 지명들의 위치를 밝히고자 한다.
즉,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진국(발해) 남경(南京) 남해부(南海府)가 해주(海州)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경운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곳은 신라로 가는 신라로(新羅路) 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현종(顯宗, 1009~1031년) 때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西海) 등 5도(五道)와 동계(東界)·북계(北界) 등 양계(兩界)를 두었는데, 서해도(西海道)에 속하는 해주(海州)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는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한다.]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폭지군(瀑池郡)이라 고쳤다.
태조(太祖)는 군(郡) 남쪽에 큰 바다가 있어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종 2년(983년)에 처음 12목(牧)을 설치할 때에 해주가 그 하나였다. (성종)14년(995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면서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부르며 양주(楊州)와 더불어 좌보(左輔)·우보(右輔)로 삼았다.
현종 3년(1012년)에 절도사를 폐지하였다. (현종)9년(1018년)에 4도호부(都護府)를 정해 설치하면서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로 고쳤다. 예종 17년(1122년)에 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고종 34년(1247년)에 해주목(海州牧)으로 하였다. 공민왕 22년(1373년)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목사(牧使) 엄익겸(嚴益謙)을 죽였다. 이때에 주리(州吏)로서 (목사를) 구하지 않은 자를 처형하고 주(州)를 군(郡)으로 강등하였다. 뒤에 다시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대령(大寧)·서해(西海)이고[성종(成廟) 때 정하였다.], 또 고죽(孤竹)이라고 부른다. 수양산(首陽山)·대수압도(大首押島)[수압(睡鴨)이라고도 쓴다. 이하 같다.]가 있고 소수압도(小首押島)·연평도(延平島)[평(平)은 평(坪)으로도 쓴다.]·용매도(龍媒島)가 있다. 속현(屬縣)이 3개, 관할하는 방어군(防禦郡)이 1개, 현령관(縣令官)이 1개, 진(鎭)이 1개이다."
즉,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고려시대 5도(五道) 양계(兩界)의 위치를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
[그림 4] 고려 5도 양계
여기서도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국사 교과서에 써있는대로 그런 줄 알고 살아도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문제가 생길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다만, 민족의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민족의 미래 비전을 바르게 기획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죽으면서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했는데, 실제 천동설(天動說) 대신에 지동설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시기는 거의 300년이 지난 후였다.
이와 유사하게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해서 대략 80%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본 연구원이 제시하는 설이 황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적 기반이 국사교과서에 써있는 역사지식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 10%의 책임감이 있고 예리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비록 국사교과서에 써있는 수준의 역사적 지식만 알고 있더라도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접할 때, 왜 그런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탐구하고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나머지 10%는 뭐가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고려시대의 서해도(西海道)에 속하는 해주(海州)의 위치를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5] 고려 도읍지 천도 추정경로
고려 해주(海州)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된 동기는 고려의 왕경과 서경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의 왕경과 서경의 위치를 기준점으로 잡고 『고려사』 지리지에 근거하여 각 지명들을 대입하면, 해주(海州)의 위치를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삼국사기』에 따르면, 해주(海州)는 삼국시대에 천주(泉州) 또는 천성(泉城)으로 불렸으며, 고려 초에는 개주(開州)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즉, 해주(海州)는 고려 태조 왕건의 출신지로서 고려의 첫 도읍지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918년에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 송악군(松嶽郡)에 에 첫 도읍지를 두면서 개주(開州)라고 불렀으며, 최소한 935년 이전에 고구려 평양성(낙랑)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천도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왕경 개성부는 개국 초기부터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개주(開州)에 있었는데, 현재의 황해도 개성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의 서경 평양부는 개국초기부터 평양(平壤)에 있었는데, 현재의 평안도 평양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고려사』에 써있는대로 믿고 우리 역사를 이해하려 한다면, 조선초의 '꾸며진 역사'를 되뇌이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서 지명(地名) 변이(變移)의 기준은 왕경(王京)과 서경(西京)임을 알아챌 수 있다. 특히 깜짝 놀라운 점은 고려의 왕경은 평양(平壤)에 있었으며, 서경은 평양이 아니라 요동(遼東)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평양(平壤)'이란 도읍지를 의미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고려 왕경은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초기에 개주(開州, 현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였다가 최소한 935년이전에 평양(平壤, 현 산동성 덕주시로 추정)으로 옮겼으며,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1~1259년(28년간)에 강도(江都, 강화)로 옮겼다가 다시 왕경으로 돌아왔고, 1360년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 신경(新京)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 서경은 고구려 요동성이 있었던 요동 지역이었는데, 원(元) 대에 동녕부를 두었으며,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광부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1360년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 도읍을 옮겼으며, '신경(新京)'이라고 불렀는데, '신경(新京)'도 개주(開州)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경(新京)은 '새로운 도읍지'라는 의미로서 평양(현 산동성 덕주시)을 떠나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주변지역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4년에 도읍지를 현재의 서울(한양)으로 옮기기 전에 도읍지 터를 확인하기 위하여 1393년에 현재의 계룡산까지 다녀갔는데, 갈 때는 16박 17일 걸렸으며, 올 때는 14박15일 걸렸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에서부터 충청도 계룡산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1,160km(실제이동거리 약 2,000km)에 달하는 거리이므로 시간 당 10km의 속도로 하루 12기간씩 이동했다면, 약 16.6일 걸리는 거리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울러 고려 해주(海州)는 서해도(西海道)를 관할하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였는데, 서해도(西海道)가 고려 왕경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현재 서쪽에 있는 큰 도시 중에서 서경이 있었던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를 제외하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를 그 당시 가장 큰 도시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외에도 하북성 형태시, 하남성 복양시와 학벽시등을 해주(海州)가 아닌지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서해도(西海道) 에 속해 있었던 지명 중에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외에도 염주(鹽州)·배주(白州)·안주(安州)·황주(黃州)·풍주(豐州)·평주(平州)·곡주(谷州) 등의 위치를 고려하면, 서해도(西海道)를 관할하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의 위치로서는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가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지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이 최초로 조선을 세운 곳(왕검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지역이다.
단군이 최초로 조선을 세운 곳(왕검성)과 도읍지를 옮겼다는 백아산 아사달과 장당경에 관해서는 '단군 조선의 도읍지 천도 추정경로'를 참조할 수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