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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시대, 교회 활동의 기초에는 자기들에게 무서운 책임이 맡겨졌다는 의식이 있었다.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메시지가 사람에게 맡겨졌다. 그 메시지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전파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기독교의 배타성 문제를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되고 직접 대면해야 한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인종의 사람, 모든 종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약속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할 수 있는 풍부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구원의 길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면, 이는 구원의 길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 방법을 받아 가지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의 잘못이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책임이 연약하고 악한 사람의 손에 맡겨질 수 있는가? 차라리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새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함으로 구원이 전달자의 충성에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기독교의 구원의 길이 사람에게 엄청난 책임을 맡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통상적인 일들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지는 책임과 비슷하다. 부모는 자녀의 신체뿐 아니라 영혼에도 상처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이 책임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의 여지가 없이 존재하는 책임이다. 예수의 이름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교회의 책임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엄청난 책임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존재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다른 방법들과 유사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죄책은 개인의 것이며, 만약 나의 잘못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도록 만든다고 해도 그로 인해 나의 죄책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병사가 당하는 자발적 죽음은 그것이 자기희생의 지고의 실례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자기희생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갈보리에서 성취된 것과 전혀 다르다. 전쟁에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죽음은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보호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죄값을 씻는 일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의의 대한 진짜 대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다른 예들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도리어 그 둘 사이의 심오한 차이점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유사성을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람들이 예수의 인격의 장엄함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자기희생의 예는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오래전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이 한 사건에만 관심을 쏟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를 언급하면서 “죄의 값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선행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각 사람은 이제 평화 시에나 전시에 어떤 고귀한 대의를 위해 결정적 행동을 취할 만큼 용감하다면 죄의 값을 충분히 지불할 만큼 선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까지 그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단지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도덕적인 세계의 가장 중심에 있는 비밀의 주인이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는 우리 죄를 담당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속죄 교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죄를 속한다는 현실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심지어 교회에서 부르는 십자가 찬송도 예수라는 인물을 높게 여기는지 낮게 여기는지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네! 나를 끌어 올리는 것이 십자가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 혹은 고난들이다. 분명히 복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는 자랑하네. 시간의 잔해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 거룩한 이야기의 모든 빛이 그 장엄한 머리의 주위에 모이네.” 여기서도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충만한 기독교적 감각을 아쉬워하게 된다. 십자가가 높여지기는 하지만 이해되지는 못하고 있다.
“영광의 주가 달려 죽은 놀라운 십자가를 살펴보고 나의 부요를 손실로 여기고 나의 모든 자만에 조소를 퍼붓네”. 여기서 참된 기독교적 정서의 어조가 들린다. 갈보리에서 고난당한 이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영광의 주라는 이해에 도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과 사회의 소망을 위해 흘려진 예수의 고귀한 피 한 방울이, 역사의 전쟁터에서 흘려진 모든 피의 강보다도 더 큰 가치를 가진다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에 대한 반대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장엄한 기독교적 감각 앞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오늘날 자연주의적으로 재구성된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난당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영광의 주에게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만약 오늘날 반대자들의 말대로 대속적 죽음이라는 관념이 그렇게도 불합리하다면, 그 죽음에 근거한 기독교 경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현대 자유주의 교회는 경험에 호소하기를 좋아한다. 갈보리에서 오는 복된 평안에서 기독교의 경험이 발견되지 않으면, 어디에 참된 기독교적 경험이 있는가?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가지기 위한 자기의 모든 노력,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열광적인 시도가 다 무익하며,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자기를 비난하던 모든 기록을 지웠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만이 이 평안이 온다. 이 복스러운 지식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의 깊이를 누가 측량할 수 있는가? 이는 “속죄의 이론” 혹은 인간 망상의 속임인가? 아니면 참된 하나님의 진리인가?
그런데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이 남아 있다. 이 비판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소외된” 모습으로 그려지고, 값이 지불되기를 냉정하게 기다렸다가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면, 이 얼마나 저급한 신관인가, 하고 현대 자유의자들을 외친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원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화해는 순전히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반론은 물론 죄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에 근거해 있다. 만약 자유주의 교회가 가정하는 것처럼 죄가 사소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도 가볍게 간주될 것이며, 하나님은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난 일은 지난 일이라고 처리하는 것은 듣기에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일이다. 같은 인간에게 범해진 죄의 경우에도 이런 식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죄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낭비되어 버린 삶의 돌이킬 수 없는 죄책을 누가 측량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런 죄책을 위해서까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는 샘을 제공했다. 하나님은 마치 옷을 입히듯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심판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선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진정한 도덕적 질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감히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간주할 수 있는지 이상하다. 예수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공의를 그분의 사랑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오직 사랑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무서운 말로,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말했다. 그는 보응적 정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오늘날처럼 죄에 대한 가벼운 견해를 받아들였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현대 자유주의 교사들은 “소외된” 혹은 “분노한” 하나님이라는 교리는 끔찍하다고 말한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을 지적하면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와 예수 자신의 분노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또한 예수의 모든 교훈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교훈과 모범에서 이렇게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을 예수의 참된 제자로 간주할 수 있는가? 진상은 이렇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교훈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는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체 신약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 자신의 교훈과 완전히 어긋난다. 사람이 일단 죄에 대한 유죄 선고를 진정으로 받았다면, 그는 십자가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상을 말하자면, 속죄 교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속죄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교리 그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오해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대해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이 마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드린 제물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값이 지불될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다가 지불된 후에야 죄를 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는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본적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린 이는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의 위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준 아버지의 위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제물을 드린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아무 값없이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다. 엄청난 값은 하나님이 지불하고 그 유익은 우리가 얻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런 사랑은 현대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느긋함과는 매우 다르다. 이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이 사랑, 오직 이 사랑만이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준다. 실로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도 기쁨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된 방법으로 찾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떻게 하면 기쁨이 될 수 있는가? 당연히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을 우울한 독재자나 엄격하고 의로운 재판관으로 간주하지 말고, 오직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만 간주하자고 권한다. 옛 신학의 공포여, 사라져라!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신을 경배하자!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종교가 기쁨을 위한 길이라는 이 제안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이 효과가 있는가? 둘째, 그것은 참된가? 그것이 효과가 있을까? 당연히 효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 자녀에게 영원한 고통을 가는 일이 결코 없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자 사랑의 아버지가 우주의 통치자인데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만약 모든 죄가 반드시 사해질 것이라면 후회의 아픔이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감사하지 않는다.
현대의 설교자가 자기의 역할을 아주 열심히 행한 후에도- 즉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불쾌한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 그에 어울리는 유창한 언어로 경축한 후에도- 회중은 어쩐지 옛날의 그 기쁨의 열광 속으로 들어가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진상을 말하자면, 현재 설교 속의 하나님은 매우 선할지는 모르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신이다.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유머만큼 무미건조한 것도 없다. 그렇게 희생을 치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만약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용서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경 쓸 것이 무엇인가? 그런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의 두려움에서 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국은, 만약 그런 천국이 존재한다면, 죄로 가득할 것이다.
사람을 격려하기 위한 오늘날의 신의 개념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또 다른 반대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과 친절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자연을 통해? 인간의 통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당신이 우울하다고 거부하려는 그 신의 개념을 이전 신학자들은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 너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가 당신의 근거인가? 이것은 더 좋지 않은 주장이다. 저 바깥 어두운 곳과 영원히 타는 불,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말한 분이 바로 예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당신의 위로를 주는 신의 개념을 위해 오늘날 당신에게 직접 내려진 계시에 호소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밝은 면만을 보는 방식으로는 종교가 기쁨이 되지 못한다. 한편으로 치우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 영혼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은 진짜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은 재앙으로 끝나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불가침의 신비 속에 둘러싸여, 두려운 공의 속에 존재한다. 사람은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로 자신의 형편을 최대로 활용하며 감옥을 싸구려 금장식으로 치장하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은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기쁨의 여지는 없고 오직 심판과 불같은 분노를 두려운 마음으로 예상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은 현대 설교에 등장하는 위로하는 하나님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나은 점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창조나 자신의 피조물에게 얽매이지 않으며, 기이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복음은 이 메시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던 것이었다. 구원의 방법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더욱 아무도 몰랐다. 그 탄생, 그 생애, 그 죽음, 왜 그것이 그런 방법으로 그때 거기서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너무나 지역적이고, 너무나 특정적이며, 너무나 비철학적이고, 기대할 수 있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구원 방법이 더 낫지 않은가?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왕하5:12)
그러나 만약 그것이 참되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가장 크신 자가 가장 사랑이 많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준 바 되었고, 모든 시대의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어졌고, 현자와 지자에게 감춰졌던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났으며, 오랫동안 갈망했지만 성취될 수 없었던 죄의 정복이 신비한 은혜에 의해 이루어졌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거룩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참으로 이것, 오직 이것만이 기쁨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 가까이 있는 기쁨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하나님, 오직 사랑뿐이고, 오직 아버지 외에 다른 분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더 안전하지 않을까? 이런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죄가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호와를 보고자 한다. 절망하고, 소망하고, 떨며, 반신반의하고, 모든 것을 예수에게 의탁하면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감히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임재 앞에서 산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 오직 그것만이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세워 준다. 주 예수가 그들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지불했고, 그들을 완전한 의로 옷 입혀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세워 준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그 이상의 일을 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새롭고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을 죄책에서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내가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말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따라왔다. 그리고 그 부활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죽음에서 일어나 영광과 능력의 새생명으로 들어갔으며, 그가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데리고 그 생명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초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