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34산우회 峨嵯山-龍馬山 종주
2015.04.05(일) 10:40 산우회원 11명은 전철 5호선 광나루역을 출발하여 아차산성-아차산 1보루
-아차산 3보루-아차산-용마산-팔각정-용마산역까지 4시간(점심시간 50분 포함)을
걸었다.
아차산의 漢字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는데, 고려시대 金富軾의
<三國史記>에는 '阿且'와 '阿旦' 2가지로, 조선
世宗 때의 <高麗史>에는 ‘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龍馬峰(山)-忘憂山-烽火山 등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太祖 李成桂의 諱가 ‘旦’이기
때문에 ‘旦’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고치면서 旦 대신에
모양이 비슷한 ‘且’자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자를 고쳐 썼다고 한다.
(*諱: 끄릴/숨길 휘. 죽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
阿嵯山은 해발 287m로 높지는 않으나 주변 漢江 流域 저지대를 觀測∙統制할 수
있는 瞰制高地로
삼국시대의 戰略的 要衝地였으며 新羅∙高句麗∙百濟의 爭奪戰이 벌어진 곳으로 삼국시대의 山城과
堡壘群이 있다. (*瞰: 굽어볼 감)
廣壯洞과 九宜洞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阿且山城(사적 제234호)은 서기475년蓋鹵王이
백제의 수도 漢城을 포위한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어 백제는 한성에서 熊津(현재 公州)으로
遷都하게 되었으며 또 고구려 溫達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戰死한 곳으로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나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이 벌어진 삼국시대의 중요한 要塞였다.
阿且山 一帶 堡壘群(사적 제455호)은 고구려가 5세기 후반 한강유역을 진압한 후 신라와 백제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6세기 중반까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中浪川과 아차산, 용마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으로 紅蓮峰 1∙2보루와 아차산 1∙2∙3∙4∙5보루,
용마산 1∙2∙3∙4∙5∙6∙7보루, 시루봉보루, 水落山보루, 忘憂山보루 등 17개의
보루로 그 중 10여 개의
보루가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堡壘(堡壘城): 四方을 관측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
날씨는 흐리고 서울지역 기온(10:00~14:00) 10℃, 바람은 동풍 4.8m/sec, 오후에는
이슬비(강수량 0.5mm)가 내려 제법 싸늘한 날씨였다.
산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2회로 나누어 올린다.
2015. 04. 06 孤 山
朴 春 慶
경복34산우회 峨嵯山-龍馬山 종주(2-1)
(00) 아차산-망우산 지도
(01) 전철 5호선 광나루역 1번출구
(02) 紫木蓮꽃
(03) 정자를 지나면서
(04) 서울 둘레길 표지, 서울 둘레길은 아차산길과 겹친다.
(05) 아차산 생태공원에 있는 <人魚像> -조각가 김오성 작-
(06) <사랑의 손> -唐津 金昌熙 작-
(07) <溫達 將軍과 平岡公主>
*溫達 장군이 충북 丹陽 溫達山城(사적 제264호)에서 戰死했다고도
하나 당시 三國의 형세로
볼 때 고구려의 군대는 남한강의 상류 단양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탈환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阿且山城이 溫達이 전사한 阿旦城으로 보고 있다.
(08) 꽃 이름은...?
(09) 아차산성 -사적 제234호-
阿且山城은 阿旦城∙長漢城∙廣壯城이라고도
하며,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에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남∙서쪽에 城門
터가 남아 있다.
아차산성은 백제지역이었으나
고구려가 차지했다가 신라가 점령하여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要塞였다.
(10) 현호색
(11) 낙타고개. 왼쪽으로 가면 관리사무소, 오른쪽은 고구려 대장간마을로 간다.
(12) 아차산 일대 堡壘 위치도
(13)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1보루로 올라가는 데크계단. 오른쪽으로 가면 大聖庵에 이른다.
(14) 낙타고개-1보루 데크계단을 올라가면서
(15) 활짝 핀 진달래꽃, 꽃 색깔이 유난히 진하다.
(16) 전망대에서 본 九宜洞과 한강 너머 잠실지역
(17) 서울 廣津區 해맞이 명소
(18) 해맞이명소 전망대를 떠나면서
(19) 아차산 1보루(해발
250m)
1994년 地表調査할 때 고구려 土器조각이
여러 개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남쪽과
남동쪽으로 아차산성과 한강 건너 風納土城과 夢村土城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북동쪽(200m)으로는 아차산 5보루를 볼 수 있다.
(20) 아차산 5보루(해발
267m)
둘레 약 158m, 내부면적 약 1,818㎡로 이곳에서는 한강 남쪽의 岩寺洞에서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잠실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조각이
여러
점 발견되어 三國時代 堡壘를 파괴하고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1) 아차산길, 성터인 것 같다.
(22) 아차산 명품 소나무 제1호와 전망대, 廣津區 九宜洞과 江南 일대가
잘 보이는 곳이다.
(23) 阿且山 3堡壘(해발
296m)
아차산 능선 6개 보루 중 한 가운데 있는 보루로 동남쪽의 아차산 2보루와 漢江
이남,
서쪽의 용마산 보루들을 바라볼 수 있는 要衝地로 성벽 둘레 약 450m, 내부면적 6,500㎡로
아차산 일대의 보루 중에서 가장 큰
보루이다.
2005년 발굴조사에서 배수로와 여러
개의 建物基壇, 성벽 등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디딜방아의
볼씨로 추정되는 것이 발굴되어 아차산 일대의
병력의 식량지원 기지로 추정하고 있다.
(24) 광진구-구리시 경계 표지
아차산 능선은 서울 廣津區와
경기 九里市의 경계로 이 길을 걸으면 ‘왼발은 서울시,
오른발은
경기도를 밟게 된다.’
(25) 아차산 4보루
아차산 일대의 보루는 고구려
長壽王 63년(475)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20여개의 보루를
만들어 서기 551년 철수할 때까지 前哨基地로 활용하였다.
아차산 4보루의 성벽은 둘레 249m로 외부감시와 방어를 위한 雉를 설치하고, 성벽 안쪽의
건물터에는 온돌, 배수로, 貯水槽 등을 배치했으며 이곳에서는 항아리∙銘文접시 등 그릇과
鬪具∙화살촉 등의 武器, 낫∙쇠스랑 등의 農器具, 재갈∙등자와 같은 馬具가 발견되었다.
(26) 4보루 저수시설과 서쪽으로 보이는 용마산-용마산 4보루(오른쪽)
4보루에서는 저수공간 430cmx300cmx깊이 230cm와 350cmx310cmx깊이 240cm의
2개의 貯水槽가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저수조를 메우고 흙을 돋우어 위치를 표시하였다.
(27) 아차산 4보루
(28) 아차산 4보루 치
雉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킨 시설로
아차산 4보루에는 5개소의
치가 설치되었다. (*雉: 꿩 치)
(29) 아차산 4보루 치에서 본 한강
작년 11월에 개통된 길이 1,130m의 九里岩寺大橋가 보인다.
(30) 아차산 4보루를 떠나 용마산으로 향한다.
(31) 용마산 제2헬기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차산 4보루에서 내려와 긴고랑 갈림길이 있는 鞍部를 지나면 계단이다.
(32) 뒤돌아 보면 아차산 정상의 아차산 4보루(왼쪽)와 아차산 3보루가
보인다.
(33) 용마산 제2헬기장으로….
(34) 흙이 보이지 않는 바위 틈에 핀 끈질긴 진달래꽃
植物은 씨가 떨어진 곳에서
싹이 트면 움직일 수 없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은 어떤 동물도 따라갈 수 없다.
(35) 전망대에서
(36) 용마산 제2헬기장
서쪽으로 용마산 제4보루가 보인다. 북쪽(오른쪽)으로 계속 가면 忘憂山으로 간다.
(37) ‘金剛山도 食後景’. 용마산 제4보루에서.
(38) 식사보다 ‘頂上酒’가
더 급한가 보다.
(39) 乾杯
(40) “祝賀합니다”. 경복34산우회
- 경복34산우회 峨嵯山-龍馬山 종주(2-2)에
계속 -
첫댓글 고산 수고가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