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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 55호 * 위치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
사백 육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紹修書院 |
백두대간의 정기를 머금은 소백산자락 영귀봉(靈龜峰)아래 위치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 ~1554)선생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평소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 하고 다음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의 시초이다.
주세붕은 그의 저서 『죽계지 ( 竹溪志 ) 』 서문에서 ‘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존현(尊賢)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을 존봉하는 사묘를 세웠고 겸하여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 ' 라고 하여 사묘와 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에 대해 밝히고 있다.
한편 주세붕은 ‘ 백운동서원 ' 이라 이름한 것에 대해 “ 왼쪽으로는 죽계수가 휘감아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소백산이 높이 솟아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과 물줄기가 실로 중국 송(宋)나라때 주희(朱 熹 1130~1200) 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이 있는 여산(慮山) 에 못지 않다 ” 고 여겨 백 록동서원을 본받은 것과 아울러 또한 “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이 있는 골짜기에 가득했기 때문이 다 ” 라고『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 』에 적고 있다 .
주세붕이 안향선생을 배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소수서원에는 이후 1544년(중종39)에 안축(安軸, 1287~1348)과 안보(安輔,1302~1357)가 추가 배향되었다. 1546년(명종1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1501~1560)의 노력으로 서원의 향사와 토지, 서적의 운용과 관리 등에 관한 서원의 운영방책이 보완되고 경제적 기반도 확충되어 서원은 확고한 기반 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1633년에는 설립자인 주세붕 선생이 소수서원에 추가 배향되었다.
그 후 1548년(명종 3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1549년 정월에 관찰사 심통원(深通源, 1499~?)에게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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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 이후라야 근본이 있게 되어 장원(長遠)하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침에 가득 찼다가도 저녁엔 메말라버리는 근원 없는 물과 같으리니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 " 처음 설치된 서원이 마침내 쇠잔해버릴까 두려워 직접 조정에 청원코자 했으나 길이 멀고 말이 미약하여 이루지 못했는데 감사께서 아뢰어 송나라 故事대로 서적과 편액이며 토지, 노비를 내리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
이를 허락한 명종(1534~1568)은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고 ‘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 (旣廢之學 紹而修之 ) ' 는 뜻을 담은 ‘ 紹修 書院 ' 으로 1550년(명종5년) 2월 친필 편액을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를 하사했다. 이와 같이 백운동서원이 퇴계 이황에 의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면서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학문의 도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敎化)사업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퇴계는 서원이 관학인 향교에 대응하는 공인된 사립고등 교육기관으로 성리학의 실천도장이자 道學의 아카데미가 되게 하였다.
한편 퇴계와 얽힌 소수서원이 간직한 특별한 역사는 소수서원을 한층 가치 있게 한다. 서원이 조선시대 엘리트 유생들의 수학공간으로만 여겨지던 당시 퇴계는 배움을 열망하던 무쇠장이 배순(裵純)을 제자로 삼아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 (有敎無類)' 라는 교육의 평등정신을 몸소 실천 하셨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사립대학이며 또한 평민교육의 실천도장으로서 한국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이룬 곳이며 예로부터 영남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부르게 된 뿌리 이기도 하다. 서원에서 수학한 유생들의 이름을 적은 입원록(入院錄)에 따르면 소수서원은 문을 닫는 1888년까지 총 4000 명의 유생이 수학했으며 각 당대 활발한 활동을 했던 월천 조목(月川 趙穆),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과 그의 4형제 등은 모두 소수서원이 배출한 주요인물들이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그 명맥을 유지한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소장 유물로는 국보 제111호인 회헌 영정과 보물 5점, 도유무형문화재 3점을 비롯한 전적(典籍) 등이 있다. |
소수서원의 배치구조 |
최초의 서원답게 조선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건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우선 강당 좌우에 있어야할 동 · 서재(東 · 書齋)가 없고 4개의 재실인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가 독립적으로 산재하며, 다른 서원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영정각 건물이 있다. 또 후대의 서원처럼 누각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경렴정(景濂亭)이란 정자를 세워 후대 서원의 누각이 지녔던 풍류 기능을 대신하였다.
또한 건물들의 배치와 외부 공간 구성에도 일정한 틀을 발견할 수 없다. 정문을 들어서면 측면을 앞으로 하고 있는 강당이 나타나고 경내의 한 구석에 높은 토대 위에 사당이 이루어져 있어 강당과 사당은 각각 남향으로 독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일반적인 삼문(三門)의 형태가 아니라 외문으로 된 것도 다른 점이다.
다만 교육기능의 강학당과 제향기능의 사당의 위치는 우리나라 대부분이 따르고 있는 중국식의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은 배움의 공간 뒤는 제향의 공간)의 방식을 택하지 않고,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서 배움의 공간은 동쪽에, 제향의 공간은 서쪽에 세워 이른바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위치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이 비록 가시적인 질서 없이 배열되어 있지만 그 나름대로 정돈된 통일성을 가지 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외부마당은 단아한 멋을 느낄 수 있으며, 형편과 필요성에 따라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며 건물들을 앉혀나간 선현들의 실용적인 정신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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