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 언덕에 있는 아자빨라라는 니그로다 나무에서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2.그때 세존께서 홀로 고요히 앉아서 명상하는데 마음에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3.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념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 한다. 그러나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 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4.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와같이 예전에 없었던 훌륭한 시들을 떠올렸다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5.이와같이 세존께서는 숙고해서 주저하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기울이셨다.
6.그때 범천 싸함빠띠가 세존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시는 바를 알아차리고 이와같이 생각했다.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주저하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기울이신다면 참으로 세계는 멸망한다. 참으로 세계는 파멸한다."
7.그래서 범천 싸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범천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의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8.그리고 범천 싸함빠띠는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같이 말했다.
싸함빠띠]
"세존이시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거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뭇삶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쇠퇴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자도 있을 겁입니다."
9. 이와 같이 범천 싸함빠띠는 말했다. 말하고 나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싸함빠띠]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 낸
오염된 가르침이 마가다 국에 나타났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라.
청정한 분께서 깨달은 진리를 들어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현자여,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자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자께서는
생사에 지배받는 슬픔에 빠진 뭇삶을 보시오.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일어서십시오
허물 없는 캐러밴의 지도자여, 세상을 거니십시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십시오.
알아듣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10.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요청을 알고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11.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한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12. 마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연못에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수중에 잠겨 자라고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으며,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 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 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13. 보고 나서 범천 싸함빠띠에게 시로써 대답하였다.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상처받는 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으려 하였었네(않았네)."
14.그때야 비로소 범천 싸함빠띠는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실 것을 내게 허락하셨다." 그는 세존께 인사드리고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그곳에서 사라졌다.
첫댓글중생의 근기로 깨침의 세계 화엄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고뇌하신다. 그대로 열반에 들고자 하나 다행히도 천인 정거께서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이후 45년간(49년설도 있다) 법화를 드러내시기 까지 방편시교를 펼치신다. 중생교화 방편의 길이 깨치신 이 붇다의 갈 길이다.
부처의 말씀 잘 받들어 나와 나의 주위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자.마음의 문을 연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부처도 그 길이 어려운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하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범천히 간곡하게 부탁을 한것이다.범천이 실상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나 범천의 부탁이 없었다면 불법도 없었을것이다.귀한 진리를
위에서는 긍정적으로 두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그러나 오늘은 부정적으로 몇가지 의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자비와 지혜는 다를까요? 왜 대지혜를 얻으신 분이 설법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대 자비를 못내셨을까요)? 이말은 싯탈타는 처음부터 자신의 평안만을 얻기 위하여 수행하였다는 말이 아닌가요?
토론하며 공부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자신만의 무고안온함을 위해 수행을 했지만,,, 대자대비 없이 진리만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할 수 없지요. 번역은 번역자에 따라 아, 어가 다를 수 있는데 그 한문장에 매어 시시비비 분별하는 마음 찾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요?
청강님 반갑습니다. 밑에 게시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여기서 하고자하는것은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이해" 즉, "正見"을 세우는 일입니다..님이 말씀하신 직지인심, 견성성불...같은 단어들을 초기불교에서는 무어라고 말하나? 같이 공부해보는 자리입니다...와서 볼수있고 들을수 있고 증명될수 있는것
이다...라는 것은 초기불교의 말씀입니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별명이 분석주의자 였다고 합니다. 인간을 오온으로 설명하여 무아를 드러내셨고 세계를 12처로 분석해 존재론적 견해를 깨뜨려 주셨습니다...이해와 분석...이자리도 그런 흐름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부처는 중생이 불쌍하다고 하였다.자비로운 마음으로 설법을 하셨다.그러한 마음을 낸다는것은 어찌됐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 접근 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범천은 어찌하여 부처가 느끼는 이 진리가 진리임을 알아 보았을까...이미 부처가 깨달음을 알았을때도 어떠한 높은 진리를 알고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았을까...다만 그랬다면 범천 자신이 할수도 있었을텐데....왜 부처의 입을 빌려야 했을까....아마도 그때는 신(존재하는 자연들의 어떠한 모습들)과 인간의 거리가 지금과는 다른 것이였을까...인간에게 설하는 법은 인간이 행해야 되는 이유는 인간의 법은 인간이 만들어야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처님이 가지시는 고뇌는 중생들의 삼독심에 발로하는 고뇌가 아니라 중생들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대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당연히 무문자설(화엄도 무문자설이 아닐까요?)의 방식으로 보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쉽게 하셨겠지요. 경전 구성상 권청에 의한 전법륜이 보다 극적이기에 채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알지 못하는사이 자기만 알고 가버린 사람들이 있기도 할것이다.허나 부처가 왜 끊임없이 고행을 하며 그 해탈의 길을 염원했는지는......부처가 출가했던 그 마음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싯탈타가 출가한 이유가 중생이 ,이렇게 왜 살아야 되는지의 의문에서 비롯된다.시작과 끝이 일맥상통하는것 같다.
첫댓글 중생의 근기로 깨침의 세계 화엄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고뇌하신다. 그대로 열반에 들고자 하나 다행히도 천인 정거께서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시기를 간청한다. 이후 45년간(49년설도 있다) 법화를 드러내시기 까지 방편시교를 펼치신다. 중생교화 방편의 길이 깨치신 이 붇다의 갈 길이다.
부처의 말씀 잘 받들어 나와 나의 주위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자.마음의 문을 연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부처도 그 길이 어려운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하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범천히 간곡하게 부탁을 한것이다.범천이 실상은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나 범천의 부탁이 없었다면 불법도 없었을것이다.귀한 진리를
알아보는 범천에게도 감사한다.매순간 열렸다 닫혔다 하는 나의 마음과 주위의 마음들....마음자리 잘알아서 빠삐만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겠다.
부처님의 중생 가여워하시는 마음 느끼며,,,,알아차림 공부를 열심히 해보려,,,합니다..()_
위에서는 긍정적으로 두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그러나 오늘은 부정적으로 몇가지 의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자비와 지혜는 다를까요? 왜 대지혜를 얻으신 분이 설법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셨을까요(대 자비를 못내셨을까요)? 이말은 싯탈타는 처음부터 자신의 평안만을 얻기 위하여 수행하였다는 말이 아닌가요?
또 범천이 간청하여 마음을 곧 돌리신것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인정하신 걸까요? 그렇다면 깨달은 분이 그렇게 처음부터 막혀서야 되겠습니까?....제가 좀 과격하게 의문을 제기해 보았습니다....
토론하며 공부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처음에는 자신만의 무고안온함을 위해 수행을 했지만,,, 대자대비 없이 진리만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할 수 없지요. 번역은 번역자에 따라 아, 어가 다를 수 있는데 그 한문장에 매어 시시비비 분별하는 마음 찾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요?
마음...보고 듣는 경계따라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는 이 마음이 무었언지???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후박나무님께 차한잔 올립니다. 합장
청강님 반갑습니다. 밑에 게시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여기서 하고자하는것은 "초기불교에 대한 바른이해" 즉, "正見"을 세우는 일입니다..님이 말씀하신 직지인심, 견성성불...같은 단어들을 초기불교에서는 무어라고 말하나? 같이 공부해보는 자리입니다...와서 볼수있고 들을수 있고 증명될수 있는것
이다...라는 것은 초기불교의 말씀입니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별명이 분석주의자 였다고 합니다. 인간을 오온으로 설명하여 무아를 드러내셨고 세계를 12처로 분석해 존재론적 견해를 깨뜨려 주셨습니다...이해와 분석...이자리도 그런 흐름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부처는 중생이 불쌍하다고 하였다.자비로운 마음으로 설법을 하셨다.그러한 마음을 낸다는것은 어찌됐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각으로 접근 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범천은 어찌하여 부처가 느끼는 이 진리가 진리임을 알아 보았을까...이미 부처가 깨달음을 알았을때도 어떠한 높은 진리를 알고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았을까...다만 그랬다면 범천 자신이 할수도 있었을텐데....왜 부처의 입을 빌려야 했을까....아마도 그때는 신(존재하는 자연들의 어떠한 모습들)과 인간의 거리가 지금과는 다른 것이였을까...인간에게 설하는 법은 인간이 행해야 되는 이유는 인간의 법은 인간이 만들어야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ㅎㅎㅎ 아란도님의 말씀처럼 범천이 대체누구였는지....그분이 부처님께 청법하지 않았다면....하는 아찔한 생각도 드네요.ㅎㅎ 그렇다면..다시 부처님은 범천이 권하지 않으면 설법하지 않았을까요? 제생각엔 그래도 무슨핑게?를 대서라도 설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부처님이 가지시는 고뇌는 중생들의 삼독심에 발로하는 고뇌가 아니라 중생들을 성숙시키고자 하는 대자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당연히 무문자설(화엄도 무문자설이 아닐까요?)의 방식으로 보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쉽게 하셨겠지요. 경전 구성상 권청에 의한 전법륜이 보다 극적이기에 채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알지 못하는사이 자기만 알고 가버린 사람들이 있기도 할것이다.허나 부처가 왜 끊임없이 고행을 하며 그 해탈의 길을 염원했는지는......부처가 출가했던 그 마음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싯탈타가 출가한 이유가 중생이 ,이렇게 왜 살아야 되는지의 의문에서 비롯된다.시작과 끝이 일맥상통하는것 같다.
중생의 고달픔의 의문에서 중생의 고달픔을 덜어주는 그 길까지...싯탈타의 마음은 애초부터 자비로 시작되어진 것이다.자비란 사람마다 크기가 다르다.그릇이 다르듯이...싯탈타의 그염원의 크기가 해탈하고나서도 또한 중생에 대한 자비로 이어진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