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 성장촉진제> -양승국신부- 요즘 이 세상이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극점을 향해 치닫는다는 것을 수시로 느낍니다. 또래가 먹는 "성장촉진 보조식품"을 보고 자기도 "성장촉진제" 좀 구해달라고 제게 떼를 쓰는 아이(제 때 못 먹어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체구가 너무도 왜소해 보이는 아이)를 볼 때마다 아이의 고달팠던 지난날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물이 앞섭니다. 주말이 오면 함께 외출이라도 나가 "초고속 성장 촉진제"라도 한 병 사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언젠가 만난 한 할머니의 사연도 기가 막혔습니다. 자식들이 알아서 조금이라도 용돈을 주면 좋겠는데, 용돈 받은 기억이 너무도 가물가물하다는 할머니. 단돈 천 원 짜리 한 장이 아쉬워 죽겠다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짠해" 보였습니다. 할 수 없이 제 용돈에서 거금 만원을 빼내 손에 쥐어드리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요즘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면 경제적인 문제로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절박한 상황 앞에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앞에서 피같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여유 있는 분들의 관대한 나눔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시기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한 부자(돈 많은 세관장)의 회개 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가장 안타깝게 보이던 부류의 사람들이 "모을 줄만 알았지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 "꽉 움켜 쥔 손을 죽어도 펴지 않는 부자들", "세상 뜰 날이 다가오는 데도 끝까지 재물을 하늘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세관장 자캐오 역시 돈이 너무도 많았기에, 또 돈의 위력을 늘 실감하고 살아왔기에,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재물을 하느님처럼 모시고 살아가던 사람들의 전형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자캐오는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회심의 기회를 잡습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예수님과의 만남, 극히 짧은 만남이었지만 자캐오는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캐오의 회개여정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회개다"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캐오는 갑자기 다가온 주님의 초대(자캐오야, 나무에서 어서 내려오너라)에 즉각적으로 응답합니다. 지체 없이 "예, 주님!"하고 무화과나무를 타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억지로가 아니라 온전한 자유의지로,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십니다. 자캐오는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또 얼마나 기특합니까? 회개여정을 시작한 자캐오는 예쁜 짓만 골라서 합니다. 행동 하나 하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다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자캐오의 이 말은 예수님께서 가장 바라시던 응답이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캐오의 회개처럼 구체성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캐오의 회개처럼 그릇된 생활 태도를 구체적으로 바꾸겠다는 실질적인 다짐이 요청됩니다. 우리의 지난 그릇된 과거를 기워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지한 반성을 토대로 한 철저한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결실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 - 엘르아잘(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그는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학자였다. 박해자들은 강제로 그의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지키고 명예롭게 살기 위하여 자진하여 태형대로 가면서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그를 살리기 위하여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고기를 준비했다가 그것을 먹도록 주면서 왕의 명령대로 희생제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체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순교를 당함으로써 율법을 위해 고상하고 훌륭한 죽음을 택하여 젊은이들에게 좋은 표본을 보였다. 그는 목숨보다 순교를 택함으로써 동포들에게 용기의 모범과 덕행의 본보기를 남긴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옛말이 있다. 사는 것은 그만큼 좋은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 살기 위한 것이다. 먹고, 자고, 놀고, 일하고, 재물을 모으고, 지식을 쌓는 등 그 모든 행위들이 살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고, 괴롭히고, 악을 행하고 살인을 하는 것도, 그 모두가 자신이 살기 위해서, 보다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본능이고,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끼치면서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사는 것은 그만큼 좋은 것이다.
그런데 엘르아잘은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 더 살 수 있었지만, 오히려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그가 삶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역시 삶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했지만,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삶을 소중하게 여겼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서 목숨을 연장할 수 있을지라도 결국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연장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만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삶의 자세는 곧 다른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으며, 덕행의 모범이 되었다.
삶은 소중하고 고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중하고 고귀한 삶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삶을 주신 하느님이 더욱 더 소중하고 고귀하다. 때문에 삶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승에서도 뭇사람들의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이상으로 갚아주신다.
오늘 우리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이 되고, 그럼으로써 이승에서나 저승에서 영광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자..............◆
어제는 월요일, 저한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쉴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제 방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원고청탁을 해서 이번 주 내로 써야 할 양이 A4 용지로 70페이지, 이번 달 말까지 100페이지 가량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쉬는 날에 많이 써야 어떻게든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제는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서 글을 쓰고 있었지요. 이런 제 자신에 대해서 괜히 화가 나더군요. 그런데 문득 옛날에 보았던 텔레비전 프로가 떠올리면서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갖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범죄자가 경찰에 쫓기다가 죽음을 당하는데, 죽은 뒤에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천사를 만납니다. 그 남자는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천사를 보면서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천국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죄도 많이 지었는데……. 운이 너무 좋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돈을 원하면 돈이, 먹고 싶은 음식을 청하면 당장 맛있는 음식이 차려집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원하면 바로 미인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삶이 지루해진 이 남자는 천사에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지요. 천사는 “이곳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지만 일해서 얻을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남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삶이 점점 더 무료하게 느껴지면서 마침내 천사에게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천사가 악마로 변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여기가 바로 지옥이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지옥인 것이지요. 단지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만으로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을 안 했으면 하며, 고통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은 결국 지옥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묵으시겠다고 하자, 자캐오는 너무나 기뻐서 이렇게 말하지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는 세관장으로써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부를 통해서 즐거움을 추구하고 어느 정도 고통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부만으로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지요.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떤 길이 진정한 행복의 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나눔의 길이고, 사랑 실천의 길이었습니다.
이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추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추구할 때 우리들은 예수님께 이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지 맙시다.
주께서 문을 두드리시면
-김찬선신부- 주님이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데도 문을 열어드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거나 하느님께 잔뜩 심통이 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 외에 의도적으로 문을 열어드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 의도적으로 문을 아니 열어드리지는 않겠지만 부지불식간에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줄 몰라서겠지요. 잠자느라 모르고, 다른 일에 정신 팔려 있어 모르고, 주님께서 보잘 것 없는 형제들 통해 문을 두드리는 줄 모르고, 스쳐가는 바람결에 두드리는 줄 모르고 사건들을 통해 쿵쿵 두드리시는데도 주님의 소린 줄 모르고 열어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묵시록에서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우리의 갈망을 성령으로 뜨겁게 하여 복음의 자캐오처럼 주님을 뜨겁게 영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얼른 내려오너라 - 임영인 신부-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길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헛된 것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헛된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소외됩니다. 그래서 갈증에 목말라 합니다. 자캐오는 고독한 삶 속에서도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갈증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체면 따위는 무시하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과 눈이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자캐오에게 건네는 주님의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얼른 내려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얼른 내려오너라.” 돌무화과나무는 쓸모 없는 나무입니다. 열매가 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목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자캐오가 그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것은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헛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캐오가 그것을 깨닫고 그 길에서 벗어나라는 뜻으로 “얼른 내려오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 역시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헛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얼른 내려오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겠습니다. 돌무화과나무에서 내려올 때 주님께서는 ‘나의 집’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양승국신부- <희망의 복음> ‘자캐오’란 이름은 ‘바르다’ 혹은 ‘깨끗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관장 자캐오의 삶은 자신이 지닌 이름처럼 바르거나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의 삶은 오랜 세월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부정부패, 중상모략, 권모술수, 이중적인 생활, 착취로 얼룩진 흠이 많은 나날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었지만, 직책상 히브리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민족의 원수였던 로마제국에 세금을 갖다 바쳤습니다. 말단 직원으로 출발했던 자캐오는 업무능력이 꽤 출중했던가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삥 뜯어내는 데’ 연륜이 쌓이면서 윗사람들에게 잘 보였겠지요. 그는 세리들 가운데 으뜸인 세관장이 되었습니다. ‘돈 많은’이란 표현을 통해 자태오가 세관장이란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상당한 부를 축척하였던 걸로 여겨집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큰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 정도가 유달리 심한 ‘숏다리’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세리들을 향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자연히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죄인 중의 죄인’ ‘대표 죄인’ ‘죄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자캐오는 ‘숏다리’였으니 군중들의 수근거름과 비아냥, 손가락질을 극에 달했습니다. 자캐오는 심심풀이 껌이나 땅콩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단골 놀림감, 첫 째 가는 조롱거리, 즐겨 씹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당시 분위기를 자캐오 본인이 몰랐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래, 좋아! 너희들,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 언젠가 단단히 혼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라고 돈을 모았습니다. 자캐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돈이었습니다. 유일한 위안은 모아진 돈을 흐뭇한 마음으로 헤아려보는 일이었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고 과제였기에, 그 방법도 잘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막대한 부를 축척하게 되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당한 심한 왕따, 눈총, 욕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받은 심한 압박감과 스트레스의 결과가 수전노 자캐오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분노에 찬 그는 돈으로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엄청 속여도 먹었습니다. 말도 못하게 삥땅도 했습니다. 고리대금업도 시작하면서 악착같이 이자를 챙겼습니다. 채무를 제때 상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방법으로 복수했습니다. 그런 자캐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죽을 죄인인 자캐오, 지옥이 확실하다고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던 자캐오에게 예수님을 천국을 선포하십니다. 죽을 인간 자캐오에게 구원을 확증하십니다.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노력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구원받았다고 단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희망의 복음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이렇게 지은 죄가 많은데, 이토록 죄질이 심각한데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우리 죄인들에게도 구원을 확증하는 희망의 복음입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그분의 자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죄가 하늘을 찌를지라도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서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분의 자비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즉시 새 삶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심을 믿고 다시 한 번 새 출발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어제 오랜만에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자전거를 탔습니다. 평소에도 자전거를 타기는 하지만, 본당 신부라 동호회 사람들과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 주로 혼자 탔거든요. 그래서 동호회 분들이 저를 위해 특별히 휴가까지 내서 어제 시간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추운 날씨였지만 좋은 분들과 함께 타는 자전거의 맛이 너무나도 좋았지요.
어제 자전거를 탔던 곳은 서해에 있는 어떤 섬이었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 그 섬의 아름다움을 자전거로 구석구석 맛 볼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 자전거 여행의 막바지에 저희는 산의 임도(임시도로. 비포장이 된 차가 지나갈 정도의 소방도로를 말합니다.)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경사가 심하고 땅의 곳곳이 많이 파헤쳐 있으며 작은 돌들이 많아서 자전거 제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잘못하면 사고 나겠다. 혹시 내가 넘어져서 다치는 거 아니야?’
바로 그 순간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위험한 부분을 거의 다 빠져나간 상태에서 제가 정말로 넘어진 것입니다. 물론 크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무릎이 까지고 얼굴에도 약간의 상처가 났지요. 동호회 사람들이 제게 말합니다.
“아니, 위험한 곳 다 지나서 왜 여기서 넘어지세요?”
왜 넘어졌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마음속으로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생각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부정적인 일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일만 꼭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긍정적인 생각 역시 그대로 이루어지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기에, 우리의 생각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지 않는 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따라서 기왕 하는 생각이라면 부정적이고 나쁜 생각이 아닌,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키도 작았고,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죄인이라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이 연결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강한 의지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자캐오의 모습과 우리들의 다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면 바로 우리들은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캐오 역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이 나이에 불구하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노력을 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 뜻에 가장 부합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기왕 하는 생각이라면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빠다킹신부
회개 -서현승 신부-
로마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세리란 직업은 부당한 착취를 일삼는 세금 징수원임과 동시에 민족의 변절자요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겐 친일파 내지는 일제의 앞잡이쯤 되겠지요. 강도나 살인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던 그들에겐 회당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지나가다 옷자락에 닿는 것조차 부정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철저히 ‘왕따’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자캐오는 그러한 세리들 중에서도 세관장이라는 직책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으니 세속적인 출세는 했을지언정 아마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죄의식이나 외로움을 묻어두면서 살아가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시며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소외되었던 그에게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보여주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재산의 반과 남을 속여가면서 축적했던 재물들을 모두 나누어주겠다는 자캐오의 다짐과 결심은 그가 얼마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기뻐했는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은 보지 못하는, 진정 구원을 원하는 이들이 애타게 갈망하는 삶의 탈출구를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세리는 발견했는지도 모릅니다.
영혼의 키 높이 깔창 -이인옥-
우리는 가끔 죄와 수치로 움츠러들 때까지 움츠러든 키 작은 자캐오가 된다. 게으름과 이기심, 안일과 교만 등 수많은 장벽에 둘러싸여 주님을 뵐 수 없는 때가 종종 생긴다. 자캐오에게 올라갈 나무가 있었듯이, 우리한테도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성사(聖事)라는 나무가 있다. 나뭇잎 속에 가려진 자캐오를 그분이 먼저 알아보셨듯이, 성사의 그늘 속에 있는 우리도 그분이 먼저 부르신다. 그리고 자캐오한테도 그러셨듯이, 우리와도 함께 지내고 싶어하신다. 주님과 함께 지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분이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시자 그는 일어나 당당하게 말했다. 자기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겠다고, 자기가 손해를 끼친 이웃이 있다면 몇 배로 갚겠다고. 그때만큼 자캐오의 기가 살아난 적은 없었다. 그때만큼 자캐오의 키가 커 보인 적은 없었다. 그렇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다. 죄와 악의 무게에 눌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영혼의 키가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하며 훌쩍 커지는 것, 마음의 어두움 때문에 억눌릴 대로 억눌린 자아가 밝은 빛 아래에서 활짝 펴지는 것, 그렇게 해서 주님이 만들어 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주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도록 교회는 성사를 마련해 놓았다. 성사 안에서 주님을 뵐 때마다 순간순간 우리는 구원을 체험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오그라들고 구부러짐을 느끼는 우리. 주님의 은총을 느낄 때마다 몸이 활짝 펴지고, 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키가 훌쩍 커졌으면 좋겠다. 마치 영혼의 키 높이 깔창을 깐 것처럼.
자캐오를 통해서 보는 구원의 현재성 -하용달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리고의 세관장인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시는 예화입니다.
이 예화 이전에 루가복음 18, 9-14절에 바리사이와 세관원의 예화가 먼저 나옵니다. 이 예화에서 하느님은 바리사이를 제쳐두고 세관원을 의인으로 여기셨다고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그리고는 "사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라며 겸손한 사람의 지위가 종말에는 뒤바뀐다고 역설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로서 예수님 당시 그 수가 육천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바리사이파는 기원전 167년에 시작된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 가담한 경건자들(하시딤) 가운데서 묵시문학적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성한 종파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도 중히 여겨 거기에 내포된 율법 규정을, 특히 정결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아울러 자기네처럼 살지 않는 동포들과 이방인들을 천민이라 하여 멸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율법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하시고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천민들과 어울려 지내셨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의 비위를 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이런 천민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하신 때문에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마태 11,19 ; 루가 7,34).
세관원은 관세를 거두어 들이는 사람인데, 세관원은 으레 부정축재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그리고 경건하지 못한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관세는 지방세로서 갈릴래아에서는 그 지방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나 관리를 두어 직접 징수하지 않고, 세관별로 임차료만 받고 일정한 기간 동안 관세 징수권을 민간인에게 빌려 주었습니다. 임차대 계약에 따라 실제로 관세를 징수하는 민간인이 곧 "세관원"인 것입니다. 세관원은 흔히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만 아니라 터무니 없이 관세를 많이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직책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다교를 올바르게 믿으려면 세관원직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 당시의 불문율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리고에는 유다 지방과 요르단 강 건너 베레아 지방 간의 교역을 감시하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그 세관의 세관장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죄인으로 취급 받던 자캐오를 불러 그의 집에 묵으시는 파격적 처신에 대해 사람들은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고 하며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회개'와 '자선'을 남달리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묵으시자 자캐오는 회개를 결단하여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로 작심합니다. 특히 자캐오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루가복음에만 나오는 "남을 속여 먹은 것"이라는 즉 직역하면 "남을 등쳐 먹은 것"을 고백합니다. 자캐오는 동포들을 등쳐먹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회개합니다.
유다인들은 회개를 일컬어 "되돌아가다"라고 합니다. 사실 회개란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방향전환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등진 인간은 죽은 몸이요 하느님께 되돌아간 몸은 다시 사는 몸입니다. 죄는 죽음을 초래하는 중병이요 회개는 새 삶을 잉태하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감동적인 회개의 고백과 자선에의 결연한 의지를 보시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루가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활동하시는 동안 구원을 이룩하셨다고 보았기 때문에 구원의 현재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즉 루가 복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늘" "이 날" "때" "찾아온 때"에 구원이 이룩되었다며 구원의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리고의 시민들이 예수님의 파격적인 처신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자캐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만큼 구원의 혜택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반기시며 바리사이와 율사들도 하느님의 이 기쁨에 마땅히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을 되찾은 부인의 비유" 및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 등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세관장 자캐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구원의 현재성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정치인의 비자금 사건 등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고 하겠습니다. OECD 국가 중에서 부끄럽게도 부정과 부패의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참다운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우러난 회개와 자기 성찰 없이 남의 눈에 끼어 있는 들보만 갖고 비난하는 불행한 행태는 보통 사람인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정자들의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인 행태 앞에 "이 땅에 희망이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부정과 부패를 국민 앞에 고백하고, 부정과 부패로 치부한 재산을 국민 앞에 내어 놓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그들은 자캐오처럼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며, 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부정과 불의의 유혹 앞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던 세관원처럼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삶을 지향한다면 우리 곁에 함께 있는 부정과 불의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아온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지난 10월 19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생전에 "저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 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평생을 자신을 내어 놓은 봉사의 삶을 사신 수녀님은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나와 당신, 그리고 여러분이 함께 가난을 나누면 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우리 모두 자족(自足)의 삶을 살면서 이웃의 가난과 불행을 나의 가난과 나의 불행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구원에 은혜로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 부산의 어느 중소기업 회장께서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수 백억원의 전 재산을 지역사회 인재 양성을 위해 부산대학교에 기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지난 번 태풍 매미로 인해 당신 집의 대문이 부서지는 등의 피해를 입었지만, 대문을 보수하는 비용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근검절약하며 모은 전 재산을 아낌없이 지역 사회에 기부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의 아름다운 기부를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이란 어떤 삶이여야 하는가를 깨닫게 될 수가 있습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특히 집단 이기주의에 찌든 현대 사회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다시금 우리에게 '회개'와 '자선'의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해줍니다. 내가 더 가지기 위해 공동체의 공동선을 희생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형제적 사랑으로 부족한 이웃과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겸손한 마음과 자세를 유지할 때 우리 사회는 보다 넉넉하고 보다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등진 몸과 마음을 되돌려 하느님을 향해 진정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자족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웃과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눌 때, 구원의 식탁에 초대받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다시금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작은 도구로 사용되어질, 하느님 손에 맡겨진 몽당연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집은 겸손한 사람들만 올 수 있는 곳이다’라고 -최금자 -
늦은 나이에 결혼한 남편과 나는 모아놓은 돈이 없어서 시누이 집의 반 지하에 신혼집을 꾸렸습니다. 지금은 집주인으로 격상했지만 정이 흠뻑 들어 계속 반지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살아서 익숙해졌음에도 출입문 천장이 낮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들어오다가 종종 정신이 퍼뜩 들도록 천장에 부딪치고 맙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집에 들어올 때 겸손하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주 묵상합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집은 겸손한 사람들만 올 수 있는 곳이다’라고 소개합니다. 친구들은 우리집에 와서 출입문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 봐야 그 말뜻을 확실히 알아듣습니다. 아직도 내가 해준 당부의 말을 잊어먹고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들어오다가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집을 방문한 친구들은 겸손에 관한 나의 묵상에 동참하여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남들이 사귀기를 꺼리는 세리 자캐오와 친구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자신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이심에 용기를 얻어 그분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을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추는 자캐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의 집은 고개를 숙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곳입니다.
자캐오의 열망 -백광현신부-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표면적으로 볼 때 부자였고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내적으로 어떤 불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것을 그가 예수를 보고 싶어 애쓰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고 싶어 애쓰는 모습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 이상의 어떤 것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행동에는 자신이 살아 왔던 삶에 대한 불만과 동요의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삶에 완전히 만족하고 거기에 빠져 있었다면 그는 죄인들과 함께 거리를 배회하던 가난한 젊은 예수를 하찮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예수님이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하나의 확신으로 변하면서 그에게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그는 창피를 무릅쓰고 나무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십자나무에 달려 구원을 가져다 주었듯이, 자캐오는 자존심에 죽고, 이전의 죄스런 삶의 형태에 죽으면서 그가 올라 간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변화될 수 있다면 이미 구원을 얻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전영준신부- 저는 동기들에게 성체 신심이 없는 신부로 통합니다. 이전에 계신 주임신부님께서는 키가 제 어깨 밑이셨기 때문에 성탄이나 부활 같은 대미사에 공동 주례를 하게 되면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주임신부님께서 거양성체를 할 때 아무리 높이 손을 들어도 제 눈 아래에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러러 봐야할 성체를 당연히 아래로 보게 되고 자연히 동기 신부들에게 성체를 알로 보는 신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초등학생들은 저의 큰 키에 대해서 신기해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키가 컸느냐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저는 초등학생이니까 별생각 없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면 키가 크지. 그리고 성당에 와서 기도도 열심히 하면 키는 저절로 큰다."라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 본당의 한 초등학생이 한 말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임신부님께서는 부모님 말씀도 안듣고 공부도 기도도 않하셨나요?"
오늘 복음에서는 자캐오라는 키가 작은 인물이 나옵니다. 자캐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군중에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단지 작은 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키라도 맨 앞자리에 있었거나 높은 곳에 있었다면 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군중에 의해서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가려진다면 하느님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적인 눈은 우리의 외적인 조건 때문에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캐오처럼 높은 곳으로 가거나 맨 앞자리로 가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려지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조건이 훌륭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외적인 조건 때문에 가려진 하느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생긴 결과 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영적인 키가 자캐오 만큼 작아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영적인 작은 키만 한탄하고 있다면 바로 내 앞에 계신 하느님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구원은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원의 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홍성만 신부-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티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로마제국의 좋은 수입원이었습니다. 동포들에게서 세금을 거워들여 로마 정부에 바치는 세리는 비록 착복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매국노로 낙인찍혀 죄인으로 취급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캐오는 그런 세리들의 '장'(長)이었습니다. 직업 때문에 언제나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죄인으로 취급당한 자캐오지만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리코 거리를 지나실 때 군중들 틈에 끼어 발돋움을 하며 몸을 바짝 추켜세우나, 작은 키 때문에 불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캐오는 포기하지 않고 앞질러 달려가, 장(長)이라는 체면이나 위신에도 불구하고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자캐오의 마음을 한눈에 알아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강한 원의는 예수님의 뜻밖에 방문으로 이어지며 오늘 복음의 전반부가 끝납니다. 지금 자캐오는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보려고 애쓰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 모셨습니다. 기쁨과 호의에 압도된 나머지 회개의 결단을 내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자캐오는 구원을 안중에 두고 회개의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회개의 증표는 곧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스럽게 찾아옵니다. 아니 합께 합니다. 나무에 올라가야만 불 수 있는 작은 키, 직업 때문에 죄인이 된 세무관장, 자캐오의 이러한 약점은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원의 앞에 무력해집니다.
간절한 원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고 집으로 모셨으며 결국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자캐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푸짐한 선물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의 성취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원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과연 나에게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간절한 원의가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강하고 열렬한가?
조용히 뒤돌아보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이회진신부- 오늘은 복음을 영성생활의 내적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다는 면과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는 점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보았고, 키가 작았다는 것과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을 아직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영적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자캐오의 모습을 상정한다면 두 가지 모습, 즉 영적 성숙을 위한 노력은 있는데 내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는 상태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 자캐오에게만 있었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신앙인 역시 이런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는 길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다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기술, 묵상하는 기술, 관상하는 기술을 찾아 배우면 더 훌륭한 영성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영적 진보와 성장은 “의식과 깨달음”에 있습니다. 영적인 기교만으로는 온전하게 하느님께 이르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통달하고, 묵상하는 방법 관상하는 방법을 통달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보는 힘”과 “직관하는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기술적이고 기교적인 면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두 가지 면을 오늘 복음과 비교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혼자”라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혼자 찾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모든 것이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문화적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택배로 주문하면 되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인터넷 “다음”이나 “네이버”등의 지식검색에서 찾으면 다 채워줍니다. 개인의 문제마저도 혼자서 위로를 찾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회성 만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캐오의 열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데 그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본다면 자신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그냥 한 번 보는 것이기에 그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기도와 하느님의 만남이 이런 일회성 만남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내적 문제가 생겼을 때만 예수님께 다가가 “위로”와 “평화”를 청합니다. 답답하고 뭔가 해결 안되면 성당에 나가 위로를 찾습니다. 마치 성당이나 예수님이 “박카스”와 같은 “피로 회복제” 역할을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이 관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당신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관계”, 다시 말해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영적 발전 혹은 성장을 바라는 근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캐오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이루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길로 우리가 들어오길 고집하지 않고 찾아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여는 것(개방)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당신이 부족한 자캐오를 받아들여 같이 지내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족한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갈 때(공동체의 삶)” 비로소 우리는 신앙 안에서 “보는 눈”과 “직관하는 능력”을 올바로 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기도하는 방법, 묵상하고 관상하는 방법들이 하느님을 찾는 기술이나 기교가 아닌 기쁨을 얻게 하는 통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나고 영적으로 더 깊어지는 것은 어떤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분과 세상을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 혼자만이 멀리 보고 있다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은 탓하여 주시고, 저의 어리석음은 당신 앞에 부끄럽게 하소서. 아멘.”
자캐오야, 어서 내려 오너라!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카 19:1-10]은 예리고의 세관장 자캐오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 당시 "예리고"하면 지역적으로 볼 때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서 종려나무 숲이 크게 우거져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삼 향나무 숲의 향기는 대단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요르단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대추야자 열매와 발삼 향기의 산지였기에 세금을 가장 많이 징수하는 지방이었다. 당시 세리라 하면 성서에서도 자주 나오듯이 그들은 탐욕과 사리사욕으로 가득 찬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의례 죄인 취급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금이 가장 많이 징수되는 지방의 세리의 장까지 올라간 자캐오이었으니, 그 지방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죄인시했는 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복음에서 보면, 그는 돈 많은 세리장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마음의 안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직을 택했고 그 길로 부자가 되었으나, 그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상종을 안 해주는 요즘 말하면 왕따, 따돌림을 당하며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며 사귀신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님과 사귀고 싶었던 것이다. 즉, 그는 예수를 원했고, 그분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실지 보고 싶었기에 키가 작은 그로써는 돌 무화과 나무 위까지 올라가 예수를 보려고 애썼다. 이렇게 예수를 보려고 애를 쓸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자캐오는 예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를 이해해주는 놀랍고도 새로운 친구를 발견하게 된 것이며, 그러한 새로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생활의 결단을 내리는 즉, 단순한 말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변화, 삶의 결단을 내렸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그리고 남을 속였다면, 그 액수의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어느 믿음의 모임에서였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의 간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간증의 청을 받았는데도 응하지 않고, 거절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방금 간증한 여인들 중의 네 사람이 나의 돈을 가져가고서 안 갚고 있습니다. 지금 내 처지는 끼니가 어려울 정도입니다."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의 간증이란 그 생활의 성실성이 따르지 않으면 전연 무가치한 것이다.
그런데 자캐오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하시는 진정한 복음의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생활 속에 예수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그분을 만나 무슨 신앙고백을 하며, 어떻게 모시고자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강영구 신부-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대에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빈집은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할까요?
백 평 가까이 되는 큰 아파트, 갖가지 호사스러운 실내장식과 값비싼 고급 가구들, 그리고 안락하고 편리하기 그지없는 세간장치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집에 살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집일 수록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의 접근을 막으려고 스스로 높은 담을 둘러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싸늘한 무덤과 같습니다. 제 눈에는 초호화 고급 아파트와 호화 묘지가 비슷한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세관장 자케오는 돈 많은 사람입니다. 돈 속에 묻혀 갖가지 영화와 향락을 누리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은 그에게 안락과 편리와 쾌락을 주지만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손길, 따뜻한 눈 빛, 향기로운 미소가 절실했던 그의 집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자케오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루가19,8) 그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빈손이 되었지만 행복합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一明)
너와 나의 참된 만남의 길!! -석찬귀 신부 -
한 때는 이 거친 도시가 ‘만두파동’으로 야단법석이더니 며칠 전에는‘김치파동’이 일어나 또 한 번 거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렇잖아도 이 회색빛 도시가 불신의 늪에서 허우대는 듯 했는데, 이 번의 ‘기생충 김치’파동은 우리의 도시를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신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 중에는 자기는 깨끗하고 옳지만 남은 모두 불의하다고 단정해버리는데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잣대를 자기보다도 남에게 먼저 들이 대고, 더욱이 자기가 져야할 책임도 남에게 떠넘겨 버리는 현상을 보면, 그런 사람들은 우리를 더욱 더 불신의 늪으로 밀어 넣는 무리에 불과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루가 복음에 나온 예수님과 자캐오가 예리코에서 만난 사건은 우리가 불신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자캐오는 에리코에 사는 부자였습니다. 허나 이웃들은 그를‘죽일 놈’으로 단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관장 자캐오가 유태인들의 원수인 로마에다가 혈세를 바치게 만들었고, 남의 눈을 속여서 부자가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하수구처럼 부패한 자캐오 였지만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먼발치에 서서라도 꼭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자캐오의 이런 열성이 예수님을 감동 시켰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들의 갖은 비난을 무릅쓰고‘자캐오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겠다’고 하시면서 격려 하십니다. 그러자 정의감에 불타던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방금 한 그 말을 취소하라고 하면서 삿대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말려도 허사였습니다. 왜냐면 주님의 판단으로는 사랑이 빠져버린 정의는 단맛이 빠져버린 과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뭣보다도 뜨거운 사랑만이 부패한 자캐오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절감한 자캐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겠으며, 더욱이 남을 속여서 번 돈의 6 배를 남들과 나누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느 날은 한 친구신부로부터 이런 내용의 글을 받았습니다.
제 친구 J 신부는 오랜만에 후배 S 신부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는 활짝 웃고 있는 한 소녀의 사진을 지갑 속에서 꺼내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왜 그 사진을 품안에 넣고 다니는지를 설명해줬습니다 s 신부는 지난 여름날 오후 한 교우의 부탁을 받고 초상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가보니, 망자는 초등학교 4 학년의 소녀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평소에 성당에 나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혼자 물놀이를 하다가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것임 그 후 S 신부는 그 소녀와 애통해 하는 부모를 위해 장례미사를 드렸습니다 비신자인 소녀의 장례미사를 반대하는 신자의 눈총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그러나 딸을 잃고 애통해 하는 부모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며칠 후 S 신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왜냐면 죽은 소녀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한 소녀가 ‘실제 물에 빠진 것은 자신이었는데, 자기를 살리고 그 친구는 그만 물에 빠져죽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저는‘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그 소녀야말로 자캐오에게 따스한 자비심으로 맞아줬던 또 하나의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으로 살면서 그 소녀 정도로 자신을 바칠 수 있을까 싶고 또 그 소녀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S 신부가 소녀의 사진을 넣고 다니는 마음처럼 저도 그 소녀를 제 수호천사로 간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아멘
양심 - 내 마음속에 있는 내 것이 아닌 마음 -박상대신부- 공관복음이 모두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치유사화(18,35-43)에 이어 루가는 오늘 단독으로 ‘자캐오의 구원사화’를 전하고 있다. 예리고는 요르단강 서쪽,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 요르단강이 사해(-395m)에 합류하는 북서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250m 낮은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보면 예리고는 사마리아, 베레아, 이두매아 지방을 서로 이어주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유다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리고에는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많은 세관들이 있었고,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자캐오는 이들 세관들을 모든 관장하는 세관장으로서 돈 많은 부자였다는 것이다. 육체가 지나친 복을 누리면 그에 비해 영혼이 고갈되는 법, 자캐오는 돈 많은 부자로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는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세관원은 지방영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은 민간인들로서 계약에 따라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세관원은 이방인들과 자주 접촉해야 하고 개별적으로 지정액 이상의 관세를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양심을 속이는 죄인 부류에 속해 있었으며, 정직하다 하더라도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신앙을 제대로 따르고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이 직업을 버려야 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자캐오가 예리고의 모든 세관들을 관장하는 세관장이었다면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얼마나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을 것인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오늘 그에게도 구원의 날이 들이닥쳤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 주신 것이다. 물론 키가 작은 자캐오가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서 자캐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실 길목을 미리 잡아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자캐오의 모든 처지를 한눈에 알아보신 예수께서 오늘 그에게 구원을 선사하신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예수께서 ‘오늘’이라고 말씀하시면 인간의 역사 안에 분명히 새롭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루가복음에만도 이러한 장면이 여러 번 있다.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2,1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4,21)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19,9)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23,43)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에게 ‘오늘’은 구원의 날이지만, 오늘의 표징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날이 될 수도 있다.(7절) 그렇다고 구원의 ‘오늘’이 아무에게나 선사되지는 않는다.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또 그래서 죄인일 수도 있는 자캐오처럼 재물의 사회 환원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보상(8절)이 선행(先行)되어야 구원의 ‘오늘’이 선사되는 것이다. 즉, 회개가 하느님 구원의 선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자캐오가 자기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고 부당한 착취에 대한 4곱절의 보상을 다짐하는 회개와 회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그의 노력에 의한 예수와의 만남’과 이로 인해 ‘예수께서 그의 집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양심(良心)을 가지고 있다. 양심이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기의 것이 아닌 마음이다. 자캐오도 이 마음 때문에 늘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늘 올바르고 착한 행동을 요구하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마음이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의 마음인 이 양심의 현존을 깨닫고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노력의 결과는 의(義)를 향한 회개와 회심으로 드러나게 된다. 회개와 회심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기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두고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15,7) 내일이 아니라 ‘오늘’ 양심과 만나 회개하는 사람은 분명히 오늘이 가기 전에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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