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보면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을 보는 내용이 나온다. 하느님의 성령은 에스겔을 인도해 골짜기에 흩어진 수많은 뼈들을 보여주고 묻는다. “사람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뼈들은 덜거덕거리더니 서로 결합되었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힘줄과 살과 피부를 입히고 숨을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섰다. 그들은 매우 많은 군중이 되었다.(〈에스겔〉 37:1~14)
에스겔은 이를 이스라엘의 부활에 대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 것이다. 이때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환상이 실현된 것이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2세)가 칙령으로 유대인의 귀환을 허용했다.
유대인들 ‘고레스 칙령’으로 귀환하다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 정복 후 맨 먼저 한 일은 바빌론 족의 포로가 되어 있던 여러 민족들을 모두 풀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제국답게 지배를 받는 각 민족의 종교와 행정자치를 허용했다. 유대민족에게도 자율권을 부여했다. 기원전 538년 고레스 왕의 포고로 유대인의 귀향이 허용되었다. 이른바 ‘고레스 칙령’이다. 황폐한 유다 왕국의 영토를 방치하는 것보다는 유대인들이 돌아가서 땅을 개간하고 예루살렘을 재건해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더 실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고레스 칙령은 꿈같은 소식이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에게 해방자로 추앙을 받았다.
유대민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약 50년간을 역사에서는 바빌론 유수기라 부른다. 기원전 586~538년 사이다. 당시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 15만 명 가운데 1차로 4만여 명이 기원전 537년 다윗 왕가에 속한 세스바살(Sheshbazzar)의 영도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은 유대인들은 터키나 동유럽으로 흩어져 살았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세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어렵게 살아남은 현지의 유대인들과 합류해 함께 살았다. 무역상으로 성공한 잔류 유대인들은 돈을 모아 귀환하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정착 경비를 지원했다. 이른바 시오니즘의 시작이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바빌론이 약탈했던 성전의 온갖 제기들도 갖고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고레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귀환자들의 성전 재건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고향에 남아 있던 가난한 유대인들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이라 불렸는데, 이들의 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 에돔인, 아람인과 힘을 합쳐 귀환자들이 성벽 쌓는 일을 방해했다.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 귀향자들도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은 1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차 귀환과 성전 재건
고레스 왕의 아들 다리우스 왕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기원전 520년에 유대인들의 2차 귀환이 있었다. 인솔자 제룹바벨(Zerubbabel)은 다윗의 자손으로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귀환한 사람 가운데는 많은 사제와 서기들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에서는 새로운 유대교 정통파가 출현한다. 신전 재건사업도 시작되었다. 새 신전은 솔로몬 때 지었던 신전보다는 훨씬 수수하게 지어졌다. 사마리아인은 이단으로 간주되어 재건공사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다. 마침내 다리우스 왕 6년 곧 기원전 515년에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성전이 파괴된 뒤 꼭 70년 되던 해였다. 솔로몬 왕의 첫 성전에 이은 두 번째 성전이었다. 이 시기부터 유다 왕국은 제사장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자치령의 나라가 된다.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해방시켜준 고레스 왕을 메시아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바빌로니아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었고, 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까지 재건하도록 지원을 했으며, 종교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메시아로 인식됐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신봉하던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연히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사상을 주목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가 죽은 후 3천 년이 지나면, 유일신이 지상에 강림해서 최후 심판기가 오고, 그때 모든 인간은 부활하며, 심판이 행해진 후, 영생복락의 메시아 세상이 온다는 사상이었다.
그 무렵 유대교와 조로아스터교는 서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Zoroaster)는 기원전 660~583년 때의 사람이다. 영어식 이름이 ‘차라투스트라’다. 그는 스무 살 때 양친과 아내 곁을 떠나 수도자가 되었고, 서른 살에 자기보다 아홉 배나 큰 천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분의 신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은 ‘아후라 마즈다’, 그 이름은 ‘지혜를 가진 주님’이라는 뜻이다. 아후라 마즈다는 지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주이며, 정의의 수호자다. 그는 밝음을 추구하는 광명의 신으로 그 상징이 불이다. 그래서 이를 배화교라고도 부른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1510)에 등장하는 조로아스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인들은 태양, 달, 별들을 숭배하는 다신교 사회인데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을 믿었다. 더불어 회개, 메시아의 재림, 심판, 천당, 지옥, 부활과 같은 교리를 보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개념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현세 지향적이었던 유대교 또한 조로아스터교로 인해 내세 신앙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있다. 선악의 문제를 선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령 아흐리만의 전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이분법 대립 구조에서 훗날 기독교의 여호와와 사탄의 대립이 생겨났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